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108. 사람을 보면 모르나? (2)
퇴근 시간 직전이어서 길이 제법 붐볐다.
“현장 소장은 어떻게 하실 거야? 크레인에 장난질 친 거 제대로 벌줘야 않겠어, 회장님?”
신호에 걸린 곽대출은 문득 떠오른 것처럼 질문을 던진 뒤에 룸미러를 통해 시선을 주었다.
“그거보다 지금은 마약조직원을 어떻게 처리할지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니냐?”
“셋이라면서? 그걸 뭘 걱정하시나? 회장님은 그저 어느 선까지 다져 놓을지만 결정해주시면 돼요.”
“뭐가 그렇게 좋아?”
“말씀도 마셔. 암행어사랍시고 가서 임원들의 잘못을 지적했을 때 한 새끼도 그 자리에서 죄송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 성질 같으면 조용한 곳으로 끌고 가고 싶은데. 그때 울분을 좀 풀까 합니다, 회장님.”
말을 마친 곽대출이 속 터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그래? 대표적인 일이 뭐가 있는데?”
“혹시 지난번에 지경전자 부사장 보고서 기억하셔?”
“징계 내리라고 했잖아?”
“거기 사장이 근신 처분만 내리고 말았어. 그 뒤에 표 나지 않게 투고한 직원 잡아낸다고 지랄을 떠는 모양이야, 회장님.”
직원들의 시선을 의식해 뒷자리에 앉았던 천중명이 얼른 시선을 들어서 곽대출의 뒤통수를 보았다.
“나한테 올라온 보고와 다른데? 분명 중징계를 내린다고 봤고 그렇게 된 거 아니었냐?”
“인사위원회를 열어야 중징계가 가능한데 규정상 위원장이 지경전자 대표거든. 보고는 그렇게 해놓고 일단 근신 내린 뒤에 인사위원회를 뒤로 미루고 있는 거지.”
천중명은 잠시 상황을 떠올린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걸 왜 지금껏 가만있었냐?”
“어?”
“너는 언제든 직접 알려줄 수 있었잖아? 그런데 왜 그걸 입 다물고 있었냐고?”
“그게….”
“뭐야? 곽대출?”
쭈뼛대던 곽대출이 결심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지경전자 대표가 장관 사촌동생이라면서 최만호 실장이 알아서 보고한다니까 괜히 내가 이간질하는 꼴이 될까 봐 지켜보고 있었지요.”
대꾸한 곽대출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느라 사이드미러로 시선을 준 채 핸들을 틀었다.
이놈은 죄가 없다.
잘못한 게 있을 뿐이지.
시스템에 적응하는 것이 천중명을 돕는 거라 믿고 최만호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었다.
“여긴가 보네.”
커브를 튼 곽대출이 높다란 빌딩의 지하주차장을 향해 승용차를 움직였다.
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이야기하는 게 좋다.
곽대출이라면 언제고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서두를 것도 없었다.
“괜히 기분 푼다고 애들 너무 잡지 말고, 적당히 해라.”
“지시만 내리십쇼, 회장님.”
지하 4층에 차를 세운 곽대출이 양손 엄지를 구부렸다 펴는 것을 보며 천중명은 차에서 내렸다.
**
천상기는 분통이 터진 얼굴로 앞에 놓인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마셨다.
“엿 같은 소리를 들으니까 커피도 쓰네! 그러니까 뭐야? 아무것도 한 거 없이 숨어만 있다가 이제 와서 나더러 돈을 내놓으라고?”
“크레인 사고 이후로 상황이 뒤집혔잖습니까? 기자 년은 물론이고, 장만섭이 꼬드긴다던 계집애까지 구속됐습니다. 투약과 거래 혐의라 우리도 걸리면 바로 빵에 가야 합니다.”
이판사판이라고 여겼는지 조직원들은 공손한 맛까지 없어졌다.
“중국에 가 있겠습니다. 평택항이나 안중에서 밀항할 테니까 한 2년 쉬었다가 올 비용만 지원해 주십시오.”
“너희 내가 누군지는 알고 이러는 거냐?”
“그걸 왜 모르겠습니까요? 마약을 쓰라고 사주하신 천상기 회장님?”
기가 막힌 심정에 천상기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회장님. 지금 우리 안 도와주시면 회장님도 끝입니다.”
“이 새끼들이 그런데? 너, 내가 어느 조직하고 일했는지는 알 거 아냐? 내 앞에서 그따위 소리 지껄이고 강남에서 돌아다닐 수 있을 거 같아?”
쳐다보기도 싫다는 양 고개를 창으로 돌린 천상기가, “일이 안 되려니까 별 이상한 놈들이 다!”하며 답답한 속을 털어냈을 때였다.
“회장님. 지금 드신 커피에 약을 탔습니다.”
걸걸한 조직원의 음성이 천상기의 귀를 파고들었다.
“뭐? 너 뭐라고 그랬어?”
고개를 홱 돌린 천상기가 종이컵과 조직원을 번갈아 본 직후였다.
