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07화 (107/315)

# 107

107. 사람을 보면 모르나? (1)

사무실에 돌아온 박승양은 골프에서 홀컵에 공을 넣을 때 사용하는 퍼터를 등 뒤에 거꾸로 들고 그의 방을 서성였다.

지경그룹의 천중명이 작정만 하면 그룹 계열사에 흩어져 있는 유보금, 한순간에 모은다.

얼추 짐작으로 20조 원이 훌쩍 넘어가는 유보금을 말이다.

“이걸 어떻게 하지?”

박승양은 뒤로 든 퍼터를 움직여 등을 툭툭 치면서 우리에 갇힌 승냥이처럼 책상과 벽을 오갔다.

담보를 요구하려면 수익을 양보하라고? 나더러? 이 바닥에서 짜하게 알아주는 박승양에게?

본능이 문제였다.

돈 냄새가 막 풍겼었잖아? 그 눈빛을 떠올려 봐.

기회야, 기회! 평생에 이런 기회는 또 없다니까!

박승양은 자꾸만 꼬드기는 본능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5조라? 담보를 제공하는 사람이 더 먹기?”

천중명에게 2조만 만들었다고 슬쩍 발을 내밀어 봐?

박승양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런 조건을 들이밀면 천중명은 분명 픽 웃은 뒤에 차나 마시라고 손을 뻗을 거다.

“천호득, 이 영감쟁이! 저런 괴물이 있으니 큰아들이고, 작은아들이 눈에 찼을 리가 없지.”

박승양이 젊었던 시절에 기억하는 천호득은 피도 눈물도 없는 독불장군이었다.

그런데 그때의 천호득이 애송이로 보일 정도로 천중명은 강렬한 인상이었다.

“이렇게 되면 박승양의 인생 배팅인데?”

일이 망가진다면 그 뒤에 천중명은 어떻게 나올까?

차갑게 웃으면서 “손해가 났으니 이거로 끝.” 하고 돌아설까, 아니면 최소한의 살길은 열어줄까?

시간이 지날수록 기회가 점점 멀어지는 듯한 느낌에 박승양은 마음이 급했다.

원하는 금액도 또 그렇다.

어쩌면 박승양이 주변을 박박 긁다시피 모아야 가능한 금액을 요구하느냐는 말이다.

“장난하지 말라는 건가?”

기업을 인수하든, 주가 조작을 하든, 정보가 들어오면 늘 다른 루트로 주식을 사서 수익을 만들었던 박승양이다. 그런데 5조 원을 들이밀고 나면 손가락 빨면서 천중명이 만들어줄 수익을 목 빼고 바라는 꼴이 된다.

“안 해!”

박승양은 결심했다.

천하의 박승양이 뭐 할 짓이 없어서 돈 곱게 가져다 바치고 천중명이 잘 되기만 바라고 있을까. 게다가 담보 하나 없이 5조를 들이밀어야 2조 5천억 먹는다.

박승양은 확실하게 고개를 돌리고는 퍼팅 연습기 앞으로 걸었다.

기다랗게 깔린 매트 끝이 오르막을 타고 올라가 그 끝에 홀컵이 있어서 공을 넣으면 옆을 타고 내려온다.

마음을 가다듬고.

박승양은 자세를 잡고 퍼터를 공 뒤에 두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가볍게 공을 쳐야 하는데.

2조 5천억 먹으면 은퇴야.

어지간한 코스닥 회사 100개를 살 돈이라고.

크레인에 올라가는 모습 봤잖아? 그런 그룹 회장을 평생에 또 만나겠어?

이번 일 잘되면 박승양의 신화가 생기는 거야.

사채의 왕, 박승양.

본능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그를 설득하고 있었다.

티익.

공이 엉뚱하게 맞아서 옆으로 굴러갈 때였다.

박승양은 이를 꽉 악물었다.

“내가 그 눈빛에 투자한다, 진짜!”

그러면서 그는 씹듯이 말을 뱉었다.

**

<오늘의 아침> 현충기 기자는 액정에 떠 있는 서수미의 이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얘가 웬일이지? 여보세요?”

- 선배님! 저 좀 살려주세요!

“갑자기 전화해서 뭐라는 거야? 왜 누가 목을 졸라?”

- 검찰이 작업했어요! 제가 마약 유통했대요!

정나미 뚝 떨어진 서수미의 전화라 끊을까 했지만, 그러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다급했다.

- 도와주세요! 아버지 가게는 국세청이 달려들었구요. 동생도 느닷없이 회사에서 잘렸어요!

“솔직히 말해 봐. 그래야 도와주지. 마약 밀매했어?”

- 그게 아니라요.

뭔가 말꼬리를 흐리는 것을 보며 현충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 여유가 있나 본데 네가 싼 건 네가 직접 치워라.”

