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05화 (105/315)

# 105

105. 당신은 큰 실수한 거야 (1)

일주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다.

그동안 천중명은 변함없이 그룹 전반의 업무 파악, 결재, 신문고, 오후에 있는 수업에 집중했다.

물론 특별한 일정도 하나 있었는데 가능한 한 점심을 황성규와 함께 먹었고, 그 시간이 어려울 때면 30분에서 한 시간쯤 따로 시간을 내서 만나는 일이었다.

“황채산이라는 헤지펀드 회장이 있습니다. 현재 홍콩에서 거주하며 지경그룹 계열사의 주식워런트 증권(ELW)을 풋으로 설정하고 거기에 더해 종합주가지수 선물을 지속적으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결국, 꼬리가 나온 건가요?”

“CIA와의 확실한 연계점은 못 찾았지만, 대신 천상기 회장과는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번득하는 천중명의 시선을 황성규는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자료를 보십시오.”

천중명은 황성규가 내민 서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쪽에서 송금한 금액이 운전기사의 계좌로 들어갔습니다. 뒤쪽에 보시면 천상기 회장과 황채산의 통화 기록이 있습니다. 사고 전날부터 사고 2시간 전까지 유독 통화가 많습니다.”

이 개새끼!

천중명은 이를 지그시 깨물며 서류를 다시 확인했다.

“천상기 회장은 단지 지경그룹의 회장 자리를 노리는 눈치인데 황채산은 그 이상일 수 있습니다.”

고개를 든 천중명을 향해 황성규가 바로 입을 열었다.

“거대 자본이 우리나라를 침입하는 창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지경그룹이 재계 서열 3위이다 보니 초기 목표로 삼았을 확률도 꽤 됩니다.”

“결국, 그 멍청이가 황채산에게 이용당하는 거군요.”

천중명의 말에 황성규는 대꾸하지 않았다.

천상기가 가족 관계이다 보니 말을 하기 조심스러운 눈치였다.

“황채산은 선물거래를 통해서 종합주가지수를 흔들고 그 틈에 지경그룹의 주식을 대대적으로 공매도하는 이른바 웩더독(Wag the dog) 방식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에 회장님이 썼던 공매도 방식을 좀 더 큰 규모로 준비하는 모양새입니다.”

“황채산이란 사람의 이력은요?”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국적만 미국이지, 실제로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쳤고, 대학만 미국에서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미국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는 말씀이네요.”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홍콩에 거주하면서 한국의 작전세력과 결탁해서 주가를 조작하는 것으로 수익을 대부분 내는 타입입니다.”

점심을 먹고 난 다음이었다.

와이셔츠 차림의 천중명과 편안한 재킷에 셔츠, 청바지를 입은 황성규는 높은 빌딩이 내려다보이는 집무실 소파에 있었다.

“검은 외국인 수준이라면 황채산이 CIA와 결탁했다고 보기 어렵잖습니까?”

“그가 운영하는 헤지펀드의 성격이 결정할 겁니다. 어쩌면 CIA에 약점을 잡혔을 수도 있구요.”

천중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우리대로 하나씩 준비해 나가죠. 박승양 회장이라고 있습니다. 사채업자.”

“예, 회장님.”

“급할 것 없습니다. 그 양반을 세세하게 알아봐 주세요. 금감원과 검찰, 국세청도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비호세력이 있다는 점 잊지 마시구요.”

“조심하겠습니다.”

황성규가 단단하게 답을 한 다음이었다.

“말씀하셨던 계획을 내일 들을까 하는데 어떠십니까?”

“회장님께서만 시간 내주시면 저는 아무 때고 괜찮습니다.”

천중명의 요구에 황성규가 반가운 얼굴로 대꾸했다.

“형이 총수님을 노렸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필요합니다. 쉽게 넘길 일이 아니니까요.”

“계속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야기는 끝났다.

황성규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마치고 나간 뒤에도, 부속실 직원이 들어와 조용하게 잔을 치울 때도, 천중명은 소파에 있었다.

천상기, 이 개새끼.

차라리 CIA의 공작이었으면 싶었다.

해외에서 송금이 있었다는 말이 그래서 반갑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결국 네놈이 천호득을 죽여 달라고 사주했다는 거지?

천중명을 몰아낸 뒤에 혹시 있을지 모를 천호득의 입김을 막기 위해서?

“후.”

천중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걸었다.

그리고는 휴대전화기를 들어 최만호의 번호를 눌렀다.

“실장님. 지난번에 말씀했던 박승양 회장을 만나고 싶습니다. 가능할까요?”

- 연락처는 받았습니다. 말씀하시면 언제고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좋군요. 그럼 그쪽에 연락해서 시간을 정해주세요. 문자로 알려주면 됩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휴대전화기를 내려놓고 책상에 기대서서 창밖을 보았다.

생각을 정리하거나 무언가를 떨쳐낼 때 널따랗게 펼쳐진 도시의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좋았다.

