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06화 (106/315)

# 106

106. 당신은 큰 실수한 거야 (2)

다음 날, 오전 9시 50분쯤이었다.

“천중명 회장님과 약속이 있는데?”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나, 박승양이오.”

지경그룹 본사에 들른 박승양은 1층의 데스크에 용무를 전했다.

“네, 박승양 회장님.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직접 움직여서는 그를 중앙 통로 옆의 특별한 공간으로 안내했다.

한눈에 봐도 회장 전용 엘리베이터였다.

그렇게 그는 부속실에 안내되었고, 거기에서 바로 제2 접견실로 들어갔다.

“회장님. 명함이 있으십니까?”

“여기.”

부속실 직원에게 명함을 건넨 박승양은 천천히 안을 둘러보았다.

제2접견실의 콘셉트는 오크 톤의 중후함이었다.

“차는 어떤 것으로 준비해 드릴까요?”

“혹시 몸에 좋은 것 있으면 부탁합시다.”

“그럼 오미자차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세월을 품은 나무로 고급스럽게 꾸며진 넓은 접견실에서 박승양은 남모르게 눈빛을 빛냈다.

그는 사채바닥에서는 적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회사든 방문한 뒤에 숨 두 번만 들이켜면 이 회사가 앞으로 어떨지 얼추 짐작하는 수준의 그가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젊은 회장이 꽤 하는데?

그가 느낀 첫인상은 그랬다.

직원들의 표정에 담긴 활력, 부속실 직원들의 태도에서 묻어나는 자부심이 그에겐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차를 내오는 모양새는 또 어떻고.

모시는 사람을 존경하지 못하는 부속실 직원들은 사소한 동작이나 움직임에서 반드시 그런 냄새를 풍긴다.

그런데 이곳 직원에게서 그는 최선을 다해 모시는 사람에게 흉이 되지 않겠다는 의지와 정성을 분명하게 보았다.

그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을 때였다.

문이 열리고 부속실 직원과 천중명이 들어섰다.

박승양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중명을 맞았다.

정장 차림 안에 투박한 느낌의 셔츠를 입은 그와는 달리 천중명은 세련된 정장 차림이었고, 젊음이 주는 반짝임에 또래에서 보기 힘든 날카로움을 담은 얼굴이었다.

“반갑습니다. 천중명입니다.”

“한 번 꼭 뵙고 싶었습니다. 박승양입니다.”

“앉으시죠.”

천중명이 자리를 가리키며 상석에 앉자, 박승양은 그의 왼쪽 첫 번째 1인석 소파에 앉았다.

“TV에 활약상이 나온 뒤로 많이 바쁘시지요?”

“갑자기 회장에 오르다 보니 배워야 할 것도 많고, 부족한 것투성이라 늘 바쁩니다. 당장은 본부장과 비서실장이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 이거 봐?

TV에 나온 걸 언급하면 우쭐할 줄 알았는데 벌써 능구렁이처럼 겸손한 모습을 풍기네?

박승양은 표정을 감추기 위해 이해한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박 회장께선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 같이 한가한 사람이야 그저 필드나 기웃거립니다. 얼른 뭐 좀 좋은 일이 있어야 할 텐데 말이지요. 그래? 우리 천 회장은 공 좀 치시나?”

“아직 기회가 없었습니다.”

천상기, 강승애와 손잡았던 사실을 빤히 알 텐데도 천중명은 부속실 직원이 차를 내줄 때까지 태연하게 박승양을 대하고 있었다.

“차 드시죠. 맛이 나쁘지 않습니다.”

“예, 회장님.”

일상적인 대화였다.

그런데도 박승양은 그 짧은 틈에도 계속 천중명을 살폈다.

실례가 아니냐고?

사채업자가 기업가를 살피는 게 염려된다면 서로 안 만나면 될 일이다. 게다가 막말로 말해서 돈 많은 사채업자가 기업가에게 꿀릴 일이 뭐가 있겠나.

박승양은 이쯤 본론을 꺼내야 할 것 같았다.

“어쩐 일로 보자셨습니까?”

“돈을 벌 기회가 있는데 창구가 필요합니다.”

