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101. 하나만 부탁하자 (2)
특별한 이상이 없는 데다, 병실도 불편했으며, 무엇보다 허선영이 보고 싶어서 천중명은 밤 10시쯤 용인의 병실을 나섰다.
비서실 직원들의 도움으로 기자들을 따돌린 천중명이 삼성동 빌라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40분이 흐른 뒤였다.
허선영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천중명의 위아래를 살핀 뒤에 잠갔던 밸브를 연 것처럼 눈물을 쏟아냈다.
“미안해.”
천중명은 왼손으로 허선영의 등을 다독였다.
울음과 떨리는 그녀의 몸이 얼마나 천중명을 염려했는지를 고스란히 알려주었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응. 어깨와 팔꿈치, 손목은 맞춰 넣었으니까 이틀이면 멀쩡해질 거야. 그 외는 다친 곳 없어.”
팔 한 번 보고 울고, 힘들었던 장면 떠올리고 울고, 무사히 돌아온 천중명의 얼굴 보고 울고.
이런 사람을 만난 것이 고맙고 행복해서 하마터면 천중명은 결혼하자는 말을 꺼낼 뻔했다.
반지도, 꽃다발도, 그 흔한 촛불 하나 켜지 않은 채, 보호대에 팔 걸친 모습으로 말이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천중명은 반지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커피 좀 준비해 줄 수 있어?”
“저녁은 어떻게 했어요?”
“아버지 오셔서 함께 먹었어.”
눈물을 닦은 허선영이 바쁘게 주방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며 천중명은 손가락 사이즈를 어떻게 알아낼지 고민했다.
**
대원의 도움을 받은 천호득이 평창동 집에 도착했을 때 윤만석이 거실에 있었다.
“오셨습니까?”
“어떻게 된 거야?”
“장 비서 올 때까지 이곳에 있을 생각입니다. 모시고 들어온 저 친구와 함께 지내겠습니다.”
“불편한데 그럴 필요 있겠어?”
“이래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천호득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저녁은요?”
“회장이랑 먹었어.”
“힘들 텐데 그냥 오시지 그랬어요?”
“내가 어련히 알아서 했을까? 벌이야? 왜 그렇게 말마다 툭툭 쏴? 아니면 까치야? 왜 콕콕 쪼아?”
천호득의 이런 투정이 어디 하루 이틀인가.
하여간 말 한마디도 곱게 하지 않는 사람이라 이은명은 나직한 숨 한 번으로 그의 투정을 털어내고 있었다.
“당신, 잠깐 이야기 좀 해.”
그런 이은명을 천호득이 무거운 얼굴로 불렀다.
“서재로 가지.”
그리고는 서재를 향해 시선을 주어서 이은명이 얼른 휠체어를 밀어주었다.
서재에 들어선 다음이었다.
“앉아 봐.”
천호득의 말에 이은명이 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았다.
“선영이하고 우리 회장이 함께 지내잖아.”
“예.”
“두 사람 다 다른 마음 없으면 날을 잡아.”
이게 뭔 병원 다녀와서 파상풍 앓는 소리인가?
고개를 갸웃하는 이은명을 보며 천호득은 단박에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인사 왔고, 한집에 산다는 데 결혼하라는 게 이상한 말이야?”
“그게 아니라 병원 다녀오셔서 느닷없이 그러시니까 그렇죠. 지금 그런 말을 할 상황도 아니고요.”
“결혼 이야기 할 때가 따로 정해져 있으면 내놔 보든가.”
기운 빠진 천호득은 다른 사람과 있을 때 부쩍 툴툴대는 것이 늘었다.
게다가 오늘은 천중명이 크게 위험했던 날이었다.
천호득의 어깨가 유독 처졌구나 싶어서 이은명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알고 준비해.”
“알았어요. 그쪽에 물어봐서 상견례부터 준비할게요.”
“상견례는 무슨? 부모가 결혼하나?”
“그런 거 건너뛰면 중명이가 서운하지 않겠어요?”
“그래?”
화들짝 바뀌는 천호득의 표정을 보며 이은명은 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그럼 그렇게 하던가.”
“알아서 준비할게요.”
“그래.”
대화가 대충 끝났다.
이은명이 일어서려는 참에 서재의 창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은명의 시선을 따라 천호득이 고개를 돌린 앞에서 장만섭이 빛을 등지며 들어서고 있었다.
“어?”
천호득이 놀란 소리를 냈고, 이은명이 얼른 그의 휠체어를 밀어가며 거실로 나왔다.
“저 왔습니다, 총수님.”
조금은 덜 우렁대는 음성으로 장만섭은 고개만 겨우 숙였다.
아직 가슴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눈치였다.
“너, 이놈! 어떻게 된 거야!”
“총수님께서 홀로 계실 것이 염려돼서 나왔습니다.”
“병원에서 보내줘?”
“화장실 간다고 하고 나와서 그냥 왔습니다.”
“이런 속 빠진 놈!”
