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02화 (102/315)

# 102

102. 꼴통 재벌, 안 할 수가 없네! (1)

천중명은 곽대출에게 소파를 가리킨 뒤에 함께 앉았다.

“몸은 어떠셔, 회장님?”

“내가 끼워 넣었다. 수술하면 회복도 오래 걸리고 힘을 제대로 쓰기 어려울 것 같아서.”

곽대출이 그건 아니라는 표정으로 천중명의 팔을 노려볼 때였다.

“어제 어디에서 잤어? 주 과장 집?”

천중명이 물었고 곽대출이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쓸었다.

잘 됐다.

행복하면 된 거지.

천중명은 그를 보고 픽 웃어준 뒤에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천상기가 작업했던 모양이다.”

그런 뒤에 박무일이 가져왔다는 정보에 대해 알려주었다.

“아, 끝까지 개새끼네, 진짜.”

이야기를 다 들은 곽대출의 반응이었다.

“두 가지가 남았다. 하나는 총수님을 노린 것이 실제로 천상기인 건지, 다음으로 과연 천상기가 달랑 저축은행 사고를 끝으로 날 밀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하는 거.”

“어쩌실 거야, 회장님?”

천중명은 보호대에 걸쳐놓은 오른팔을 슬쩍 보고는 다시 시선을 들었다.

“원래 천상기를 좀 여유롭게 상대할까 했는데 시간을 당길 생각이다. 나머지는 황 선생이 가져오는 정보를 보고 판단할 거고. 대신 너는 내부를 단단하게 만드는 데 집중해.”

“예, 회장님.”

“쉽게 생각하지 마. 네가 내부를 완벽하게 정리하지 못하면 반드시 이런 반발이 계속 생긴다.”

“조심하겠습니다.”

천중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네가 내부를 다지는 동안, 나는 바깥으로 시선을 돌릴 거다.”

“바깥쪽이라면 어딜 말씀하셔, 회장님?”

“이대로 가면 우리는 고립돼. 그러기 전에 인수합병을 통해서 덩치를 키울 생각이지. 금융 쪽도 보강해야 하고.”

곽대출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금융이라는 단어에 담긴 숫자와 계산이 골치 아프다는 의미로 보였다.

“어제 일도 있으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고, 그룹 내부의 비리와 부조리를 바로 잡아. 필요하면 바로 내게 전화하고.”

“알겠습니다.”

그가 일어설 순간이었다.

“지금은 완벽하게 회장님의 모습이야. 그거 아셔?”

곽대출이 뜬금없는 말을 건넸다.

“거역하기 어려운 기품도 보이고, 도전적으로 보이던 눈빛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바뀌셨어.”

“미친놈. 그래서 옥상에 매달려서 꼴통 회장이라고 고함을 질렀냐?”

“에이! 내 마음 다 알면서!”

웃음과 함께 곽대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놈이 아니었다면 엉뚱한 사고에 휘말려 죽을 뻔했었다.

“고맙다, 대출아.”

“미친 회장!”

차마 ‘미친놈’이란 말을 뱉기 어려웠는지 곽대출다운 말을 남기고 그가 문을 나섰다.

천중명이 책상에 앉았을 때였다.

잔을 정리하러 들어온 부속실 직원이 연락을 요청한 명단을 책상에 올려주었다.

명단을 살피던 천중명은 허세직의 이름을 본 순간에 픽 웃었다.

어쩌면 이리도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지.

어제의 일이 그를 꼬드겼을 게 분명했다.

이런 분위기에 올라타면 이름을 알리기 더 좋을 테고, 앞으로 그가 어떤 일을 할지에 대해 홍보하기에도 더할 수 없이 좋은 기회라 판단했을 사람이었다.

“허세직 의원에게 연락해서 오후에 약속을 잡아줘.”

“예, 회장님.”

책상에 앉은 천중명은 오늘의 결재서류를 펼치고 내용을 살폈다.

공부가 더 필요했다.

이론으로 무장하고, 현실에서 경험을 쌓는다.

경험이라는 큰 틀은 유진교와 최만호에게서 얻고, 연륜이라는 넘지 못할 산은 천호득을 보며 익힐 생각이었다.

‘아버지?’

천중명은 천호득을 떠올렸다.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을 그에게서 보았다.

그가 행복하게 웃는 것이 좋았고,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몸이 바뀐 것에 대한 미안함보다는 자식으로 그 앞에 설 때 천중명도 행복해서 그렇다.

생각을 정리한 천중명은 왼손으로 서류를 넘기고는 내용에 집중했다.

**

황성규는 보고서와 내용을 모두 정리했다.

“웃기는군. 밀려난 기자가 이따위 도발을 해서 성공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다니.”

그는 우선 인터넷 방송을 준비하고 송출한 사람이 서수미임을 밝혀냈다.

그런 거?

웃기게도 아이피 추적해서 그 주인이 어떤 계좌를 썼는지 뒤지면 모두 나온다.

불법이다.

그런데 정보를 다루는 그에게는 불법과 합법의 경계 따위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벌써 두 개 그룹이 당한 꼴이네.”

