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104. 꼴통 재벌, 안 할 수가 없네! (3)
오후 5시쯤 허선영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아직 특별하게 명함을 돌린 곳이 없어서 전화 올 곳이라고 해 봐야 몇 곳 없다.
게다가 처음 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 회사냐?
이 투박한 음성과 거친 말투로 전화할 사람이 천호득 외에 누가 있겠나.
“예, 지금 회사에 있습니다.”
허선영은 자세까지 세우며 얼른 답을 건넸다.
- 안 바쁘면 잠깐 회사 앞으로 나와. 저녁 먹을 수 있어?
질문과 지시의 순서가 바뀌었으나 허선영은 그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개인적으로 천중명의 부친이고, 회사에서 보면 지경그룹의 명예회장이자 유일하게 총수라 불리는 사람이 천호득이었다.
“바로 나가겠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허선영은 디자인 시안들을 챙겼다.
마음이 급했다.
핸드백에 전화기를 구겨 넣은 허선영이 방을 나서자 디자인실 직원들이 시선을 주었다.
“급한 일로 나갔다 올게요. 저녁 먹고 올 거 같아요.”
“다녀오세요.”
계단을 내려선 허선영이 주차장을 가로질러 회사의 정문을 나선 직후였다.
“사모님!”
힘이 빠진 우렁대는 목소리가 허선영을 불렀다.
장만섭이 옆에 있어서 그런지 어쩐지 작아 보이는 승용차를 향해 허선영이 움직이자 그가 운전석 뒷문을 열어주었다.
“안녕하세요?”
“뭐해? 얼른 타지 않고.”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허선영이 조심스럽게 앉자 장만섭이 문을 닫아주고는 몹시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조수석에 올랐다.
“그게 뭐야?”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시안을 몇 개 준비해 봤습니다.”
“벌써?”
“시안이어서 거칠게 나왔습니다.”
말을 마친 허선영은 도로에 들어선 승용차의 뒷좌석에서 가져온 시안들을 천호득의 무릎에 펼쳐주었다.
“눈빛이 어쩌고 하더니 눈을 그리는 게 아닌 모양이다?”
“여기 양옆으로 흐른 선이 총수님께서 중명 씨를 품어주시는 마음이고 위에서 내려오는 선이 지켜보시는 시선이라고 정해봤습니다.”
“오호. 그럼 가운데 이 지경 마크가 회장이냐?”
“예, 총수님.”
설명을 듣고서는 마음에 들었는지 천호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다른 디자인을 살펴 본 그는 자세를 바로 세우고 앞을 향해 앉았다.
잡혀가는 것도 아닌데 허선영은 어딜 가는지도 모른 채 처음 보는 남자가 운전하고, 장만섭이 조수석에 앉은 차의 뒷좌석에 있는 꼴이었다.
“일은 할 만하냐?”
“예, 총수님.”
“상을 받았었다고?”
“미국에서 공부할 때 공모전에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은명에게 전해 들었는지 천호득은 허선영이 말한 적 없는 일들을 하나씩 꺼내 들었다.
“취임식 전에 백화점 지하에 가서 먹은 떡국이 맛있었다. 갑자기 그게 먹고 싶어졌다.”
“네.”
이왕이면 함께 먹고 싶었다거나, 그걸 먹으러 가려는데 네 생각이 났다, 말을 해주면 오죽 좋겠냐마는, 천호득은 또 대뜸 꼬리를 자른 채 말을 마쳤다.
게다가 그는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말을 걸지 말라는 뜻 같아서 허선영이 반듯하게 앉았고, 차는 계속해서 서울을 향해 달렸다.
40분쯤 걸려서 백화점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사장과 퍼스널 쇼퍼의 안내를 받아 VIP실로 곧장 이동한 천호득이 재촉하듯 시선을 돌렸다.
“준비해두었습니다, 총수님.”
쇼퍼가 한쪽의 커튼을 젖히자 옷, 핸드백, 구두, 시계가 가지런히 있었다.
“뭐해? 얼른 입어보지 않고.”
“네?”
“배고파!”
이걸 어떻게 라는 말도 꺼내지 못할 정도로 천호득의 눈매는 매서웠다.
그의 앞에서 숨조차 제대로 못 쉬는 백화점 사장과 퍼스널 쇼퍼의 간절한 눈빛 속에서 허선영은 마법에 걸린 신데렐라처럼 주는 옷들을 입었고, 들어보라는 백을 팔에 걸쳤으며, 구두를 신었다.
“총수님. 어떤 걸 입으셔도 잘 어울리십니다.”
“그럼! 안 어울릴 줄 알았어?”
“아, 네.”
듣기 좋은 말을 멋지게 걷어찬 천호득이 백화점 사장을 노려보았다.
“예?”