- 지난번에 크레인 넘어간 거요! 그거 내가 인터넷에 방송했어요.

설명을 들은 현충기는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너, 천중명 회장을 또 노렸던 거야? 미쳤어?”

주변에 있던 기자들의 시선이 단박에 달려왔고, 편집장은 아예 책상에서 일어나 현충기의 곁으로 다가왔다.

- 선배님! 잘못했어요! 이번만 도와주시면 뭐든 시키는 대로 할게요!

“네 멋대로 다 해놓고, 아쉬울 때만 선배야? 하여간 끊어 봐. 내가 알아볼 테니까.”

통화를 마친 현충기를 편집장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서수미인데요. 지난번 크레인 사고 인터넷 방송했답니다. 지금 마약 밀매로 엮였다고 하고, 아버지 가게는 국세청이 털은 데다, 동생은 해고됐다며 살려달라는데요?”

“꼼짝도 하지 마.”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편집장은 그 어느 때보다 무서운 눈으로 다부진 지시를 내렸다.

그런 뒤에 그는 고개를 들어 기자실을 둘러보았다.

“누구든 이 일에 관여하면 정말 나랑 평생 원수 되는 거다. 나서지 마. 내가 이거 전무님과 대표님께 보고하고 서수미 파면할 거니까 곤란한 사람은 아예 번호를 거부로 돌려놔.”

거북이처럼 목이 앞으로 굽은 편집장이 홱 몸을 돌려 전무의 방으로 움직였다.

“어떻게 해요?”

누군가 걱정하는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는데 현충기를 비롯해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을 보면 모르나? 왜 한 번 양보한 사자의 성질을 또 건드려?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게?”

현충기의 탄식은 조금 뒤에 나왔다.

**

대교건설 오상구는 그의 집무실에서 긴급체포 되었다.

“오상구 씨. 분식회계, 탈세, 탈루, 횡령, 배임의 혐의로 체포합니다.”

그래도 산전수전 다 겪은 오상구였다.

“알았어요. 알았어. 전화 좀 씁시다.”

미란다 원칙을 들은 이후에도 오상구는 여유로운 태도로 요구했고, 형사들은 또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는 우선 관할서인 강남경찰서 서장에게 전화를 넣었다.

“여보세요? 나, 오상구입니다.”

- 오 회장님. 지금 어디예요?

서장의 대꾸가 평소보다 거친 것에 눈이 꿈틀했지만, 오상구는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느닷없이 긴급체포가 왔지 뭡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 하도급 업체에서 사망사고 난 걸 덮으셨고, 횡령과 배임, 탈세의 혐의가 큽니다. 따님은 마약 투약, 거래 혐의로 이미 경찰서에 와 있습니다.

“뭐? 누가 어디에 있다고?”

- 회장님. 내가 통화하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앞으로 연락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좋은 결과를 바랍니다.

통화가 뚝 끊겼다.

“전화 다 하셨으면 가시죠?”

얼이 빠진 오상구가 고개를 돌린 앞에서 형사들이 픽 웃고 있었다.

**

오늘은 교수와 하는 마지막 수업이었다.

“그동안 많이 배웠습니다.”

“궁금한 게 있다면 언제고 연락 주세요. 수업료는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천중명이 웃으며 건넨 농담을,

“그룹을 맡지 않으셨다면 차라리 학업을 깊게 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을 겁니다.”

교수는 진지하게 받았다.

“이건 감사의 표시로 준비한 제 성의입니다.”

교수에게 명함지갑을 선물한 천중명은 그와 헤어져 집무실로 돌아왔다.

많이 배웠다.

궁금한 것들의 윤곽이 뚜렷해질 정도여서 그 무엇과도 바꾸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천중명이 집무실의 책상에 앉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휴대 전화기가 울면서 액정에 허세직의 이름이 올라왔다.

“천중명입니다.”

- 바쁠 테니 용건만 전함세. 서수미와 대교건설 오상구, 오지은은 오늘 모두 구속됐네.

“그렇군요.”

- 문제는 도주한 마약조직 폭력배인데 당장 어디 있는지 위치를 찾지 못해서 수배만 내려놨어. 혹시 서수미나 오지은 쪽에서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절대 모른 척 해주게. 안 그러면 애써 일을 본 내가 이상한 사람이 돼.

“알겠습니다.”

- 이제야 속이 절반쯤 풀리는구만. 또 연락함세.

허세직의 뒤끝이 얼마나 강하고 끈질긴 것인지를 알려주며 통화가 끝났다.

멍청이들!

정당하게 달려들었다면 모르겠다만, 자꾸 없는 말을 만들어내고, 마약조직원과 손을 잡아가면서 달려드는 상대를 곱게 놔둘 천중명은 아니었다.

