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00화 (100/315)

# 100

100. 하나만 부탁하자 (1)

인심은 어차피 초겨울 호수에 깔린 살얼음처럼 얄팍한 것인지도 모른다.

타워크레인 기사의 사건이 중계되고 난 다음이었다.

먼저 인터넷 포털과 각종 사이트에 공사가 빡빡하게 진행된 과정이 직원들과 그 가족들의 글을 통해 올라왔다.

[신임회장님이 직접 방문하셨대요. 입구에 물이 차면 그걸 바라보는 가족들이 어떻겠냐고 하셨고, 비용이 얼마가 들던 야간작업을 해서라도 제대로 된 집을 만들라고 하셨대요.]

그렇게 올라온 글들에 엄청난 댓글들이 달렸다.

지경화장품에 다니는 직원이라고 밝힌 글은 아예 회원들이 복사해서 퍼가는 상황이었다.

[우리 회장님을 욕하지 마세요. 부탁드립니다.]

그 글의 마지막에 달린 간절한 바람이 읽는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지경화장품은 매장 담당까지 전 직원이 정규직으로 전환됐어요. 요즘 처음으로 직장 생활하는 기쁨을 느껴요. 우리 회장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비난으로 일관하던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뉴스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나라에서 나온 네티즌들의 반응이 실시간으로 번역돼서 사이트에 올라오고 있었다.

[오늘 지경그룹은 참 어려운 일이 많았습니다. 그림이 나오는데요? 천호득 명예회장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늦은 시간에 휠체어를 탄 천호득 명예회장이 입원 중인 천중명 회장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화면에 휠체어를 탄 채 모자를 눌러쓴 천호득이 병원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뒤에서 밀고 있는 사람은 윤만석과 함께 있던 대원이었다.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들었는데 큰 사고는 아니었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거의 폐차를 해야 할 수준의 사고였고, 그래서 천중명 회장이 직접 명예회장이 입원했던 병원으로 달려갔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사고 현장의 거친 동영상이 화면에 올라왔고, 이어서 트럭에 밀려 절반이 찌그러진 승용차의 모습이 보였다.

[천중명 회장의 새로운 개혁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그 점을 설명해 주시죠.]

[네. 천중명 신임회장은 전 직원의 정규직 전환, 그리고 신문고와 암행어사 제도를 시행하겠다고 밝혔고, 이미 시행단계인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천중명 회장과 함께 구조에 나섰던 곽대출 이사가 암행어사 역할을 맡는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사다리에서 몸을 날려 크레인 기사를 붙드는 장면이 먼저 나왔고, 이어서 곽대출이 외친 ‘이 꼴통 회장아!’ 하는 모습이 화면에 떠올랐다.

보도를 보고 있던 앵커가 툭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억지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큼! 이렇게 보면 신임회장과 곽대출 이사가 막역한 사이가 아닌가 싶은데 어떻습니까?]

[실제로 두 사람의 관계에 관한 추측이 많습니다. 특수 부대 출신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고, 천중명 회장이 소개받은 뒤로 부쩍 신뢰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뉴스는 그렇게 온통 천중명과 곽대출, 그리고 지경그룹의 이야기로 도배되고 있었다.

**

병실에 들어선 천호득이 매섭게 천중명을 노려보았다.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천중명이 고개를 떨어뜨리는데도 그는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독한 눈을 돌려 보조대에 걸고 있는 천중명의 팔을 빠르게 살폈다.

“저녁은?”

“아직 못 먹었습니다.”

“망할! 환자가 돼서 여태 밥도 못 먹고 뭐했어!”

천중명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는 드셨어요?”

“그런 걸 걱정하는 놈이! 그따위로 막무가내 짓을 벌여!”

“죄송합니다, 아버지.”

천중명의 사과에 천호득이 쏟아내려던 타박을 꿀꺽 넘겼다.

“죽어가는 직원을 그냥 둘 수는 없었습니다.”

“팔은?”

“끼워 넣었습니다. 사흘 정도 지나면 생활하는 데 지장 없을 겁니다.”

의사가 시술해준 것으로 생각한 모양인지 천호득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움직이셔도 돼요?”

“아니면? 회장이 죽을 뻔했는데 그냥 침대에 계속 누워 있어? 엄마는 기절했고, 선영이도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아냈어.”

부스스 침대에서 내려온 천중명이 휠체어 뒤로 가서 천호득의 목과 어깨를 왼손으로 주물렀다.

“뭐하는 거야!”

“어쩐지 안색이 안 좋아 보이셔서요. 괜찮으세요?”

천중명이 질문한 다음이었다.

“총수님께서도 저혈당 쇼크 때문에 위험하셨습니다.”

뒤에 물러나 있던 대원이 설명을 덧붙였다.

