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113. 돈 놓고 돈 먹기! (3)
천중명은 최만호를 불러서 소파에 함께 앉았다.
“조승필 지경전자 회장이 계속해서 반기를 들고 있습니다. 오늘은 영통 대리점에 특별 감사를 지시했던 일은 알고 있습니까?”
“곽대출 이사에게서 보고받았습니다.”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실 거라 믿습니다. 독불장군은 나 하나로 충분하다는 말이요.”
“네, 회장님.”
“그런데 실장님은 그의 행동을 지켜보자고 했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바로 세운 자세에서 천중명은 날카로운 눈으로 최만호의 답을 기다렸다.
“회장님. 변화가 너무 빠르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나오는 혼란과 부작용 탓으로 그룹 전체가 반쯤 떠 있는 상태입니다.”
최만호는 최악의 상황을 각오한 표정으로 말을 잇고 있었다.
“어렵게 시험을 통과한 직원들과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한 직원들 사이에 파벌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걸 제대로 누르지 못하면 한순간에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가 생깁니다.”
“원인이 뭡니까?”
“당장 직급체계가 흔들립니다. 8년을 계약직으로 일했던 직원은 경력을 인정받고 싶어 하고, 정직원으로 들어온 직원들은 여태껏 업무를 수행했던 대로 그들을 지휘하려는 데서 오는 충돌입니다.”
그건 그럴 수도 있겠다.
천중명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최만호는 다시 말을 이었다.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방향이 선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지금까지 지켜왔던 균형을 유지할 최소한의 규율과 체계가 필요합니다.”
“새롭게 정직원으로 전환된 직원들이 규율을 흐린다는 말씀인가요?”
“정직원이 된 기쁨과 함께 그동안 억눌렸던 부분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당연히 겪어야 할 진통인데 이럴 때 그걸 통제해야 할 임원들을 너무 옥죄면 중간 간부들이 힘을 잃습니다.”
최만호의 답을 들은 천중명은 잠시 그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새로 회장이 된 내 방침에 반항하는 것과 혼란을 통제하는 것에 연관성이 있습니까?”
“지경전자 조승필 회장의 방법이 거칠고, 무례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 과정과 결과를 모든 임원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아주십시오. 그들이 몸을 사리기 시작하면 정말 대책이 없습니다.”
최만호는 임원들이 가진 불만을 말하는 느낌이었다.
“회장님. 의도하지는 않으셨겠지만, 직원들의 복지 향상에 임원들이 방해되는 존재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그룹 전체에 결코 좋을 일은 없습니다.”
천중명은 입술만 움직여 웃었다.
“웃기는군요. 자기들은 내게 반기를 들면서 반대로 직원들 앞에서는 권위를 인정해 달라?”
“그런 뜻으로 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좀 더 부드럽게 이 일을 진화할 필요도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게다가 정부와의 관계도 고려해주셔야 합니다.”
“하나씩 짚죠. 지경전자의 작년 매출이 얼만인지 아십니까?”
“작년 결산으로 대략 33조7천억 원입니다.”
“영업이익은요?”
“788억 원 손실입니다.”
“그러니까 33조7천억을 팔아서 788억의 손실을 낸 지경전자가 그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대리점에 부사장이 달려가 직원들에게 막말을 퍼붓고 여직원에게 사진찍기를 강요해야 한다, 그런 말씀입니까?”
너무 거친 표현인가 싶었지만, 최만호에게는 꼭 한 번 짚고 넘어가고 싶었던 말이었다.
“조승필 대표회장은 아이비리그 출신으로 해외 영업망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뛰어난 능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조승필 회장의 인맥 또한 해외시장개척과 컨벤션 센터 유지에 큰 도움이 됩니다.”
“실장님을 존중합니다. 총수님께서 신뢰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에 제가 봐왔던 모습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사장을 이유 없이 감싸는 조승필 회장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천중명은 최만호의 조언을 최대한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러시다면 지경전자를 방문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조승필 대표회장을 만나보시고, 공장 시설도 돌아보시면 싶습니다.”
“현장을 통제해야 하는 임원들의 고충을 직접 들어보자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회장님.”
천중명은 시선을 돌려서 창밖으로 보았다.
너무 현장 직원 위주의 정책으로 밀고 나갔나?
계열사를 관리하는 임원들의 고충을 알아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잠시 고민했던 천중명은 다시 시선을 최만호에게 가져왔다.
“지경전자를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중으로 일정을 잡아주세요.”
“예, 회장님. 내일 오후에 코리아 클럽에 참석하시는 일정을 피해서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주세요.”
