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03화 (103/315)

# 103

103. 꼴통 재벌, 안 할 수가 없네! (2)

점심 뒤에 급한 결재를 모두 마친 천중명은 붉은색으로 표시된 이메일을 점검했다.

답답하고 아쉬운 일은 물밀 듯 밀려드는데 곽대출과 안신우, 주인영과 대리 두 명으로는 한계가 있는지 당장은 분류하기에 정신이 없는 눈치였다.

고작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다.

첫술에 배부르기를 바라는 건 너무 과한 욕심 같아서 천중명은 우선 내용을 확인하는 선에서 더는 독촉하지 않았다.

오후에 허세직을 만나고, 다시 초빙한 교수에게서 수업을 받는 일이 남은 상황에서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찾는 번호는 유진교였다.

- 예, 회장님.

“어디세요? 잠깐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요.”

-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이 왼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여 메일 한 개를 더 읽었을 때 유진교가 들어왔다.

“앉으세요.”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유진교의 질문이 있어서 천중명은 바로 내용을 꺼냈다.

“혹시 중장비 업체 매각에 관해 알고 계세요?”

“대형기계산업 말씀이십니까?”

“예.”

천중명의 답을 듣기 무섭게 유진교는 곤란한 표정을 그려냈다.

“회장님. 대형기계산업은 부채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5천억의 회사채를 발행한 것이 문제가 돼서 당장 상환해야 하는 금액만 8천억이 넘었습니다.”

“사채가 아닌데도 그럴 수가 있나요?”

“연체 시 이자율을 24퍼센트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일 줄은 몰라서 천중명은 당장 말을 꺼내지 못했다.

“기술이 뛰어나고 특허도 있습니다만, 엉뚱한 개발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회복 불가능 상태입니다. 지금은 중국 투자에 발이 묶여서 가지고 있던 계열사를 차례로 팔아서 버티는 형편입니다.”

“렌탈 회사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알짜배기를 팔아서 겨우 한 달, 한 달을 버티는 수준입니다. 만약 회장님께서 그 회사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차라리 그쪽 인원을 스카우트해서 새로 차리는 것이 훨씬 현명한 판단입니다.”

더는 말을 붙일 수도 없을 정도로 유진교의 뜻은 단호했다.

하긴 대형기계산업도 회장이 독단적으로 중국에 투자하겠답시고 회사채를 끌어들여서 망한 꼴이니 이 부분에서 천중명이 고집을 피우기는 어려웠다.

“그 기술이 아까워서 그런 거니까 혹시 있을지 모를 가능성을 파악해 주세요.”

“그 점은 분명하게 확인하겠습니다. 그런데, 회장님. 갑자기 대형기계산업에 관심을 가지신 이유가 있습니까?”

유진교의 질문을 들은 천중명은 잠시 고민했다.

아직은 제2의 IMF를 떠들 때가 아니라는 생각과 반대로 이 사람에게 숨기는 것이 있어서 어떻게 제대로 된 의견을 얻을 수 있겠나 하는 의문 사이에서 생긴 고민이었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결심을 굳힌 천중명은 황성규가 했었던 말을 차분하게 풀어냈다. 어차피 그에게서 계획을 들을 때 함께하려던 사람이 바로 유진교였기 때문이었다.

별거 아닌 설명이라고 생각했는데도 얼추 15분을 잡아먹고서야 이야기가 끝났다.

“흠.”

이 사람, 알고 있었구나.

그의 기다란 한숨을 들으며 천중명이 짐작한 일이었다.

“짐작하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비슷한 정보가 그룹 수뇌부에 돌고 있습니다. 현재 많은 그룹이 천문학적인 유보금을 쥐고서, 해외로 반출하려는 이유도 그 정보에 기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진 사람들은 무섭군요.”

천중명이 농담처럼 건넨 탄식을,

“저는 회장님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습니다.”

유진교가 비슷한 톤으로 받았다.

“그렇다면 정규직 전환이 제 목줄을 쥐는 일인데 왜 지켜보고 계셨습니까?”

“반대로 외국 자본의 공격이 있다고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굳이 가리키신 방향을 반대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참고로 총수님께서도 이 정보를 알고 계시면서 회장님의 뜻을 받아들이신 겁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대견한 눈길로 봐주었단 말인가?

날카로운 느낌의 유진교가 건넨 말에 천중명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감정을 얼른 접어놓은 천중명은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본부장님도 외국 자본의 공격이 있으면 감원을 고민하신다는 뜻입니까?”

“최선을 다해 회장님께 조언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확실히 유진교는 여느 임원과는 달리 직선적인 면이 있었다.

“우선 대형기계산업은 한 걸음 떨어져서 판단하시는 게 좋습니다. 기술을 탐낸 중국이 마구잡이로 던지는 현금에 맞서다가는 엉뚱한 미국 투자은행의 배만 불려주는 모양새가 됩니다.”

“그렇게 하죠.”