그가 던진 질문에 답은 바로 나왔다.

호오? 이거 봐?

이런 때는 또 박력이 있어?

박승양은 어린 가젤을 발견한 승냥이처럼 눈빛을 번득였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박 회장님이 동원할 수 있는 자금 규모가 어떻게 되십니까? 기본 한 달, 길게는 두 달 정도 묶여 있을 것 같은데요?”

“흠. 그야 우리 회장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느냐에 따라 달라지지요.”

정확한 답을 원하는지 그를 빤히 바라본 채 천중명은 대꾸가 없었다.

만만치는 않은데?

박승양은 젊은 시절에 만나보았던 천호득을 떠올렸다.

지금의 천중명은 그때의 천호득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밀리지 않는 날카로움과 배포가 있었다.

“뭐, 순수하게 동원할 수 있는 건 대략 6천억 정도고, 필요해서 당기라고 하시면 1조가량 됩니다.”

박승양이 할 걸음 물러나 설명을 건넸는데도 천중명은 가볍게 웃기만 했다.

돈을 버는 일이 뭐가 있을까?

이 젊은 회장이?

돈 냄새를 맡은 박승양의 본능이 자꾸만 그의 호기심을 콕콕 찔러댔다.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무슨 일을 계획하십니까?”

“무리할 건은 아닙니다. 전에 얽힌 일에서 회장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있고, 주변에서 워낙 인정하는 분들이 많아서 한번 뵙고 싶기도 했구요. 오늘 뵌 것은 편안하게 생각해주시면 싶습니다.”

박승양은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새파랗게 어린 회장에게 수모를 당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쯤에서 슬쩍 일어날까?

그러나 박승양의 본능이 그를 꽉 붙들었다.

돈이야, 돈!

돈 냄새가 풀풀 나잖아!

이 젊은 회장은 과거 천호득보다 더한 사람인 것 같으니까 일단 좀 참고, 더 꼬드겨 보자고.

박승양은 얼른 표정을 감췄다.

“혹시 회장님께서 내게 기대하는 자금 규모가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맞출 수 있는지 없는지 시원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런가요?”

뭔 젊은 친구가 속이 이렇게 안 보여?

늘 사람을 주무르기만 하던 박승양이 오늘은 이상하게 쪼이는 느낌이 들어서 공연히 어깨를 들썩였다.

“필요한 금액은 대략 5조쯤 됩니다.”

“어후! 엄청나군요.”

“박 회장님. 지경그룹의 유보금이 얼마인지는 아실 거라 생각하고 말씀드립니다. 그걸 돌려도 수익은 나옵니다. 그렇지만 자칫하면 배임에 걸리죠. 그걸 피하고 싶습니다.”

“내게 앞마이를 서라?”

“수익이 꽤 될 테니까요.”

미적거리던 대화가 느닷없이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앞마이를 선다면 나는 얼마나 벌게 됩니까?”

“기대하는 수익이 한 달에 100퍼센트니까 반반씩 나누면 적당하지 않을까요?”

박승양은 순간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소름이 다 돋는다.

5조 원의 50퍼센트면 2조5천억 원을 한 달에?

“그럼 천 회장님. 두 달이면?”

“당연히 수익이 그만큼 불어야죠.”

박승양은 엉뚱하게 두 번째로 소름이 돋았다.

조무래기 사채업자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월 천만 원 굴리는 놈은 그거 따블 먹는 거 어렵지 않다.

그런데 1억 원을 굴리면 상황이 좀 다르고, 10억 원은 오히려 굴리는 놈이 뻑뻑해지고, 100억 원이 넘어가면 굴릴 곳이 마땅치 않다.

“담보는 있으십니까?”

“반반씩 걸어야겠죠?”

“예? 반반이라니? 무슨 말씀인지?”

“똑같이 수익을 나누는데 위험도 반반 안아야지요.”

“허허. 우리 회장님께서 잘 모르시나 본데 우리 같은 사람은 담보가 확실하지 않으면 아버지에게도 돈 안 빌려줍니다.”

“그렇다면 담보를 제공하는 만큼 내가 수익을 더 갖겠습니다.”