인사를 마친 최만호가 굳은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유진교와 최만호, 두 사람과의 관계가 어쩐지 삐거덕대는 느낌이었지만 이 정도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살다 보면 곽대출과도 목소리를 높일 때가 있을 텐데 어떻게 유진교, 최만호와 영원히 좋은 순간만 있기를 바라겠나.
하루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천중명은 책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 뒤에 모니터에 시선을 주었을 때였다.
[회장님. 강남서에서 천상기 회장이 통화를 원한다는 연락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인터폰에서 정말 웃기는 말이 넘어왔다.
이 미꾸라지는 정말이지 예상했던 선에서 한 치도 변함이 없는데 그때마다 손가락 사이를 잘도 빠져나간다.
천중명은 왼손을 뻗어서 버튼을 눌렀다.
“연결해서 알려줘요.”
[네, 회장님.]
그나저나 코리아 클럽의 모임이 내일이었나?
천중명은 초대장을 들어 내용을 확인했다.
참 고급스럽게도 만들었는데 내용은 오후 5시에 남산의 호텔과 체육관 사이에 있는 갤러리에서 모인다는 게 전부였다.
드레스코드는 짙은 색 정장과 타이라고 되어 있고, 동반인은 내일 오전 11시까지 통보하지 않으면 입장이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지랄들은!”
천중명이 속한 플래티넘 회원은 가입비가 10억 원에 1년 회비가 5억이었다.
법인비용으로 처리한다고는 하지만, 도대체 이게 뭔 돈 지랄들인 건지 천중명은 당최 이해하기 어려웠다.
뒤편으로 회원 명부가 동반되었는데 플래티넘 회원 아래 로열 회원은 주로 재벌 2세와 벤처사업 운영자들이 들어있었고, 뜬금없이 인지도 높은 탑 연예인도 있었다.
플래티넘 회원은 그들만 따로 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클럽의 2층에 플래티넘 회원 전용 공간까지 마련해 놓았다.
이걸 왜 나가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유진교의 당부대로 한 번쯤 가서 지켜보고 오겠다는 생각이었다.
[회장님. 1번에 전화 연결했습니다.]
그때 천중명의 생각을 자르며 인터폰에서 직원의 음성이 들렸다. 초대장을 내려놓은 천중명은 구내전화기를 들고 내선 1번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천 회장. 나 형이야. 천상기.
변화무쌍하기로 이만한 인간이 있을까 싶어서 천중명은 허탈하게 웃었다.
- 내가 우리 천 회장 뜻대로 40년 기다릴게. 이번 한 번만 선처해줄 수 없을까? 다리의 통증이 심해서 치료는 아니더라도 약도 처방해서 먹어야 하고, 목은 숙어지지도 않아서….
금방에라도 흐느낌을 쏟아낼 것처럼 울먹이는 음성이었다.
“그거 나한테는 안 통하는데.”
- 우리 천 회장 동생이 기회를 줄 때까지 40년 아니라 100년이라도 기다릴게. 선처를 부탁해.
“그래?”
천중명은 한숨을 푹 내쉰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 전화 드려. 못났지만 형이라고 생각하고 봐주라 하셨던 분이니까 아버지가 허락하시면 나도 생각을 바꿔보지. 원하는 게 뭐야?”
- 내 변호사가 탄원서 작성해서 갈 테니까 거기에 우리 천 회장이 이름만 적어주면 돼. 그럼 내가 아버지께 지금 당장 전화할게.
“그러지 말고 30분쯤 있다가 해. 내가 먼저 통화할 테니까.”
- 고마워, 천 회장. 정말 고마….
“그런 쇼 나한테는 안 통한다고 했었다.”
거짓말처럼 천상기의 울음이 뚝 잘렸다.
어쩌면 이 인간은 감정마저 자신의 이익에 이토록 일치하는지 진심으로 존경심이 우러나올 지경이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곧장 천호득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쯤 간 다음이었다.
- 어쩐 일이야?
반가움을 딱딱함으로 둘러싼 천호득의 음성이 휴대 전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아버지. 형이 전화했었습니다. 선처를 요구하고, 이후에 제가 지시하는 대로 살겠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허락받으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30분쯤 뒤에 전화할 겁니다.”
- 흠.
천호득은 우선 신음 같은 숨을 쏟아냈다.
- 선처를 해주면 바로 나와?
“우리가 탄원서를 낸다고 해도 법원이 어떤 판결을 내릴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아버지께서 허락하시면 원하는 대로 협조해줄 생각입니다.”
답을 건네고 숨 한 번 쉴 짧은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법의 판결이 나온 뒤에는 용인에서 치료받게 한다는 것만 이해해주세요.”
- 그래. 고맙다.
천호득이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 빠진 음성이 넘어왔다.
“아버지.”
천중명이 불렀는데 당장 답은 건너오지 않았다.