천중명이 지닌 한계가 어느 선인지를 지금의 대화로 분명하게 알게 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대 자본이 놓은 덫에 걸린 대형기계산업을 놓고 중국과 싸워서 얻을 것이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작정하고 달려들면 인수야 하겠다.

그러나 쓸데없이 높아진 인수 비용을 언제 회수할 것이며, 또 숨겨진 부채들과 산적해 있는 문제들을 언제 바로 잡을까 싶기도 했다.

멍청이들.

중장비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될 기회를 버린 채 뭐 알지도 못하는 중국 부동산에 뛰어들어서는 탄탄한 계열사까지 날리는 건지.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이 얼마나 많은 임직원을 불행에 빠트린 건지 과연 대형기계산업의 오너는 알기나 할까 싶었다.

천중명은 우선 대형기계산업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본부장님 덕분에 궁금한 것을 풀었습니다. 다음번에 황 선생의 계획을 함께 들었으면 하는데 어떠신가요?”

“불러주시면 기쁘게 참석하겠습니다. 그런 공부야 오히려 제가 원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럼 그때 함께 듣지요.”

천중명의 말이 끝나자 유진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상 참 만만치 않다.

곳곳에 숨겨진 위험을 헤치고 나가서 성과를 얻어야 하고, 누군가의 목줄을 쥐어서라도 목적한 바를 얻으려는 인간들이 바글바글한 정글 같았다.

유진교가 나가고 난 뒤였다.

“회장님. 허세직 의원이 접견실에서 기다립니다.”

부속실 직원이 허세직이 왔음을 알려주었다.

**

지경화장품은 드디어 첫 제품을 생산했다.

개별 포장된 상품의 이름은 ‘미라클’이었다.

손도운이 구석을 향해 몸을 돌리고는 굵은 눈물을 양 손바닥으로 닦아낼 때, 영업이사 오승현은 상기된 얼굴로 개별 포장된 제품을 품에 안았다.

“알지? 매장에서 얼마나 입소문을 타느냐가 이 제품의 성공을 좌우해. 다들 부탁합니다.”

빌빌거리며 현상 유지에 바빴던 지경화장품이 얼마 만에 만든 신제품인지 모른다. 그것도 모두가 성과를 기대하는 환상적인 제품을 말이다.

영업부 직원들과 베테랑 여직원, 그리고 매장에서 판촉을 담당하는 여직원들의 얼굴에도 흥분한 기색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얼른 내일이 왔으면 좋겠어요. 최근에 이 정도로 흥분한 적이 있나 싶어요.”

베테랑 여직원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음성으로 판촉 담당 여직원들을 돌아보았다.

“우리 회장님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뛰어요.”

베테랑 여직원이 주먹을 쥐어 보이자, 지켜보던 판촉 담당 여직원들과 생산 담당 직원들이 함께 주먹을 불끈 쥐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중성은 사무실로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내일부터 판매가 시작된다.

입소문을 타면 TV 광고를 시작할 참이어서 그 역시 기대가 컸고, 반대로 그만큼 부담도 컸다.

그는 먼저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회장님. 지경화장품 이중성입니다. 손도운 씨가 개발한 제품이 내일부터 미라클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를 시작합니다. 좋은 성과를 회장님께 올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문자를 입력한 이중성은 굳은 얼굴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천중명 덕분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대표이사가 되었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신제품까지 손에 넣었다.

이중성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는 내려가서 아직도 울고 있을 손도운을 달래줘야 할 시간이었다.

**

허세직은 여전히 정치인 특유의 머리스타일과 번들거리는 얼굴, 그리고 짙은 양복에 붉은색 타이를 매고 나타났다.

“팔은 좀 어떤가?”

“이삼일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크게 상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많았네.”

자리에 앉은 뒤에 차가 나오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어제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결국, 천중명이 용건을 묻게 만드는 이 여유도 배울 필요는 있지 싶었다.

“자네의 말을 오래 고민했네. 그리고 자네 뜻에 따르기로 했네.”

“뜻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자네가 나를 끌어주어야지. 내게 지시도 내리고. 허허허.”

“각오는 되셨습니까?”

“어?”

웃음을 뚝 그친 허세직이 고개를 틀어 천중명을 보았다.

“그룹 규정에 따라 똑같이 처벌받을 각오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인사 청탁, 부정 지원, 혹은 규정에 어긋나는 자금 집행을 모두 포함해서 조금이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의원님도 처벌받게 됩니다.”

허세직의 볼이 씰룩했는데 천중명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 외에 직원들이 신문고를 통해 부당한 일을 바로 제게 메일을 넣습니다. 친분 따지고, 관계 따질 거면 시작하지 않았을 일입니다.”

“크흠.”

허세직이 헛기침에 불편한 기색을 고스란히 담았다.

“벤처투자 부서의 출발은 의원직을 사퇴하시는 날, 홍보부와 의논해서 발표하십시오.”

“알겠네.”

불편한 감정을 모두 누른 허세직이 천중명의 지시를 받아들었다.