아직 팔짱을 끼기에는 오른팔의 통증이 심해서 천중명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몸이 바뀌는 바람에 천호득이 첫째와 둘째를 모두 잃는 게 싫어서 버텼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려고 이렇게 애썼다.

누구라도 죽음에서 되돌아올 수는 없는 일이고, 천호득이 사람을 잃는 것을 못 견디기 때문에 더 그랬다.

“너는 넘지 말았어야 할 마지막 선을 넘었어.”

빌딩 숲을 바라보는 천중명의 눈이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

허세직은 오늘도 무척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오전을 분주하게 보낸 그는, 점심시간을 맞아 그의 가장 강한 경쟁자로 부상한 정안규와 함께 여의도의 일식집 안쪽으로 들어갔다.

“선배 의원님께서 먼저 불러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금감원 송우근 부원장보에게 허세직을 밀어내자던 정안규가 지금은 뻔뻔스럽게도 황송한 표정을 그려내고 있었다.

괜찮다. 이런 모습쯤.

원래 정치바닥이라는 곳이 기본적으로 낯짝 두께가 일반인의 세 배쯤 되어야 하고, 염치나 예의, 양심 따위 개나 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던가.

당연하게 허세직은 그런 뻔뻔한 표정 따위에 감정이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어서 들어. 자, 술 한 잔 받고.”

“그럼 선배 의원께서 주시는 술이니 한 잔만 하겠습니다.”

잔을 내밀어 술을 받았던 정안규가 얼른 주전자를 들어서 허세직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드세.”

“예, 의원님.”

둘이서 입만 슬쩍 댄 다음이었다.

“도미가 좋아. 얼른 들어봐.”

허세직이 권하며 젓가락을 놀렸고, 정안규가 회를 한 점 먹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확실히 정 의원은 빨라. 그러니 그 나이에 선두주자로 국민의 눈에 띄었겠지.”

정안규를 치켜세운 허세직이 잠시 회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정계를 은퇴할 생각이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드님 때문에 곤란한 순간이긴 하지만, 그렇게 쉽게 결정하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허허허. 우리 정 의원이 나를 이렇게 생각해 주는 것을 보니 자리를 마련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속으로는 좋아 죽겠을 정안규와 조금 전에 삼켰던 회가 뱃속에서 요동치는 느낌의 허세직이 태연한 태도로 마주앉아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지경그룹으로 들어갈 걸세. 그쪽에서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부서를 새로 만드는 모양이야. 그걸 맡기로 했지. 그래서 1심 판결과 동시에 사퇴할 생각일세.”

이 구렁이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러지?

정안규의 눈빛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대신 검찰통인 자네에게 부탁이 있어.”

“말씀하십시오.”

“대교건설에서 최근에 사망사고가 잦아. 그걸 모두 하청업체의 잘못으로 밀고 가서 적절한 보상도 제대로 하지 않은 모양일세. 우선 그걸 바로잡아주게.”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정안규는 허세직의 다음 말에 집중했다.

“내 아들의 기사를 올린 기자년이 지금 발령대기라고 하네. 그년의 집구석을 뒤지고, 그년이 마약 거래 조직의 폭력배와 교류가 있으니 그쪽으로 묶어서 처벌해 주게.”

“복수하시겠다는 겁니까?”

정안규의 질문에 허세직은 감출 것 없다는 투였다.

“부탁을 했으니 응당 선물이 있어야겠지. 그 일을 시원하게 끝내준다면 내가 물러나면서 내 선거 조직을 자네에게 넘기겠네. 앞으로 지역구 관리만 좀 하면 다음번 선거는 무소속으로 나서도 될 거야.”

뭐를 넘겨준다고?

내내 태연했던 정안규의 고개가 불쑥 나왔다.

“선거 조직을 넘기겠다는 말의 의미를 자네도 잘 알 걸세. 깨끗하게 손 터는 거지. 내가 돌아온다고 해도 3년간 지역구를 관리한 자네를 이길 방법이 있겠나?”

이건 허세직의 말이 백번 맞다.

허세직 만큼 탄탄하게 지역구를 관리한 의원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는 그 방면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그걸 넘겨받으면, 정안규는 이후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을 걱정할 이유가 반쯤 사라진다.

더불어 당내의 입지 또한 확 살아날 테고.

솔직히 정안규가 아니어도 허세직이 내놓은 조건을 움켜쥐겠다고 나설 사람은 많다.

“제가 의원님의 억울함을 제대로 풀어드리겠습니다.”

정안규는 마침내 허세직이 흔드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렇다면 제대로 한잔해야지 않겠나?”

허세직이 반쯤 남은 술잔을 내밀었고, 정안규가 두 손으로 잔을 내밀었다.

“정말 안 돌아오실 생각입니까?”

“허허허. 사위가 정치하는 것을 싫어하니 어떻게 하겠나. 게다가 자네처럼 빛나는 젊은 친구들을 보고 나니 더는 자신도 없고.”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왕 하는 거, 내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능력을 한번 보여주게.”

“맡겨주십시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은 잔을 시원하게 털어 넣었다.

**

천상기는 전화를 끊은 뒤에 곧바로 분통을 터트렸다.