홱!

천호득이 그를 노려보았는데 천중명이 슬쩍 자리를 옮겨 대원을 가려주었다.

꾹! 꾸욱! 꾹!

천호득은 살면서 자식이 해주는 안마를 처음 받았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제발 건강하세요. 그래서 오래오래 가르치고 꾸짖어주세요.”

이러지 말라고, 뭐하는 짓이냐고 소리쳐야 하는데 처음 받아보는 자식의 손길이 너무 좋아서 천호득의 마음이 자꾸만 스르륵 녹아내렸다.

“정말…. 다른 데 다친 곳은 없지?”

“예. 그런데 아버지가 이렇게 야위셨었어요?”

“뭐? 내가 그럼 돼지처럼 살이 피둥피둥했을 거 같아?”

꾸욱. 꾹. 꾹. 꾹.

“아파! 하지 마!”

“조금만 더 할게요. 제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저녁 드실래요?”

“그래? 먹을 수 있겠어?”

원래는 얼굴만 보고 가겠다며 들른 길이었다.

그래서 함께 오겠다는 이은명과 허선영을 매서운 눈길로 먼저 보냈던 참이었다.

“낮에 불갈비 먹었으니까 저녁에는 곰탕이나 갈비탕 어떠세요? 밖에 비서실 직원에게 부탁하면 될 것 같은데요.”

“좀! 이 사람아! 회장이 돼서 부탁이 뭐야. 부탁이! 지시하면 된다니까.”

“예, 아버지. 비서실 직원에게 지시해서 사오라고 하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던가. 혼자 먹기 그럴 것 아냐!”

“그럼요.”

천중명이 고개를 돌리자 대원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을 나섰다.

“이제 그만해.”

“제가 좋아서 손을 못 놓겠어요. 아버지 주물러 드리는 게 이렇게 좋을 줄 몰랐어요.”

“그래? 흐헤헤헤헤헤.”

늘 이렇다.

천중명의 이야기를 듣거나 함께 있으면 꼭 이런다.

결국, 천호득은 경망스러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곽대출은 정장 바지에 와이셔츠 차림으로 누워 있었다.

주인영이 사는 투 룸의 침대였다.

여자 혼자 사는 집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와 봤다.

이런 건 건축 자재가 다른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집 전체에서 은은한 향이 이렇게 배어나올 수가 있겠나.

“이사님. 엎드릴 수 있으세요?”

“어?”

밖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주인영이 플라스틱 대야를 들고 들어왔다.

곽대출의 가슴에서 피어난 것처럼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찜질이 좋대요.”

“씻지도 못했어. 그럼 차라리 좀 씻고 올게.”

“안돼요.”

대야를 바닥에 내려놓은 주인영이 털썩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는 과감하게 곽대출의 와이셔츠를 붙들었다.

“왜 이래?”

우습다.

곽대출이 양손을 들어 가슴을 가리는 꼴이.

그러면서 그는 인상을 버럭 찌푸렸다.

허리가 울린 탓이었다.

“아까 이사님 떨어지실 때요. 저, 죽는 줄 알았어요.”

누운 곽대출을 내려다보며 주인영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때 다짐했었어요. 이 말씀 드리겠다고요.”

곽대출은 끔벅끔벅 눈을 깜박이며 주인영을 보고만 있었다.

“저요. 이사님 좋아해요. 아니, 사랑하는 거 같아요.”

진지한 고백이었다.

그런데 헤벌쭉 좋아해 줄 줄 알았던 곽대출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상체를 일으켰다.

“끄응.”

팔을 짚고 몸을 일으킨 곽대출은 화난 사람처럼 또 침대에서 억지로 내려섰다.

“왜 그러세요?”

“주 과장. 바보야? 멍청이냐고? 나 무식한 거 알지? 배우지 못한 것도 알 테고. 지금은 좋아한다고 치자. 앞으로 발전하면? 와인 즐기고 싶을 때 소주 먹자고 할지 모르고, 화나면 온갖 무식한 욕 뱉을 텐데 주 과장이 그거 견딜 수 있어?”

허리가 아파서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곽대출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왜 말을 못한 줄 알아? 그게 무서웠어. 나중에 주 과장이 나한테 지칠까 봐. 솔직히 욕심났거든. 여기까지 올 때도 계속. 그런데 막상 말을 들으니까 이건 아니다 싶다.”

침대에서 일어선 주인영이 곽대출의 앞으로 움직였다.

이마가 곽대출의 코쯤 걸린 그녀가 당돌하게 눈을 뜨고는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들이밀었다.

“하나만 대답해 주세요. 내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걸 견딜 수 있으세요?”

곽대출의 입이 꿈틀했는데 답은 나오지 않았다.