“어차피 기자년도 마약으로 엮였고, 오지은도 투약과 거래로 달려 들어갔으니까….”
“그건 저쪽에서 작업친 거 아냐!”
“오지은은 전에 허광렬이 작업할 때 이미 약했습니다. 그년이 혼자 죽기 싫으니까 서수미와 만났을 때, 물뽕 작업했구요. 모르셨나 본데 회장님도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이 미친 새끼들아!”
“뽕쟁이들 만나면 물도 마시지 말라는 말 못 들어 보셨습니까? 커피에 투약한 게 벌써 두 번째입니다. 우리가 회장님도 작대기 거래했다고 진술하면 다 같이 죽는 겁니다.”
조직원은 느물거리는 표정으로 섬뜩한 말을 서슴지 않고 뱉어냈다.
“뽕을 했는데 왜 반응이 없어? 뭔가 좀 꽂힌다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이라든지?”
“참, 나.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 오지셨네! 무릎이나 한번 움직여 보십쇼.”
이것들이 뭔 수작을 꾸미는 거야?
의심스러운 눈초리에서도 천상기는 다리를 슬쩍 펴보았다.
“어?”
그러고 그는 놀란 소리를 냈다.
“감이 좀 잡히시나? 뽕은 잡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거든요. 끌어주는 대로 가니까.”
인상을 찌푸린 천상기를 향해 조직원은 계속 말을 이었다.
“회장님처럼 안 잡아주고 놔두면 통증이 싹 가시는 효과가 있습니다. 자! 다른 말씀 마시고, 20억만 만들어 주십쇼. 조용히, 죽은 듯이, 한 2년 있다가 올랍니다. 수표로 주셔도 됩니다.”
느물거리는 조직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누구세요? 왜 이러세요?”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린 직후에 문이 열렸다.
“어?”
방 안에 있던 네 사람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조직원 셋이 일어서는 사이에 천상기는 마른 침을 삼켰다.
천중명과 곽대출이 연달아 방으로 들어와서는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앞서 들어선 천중명은 천상기를 먼저 살핀 후에 조직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희는 조금 뒤에 이야기할 테니까 나가 있어.”
“하! 씨발! 요즘은 그룹 회장이 별별 걸 다 하고 다니시네!”
조직원들은 천상기가 그토록 강조했던 경고를 잊어버린 눈치였다.
덩치들이 의자를 거칠게 밀쳐낸 직후였다.
“이것들 밖으로 치워.”
“예, 회장님.”
천중명이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던진 지시에 뒤에 있던 곽대출이 훅 앞으로 나섰다.
“뭐야? 이…! 커헉!”
팔을 들어 곽대출을 밀치려던 조직원이 목을 부여잡은 채 무너져 내렸고,
퍽! 퍼버벅!
오른쪽에 있던 놈은 명치를 얻어맞아 눈과 입을 쩍 벌린 모습으로 바닥을 뒹굴었으며,
휘익! 쩌걱!
마지막 놈은 사타구니를 얻어맞아 양손을 소중한 곳에 처박은 몰골로 비참하게 고꾸라졌다.
“자! 나가서 이야기하자. 어른들 말씀하시는 데 방해된다.”
덥석! 지이이이이익!
왼손에는 머리끄덩이를, 오른손에는 발목을 잡아 두 놈을 한꺼번에 끌고 나갔던 곽대출이 도토리 놓고 갔던 다람쥐처럼 들어와서 사타구니 맞은 놈의 목을 배추 잡아 빼듯이 당겨서 끌고 나갔다.
천중명은 의아한 눈으로 천상기를 바라보았다.
“하아. 하아아.”
그가 묘한 숨소리를 낼 때마다 역겨운 냄새가 풀풀 풍겨 나오고 있어서였다.
이유는 바로 알 것 같았다.
이 인간이 좋아서 약을 했을 리는 없고, 앞에 놓인 커피에 당한 게 분명해 보였다.
“에라, 이 모지라.”
“너 때문이야!”
고함을 버럭 지른 천상기의 눈과 볼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 때문이라고! 다! 네가 나서지 않았으면 모든 게 제대로 끝날 일이었다고!”
퍼억! 퍽! 퍽! 퍼억!
밖에서 곽대출의 매질 소리가 들리자 탁자로 떨어지던 천상기의 고개가 화들짝 올라왔다.
“아버지는 노리지 말았어야지.”
“너만 좋아하잖아! 나는 다 뺏겼는데도 돌아보지도 않고! 그게 아버지야? 그렇게 차이 나게 대하면 안 되는 거잖아! 두고 봐! 내가 언젠가는 그 영감 꼭….”
“이 개새끼가?”
약에 취했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천상기가 놀란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본 직후였다.
독하게 마음먹은 천중명은 천상기에게 다가섰다.
그리고는 움찔하는 그의 머리를 양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안 돼! 안 돼! 하지 마!”
천중명의 손목을 잡은 채 천상기가 고개를 빼려는 순간이었다.
휘익! 드드드득!
“끄아-! 끄아악! 끄으-으!”