“이 의리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새끼들! 나이 든 놈은 먼저 가서 고개를 조아리고, 깡패란 새끼들은 숨어서 벌벌 떨고. 뭐 이런 밥벌레 같은 놈들이 다 있어!”

말을 거칠게 뱉었지만, 솔직히 천상기도 천중명이 무섭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강승애가 어떤 꼴이 됐는지와 아직도 밤마다 쑤시고 저리는 무릎을 보면 답이 나온다.

‘그런데 이 새끼가 왜 잠잠하지?’

하다못해 ‘이번엔 목을 부러트린다고 했었지?’ 따위의 협박과 함께 나타나 목이라도 적당히 비틀어주면 얼마나 마음 편하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는 박무일의 고백 뒤에도 천중명은 잠잠했다.

사채업자 박승양의 말대로 그의 밑으로 들어가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것이 유일한 살길일지도 모른다.

“하, 이 씨!”

천상기는 욕을 뱉어냈다.

다 알면서 그러지 못하는 이유?

천중명을 떠올리기만 하면 속에서 불이 올라오고 눈이 뒤집히는 걸 또 어쩌겠나.

심정 같으면 회장 자리 되찾은 다음에 팔다리 못 쓰게 만들어서 시장판에 던져두고 싶은데 현실은 오피스텔 안쪽에서 씩씩거리는 모습이었다.

“후우-.”

서너 번 숨을 씩씩댄 천상기는 평정심을 찾기 위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됐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았다.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면 천중명은 어떻게 죽는 줄도 모른 채 배배 말라서 죽게 될 거다.

천상기의 마지막 한 수는 그렇게 무섭다.

“얼른 시간 좀 가라!”

이제 대략 2주쯤 남았다.

그 뒤에는 천상기에게도 돌이킬 방법도 없다.

이번 일이 성공하면 지경그룹의 계열사 절반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겠다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비용이었다.

“두고 보자, 개망나니야!”

눈에 파랗게 불을 켠 상태에서 천상기는 천중명을 떠올리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

퇴근이 한 시간쯤 남았다.

천중명은 오늘 결재한 내용들을 살폈고, 산청재단의 진행과정을 챙겼으며, 마지막으로 곽대출이 올린 보고서를 펼쳤다.

열심히는 산다, 곽대출.

오늘 그는 안신우 부장과 함께 지경전자의 영통대리점에 내려가 부당한 일을 바로잡는 일정이 있었다.

직영체계인 지경전자 대리점을 순회하는 부사장의 갑질이 문제였다.

직원들에게 쓸데없이 실적을 암기하도록 강요하고, 그걸 외우지 못한 직원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으며, 심지어 여직원들이 몰려나와 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점장의 정강이를 구둣발로 걷어찬 위인이었다.

반대로 그가 부사장에 오른 뒤로 실적은 6퍼센트 상향되었다.

“쓰레기!”

천중명은 부사장의 인적사항을 살피고는 대뜸 욕을 뱉었다.

6퍼센트의 실적 따위 없어도 산다.

그게 뭐 중요한 거라고 나이 든 지점장의 정강이를 구둣발로 차고 직원들에게 욕을 퍼붓는다는 건지.

분명 부사장의 뒤에 그룹 내부의 임원이 버티고 있을 테고, 아니라면 전자의 사장이 그를 지켜주고 있을 게 분명했다.

천중명이 달려가 사장과 부사장을 세워놓고 정강이를 걷어차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막말로 강요당해서 사진을 찍은 여직원들은 또 무슨 죄가 있는 건지 천중명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잘하고 있다, 곽대출.

내가 돌아볼 수 없는 구석을 악착같이 파고들어서 시원하게 정리해라.

부사장 위에 사장, 사장 위에 그룹 임원, 그리고 그 임원들을 주르륵 타고 올라오면 천중명이 있는 지경그룹에서 계열사 부사장이 뭐 그리 잘난 자리라고 그러는 건지 이왕 하는 거, 제대로 부러트리고 와라.

서류철을 덮은 천중명은 모니터에 올라온 간단한 보고를 살폈다.

지경화장품은 신제품 미라클의 발매 일주일 만에 폭발적인 입소문을 타고 엄청난 매출을 기록 중이었으며, 용인의 아파트는 프리미엄이 치솟고 있었다.

하나씩 간다.

천중명이 메일을 펼칠 때였다.

지이잉.

휴대전화기가 짧게 울면서 문자가 올라왔다.

[박승양 회장이 내일 중으로 방문하겠답니다. 시간은 회장님께서 정해주시는 대로 따른다는 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전이 좋겠습니다. 10시쯤으로 잡아주세요.]

천중명이 답을 넣고 메일 한 통을 읽고 난 다음이었다.

[내일 오전 10시에 약속을 정했습니다.]

최만호의 답신이 바로 들어왔다.

“황채산? 당신은 큰 실수한 거야. 적어도 내가 끔찍하게 생각하는 아버지를 노리지는 말았어야지.”

천중명은 차갑게 웃은 뒤에 다시 서류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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