“누구보다 저 사랑해 줄 자신 있으시잖아요. 그거 말고 뭐가 더 필요해요?”

곽대출의 눈을 바라본 상태에서 주인영의 얼굴이 슥 다가왔다.

그리고 곽대출의 입술에 그녀의 입술을 꾹 붙였다.

반사적으로 곽대출의 손이 움직였고 주인영이 그에게 안겼다.

허리 좀 아프면 어떠냐.

곽대출 또 살살 녹는데.

입술을 뗀 주인영이 곽대출을 또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랑해요, 이사님.”

“나, 당신 안 놓친다. 절대.”

곽대출의 다짐을 주인영은 반달처럼 곱게 웃는 눈으로 받았다.

**

유진교는 타이밍을 아는 남자였다.

오늘 사건이 있었는데도 오히려 용인의 아파트는 프리미엄이 오르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입구의 물길을 새로 잡는 공사, 내부의 벽과 층간 소음 보강 공사, 암행어사 곽대출 이사가 대형 해머를 들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아예 부수었다는 일화가 입에 오르내린 결과였다.

지경건설의 브랜드를 이토록 확실하게 심어줄 방법이 또 있을까?

유진교는 결심을 굳혔다.

그래서 그는 지경의 모든 계열사에 전 직원 정규직 전환을 지시했고, 해당 직원들을 선발해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 본부장님. 이건 너무 일방적인 지시입니다. 이런 식이면 저는 당장 영업손실을 감당해야 합니다.

물론 안면이 있는 계열사 대표의 항의 전화는 있었다.

“회장님께서 지시한 방향을 따르지 못하겠다면 언제고 사의를 표명해. 아니라면 최선을 다해 회장님의 계획에 함께하든가.”

원체 뾰족한 느낌의 유진교였다.

칼로 자르는 듯한 대꾸를 들은 임원들은 더 말을 붙이지 못했다.

“후우. 시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그룹이라니.”

늦은 시간에 본부장실의 창을 향해 선 유진교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도시를 묵직하게 바라보았다.

**

윤만석은 황성규와 함께 있었다.

“자네는 죽음을 각오하고 한국에 들어온 거군.”

“그렇게 됩니까?”

“웃음이 나오나?”

윤만석의 질문에도 황성규는 사람 좋은 얼굴로 옅은 미소만 보였다.

“CIA에서 얻은 정보를 외부에 발설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잘 알잖나? 게다가 자네는 그 계획에 맞서려는 거야.”

“잘못된 행위를 막아야 할 의무도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군.”

더는 말릴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윤만석은 하나뿐인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유대 자금이 테스트를 시행할 모양인가 보구만.”

“알고 계셨습니까?”

“내가 현역일 때도 비슷한 정보가 있었다. 유대 자금이 아시아를 노리는 계획을 세웠고, 그 시작을 우리나라로 잡았다는 것이었지.”

“꽤 오래 준비한 일이었군요.”

황성규의 대꾸를 들은 윤만석이 하나뿐인 눈을 들었다.

“이 상태로는 자네가 위험해. 그러니 일단 내가 데리고 있던 대원들과 합류하게.”

“선배님은요?”

“나는 총수님을 모시는 일에만 집중하지. 장 비서의 능력이 예상 밖이어서 대원 한 명만 있으면 충분할 것 같다.”

윤만석이 의견을 낸 직후였다.

“장만섭 비서와 곽대출 이사는 해군특수작전부대 출신입니다.”

황성규가 설명을 덧붙이는 것처럼 말을 건넸고,

“그야 알고 있었지.”

윤만석이 다시 답을 꺼내놓았다.

“오늘 크레인 위에서 회장님께서 묶은 매듭이 그쪽에서 사용하는 매듭법이었습니다.”

그러나 황성규가 다시 내놓은 말에 윤만석은 고개를 갸웃할 뿐 입을 열지 못했다.

“천천히 알아봐야겠지만, 능숙한 솜씨였습니다. 그리고 총수님을 보호하시겠다니 참고로 알려드립니다. 이번 교통사고는 분명 계획된 일이었습니다. 동선이 그렇습니다.”

“기사의 신원은?”

“현재까지는 나온 게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작업하는 방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일종의 경고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윤만석은 먼저 무거운 신음을 쏟아냈다.

“그래도 계획을 계속 진행할 생각이겠지?”

“제가 멈추면 너무 많은 사람이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도 저들의 욕심을 위해서 말입니다.”

재미없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윤만석은 입맛을 다셨다.

“가보겠네. 하나만 부탁하자.”

“말씀하십시오.”

“총수님께 더는 해가 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황성규의 답을 들은 윤만석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그락.

황성규의 오피스텔에 묘한 소리가 울려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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