# 114
114. 다들 그런 회사 가지고 싶어 했잖아? (1)
천중명과 전화를 끊고 20분쯤 지나서 모르는 번호가 천호득의 휴대 전화기에 올라왔다.
“여보세요?”
- 총수님. 저 상기입니다.
천호득은 눈썹과 눈썹이 달라붙을 정도로 눈살을 찌푸렸다.
“회장에게서 말은 들었다.”
- 이번만 도와주시면 저는 정말 욕심 안 부리겠습니다.
“다 필요 없고,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지 몰라도 더는 설치지 말고 죽은 듯이 지내.”
- 예, 총수님.
목적한 바를 손에 넣었다고 여겼는지 전화는 그렇게 끝났다.
“에이, 못난 자식.”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대신 그 흔한 건강은 어떠시냐는 말 한마디 없이 원하는 것만 날름 받아 채고는 통화를 마치는 꼴을 보자니 찌푸려진 인상이 펴지지를 않았다.
“흠.”
신음 같은 한숨을 쏟아낸 천호득은 휠체어를 움직여 서재를 나섰다.
“어디 있냐?”
- 예, 회장님.
주방 안쪽에서 우렁대는 답과 함께 장만섭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갈비뼈가 부러져 폐를 찔렀다는 놈이고, 아직도 지경병원에서 온 의사가 주사를 놓아주는 형편인데도 그는 뭘 먹다 나왔는지 음식을 급하게 삼키고 있었다.
“토요일에 이화각에 갈 테니까 예약을 해.”
“이화각입니까?”
“그래! 거기 메이드들에게 물어보면 알 거다. 아니면 인터넷에 알아보든가. 내 이름 대고…. 가만있자. 몇 명을 예약하지? 그래! 우선 다섯 명을 해.”
“예, 총수님.”
상체를 아직 제대로 숙이지 못하는 장만섭이 엉거주춤하게 고개를 숙인 뒤에 몸을 돌렸다.
“넌 뭘 먹고 있었어?”
그런 그의 뒤통수를 붙들 듯이 천호득은 질문을 던졌고, 장만섭이 얼른 돌아섰다.
“수육이 있길래 맛만 봤습니다.”
“허파에 구멍 뚫린 놈이 수육이 들어가?”
“확실히 평소보다 먹는 양이 반으로 줄었습니다.”
“가! 얼른 가서 먹어! 예약 잊어버리지 말고!”
“예에, 총수님.”
길게 답을 하며 돌아서는 장만섭의 뒤통수를 보며 천호득은 공연히 입맛을 다셨다.
먹고 싶다.
그런데 지금 먹으면 속이 더부룩해서 당최 견딜 재간이 없으니 그저 씩씩하게 먹는 장만섭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
퇴근을 앞둔 시간에 유진교와 최만호가 천중명을 찾았다.
그리고는 지경전자 대표회장 조승필과 최만호의 대화에 관해 알려주었다.
“내가 너무 무르게 대했나 보네요.”
너무 무르면 임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너무 강압적이면 음모를 꾸민다던 유진교의 조언을 빗대서 천중명은 반쯤 농담처럼 말을 꺼냈다.
“그보다는 너무 누르셔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쩐 일인지 유진교는 심각한 내용임에도 천중명의 농담에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내일 방문 시간은요?”
“오후 2시로 정했습니다. 우선 생산설비를 둘러보시고, 이어서 브리핑이 있을 예정입니다.”
천중명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이었다.
“회장님. 조승필 회장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최만호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질문을 건넸다.
“그의 태도를 봐서 결정할 생각입니다.”
그에 대해 천중명은 진지한 음성으로 답을 꺼내놓았다.
“정직원 전환에 따른 어수선한 상황에서 임원들을 죄인처럼 보이게 했다면 그건 전적으로 내 잘못입니다. 그를 만나보고 그 점에 관한 의견이 있다면 받아들일 생각이고, 권위에 사로잡혀 반기를 든 것이라면.”
천중명은 말을 흐린 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더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두 분께 부탁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천중명의 요구에 유진교와 최만호가 긴장한 표정으로 시선을 주었다.
“당분간 이런 일들이 반복되리라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임원들의 기득권을 빼앗는 모양새니까요. 관행이라고 해서 잘못을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겠습니다.”
천중명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적어도 두 분만큼은 잘못된 일을 고쳐나가는 길에서 타협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물론 서 있는 자리가 다르니 중재를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잘못을 감싸고 두둔하는 일은 아니었으면 싶습니다.”
천중명은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천천히 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지이잉.
[천 회장님. 말씀하신 1조를 입금했는데 아직 주문이 없습니다. 혹시 잊고 계시는가 해서 확인 차 문자 드립니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기도 전에 박승양이 보낸 문자가 휴대 전화기에 들어왔다.
