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109. 섬뜩한 교훈 (1)
순찰차가 천상기의 오피스텔에 들어서는 것을 보며 천중명은 다시 유진교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 예, 회장님.
“본부장님. 형이 조금 뒤에 경찰에 체포될 겁니다. 이번 사건이 언론에 나오지 않도록 조치해주세요. 자세한 내용은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
- 홍보실에 지시하고, 제가 직접 관리하겠습니다.
유진교의 굵직한 음성이 바로 넘어왔다.
살면서 이 양반이 진심으로 당황하는 것을 한 번쯤은 볼 수 있을까?
“지금 평창동으로 가는 길이거든요. 총수님 뵙고 바로 들어갈까 하는데 특별한 일이 있나요?”
- 코리아클럽에서 초청장이 도착한 것 외에는 없습니다.
“내일 확인해도 되는 거죠?”
- 그렇습니다, 회장님.
간단하게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전화기를 내려놓은 뒤에 곽대출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부탁이 있다.”
“부탁은 무슨? 지시만 내리셔, 회장님. 물이고, 불이고 다 뛰어들 테니까.”
“쉽지 않겠지만, 네가 욕을 먹어.”
곽대출은 ‘뭔 소리지?’하는 의미로 시선만 주었다.
“암행어사가 원래 그런 자리 아니냐? 여기저기에서 욕먹는 자리? 널 믿고 부조리한 일을 메일로 올렸는데 조사가 끝난 뒤에도 바로 잡히는 게 없으면 직원들이 무슨 생각할 거 같냐?”
곽대출은 천중명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단박에 알아들은 눈치였다.
강단으로는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곽대출이었다.
천중명에게 바로 보고하자니 최만호를 무시하는 꼴이 되는 터라, 그라고 왜 답답한 속이 없었을까?
“내가 꼴통 회장 할 거니까 너도 꼴통 이사가 돼야지, 네 힘으로 감당하지 못할 일이 생기면 내게 바로 알려줘. 그렇게 직원들에게 존경받는 이사가 돼라.”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점잖은 척은?”
“아, 거! 사람이 진지하게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는데.”
“어울리는 짓을 해, 인마!”
“에이, 꼴통 회장!”
둘이서 비슷한 표정으로 웃고 난 다음이었다.
“그나저나 꼴통 이사라?”
듣기에 나쁘지 않았던지 곽대출이 어깨를 으쓱했다.
“괜히 임원들 두들기라는 뜻은 아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 회장님아.”
천중명은 가볍게 웃으며 시선을 앞으로 가져갔다.
이놈에게는 더 말할 필요 없었다.
천중명이 어떤 심정으로 이야기했는지 모두 알아들었을 놈이라 그렇다.
“요즘도 주 과장과 교육이 많냐? 왜 그렇게 퇴근이 늦어?”
“말도 마셔요, 회장님. 팔자에 없는 책을 하루에 한 시간씩이나 읽잖아.”
“무슨 책인데?”
“삼국지. 그거 언제 다 읽지?”
툴툴대는 곽대출의 눈가에 숨기지 못한 행복이 옅게 피어나 있었다.
**
허선영은 숨을 길게 내쉬며 들여다보던 모니터에서 상체를 세웠다. 이렇게 달려들어도 그룹 계열사에서 들어오는 디자인 의뢰는 정말이지 끝이 없었다.
똑똑.
그녀가 잠시 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처럼 노크가 들렸고, 곧바로 디자인부서의 직원이 들어왔다.
“대표님. 이거 어떠세요?”
제품 설명서에 사용할 캐릭터를 그려온 여직원이 스케치북을 내밀었다.
3등신이라 해서 머리와 몸통, 다리 길이가 비슷한 캐릭터가 여러 가지 표정으로 그려져 있었다.
“너무 튀는 거 아닐까? 이 제품을 구입하는 고객의 주 연령층을 생각하면 조금 점잖은 게 나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그래도 이건 너무 아깝다. 어디 다른 곳에 쓸 곳이 없을까요? 아니면….”
연필을 집어 든 허선영이 스케치북의 빈 곳에 캐릭터를 그렸다.
“이런 느낌으로 좀 점잖게 만들면 어떨까? 이건 너무 나이 들어 보이나?”
허선영이 그린 스케치를 본 직원이 뭔가 떠오른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 캐릭터가 나쁘지는 않으시죠?”
“난 정말 마음에 들어.”
“그럼 이걸 수정해 볼게요.”
허선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이 스케치북을 품에 안았다.