그러면서 그는 다른 서류를 들어 앞장과 뒤에 있는 페이지를 살폈다.

“쓸데없는 욕심에 탄탄했던 그룹 두 개가 이렇게 찢겨 나가는 걸 보면 오너의 판단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시스템의 가장 큰 단점이 이런 게 아닌가 싶다.”

날카로운 눈으로 서류를 살피던 그는 창으로 시선을 돌리고 천중명을 떠올렸다.

크레인에 오를 때 방송에 나왔던 천중명의 눈빛이 아예 칼로 새긴 것처럼 그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매달리자. 그분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혼잣말처럼 각오를 다진 그는 휴대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 회장 부속실입니다.

“황성규입니다. 회장님을 뵙고 싶은데 말씀드려주십시오. 오후에 언제고 괜찮습니다.”

- 네, 확인 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팀원들이 힐끔거리며 황성규를 살피고 있었다.

천중명이 거부한다면 이 일을 더 진행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남은 서류들을 황성규가 살필 때였다.

띠루루룩. 띠루루룩. 띠루루룩.

그의 전화기가 울었다.

“황성규입니다, 회장님.”

그는 곧바로 통화버튼을 누르고 천중명의 전화를 받았다.

“예. 아직 전입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점심 함께하시잔다. 바로 들어갔다 오마. 나 없더라도 윤 선배 쪽 대원들과 연락해둬.”

“이미 연락해두었습니다. 안심하고 다녀오십시오.”

크레인 사건 이후로 부쩍 긍정적으로 변한 팀원들이 황성규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

황성규가 천중명을 방문한 직후에 부속실 직원이 도시락 두 개를 준비해주었다.

“드시면서 이야기하죠.”

오른손을 아직 제대로 쓰지 못해서 천중명은 왼손에 포크를 든 채로 식사를 시작했다.

황성규는 정보를 다루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도시락을 함께 먹는 것이 그만큼 황성규를 신뢰한다는 의미였고, 한편으로는 그만큼 천중명의 하루가 바쁘게 돌아가서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천중명이 밥을 자르는 것처럼 포크로 갈라서 입에 넣은 다음이었다.

“오늘의 아침, 서수미 기자가 용인의 사고 장면을 인터넷에 방송한 장본인입니다.”

황성규가 젓가락으로 밥을 떠 넣고는 보고를 시작했다.

“어제 사건이 있었던 시점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 천상기 회장의 통화 내역과 오피스텔 방문자를 모두 조사했습니다. 눈에 띄는 사람은 박무일 전무, 그리고 마약조직에 속한 조직원 세 명과 폭력조직원 한 명이 있었습니다.”

이미 짐작했었던 일이었다.

거기에 마약관련자들이 나왔다면 천상기가 허선영까지 노린다고 보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쇼더앤톨먼이라는 미국의 투자은행에서 한국의 기업에 사채를 발행해준 일이 있습니다.”

점심을 먹으며 마치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는 것처럼 황성규는 다른 내용을 꺼내 들었다.

“미국에서도 갑론을박이 많았던 사안인데 회사채를 발행하는 것을 부채로 잡아야 할지, 자본으로 잡아야 할지에 대해 논의한 끝에 국제회계법상 자본으로 정하기로 했습니다.”

“빌린 돈은 부채로 잡는 게 상식인 것 같은데 자본에 포함하는 일이 가능한가요?”

구운 생선을 포크로 찍은 천중명의 질문에,

“투자은행의 로비가 먹혔다고 보시면 거의 정확합니다.”

황성규가 곧바로 답을 내놓았다.

“쇼더앤톨먼은 그 규정을 이용해 한국의 두 개 그룹에 사채를 빌려주었습니다. 이자율을 정하고 2년에 걸쳐 연장하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빌려준 돈으로 중국의 부동산에 투자하게 만들었습니다.”

된장국을 마신 천중명이 그릇을 내려놓는 것을 보며 황성규가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중국은 규제를 시작했고, 부동산 거품이 꺼졌으며, 그곳에 투자한 두 개 그룹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천중명은 이제야 그 두 개 그룹이 어디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것처럼 2년이 지난 회사채를 쇼더앤톨먼은 연장 거부했습니다. 규정상 문제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탄탄했던 기업이 느닷없이 매각에 나섰던 거군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사전에 매각하면 그나마 건질 것이 있지만, 만약 이대로 쇼더앤톨먼에 넘어간다면 그들은 중국에 웃돈을 받고 넘길 겁니다.”

“결국, 기술만 빼낸 뒤에 껍데기만 남은 기업을 파산시키겠네요.”

“중장비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중국에 꼭 필요한 기술입니다.”

냅킨을 꺼내 입을 닦은 천중명은 자세를 세우고 인터폰을 눌렀다.

“여기 식사 끝났으니까 차를 좀 준비해 줘.”

[네, 회장님.]

부속실 직원 두 명이 능숙하게 테이블을 치운 뒤에 차를 놓아주고 나갔다.