“그럼 하나 남는데?”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은 천중명은 입술에 힘을 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되면 궁지에 몰린 마약조직원들이 극단적으로 허선영을 노릴 수도 있었다.

천중명은 다시 전화기를 들어서 황성규의 번호를 눌렀다.

- 네, 회장님. 황성규입니다.

“모습을 감춘 마약조직원들인데 이름을 알려드리면 찾을 수 있을까요? 시간이 급한데요.”

그룹 회장인 천중명이 느닷없이 마약조직원을 찾는 일이었다.

- 불러주십시오.

그런데도 황성규는 그 흔한 이유 따위 묻지 않은 채 바로 천중명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천중명이 이름을 알려준 다음이었다.

- 급하다고 하셨으니 찾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황성규는 듬직한 답을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

황성규가 마약조직원의 이름을 받아 적은 다음이었다.

“서창호. 마약조직원인데 숨어 있는 모양이다. 시간이 급한 일이니까 바로 찾아내.”

그가 팀원 서창호에게 지시를 내리기 무섭게 며칠 전부터 합류했던 윤만석의 대원 중 한 명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쪽이라면 저희에게 주십시오. 바로 잡아 오겠습니다.”

“아는 사람입니까?”

“그게 아니라 그놈들 속해 있는 조직을 우리가 압니다. 중간 간부 하나쯤 잡아다가 두들기면 바로 나옵니다.”

황성규는 대원들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숫자가 가득한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것이 지루하던 참에 반가운 일을 만난 눈빛이었다.

“이번 일은 조용하게 처리하라는 의미 같았습니다. 우선 찾은 뒤에 혹시 도움을 청할 일이 있다면 그때 부탁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황성규는 얼른 찾아내라는 의미로 서창호에게 고갯짓을 했다.

“일이 시작되면 당장 지켜야 할 인원이 부쩍 늘어납니다. 그때 우리가 상대해야 할 대상은 조직 폭력배가 아니라 살인 기술을 익힌 괴물들이 될 겁니다. 지루하더라도 조금만 참으세요.”

“누가 들으면 욕먹을 말이기는 한데 얼른 그런 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대원 중 한 명이 입맛을 다시며 내놓은 말에 황성규는 이해한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저런 놈들은 어떻게 찾습니까?”

“우선 통화목록을 거꾸로 타고 들어갑니다. 연관성이 있는 번호를 추리고 최근 목록을 뒤지다 보면 걸리는 곳이 나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습니까? 번호만 해도 한두 개가 아닐 텐데요?”

대원은 순수한 의미로 묻는 것처럼 보였다.

“윤 선배도 이런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까?”

“최근에는 총수님께서 그 정도의 일을 시키신 적이 없어서 필요할 때마다 주변에 도움을 받는 방식으로 일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저희 방식이 좀 더 효과적이었구요.”

“그렇군요.”

황성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가 끝났다.

대원은 의미를 알아먹기 어려운 모니터를 앞에 두고 스마트폰을 꺼내 포탈을 뒤졌고, 황성규는 아까 보던 자료를 계속 살폈다.

한 시간쯤 흐른 후였다.

“이놈들 함께 있나 본데요?”

건너편 책상에 앉아 있던 서창호가 고개를 들었다.

“논현동에 있는 오피스텔입니다.”

“그 오피스텔에 관련자가 있나 확인해봐.”

벌써? 이렇게 빨리 그런 게 나온다고?

감탄하는 대원 앞에서 황성규는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

천중명은 액정에 올라온 황성규의 이름을 확인하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회장님. 황성규입니다. 말씀하신 세 사람의 위치가 나왔습니다.

해가 기울어서 주황색 빛살이 거실 창으로 길게 넘어오는 시간이었다.

- 천상기 회장님의 논현동 오피스텔에 있습니다. 위치는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렇군요.”

- 필요하시면 이곳의 대원들에게 지시해서 다른 곳에서 만나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형인데 그렇게 하면 도리가 아니죠. 혹시 그 세 사람이 이동하면 바로 알려주세요.”

- 알겠습니다,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픽 웃었다.

어차피 무너질 천상기, 그때까지 목이라도 제대로 쓰라는 생각에 그냥 두었더니 사람 배려를 이렇게 무시해?

지이잉.

황성규가 보내준 문자를 확인한 천중명은 익숙한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네, 회장님.

“어디야? 천상기 오피스텔에 손보러 갈 놈들이 셋 있는데 오른팔이 아직 아쉬워서 함께 갔으면 싶은데?”

- 어디로 갑니까? 꼼짝 말고 계셔! 내가 바로 가, 회장님!

“너 어디냐고?”

- 아래층이지요.

“올라와. 바로 출발하게.”

- 예! 회장님!

곽대출의 기분 좋은 답이 씩씩하게 건너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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