말이 좋아서 확인이지 오늘부터 날짜를 계산하겠다는 확실한 다짐과 같은 내용이어서 천중명은 잔을 내려놓으며 픽 웃었다.
“밖에서 무서운 적들이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내가 경험이 부족해서, 연륜이 없어서 임원들에게 밀려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럴 일까지는 없을 겁니다.”
“본부장님이 계시고, 최 실장님이 최선을 다해주시니 안심은 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니 각오는 해두는 게 좋겠지요.”
천중명은 유진교와 최만호를 차례로 본 뒤에 입을 열었다.
“잘못된 우리의 관행이 적을 만났을 때 약점이 됩니다. 최고의 기술을 갖추고, 최고의 제품을 준비해서 진심으로 고객을 대할 때 지경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최만호가 나직하게 숨을 내쉬다가 천중명과 눈이 마주쳤다.
“부당한 대우에 억눌린 직원들이 과연 최선을 다할 수 있을까요? 인격적인 모독이 필요악이라고 주장하는 임원이 고객에게 진심으로 다가설 수 있을까요?”
천중명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어 보였다.
“고객은 바보가 아닙니다. 아이비리그 아니라 세상없는 대학을 나왔어도 고객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려는 계열사 대표 따위 나는 필요 없습니다. 그런 임원들이 항거한다면 내가 돌려줄 것은 해임밖에 없습니다.”
천중명이 분명하게 밝힌 뜻을 유진교와 최만호가 무겁게 받았다.
**
곽대출은 영통대리점 사무실에서 도시락을 주문해 식사를 마쳤다.
저녁만이라도 밖에서 먹자는 지점장의 권유가 있었지만, 대리점 직원들에게 부담 주기 싫었고 혹시 또 있을지 모른 지경전자 조승필 회장의 부당한 지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도시락을 다 먹었을 때쯤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 이사님. 주인영 과장입니다. 오늘 그쪽에서 퇴근하시나요?
“대리점 폐점 시간이 9시니까 우선 그때까지 있을 생각이야. 왜? 무슨 일이야?”
- 저녁은 어떻게 하셨어요?
“도시락 먹었어.”
곽대출은 지점장을 의식해서 조금은 사무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 걱정돼서 전화 드렸어요. 김준동 전무 파면 건으로 이쪽도 말이 돌고 있거든요. 그럼 퇴근할 때 다시 전화 드릴게요.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허흠!”
괜히 헛기침을 한 곽대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달한 커피가 생각나서였다.
**
지경화장품의 신제품 ‘미라클’을 앞에 둔 어천수는 코보다 높게 솟은 양쪽 볼을 붉게 물들인 채 분통을 터트렸다.
“어떻게 지경화장품이 이렇게 신나게 해먹도록 우리는 아직 시제품도 못 만드냐고! 이래서 밥 먹고 살겠어! 내가 시간을 단축하는 만큼 포상도 하겠다는데 당신은 그동안 뭐했어!”
그는 애꿎은 연구원을 앞에 두고 고함을 버럭버럭 질러댔다.
“후! 내가 이 사업을 어떻게 일으켰는지 당신이 알아? 어? 추운 날이고 더운 날이고 좌판에서 이 목이 쉬도록 고함질러가며 일으킨 회사라고!”
“면목 없습니다. 손도운이 저쪽에 붙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에이, 씨!”
연구원이 턱없는 사과를 내놓자 어천수는 납작한 코를 벌렁거리며 뜨거운 김을 푹 쏟아냈다.
“이렇게 된 거 방법 없어. 우리는 여기에 머드 성분을 넣어. 0.01퍼센트든, 0.03퍼센트든 넣고서 머라클! 이렇게 홍보해. 디자인도 이거 정말 탐나게 뽑았으니까 뚜껑 색깔이나 살짝 바꾸고 글씨체도 이대로 가.”
눈치를 살피는 연구원을 보며 어천수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저쪽에서 소송 걸 때쯤이면 이 상품 이미 바람 빠져. 실컷 벌어먹고 변호사 대놓으면 3년도 좋고, 5년도 좋은 게 특허권 소송이야. 그러니까 그냥 밀어붙여!”
“예.”
“그건 그렇게 하면 되고. 그 서큘레이터를 어떻게 하지?”
“기존에 있는 마사지 기계에 우리 브랜드 달아서 우선 매장에 깔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래. 저쪽에서 1회에 15만 원을 받는다니까 우리는 무조건 10만 원에 끊고, 100만 원 선납하면 12회로 가자.”
연구원이 할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어천수는 또 그런 걸 구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말이지.”
대강 방향을 정한 어천수가 턱을 매만지며 가뜩이나 볼에 밀려 올라가 작아 보이는 눈을 더욱 좁게 만들었다.
“지경화장품을 씹을 뭐 좋은 게 없을까?”