“예행연습입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한국 기업을 손에 넣은 뒤에 기술을 빼가고 껍데기를 넘길 겁니다. 10년쯤 뒤에 다시 기업이 살아난다고 해도 이미 넘어간 기술 때문에 특허료를 지급하느라 한국은 다시 10년쯤 더 붙들려 있어야 합니다.”

천중명이 입술에 힘을 준 채 지금의 이야기를 되새길 때였다.

“마지막으로 총수님께서 당한 교통사고는 CIA가 보내는 경고였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운전기사가 부친 통장으로 현금을 입금했었습니다.”

황성규가 전하는 뜻밖의 보고에 천중명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기사가 어디에서 돈이 생겼는지 추적하다가 트럭의 연료를 주입할 때 사용한 카드 결제 통장에서 다시 무역회사의 입금 정황을 찾았습니다. CIA가 흔히 사용하는 수법입니다.”

“황 선생님이 나와 일하는 것에 대한 경고라는 건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참. 빠르기도 하네요.”

“아무래도 워낙 큰 거래가 될 테니까 방해될 만한 요소들을 사전에 제거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설명은 대강 들었다.

남은 것은 궁금한 것 몇 가지였다.

“황 선생님의 말씀대로 제2의 IMF 사태가 온다고 치지요. 그렇다면 지경그룹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직원의 절반 감원, 급여 축소, 최소 다섯 개 이상의 계열사 매각 정도 되리라 예상합니다.”

“그걸 피할 방법은요?”

“정직원을 줄이십시오. 최대한 현금 유보금을 쌓은 채로 견디지 못하고 매물로 나온 부동산을 싼값에 매입하십시오.”

천중명의 눈을 본 황성규가 설명처럼 말을 이었다.

“국내에도 제2의 IMF 사태를 바라는 세력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일부 정치권입니다. 그들은 국민이 정치에 개입하기보다는 당장 하루 벌어서 하루 먹기 힘든 환경으로 돌아가길 바랍니다.”

천중명의 눈에 분노가 깃든 것을 보았을 텐데도 황성규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필리핀이 한때는 우리보다 잘살았습니다. 부패한 관료와 정치권, 그리고 그에 결탁한 기업들이 만들어낸 결과가 현재와 같습니다. 어쩌면 일부 기업가들과 정치권, 그리고 유대 자금은 한국이 필리핀처럼 되기를 바랄 겁니다.”

“그들만 행복한 세상을 원한다는 겁니까?”

“적은 돈에도 자존심 따위 던지고 매달리는 세상이 가진 자들에게 가장 매력적이니까요. 정치에 관심 따위 버리고 하루 살기 바쁜 세상, 한번 쥔 부가 대대손손 이어지는 세상이라면 그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겠습니까?”

천중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을 듣는데 4시간 정도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혹시 몇몇 분과 함께 들어도 되겠습니까?”

“회장님께서 믿는 분이라면 저도 믿겠습니다. 말이 새나가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으시다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렇군요.”

천중명의 답을 들은 황성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기쁜 소식이 아니어서 죄송합니다.”

“정보란 게 워낙 그렇잖아요. 합격 소식을 미리 알려주는 게 아니라면 이런 환경에서 기쁜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천중명은 황성규와 짧은 인사를 나눴다.

그가 나가고 난 다음, 버릇이 된 것처럼 천중명은 집무실의 창 앞으로 걸었다.

꼴통 재벌, 더럽게 힘들다.

겨우 전 직원을 정규직으로 돌리는 단계인데 살아남으려면 다시 파견직과 계약직으로 바꿔야 한단다.

일이 벌어지면 직원의 절반을 감원하고 급여도 축소해야 한다고 들었다.

떨어져 나간 사람들은 당장 과거의 천중명처럼 힘겹게 지내야 할 테고, 남아 있는 이들도 지치고 숨 가쁜 날들을 보내야 할 게 틀림없었다.

“개새끼들. 욕심 더럽게 많네.”

거실 유리에 비친 모습을 보며 천중명은 픽 웃었다.

오른팔을 보호대에 건 정장 차림의 남자는 이미 결심이 선 것처럼 보였다.

“겁나?”

유리에 비친 천중명의 그림자가 물었고,

피식.

그 앞에 선 천중명이 웃었다.

“썩어빠진 정치인에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둔 그룹들, 그리고 규모가 얼마인지 짐작조차 못 한다는 유대 자금을 상대할 자신이 있어?”

이번 질문에는 답을 하지 못했다.

“적당한 순간에 천상기에게 넘겨. 그럼 그놈이 알아서 정규직 다 해고하고, 파견직과 계약직으로 채울 거야. 돈이 한두 푼이야? 마음에 걸리면 천호득 영감하고 외국으로 가. 행복하게 살아.”

유리 속의 그림자가 좀 더 강력한 유혹을 던진 직후였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내 밥그릇 노리는 거하고, 내 직원 해고하게 만드는 건 못 참겠는데?”

천중명은 목을 좌우로 꺾으며 유리에 비친 모습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곽대출이라고 있거든. 어설프게 굴면 눈알 빠져. 그게 고난이든, 음모든. 어디 해보자.”

말을 마친 천중명은 픽 웃으며 책상을 향해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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