윤만석과 대원, 그리고 메이드들조차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보는 앞에서 장만섭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온몸에서 피워내고 있었다.
“이눔아! 뭐가 그렇게 염려된다고 이래!”
“저 없는 동안 드시는 것과 마시는 것도 그렇고, 혹여 또 사고가 있지 않을까 잠이 안 옵니다. 총수님께서 꾸짖으신다고 확인 없이 물을 드리는 건 아닌지 잠시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허어.”
천하의 천호득이 입을 벌리고 멍한 눈으로 장만섭을 보았다.
전에는 분위기만 그랬는데 지금은 오른쪽 얼굴과 목에 상처가 크게 있어서 완벽한 프랑켄슈타인의 몰골이었다.
“병원에서 뭐라고 하던가?”
윤만석이 물었고,
“예상보다 심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염증이 발생할지 몰라 항생제를 계속 투여해야 한다는 전화도 있었습니다.”
장만섭이 우렁대는 소리로 답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병원에서 그에게 전화했었던 모양이었다.
“에효, 미련한 놈. 윤 실장, 저놈 저거, 내일 지경병원에 연락해서 의사를 부르든가, 하여간 치료를 계속 받게 해.”
“예, 총수님.”
한바탕 소란을 끝으로 평창동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서재로 돌아가는 휠체어를 밀며 이은명은 분명하게 보았다.
한숨을 길게 내쉬는 천호득의 어깨에 조금이나마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을 말이다.
**
아침이 돌아왔다.
오른쪽 어깨부터 팔에 전해지는 통증이 어제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끔찍해서 천중명은 아예 몸 위쪽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 덕분에 재미있는 경험도 있었다.
“가만있어요.”
아이를 다루는 엄마처럼 허선영이 넣어주는 샌드위치를 받아먹는 일이었다.
그녀가 넣어주는 샌드위치를 삼키며 천중명은 확신했다.
이 사람과 결혼할 거다.
“왜요? 샌드위치가 이상해요?”
“아니. 맛있어서 그래. 당분간 팔을 이러고 지낼까 봐.”
그녀가 커다란 눈으로 흘겨보는 것도 좋았다.
식사를 마친 천중명은 허선영의 도움을 받아 정장을 입었고, 구두를 신었다.
“다녀올게.”
“무리하지 마세요.”
왼손을 내민 천중명의 품으로 허선영이 부드럽게 들어왔다.
산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그 어떤 고난이 밀려와도 그걸 이겨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현관을 나선 천중명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도착했을 때였다.
“회장님. 죄송하지만 지하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비서실 직원이 밖을 내다보며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야?”
“기자들이 꽤 와 있습니다. 지하주차장에 따로 승합차를 준비했으니 출근은 그 차를 이용하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이 정도라면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천중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서실 직원들이 엘리베이터로 올라탔고, 함께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천중명이 출근길에 이용하는 승용차가 있었고, 그 뒤에 다시 유리를 짙게 만든 VIP용 승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승합차에 올라 출근하는 길이었다.
역시 누가 뭐래도 출근은 곽대출과 함께 떠들며 가는 게 제맛인데 뭔가 허전한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이놈은 어제 잘 지냈나?
빌라의 앞에 쭉 늘어선 기자들을 바라보며 천중명은 곽대출을 떠올렸다.
**
급하게 준비했지만, 맛이 제대로 우러난 된장찌개와 집에서 가져왔다는 김치, 계란찜, 몇 가지 마른반찬이 곽대출의 아침이었다.
점잖은 얼굴로 밥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곽대출은 아까부터 계속 속에서 “우히히히히!”하고 웃고 있었다.
기독교 신자도 아닌데 지난밤에 곽대출은 천국을 봤었다.
불쌍한 우리 회장님.
이런 세상이 있는 줄도 모르고 아직 데면데면 지내겠지?
“왜 그러세요? 찌개가 입에 안 맞으세요?”
“아냐. 회장님이 생각나서 그랬어. 이 찌개를 함께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반달처럼 휘어져 웃는 주인영의 눈을 보며 곽대출은 찌개를 듬뿍 떠서 입에 넣었다.
‘끄윽.’
목에서부터 가슴 안쪽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도 곽대출은 행복했다.
**
천중명이 집무실에 도착하기 무섭게 유진교가 방으로 들어왔다.
“팔은 좀 어떠십니까?”
“오늘만 견디면 내일부터는 조금씩 움직일 거 같은데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팔을 보는 유진교와 함께 천중명은 소파에 앉았다.
“어제 계열사 전체에 파견직과 계약직 직원의 현황을 파악해서 올리라고 지시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계약한 지 6개월 미만의 직원은 인사고과를 판단해서 정직원으로 전환하겠다는 의견만은 받아들였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정직원은 필기시험과 혹독한 압박 면접, 그리고 연수를 통해 선발되었습니다. 정직원 전환으로 그들이 느끼는 상실감도 이해해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부분은 본부장님이 판단하시는 거로 하죠.”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 뒤로 유진교는 몇 가지 안건을 더 내놓았다.