“실무담당자들이 대표님 엄청 좋아하는 거 아세요?”
“무슨 소리예요?”
“대표님이 디자인 맡으신 뒤부터 계열사 임원들이 고집 피우는 일이 많이 줄었대요. 저희도 피부로 실감해요. 전 같으면 답답할 정도로 보수적이었던 디자인이 세련되게 바뀌고 있거든요.”
“난 그런 소리 들으면 겁나.”
“괜히 또 그러신다. 지난번에 지경화장품 매장에서 매니저 도와주신 일로…, 아시죠?”
엄지를 세워서 보여준 직원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에 방을 나섰다.
강남스퀘어의 지경화장품 직원이 사내 통신망에 그날의 일을 올려서 여직원들과 현장 직원들 사이에 허선영의 인기는 굉장했다.
이럴수록 더 조심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쯤 정치인의 딸로 자란 허선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허선영은 문득 천중명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당신 잘하고 있다고.
최선을 다하는 거 안다는 칭찬이 듣고 싶기도 했다.
그러려면 더 열심히 일해야겠지?
손가락에 끼운 반지를 얼굴 앞에 들어보았던 허선영은 전화기 대신 터치펜을 들었다.
**
천중명이 곽대출과 함께 평창동의 저택에 들어섰을 때 천호득은 정원에 있었다.
“왜 나와 계세요?”
“이맘쯤이 정원에 있기 가장 좋아. 조금 지나면 너무 덥고, 그 뒤로는 계속 추우니까. 머리 깨진 놈은 어쩐 일이야?”
천중명의 질문에 대꾸한 천호득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곽대출을 살폈다.
곽대출과 둘이 다녔다면 뭔가 또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미의 눈초리였다.
“먼저 들어가 있어.”
“예, 회장님.”
천중명의 눈짓을 받은 곽대출과 장만섭이 안으로 들어간 다음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형 이야기야?”
“예.”
천호득이 질문을 던졌고, 천중명이 답했다.
“앉아. 앉아서 이야기해.”
“예, 아버지.”
천중명은 정원 한쪽에 있던 철제 의자를 가져와 휠체어 앞에 두고 거기에 앉았다.
“형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천중명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천상기가 사주해서 크레인이 꺾였다는 사실부터 천호득의 교통사고에 개입한 것, 그리고 그가 노렸던 것과 반대로 오히려 마약에 당했다는 것까지 모두 전했다.
해가 이미 넘어간 시간이었다.
은은하게 풍기는 조명 속에서 천호득은 말이 없었다.
“괜찮으세요?”
“그놈을 어떻게 할 거야?”
그리고는 천중명의 염려에 엉뚱한 질문으로 답을 대신했다.
정원의 조명이 들춘 천호득의 눈매와 볼에 못된 자식을 어쩌지 못하는 아버지의 아픔이 서러운 느낌으로 서려 있었다.
“내가…. 내가 부탁하면 그놈을 살려줄 수 있겠어?”
천호득의 눈에 담긴 감정은 실제로도 죽이지만은 말아 달라는 의미로 보였다.
솔직히 그룹 회장이 지닌 힘을 나쁘게 사용하면 천상기쯤 얼마든지 죽일 수 있겠다.
천중명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천호득의 뒤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말없이, 그리고 정성껏 어깨와 목을 주물렀다.
“아버지. 형은 잘못한 일의 처벌을 받은 뒤에 용인 근처에 집을 구해서 그곳에 있게 할 생각입니다. 윤 실장에게 맡겨서 정신과 치료도 받게 할 거구요.”
숨을 들이마셨는지 커다랗게 가슴을 부풀렸던 천호득이 오른손을 돌려서 천중명의 손을 덮었다.
“내가 약해졌어. 그래서 회장에게 짐이 되는 걸 알면서 자꾸 그놈 편을 들게 돼.”
“그런 말씀 마세요, 아버지. 언젠가 형도 잘못을 뉘우치는 날이 올 겁니다.”
“흥! 개가 육식을 끊었다는 소리를 듣는 게 빠르지!”
하여간 천호득이 툭툭 내뱉는 말은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에 웃음이 터진 게 그랬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
“아버지 말씀이 매력 있는 건 아세요?”
“뭐라는 거야? 힘들어! 그만해!”
“이게 중독이 있다니까요. 낮에 근무하다가도 아버지 어깨를 주물러 드렸으면 좋겠다 싶은 때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
“진짜 좋아요. 아버지 주물러드리는 거요.”
“흐헤헤헤.”
천호득이 만족한 웃음을 터트렸을 때였다.