“저거 삼성동 빌라로 모두 보내.”
“예, 총수님.”
얼이 빠진 상태에서도 허선영은 이걸 모두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 총수님.”
홱!
입을 겨우 열었는데 단박에 독한 시선만 날아왔다.
“제게 너무 과분합니다. 이렇게 받아도….”
“배고파. 얼른 가.”
장만섭은 천호득의 저런 모습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까?
그가 태연한 표정으로 휠체어를 움직이는 바람에 허선영은 옷을 갈아입지도 못한 채 천호득의 뒤를 따랐다.
“떡국 좋아해?”
“네.”
허선영은 조심스럽게 답했다.
명품이니 하는 좋은 구두와 핸드백, 당연히 가져봤다.
그러나 허세직이 무언가를 노린 채 던져주던 것과 달리 오늘 옷과 구두에는 천호득의 저 투박한 마음이 분명하게 담겨 있었다.
전용 엘리베이터에 탄 허선영이 천호득, 장만섭과 지하에 도착하자 퍼스널 쇼퍼가 또 VIP용 공간으로 세 사람을 안내했다.
지하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을 허선영은 처음 알았다.
이럴 거면 그냥 아까 그곳에서 먹지?
아! 음식 냄새가 배면 곤란하지.
허선영은 바보처럼 생각이 자꾸만 엉키고 있었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수저가 준비되고, 떡국이 바로 들어왔다.
“그냥 좀 먹어! 그냥!”
“그럴 수는 없습니다, 총수님.”
“야, 이눔아! 이 먹깨비 같은 놈아! 나도 새것을 먹겠다고!”
욕이 맛있는 반찬이라도 된다는 양, 장만섭은 한 숟갈 국물을 쓱 먹고는 “맛있게 드십시오.”라는 말을 꺼내놓았다.
“에이, 꼴 보기 싫은 놈! 너는 뭐해? 어서 먹지 않고?”
“네, 잘 먹겠습니다.”
허선영은 완전히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얼결에 국물을 떠서 입에 넣은 허선영을 천호득이 또 매섭게 노려보았다.
“맛있습니다.”
“그래? 흐헤헤헤. 여기가 괜찮지?”
“예, 총수님.”
“뭐해? 얼른 먹지 않고?”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가운데 새로 산 옷에 새로 산 구두를 신은 허선영이 다시 숟가락을 떡국에 담을 때였다.
똑똑똑.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천중명이 들어섰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어? 회장이 여기 어쩐 일이야?”
떡국에서 고개를 든 천호득의 눈이 웃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허선영은 내내 툴툴대던 천호득이 천중명을 보자마자 웃는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 가슴이 울컥하며 목이 멨다.
“살 게 있어서 들렀다가 아버지가 계시단 말씀을 들었습니다.”
인사를 위해 허선영과 장만섭이 일어서 있었다.
눈인사를 전해 두 사람을 앉게 한 천중명이 허선영의 옆에 앉았다.
“저녁은?”
“떡국을 주문했습니다.”
“그래?”
천호득이 기분 좋게 반문했을 때였다.
“맛있겠는데요? 조금만 덜어가도 됩니까?”
뻔뻔한 질문을 던진 천중명이 허선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총수님 드셔야 하잖아요. 이걸 먼저 드세요.”
“아버지 떡국이 더 맛있어 보이는데?”
“그래? 그렇지? 흐헤헤헤헤. 이리 줘 봐.”
테이블 중간의 빈 공기를 앞에 놓게 한 천호득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떡살과 국물을 덜었다.
“먹어 봐. 얼른.”
“아버지도 얼른 드세요.”
천중명이 왼손으로 떡국을 한 숟가락 떴을 때였다.
“여기. 여기.”
믿기기나 한가.
천호득이 떨리는 손으로 깍두기를 집어서 천중명의 떡국에 올려주고 있었다.
“음! 정말 맛있네요!”
천중명이 감탄을 쏟아낼 때 떡국 두 그릇이 들어왔다.
설명하지 않아도 하나는 장만섭의 몫이었다.
“아버지와 나눠 먹을 거니까 제가 한 번만 먼저 먹을게요.”
천중명이 새로 들어온 떡국의 국물을 먼저 먹었는데 천호득은 또 그걸 세상 행복한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네 사람이 그렇게 앉아서 떡국을 먹었다.
“선영 씨, 그 옷은 뭐야?”
“이 옷하고 구두, 백, 시계, 모두 총수님께서 사주셨어요. 위에 여섯 벌쯤 더 있는데 모두 집으로 보내라 하셨어요.”
씨익 웃은 천중명이 천호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마음에 들어?”
“그럼요. 아버지가 사주신 옷을 입으니까 천사처럼 보여요.”