급한 결재가 우선 구두로 이뤄진 다음이었다.
“그룹의 이미지가 굉장히 좋아졌다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고, 반대로 파견직과 계약직을 이용하는 다른 그룹과 기업들의 공통 타깃이 되었다는 부정적인 면이 발생했습니다.”
어차피 각오했던 일이었다.
꼴통 재벌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이 정도 반감도 없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홍보실을 통해 계속해서 그룹 이미지 광고를 전달하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리고 참.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예비비든, 판공비든, 어떤 방식으로든 좋으니까 전국에 있는 소방서에 소방관들이 필요로 하는 개인 장비를 100억 원가량 보내주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홍보실에도 통보하겠습니다.”
유진교의 답을 들은 천중명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세요. 이건 그들이 목숨 걸고 나서준 숭고한 정신에 대한 감사이지 홍보를 위해 내놓는 게 아닙니다.”
유진교가 복잡한 표정으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이런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미가 가장 먼저 보였고, 다음으로 아직 세상을 너무 모르는 게 아닐까 하는 답답함이 스쳐 지나갔다.
“제가 가리킨 지경의 길은 진심이 있어야 나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임원은 직원을 아끼고, 직원들은 고객을 또 그렇게 대해야죠. 작은 것을 홍보하려고 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생깁니다.”
“회장님. 이런 기회는 만들겠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수백억을 쏟아 부어도 얻기 어려운 홍보 기회를 굳이 마다하실 필요가 있는지, 그 점이 아쉽습니다.”
“진심은 언젠가 통합니다. 물론 그걸 악용하려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런 이들은 처절하게 응징해주면서 가면 됩니다. 그게 나와 본부장님, 그리고 기획실장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중명의 단호한 의지를 들은 유진교가 아쉬운 얼굴로 “말씀대로 하겠습니다.”하고 답을 했을 때였다.
노크와 함께 최만호가 들어섰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 역시 천중명의 상태를 물으며 소파로 다가왔다.
간단하게 안부를 전한 다음이었다.
“회장님. 박무일 전무라고 전에 저축은행에 있던 임원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오늘 오전에 제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내용이 조금 불편한데….”
그러면서 최만호는 박무일의 말을 전했다.
천상기가 크레인을 부러지도록 지시했고, 오늘 중으로 중국의 해커집단을 통해 저축은행의 돈을 빼가도록 사주했다는 내용이었다.
천중명은 먼저 픽 웃었다.
“왜 박 전무가 갑자기 양심 고백을 했을까요?”
“어제 일로 분위기가 바뀌어서 자칫하다가는 혼자 뒤집어쓰게 생겼다고 판단한 눈치였습니다. 이번 기회에 회장님께 정보를 드리고 어떡해서든 다시 기회를 잡고 싶다는 욕심도 보였습니다.”
천중명은 먼저 휠체어에 앉은 천상기를 떠올렸다.
모지리가 사람을 부려도 어쩌면 꼭 저 같은 놈들만 구하는 건지.
“박 전무가 모른 척 달려들었다면 정말 저축은행이 해킹에 당해서 돈을 빼앗기는 겁니까?”
“그럴 일은 없습니다. 대신 박 전무가 저축은행을 방문해서 해커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심어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박 전무는 아마 그걸 염려한 것 같습니다.”
“형에게 지시는 받았고, 성공하자니 본인이 직접 저축은행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심어야 하고?”
“그렇습니다. 게다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분위기가 어지간해서는 뒤집히기 어렵다는 판단도 섰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차피 그런 짓을 해봐야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천중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레인 사고로 직원이 사망하는 것이 고스란히 방송된 상태에서 저축은행 사고까지 터졌다면 문제가 되긴 했겠네요.”
“힘든 상황이 왔을 수 있습니다.”
최만호의 답을 들으며 천중명은 이제야 천호득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형제 중 누군가 총수자리를 차지할 경우, 나머지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을 말이다.
천중명이 아무리 기회를 주려고 해도 스스로 죽을 길로 달려드는 걸 막을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최종 목표가 지경그룹의 회장 자리여서 더 그랬다.
“형의 일은 생각을 정리한 뒤에 의논하기로 하지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두 사람이 나간 뒤에 천중명은 천천히 움직여 집무실 창 앞에 섰다.
그냥 좀 욕심 버리고 살지!
굳이 많이 가져야 행복한 게 아니란 걸 깨닫고,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함께 따뜻한 밥 먹는 일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도 좀 느끼지.
돌아가시면 아무리 억만금을 줘도 못 만난다니까!
금으로 밥을 해도 함께 못 먹는다고!
천중명이 입맛을 다실 때였다.
똑똑똑.
노크와 함께 곽대출이 들어왔다.
몸을 돌린 천중명은 픽 웃었다.
그의 온몸에서 감출 수 없는 행복이 피어나고 있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