천중명의 말에 박승양은 도전적인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불편하면 안 하시면 됩니다. 그룹 유보금을 만지는 것이 배임이 되기 때문에 이러는 거지, 돈이 없어서 회장님을 뵌 것이 아니니까요.”

“혹시 내 배경을 이용하겠다는 겁니까?”

“뭐, 나쁠 것은 없습니다.”

천상기조차 주눅 들었던 박승양의 눈빛을 천중명은 태연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생각해 보시고 관심 있으시면 그때 말씀해 주면 됩니다.”

“무슨 일인지나 알고….”

“자금이 준비되면 그때 말씀하시지요. 실제로 확인하지는 않겠습니다. 적어도 그런 거짓말을 하실 분은 아니니까요.”

처음으로 천중명이 번득이는 눈으로 박승양을 바라보았다.

더는 내 앞에서 말장난하지 마.

나는 천상기와 달라.

박승양은 굳은 얼굴로 대꾸하지 못했다.

뭔 사람 눈빛이?

피는 못 속이는 건가.

천호득 이 영감쟁이, 후계자를 제대로 키웠어!

참 오랜만에 박승양은 사람의 눈빛에 눌려봤다.

천호득에게 눌려본 이후로 처음이었다.

**

강남스퀘어의 1층에 자리한 지경화장품 매장의 직원들은 아예 혼이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점심은 아예 생각도 못 한 채 고객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오후 3시 경에 김밥 한 줄을 급하게 교대로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일 정도로 매장은 붐볐다.

“세영아. 얼른 창고에 다녀와.”

“네, 지점장님. 그거 아시죠?”

“추가 주문한 제품이 조금 뒤에 도착할 거야. 부탁해.”

창고로 열심히 뛰어가는 아르바이트 직원을 보며 매니저 김민희는 눈물이 핑 돌았다.

매장 담당만 17년을 했다.

쥐꼬리만 한 본봉에 판매 금액에 따른 수당을 받았는데 솔직히 강남 스퀘어에 입점한 화장품 매장 평균치보다 더 가져가 본 적은 없었다.

지금은?

정직원이다.

심지어 그녀뿐만 아니라 고객에게 매달려 제품을 홍보하고,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애쓰는 세 명의 직원들 역시 정직원으로 고용돼서 안정적인 급여를 받는다.

“따가운 거 같은데?”

“네, 고객님. 처음엔 파스를 바른 것처럼 화한 느낌이 있는데, 보습 크림을 바르시면 진정되시고요, 30분만 지나면 효과를 확인하실 수 있어요.”

고맙다. 저렇게 끈기 있게 매달려주는 직원들이.

종일 저리 매달리면 가장 먼저 종아리가 터질 것처럼 아프고, 다음으로 무릎이 쑤신 뒤에 마지막으로 허리가 끊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이 몰려온다.

“언니!”

그때 직원 한 명이 그녀에게 사인을 보냈다.

까탈스러운 손님이란 뜻이었다.

“네, 고객님.”

김민희는 곧장 웃는 얼굴로 고객에게 다가갔다.

“소문이 워낙 자자해서 와봤는데 당신들, 내가 평소에 국산 화장품에 눈길이나 주는 사람인 줄 알아? 그런 내 얼굴에 다른 고객이 바르고 남은 걸 또 바르겠다는 게 말이 돼?”

“고객님께 실망 드려서 죄송합니다.”

김민희는 능숙한 표정으로 먼저 고개를 숙였다.

“서큘레이터 마사지가 있습니다. 비용이 15만 원인데, 제가 매니저 권한으로 50퍼센트 할인한 가격으로 해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서큘레이터에는 아직 손님 한 명이 앉아 있어서 김민희는 아예 속삭이는 톤으로 말을 건넸다.

“잘못을 인정한다면 무료로 해줘야지!”

“죄송합니다, 고객님. 이 기계는 오늘 작동 횟수가 자동 입력됩니다. 제게 있는 50퍼센트 할인 권한도 한 번밖에 없는데 그걸 고객님께 드리는 겁니다.”

“아까 잘못한 건 어떻게 할 거야?”