“흐헤헤헤헤! 내가 보는 눈이 좀 있지. 얼른 들어.”
이렇게 유쾌하게 하는 식사가 있을까?
아버지는 손을 떨고, 아들은 어색하게 왼손을 사용하며, 장만섭은 두 그릇밖에 못 먹을 정도로 컨디션이 안 좋은 데 이상하게 식사 내내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아버지. 미국 자본이 우리나라를 노린다는 정보에 관해 알고 계셨다면서요?”
“응?”
“그걸 알고 계셨으면서도 저를 믿어주셨다는 거, 오늘 유 본부장을 통해 처음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그 사람은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
투박하게 대꾸한 천호득이 천중명의 그릇이 비었나를 확인했다.
“떡국은 됐고, 여기 오미자차와 약과가 맛있는데 제가 살게요. 괜찮으세요?”
천호득이 고개를 끄덕였고, 천중명이 얼른 테이블에 놓인 벨을 눌렀다.
따뜻한 커피와 오미자차, 한과, 그리고 과일주스를 놓고 그렇게 한 시간쯤 웃었다.
천호득이 이렇게 유쾌하게 시간을 보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허선영은.
어쩐지 천호득 혼자 집에 가라는 것이 너무 못할 짓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천중명이 부축하며 백화점 주차장으로 움직이는 뒤로 사장과 임원들, 퍼스널 쇼퍼, 매니저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아버지, 오늘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며칠 내로 찾아뵐게요.”
“바쁜 사람이 뭘 자꾸 와? 오늘 봤으니까 됐어!”
전혀 마음에 없는 소리를 내던진 천호득이 장만섭과 함께 먼저 출발했고, 허선영은 천중명과 함께 백화점을 나섰다.
팔이 그래서인지 운전하는 직원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회사에 찾아오셨어요. 거기에서 바로 이리로 왔는데 짐작도 못 했었어요.”
천중명은 픽 웃었다.
“차 마실 수 있어?”
“오늘은 다시 가봐야 일하기 그래요. 집에 가요. 중명 씨, 팔도 불편하잖아요.”
“커피 한잔 마시고.”
천중명의 지시를 받은 승용차가 이번엔 미사리를 지나 양평으로 달렸다.
지루하지 않았다.
오늘 천호득과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고 디자인 시안을 보여주는 동안 양평 초입의 갤러리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초여름의 눅눅함이 저녁의 서늘함에 밀려난 시간이었다.
천중명과 허선영이 마당의 테이블에 앉자 직원들이 초와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정말 잘 꾸몄네요.”
허선영을 바라보던 천중명이 품에서 작은 상자를 열었다.
오늘 허선영은 여러 번 놀랐다.
“팔이 이래서 멋진 프러포즈를 하기 어려워.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가 할까 했는데 그건 또 기다리기 싫더라고.”
천중명은 왼손으로 상자를 잡고는 엄지로 뚜껑을 열었다.
촛불이 곧장 플래티넘 안으로 뛰어들어서 빛났다.
“선영 씨만 볼게. 그리고 아버지처럼 나이 들어서도 선영 씨와 손잡고 걸을게.”
허선영은 이미 흘러내리는 눈물을 기다랗게 편 손을 세워서 닦아내고 있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자리에서 일어난 허선영이 천중명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이런 용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당당하게 입을 맞췄다.
직원들이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가운데 약속처럼 진한 입맞춤이 지나갔다.
“반지 마음에 들어?”
다시 자리로 돌아간 허선영은 그제야 반지를 상자에서 꺼내 손에 끼웠다.
“어떻게 알았어요? 손에 꼭 맞아요!”
“퍼스널 쇼퍼가 단박에 짐작하던데? 아버지가 오늘 선영 씨를 안 데려왔으면 엉뚱한 사이즈를 샀을지도 몰라.”
반지를 낀 허선영이 왼손을 쫙 펴서 바라본 뒤에 천중명의 앞으로 내밀었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다.”
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은 허선영의 커다란 눈이 선한 느낌으로 웃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잠시 미래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평창동에서 살아도 될까요? 허락하실까요?”
천호득의 시선이 가슴에 남은 허선영의 질문도 있었다.
차를 마시다가 문득 천중명은 곽대출을 떠올렸다.
신문고 메일과 암행어사 일에 치여서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놈이라 주인영에게도 막무가내 식으로 달려들게 뻔했다.
그놈도 이런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준비해주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달빛을 쪼개 넣은 것처럼 별이 빛나는 양평의 갤러리에서 천중명은 허선영과 꽤 오랫동안 시간을 보냈다.
지금까지의 힘겨움이 눈 녹듯 녹아내렸고, 새로운 활력이 서서히 들어차는 느낌이었다.
세상에 없는 재벌을 향해 가는 길에 잠시 들른 오아시스 같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