“어제 있었던 사고를 인터넷에 영상으로 올린 사람이 서수미 기자더군요.”

대강 의논은 끝났다.

마약 거래하는 폭력배까지 동원했다면 타깃이 당연히 허세직과 허선영일 거란 생각에서 천중명은 가벼운 경고를 그에게 전해주었다.

“서수미 기자? 서수미? 혹시…?”

“예. 아드님의 기사를 특집으로 다뤘고, 선영 씨와 제가 마약데이트를 하는 게 아니냐는 기사를 올렸던 그 기자입니다.”

반응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밸브를 열어놓은 가스레인지에 불을 던진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허세직의 눈에 시퍼렇게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들과 잠자리를 했던 여자도 있다던데?”

“그때 아드님을 꼬드겼던 여자가 대교건설의 딸, 오지은입니다.”

“그랬군. 그것들이…. 오지은이 자네와 소문이 있지 않았나?”

천중명은 그저 어깨만 슬쩍 들었다가 놓았다.

“그 서수미란 기자가 아직도 현직에 있나?”

“대기발령이라는 말은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이용한 모양입니다. 참고로 마약 거래를 하는 폭력배에게도 손을 뻗쳤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허세직이 야비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마약 거래를 하는 폭력배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것처럼 번득 시선을 들었다.

“자네와 손을 잡으면서 지난번에 내게 수모를 주었던 이들을 돌아볼 생각이었네. 금감원 부원장보와 허하수 의장도 만날 생각이었고. 그러니 서수미 기자의 처리도 내게 맡겨주게.”

“어설프게 건드리면 더 곤란해집니다. 차라리 제가 알아서 선영 씨를 지키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깟 기자년 하나 해결 못 해서야 이 허세직이 어떻게 벤처사업부를 성공시키겠나. 그러지 말고 내가 알아서 처리하게 해주게. 내 그년의 집구석을 아예 주저앉혀 줘야겠네.”

천중명은 잠시 허세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경을 지휘하는 자네가 그런 일까지 신경 쓸 필요가 뭐가 있어? 내가 티끌 한 점 자네에게 튀지 않도록 할 테니 이번 일은 그렇게 하세.”

“알겠습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있으면 바로 알려주십시오.”

“그럴 일 없네.”

답을 한 허세직이 이를 깨무는지 볼을 씰룩였다.

실제로 약을 한 것과 상관없이 그에게 서수미는 아들의 인생을 망친 악귀일 테고, 그런 의미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두 사람은 좋은 맞수가 되지 싶었다.

물론, 현재로는 허세직이 월등히 유리한 위치에 있지만 말이다.

“그 폭력배 놈들도 건네주겠나?”

천중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지 말고 주게.”

그의 의지가 워낙 강렬하게 피어올라서 차마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럼 의원님을 믿고 확인한 뒤에 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허세직은 마치 ‘우리는 한 식구니까요.’라는 답을 들은 것과 비슷한 표정으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바쁠 테니 그만 일어서겠네.”

“앞으로 의원님이 꼭 원하는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보았으면 싶습니다.”

“내 열심히 함세.”

그렇게 몸을 일으킨 허세직이 인사를 마치고 몸을 돌렸다.

사람 일은 참 알기 어렵다.

조심하라고 전한 말에 계산 빠른 허세직이 저토록 독하게 달려들 거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나.

“후.”

그가 나간 뒤에 천중명은 부속실의 소파에 다시 앉았다.

화원을 연상시키는 화분들의 녹색이 주는 위로가 나쁘지 않았고, 결재와 복잡한 이익 관계에서 잠시나마 한 걸음 떨어지고 싶어서였다.

“시원한 음료수를 한 잔 준비해 드릴까요?”

역시 부속실 직원의 센스는 최고였다.

잔을 치운 뒤에 천중명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시선을 든 천중명의 앞에서 서른 중반의 부속실 여직원이 있었다.

“회장님. 미숫가루가 좋은 게 들어왔습니다. 기분 전환에 도움 되실 겁니다.”

“그럴까?”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부속실 직원은 1분도 되지 않아서 미숫가루를 가져왔다.

“8년을 계약직으로 일했던 지경유통 직원의 노모께서 회장님께 꼭 드시게 해달라며 보내왔습니다. 비서실장이 직접 통화해서 비용을 전달해드리는 조건으로 받았습니다.”

천중명은 테이블에 올려진 미숫가루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부속실에 근무한 지 10년쯤 되었는데 지금처럼 자부심 넘쳤던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천중명을 향해 고개를 곱다랗게 숙인 부속실 직원이 접견실을 나섰다.

천중명은 픽 웃었다.

염병! 꼴통 재벌, 안 할 수가 없네!

천중명은 왼손을 뻗쳐서 미숫가루 잔을 잡았다.

사람 사는 거 진짜 별거 없다.

태어나서 마셨던 그 어떤 음료수보다 이 미숫가루 탄 물이 맛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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