“아버지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기운을 주고 싶었다.
큰아들 잃고, 작은아들 저리된 천호득에게 최소한 제대로 된 자식 한 명은 남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 회장이 그렇게 약해빠진 말이나 해서 어떻게 해!
“아버지께 보이는 건데 약한 모습이면 어떻습니까? 누가 뭐라고 하면 곽 이사 데려가서 확 눈알을 빼버리면 되지요.”
- 흐헤헤헤.
“기운 내세요. 아버지가 힘을 잃으시면 종일 힘이 안 나요. 모레 토요일에 찾아뵐 테니까 우리 굴비에 밥 먹지요.”
- 굴비? 왜 그게 생각나? 그럼 우리 이화각에 가볼까?
천호득의 음성에 힘이 실리고 있었다.
“집에서 먹을까 했는데 그곳 음식이 생각나시면 그리 가시죠.”
- 그래. 그럼 내가 전화 받을 테니까 회장이 좀 도와줘.
“예.”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먼저 선물지수 움직임을 살폈고, 환율 변화, 투자자별 동향 등을 확인했다.
다음으로 직원들이 올린 이메일을 확인하고, 붉은색으로 표시된 처리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제는 그나마 그룹 회장의 업무에 익숙해진 느낌이었고, 오후에 받던 수업이 없어지면서 그만큼 시간 여유도 생겼다.
지경연구소에서 올린 리포트의 목록을 살피던 천중명은 눈썹을 매만지며 느닷없이 튀어나온 블루 크루드라는 새로운 연료를 떠올렸다.
20년 전에 이산화탄소와 물, 전기로 크린 디젤을 생산할 아이디어를 떠올리며 그 시제품을 만들기 위해 실험을 했었다는 것이 아직 믿기지 않았다.
어둠에서 보았던 폭발이 그때의 장면이었을까?
그나저나 최근에는 왜 어둠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을까?
분명 뭔가 있는데.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죽기 직전에 원래 천중명이 알 것 같다고 했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천중명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
천중명의 방을 나선 최만호는 그의 집무실에서 지경전자 대표회장 조승필의 전화를 받았다.
- 최 실장님. 계열사도 계열사 나름이고, 대표회장이라고 해서 모두 고개를 조아리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회장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해임 통지가 떨어진 날 바로 특별 감사를 내리셨습니까?”
- 증거가 확실합니다. 그리고 하나만 알아두십시오. 주식회사 지경이 김준동 전무의 해임을 통지하면 내가 다음 날 그를 다시 내 직권으로 고용할 거요.
최만호는 전화기를 귀에 댄 채 고개를 숙이고는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내일 회장님께서 지경전자를 방문하실 예정입니다. 그전에 하나만 알고 갔으면 합니다.”
조승필은 침묵으로 최만호의 답을 기다렸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회장님의 지시에 반기를 드는 겁니까? 이유를 알아야 애로사항을 제대로 전달 드릴 수 있어서 하는 질문입니다.”
- 최 실장님. 회장님이 경영에 관해 아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이건 직원들과 열등감에 빠진 능력 없는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는 유치한 수작이고….
“말을 가려서 하세요.”
- 큼.
최만호의 경고에 뜨끔했는지 조승필은 헛기침을 내놓았다.
- 솔직히 말합니다. 정부에서도 우리 회장의 독단을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체계를 흔들어놓는 것을 벼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최만호는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
결국, 정통부 장관을 시작으로 반 천중명 세력이 힘을 모으고 있다는 의미이고, 그 앞을 조승필이 섰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나오시면 조승필 대표회장의 해임지시를 나도 더는 막아낼 수 없습니다.”
- 할 테면 해보라고 하시오. 나도 그냥 당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동안 지경이 어떻게 운영됐는지 나도 알만큼은 아는 사람입니다. 명예회장님의 비리까지 들고 일어날 테고, 외국인 지분을 이용해서라도 쉽게 물러서지는 않을 거요.
최만호는 이를 꽉 깨물었다.
결국, 염려하던 일들이 수면 위로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그룹의 생리를 아실 텐데 그러십니까? 구심점이 없는 조 회장이 과연 정통성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 흥! 서자 출신인 회장보다야 본부인에게서 나온 천상기 회장이 훨씬 적격이겠지. 적어도 그분은 임원의 권한에 손을 대지는 않았으니까.
“지금 하신 말씀을 본부장님과 의논하겠습니다.”
- 마음대로 하시오. 나는 내 방식대로 천상기 회장의 구명 활동을 할 거고, 내일 천중명 회장께서 방문한 뒤에도 내 권한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내 길을 가겠습니다.
최만호의 경고에도 조승필은 뜻을 굽히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