“말씀 아직 안 끝나셨어요? 저녁 드셔야죠?”
이은명이 정원으로 나서며 천호득의 웃음을 뚝 잘랐다.
**
다음 날 출근한 천중명은 가장 먼저 유진교를 불렀다.
먼저 천상기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고, 다음으로 코리아클럽의 초청장을 확인했다.
“본부장님. 지경전자 부사장 이야기인데요. 조승필 대표회장이 정통부 장관의 사촌 동생인데, 그가 싸고돌아서 장서문 부사장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았다는 의견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초청장을 내려놓은 뒤에 천중명은 지경전자 부사장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회장님께서는 어느 정도의 처벌이 적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유진교의 질문이 도전적인 느낌이어서 천중명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실적이 최우선인 기업이 선만 추구해서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이번 근신 처분으로 그가 조심한다면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천중명의 표정을 알아챘는지 유진교는 마지막에 사과의 말을 얹어 놓았다.
“하나만 먼저 듣고 싶습니다. 조승필 회장이 장관의 사촌 동생이 아니었거나 그가 싸고돌지 않았어도 장서문 부사장에 대한 징계를 이 정도 선에서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천중명의 질문에 유진교는 망설이지 않았다.
“실적이 전부인 대리점은 어쩔 수 없이 푸시 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비인간적인 문제가 있었다면 그 점을 수정하는 방법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원하는 답은 아닌 것 같은데요?”
“회장님. 이번 일만큼은 눈감아 주시면 안 되시겠습니까?”
유진교의 간절한 눈을 보며 천중명은 알 수 있었다.
지경전자의 부사장 장서문을 내치는 일이 조승필 지경전자 대표회장의 따귀를 때리는 일이 되고, 그것이 곧 조철행 현직 장관의 이마를 밀쳐내는 행위가 된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지경그룹은 알게 모르게 불이익을 받을 확률이 높았다.
“널 믿고 부조리한 일을 메일로 올렸는데 조사가 끝난 뒤에도 바로 잡히는 게 없으면 직원들이 무슨 생각을 할 거 같냐?”
그리고 천중명은 어제 곽대출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타이밍 참.
꼴통 회장이 장관 겁내고, 실적 겁나서 직원을 함부로 대하는 임원을 지켜본다?
그것도 어제 꼴통 이사가 되라고 자신 있게 말한 다음 날?
천중명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본부장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에 동의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유진교가 긴장한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본 직후였다.
“지경전자 회장과 부사장, 두 사람을 해임하겠습니다. 명령서를 오늘 중으로 내려주고, 후임을 빠른 시간 안에 추천해 주세요.”
“예, 회장님.”
천중명의 지시를 유진교는 먼저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회장님께서 이런 지시를 내리실 거라 예상했었습니다. 솔직히 조금은 쉬운 길로 모시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제가 복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그래놓고 유진교는 아예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오히려 천중명이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회장님. 원하는 방향으로 가시더라도 요령은 필요합니다. 인사위원회를 열지 않은 조승필 회장에게는 경고 처분, 그리고 장서문 부사장은 해임, 이렇게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유는요?”
“그 조치에 반발해서 조승필 회장이 반항하면 그때 해임하시는 게 장관에게 말할 명분도 있습니다. 반대로 두 사람을 동시에 해고했을 때 최만호 실장과 곽대출 이사가 받아야 하는 눈총도 배려해주셔야 합니다.”
이 부분은 유진교의 설명을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사안이었다.
“그렇게 하시죠.”
“감사합니다, 회장님.”
유진교의 답이 떨어졌을 때였다.
“제 성격에 두 사람을 해임할 거 같아서 일부러 불편한 이야기를 먼저 내놓으신 건가요?”
“회장님께서 워낙 직선이셔서 저라도 살짝 돌아가는 맛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은 했었습니다.”
천중명의 질문에 유진교가 여유를 찾은 눈빛으로 대꾸를 꺼냈다.
“조선시대의 왕의 자리라고 생각하십시오. 너무 무르면 임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반대로 너무 강하면 모여서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 생깁니다. 조선 시대와 다른 것이 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다음 말을 기다리는 천중명의 눈을 바라보며 유진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직원들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기업입니다. 그 기본적인 존재 이유를 무시하면 회장님께 있었던 모든 명분이 한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렇군요.”
“언짢은 이야기를 두 번이나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유진교를 보며 천중명은 서늘해지는 가슴을 감추기 위해 찻잔을 들었다.
유진교에게서 섬뜩한 교훈과 경고를 얻은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