뒤에 있던 옷걸이까지 고개가 돌아갔던 천상기가 되돌아온 목을 부여잡고 버둥거렸다.
“끄으! 끄으으-!”
탁자에 머리를 처박은 채 몸부림치는 그를 천중명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지막 순간에 차마 힘을 더 주지 못했다.
둘째마저 잃게 됐을 때 천호득이 아파할 얼굴을 끝내 외면할 수 없었다.
그 심정을 이 인간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오른팔이 아직 회복 안 된 걸 다행으로 알아. 그리고 형사 처분이 끝나면 병원에 넣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차가운 말을 끝으로 천중명은 밖으로 나왔다.
퍼억! 퍼억! 퍼억!
그리고는 잔인한 발길질을 계속 쏟아내는 곽대출의 뒤에 섰다.
“그만해.”
“예? 예, 회장님.”
앞으로 쏟아진 머리칼을 뒤로 넘긴 곽대출이 재킷 아래를 당기며 뒤로 물러났다.
천중명은 자세를 낮춰 아까 욕을 뱉으며 대들었던 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얼굴을 제대로 걷어차였는지 코가 완전히 뭉개졌고, 앞니가 온통 부러져버린 입에서 덩어리 피가 꾸역꾸역 나오고 있었다.
“너희가 속한 조직을 완전히 무너트려 주마. 필요하면 서울 전체의 조직을 하나씩 무너트릴 거고. 이유는 너희가 내 사람을 건드리려 한 데다, 우리 형에게 약을 쓴 것 때문이다.”
꿈틀. 꿈틀.
“크흑! 그게…. 저희는….
뭔가를 말하려는지 꿈틀대던 놈이 급하게 피를 꿀떡 삼켰다.
“늦었어. 평생 다른 조직원들에게 쫓기며 살아봐. 너희 세 놈이 갈가리 찢겨 죽었다는 걸 확인할 때까지 돈이 얼마가 들든, 어떤 압력을 넣든, 서울의 조직 전체를 부술 테니까.”
“잘못…! 한 번만…. 기회를….”
버둥대는 놈을 향해 차갑게 웃어준 천중명은 몸을 일으켰다.
“수배된 놈들이니까 경찰에 연락해. 그리고 구급차도 불러. 뭐해? 연락 안 하고?”
“예? 예.”
천상기의 사무실에 있던 직원이 급하게 수화기를 들었다.
슬쩍 천상기를 들여다보았던 곽대출이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직후였다.
“평창동에 잠깐 들르자.”
“예, 회장님.”
천중명이 지시했고, 곽대출이 길을 여는 것처럼 쓰러진 놈의 얼굴을 발로 시원하게 밀어냈다.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천중명은 조수석에 올랐다.
“평창동에서 직원들이 봅니다. 뒤로 타셔요.”
“그냥 가.”
왜 이러나 했던 곽대출이 우선 차를 움직였다.
주차장을 빠져나올 때였다.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꺼내 번호를 눌렀다.
- 예, 회장님.
“윤 실장님. 아버지 안 들으시는 곳에서 통화했으면 싶은데요. 불편하시면 좀 뒤에 전화해도 됩니다.”
- 아닙니다. 마침 장 비서와 정원에 계십니다.
“아, 그래요?”
혼자 있는 것을 확인한 천중명은 천상기의 오피스텔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빠르게 전했다.
“제가 지금 그리 가고 있거든요. 여기 세 명이 아마 형의 죄를 다 털어놓을 겁니다. 그놈들 제대로 처벌받게 해주시고, 형은 형사 처분이 끝나면 병원에 넣어주세요. 지금 가서 아버지께 허락받을 테니까요.”
- 정신과를 말씀하십니까?
“예.”
천중명의 답이 건너간 직후였다.
짧은 숨소리 이후에 윤만석의 답이 건너왔다.
- 회장님. 천상기 회장을 차라리 용인의 주택에 모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곳에서 정식으로 치료받게 하겠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나요?”
- 어떤 이유에서건 한 번의 투약으로 병원에 넣는 것은 가족 간의 분쟁에 대한 응징으로 보입니다. 괜히 언론에 좋은 소재만 던지는 모양새가 됩니다.
창밖을 향해 시선을 주었던 천중명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형사 처분 이후에는 윤 실장님에게 맡기겠습니다. 어머니 집은 그대로 두시고, 적당한 집을 하나 더 구해주세요.”
- 예, 회장님.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곽대출이 힐끔 쳐다보는 앞에서 할 말이 끝났다.
그때였다.
전화기 너머에서 “누군데 그렇게 어렵게 통화하냐?”하는 천호득의 음성이 들렸고, “회장님이 이리 오는 중이랍니다.” 하는 윤만석의 답이 이어졌으며, “그래?” 하는 반가움 가득한 반문이 연이어 건너왔다.
그래, 잘 참았다.
이런 양반의 둘째 아들까지 보내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니까.
천중명은 픽 웃으며 휴대 전화기의 종료 버튼을 눌렀다.
퇴근 시간의 막히는 도로를 뚫고 순찰차가 요란하게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