“서큘레이터가 불편하시면 샘플을 넉넉하게 준비해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여!”

여자의 고함이 쨍하고 화장품 매장에 울렸다.

“당신들, 정말 이럴 거야? 여기 책임자가 누구야!”

“제가 책임자입니다.”

“저 마사지 무료로 해주던가, 아니면 무릎 꿇고 사과해!”

이제 고객의 의도는 충분히 알았다.

여기에서 김민희가 버티면 이 여자는 강남스퀘어 고객관리실에 뛰어 들어가 난리를 칠 게 분명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언짢게 해드릴….”

“꿇으라고!”

손님들과 직원들이 힐끔거리는 앞에서 김민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신제품 미라클의 초반 이미지를 결정하는 데 이런 고객이 또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인터넷에 엉뚱한 불평을 올리고, 언론이 그걸 떠들어 대면 지경화장품이 불친절하고 배짱 부르는 기업이 되는 일은 한순간이다.

나중에 오해라고 밝혀져도 한번 박힌 선입견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뭐야? 해보겠다는 거야!”

그래. 이런 것도 제품이 입소문을 타니까 생기는 일이지.

꿇는다. 꿇으면 되는 거지, 뭐.

너란 인간에게 꿇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분들을 위해, 나를 정직원으로 만들어준 회장님을 위해, 사랑하는 내 가족을 위해….

오랜 경력에도 눈물이 핑 돌았지만, 김민희는 악착같이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 무릎 앞의 스커트를 잡았다.

그때였다.

꽉.

그녀의 팔을 누군가 잡았다.

“매니저님이시죠? 지경디자인의 허선영이에요. 저쪽으로 가서 저랑 이야기 좀 하세요.”

놀란 김민희가 고개를 돌린 곳에서 눈이 커다란 허선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 추가 주문한 제품을 가져온 오승현 이사도 있었다.

이름은 들어봤다, 허선영.

미라클의 브랜드와 포장, 그리고 제품 용기 디자인을 총괄한 분이고, 천중명 회장과 미래를 약속한 사이라는 걸 모르는 직원은 지경화장품에 없다.

“당신들! 뭐야!”

“본사에서 나왔습니다. 우리 직원의 대응이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그러나 직원이 무릎을 꿇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좋아. 이따위로 나왔다는 거지?”

여자가 악을 써댔으나 오승환 이사는 묵묵하게 같은 답을 반복했고, 고맙게도 그녀를 바라보는 주변 반응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흥!”

산통이 깨졌다는 것처럼 마흔 후반의 여자가 몸을 돌린 후에 오승환은 슬쩍 몸을 빼냈다.

그는 허선영, 김민희와 함께 계단 통로를 막아 놓은 직원 휴게실로 움직였다.

“디자인이 실제 매장에서 어떤 느낌인지를 알아보러 나왔던 길이에요. 처음부터 보고 있었는데 마지막엔 그냥 있을 수 없었어요.”

김민희는 얼이 빠진 느낌이었다.

그룹 회장과 미래를 약속한 지경디자인의 대표 허선영이 진상 고객에게서 화장품 매니저를 빼낸 뒤에 다독여주는 일이 어디 흔히 있는 일인가?

그것도 지경화장품의 영업이사 오승환을 옆에 두고?

“제품 반응은 어때요?”

“최고입니다.”

“디자인에서 아쉬운 점은 없나요?”

“미라클 출시 뒤에 외국 유명 브랜드 매니저들과 이야기를 나눈 게 있는데 오히려 우리 제품이 훨씬 세련돼 보인다는 말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쁘실 텐데 잡고 있어서 미안해요. 시간 내줘서 고마웠어요.”

“아닙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전한 김민희는 매장으로 향했다.

이런 회사를 위해 그깟 무릎, 또 못 꿇을 일이 뭐가 있겠나.

아까의 그 진상 고객이 또 오면 죽었던 할머니 살아 돌아온 것처럼 챙길 거다.

김민희는 지경화장품에 남아 있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백 번쯤 되뇌었다. 매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요청을 하루에 몇 번이나 받는 지경화장품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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