그러면서 그는 좁아진 눈 속에서 눈알을 굴려 야비하게 연구원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틀 전에 강남스퀘어에서 한바탕 소란이 있었답니다. 지경화장품 매니저에게 무릎을 꿇으라는 말까지 나왔는데 영업이사와 지경디자인 대표가 있어서 무마됐답니다.”
“그래?”
어천수는 혀를 내밀어 얇은 입술을 좌에서 우로 핥았다.
“그럼 말이지. 우리 쪽에서 사람을 그리 보내. 우선 강남스퀘어 매장을 집중적으로 파자고. 한번은 손님이 진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연속되면 다들 진짜 그런가 하거든.”
“영업부에 지시하겠습니다.”
“맘 카페를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 에이! 이럴 때 어천수 코스메틱의 머라클을 대신 사봤는데 죽이더라, 이런 글이 올라가야 하는데! 머라클은 얼마나 걸리겠어?”
연구원이 눈을 허공에 띄운 채 계산에 집중했다.
“제품 있고, 디자인은 이대로 가면, 한 달이면 됩니다.”
“얼른 용기랑 포장지 제작 들어가고, 독한 여자들 서넛을 강남스퀘어로 보내. 그쪽에서 지경화장품이 밀려나면 이 제품 시장 우리가 다 먹는 거야.”
“알겠습니다.”
답을 한 연구원을 어천수가 빤히 바라보았다.
“예? 왜 그러시는지?”
“알았는데 거기 앉아 있으면 제품이 나와? 케이스가 만들어져? 뭐 하고 있어?”
“아,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제야 연구원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하, 이 씨! 이 제품이 이대로 터지면 이거 1년에 2천억은 우습고, 중국으로 넘어가면 얼마나 터질지 모르는 건데.”
혼자 남은 어천수는 미라클을 바라보며 아쉬움 가득한 소리를 계속 쏟아내고 있었다.
**
퇴근을 앞둔 천중명은 먼저 곽대출과 통화했다.
- 여기 영업 마치는 것까지 보고 퇴근하겠습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겠어?”
- 예, 회장님.
“그래, 그럼. 고생해.”
- 들어가십시오.
유난히 공손해진 음성이었는데 옆에 누가 있겠거니 싶어서 천중명은 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통화를 마쳤다.
퇴근한다고 해도 야간에 해외 선물지수 변동을 체크할 예정이어서 어차피 천중명도 편히 쉬지는 못할 상황이라 곽대출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퇴근이기도 했다.
천중명이 모니터에서 상체를 세웠을 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부속실 직원이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돌아가신 천봉서 회장님의 일로 회장님과 통화하고 싶다는 여자 분의 전화가 있었습니다. 회장님께서 연락 주실 줄 알고 기다렸다면서 번호와 이름을 남겼습니다.”
미숫가루를 타 주었던 10년 경력의 부속실 직원이 조심스럽게 메모를 앞에 놓아주었다.
이하연이라는 이름 뒤에 휴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천중명은 그 이름과 번호를 보며 문득 천봉서가 마지막에 부탁한다던 여자를 떠올렸다.
“이 여자가 혹시 연기자나 연예인인가?”
“예, 회장님. 전에 코리아클럽에도 두 번 참석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천중명은 “하아.”하고 숨을 뱉어내고는 입맛을 다셨다.
대개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천봉서는 여자를 남겼다.
“내 번호를 알리기도 그렇고 하니까 최만호 실장에게 통화해 보라고 해. 내용만 내게 알려주고.”
“그렇지 않아도 비서실로 돌렸는데 오늘 중으로 통화가 안 되면 내일 코리아클럽에서 직접 뵙겠답니다. 자칫하면 처음 나가는 자리에서 거북한 일이 생길까 봐 말씀드립니다.”
“배짱은 죽이네.”
부속실 직원은 이런 일을 이미 겪어본 사람처럼 덤덤한 얼굴이었다.
“알았어요. 부속실 전화로 연결해 줘.”
“예, 회장님.”
부속실 직원이 나가는 동안 천중명은 의자를 돌려 밖에 펼쳐진 빌딩 숲을 바라보았다.
뭔가 약점을 잡혔을까?
그래서 죽음을 각오한 그 상황에서도 병아리 탤런트를 당부했었던 걸까?
죽고 난 뒤에 망신당하는 것을 막아달라고?
욕심과 탐욕만이 가득했던 천봉서의 장례식을 떠올리며 천중명이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회장님. 1번에 이하연 씨 전화 연결했습니다.]
부속실 직원의 음성이 인터폰을 타고 들어왔다.
일단 전화를 받고.
의자를 책상으로 돌린 천중명이 손을 뻗어 구내전화기를 들고서 1번을 누르는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아아악!
느닷없이 집무실 벽과 유리가 시커멓게 변하더니 어둠이 천중명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