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97화 (97/315)

# 97

097.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1)

이런저런 의논이 많았지만, 결국 저녁을 먹고 난 뒤에 천호득과 이은명, 장만섭을 지경병원으로 이송하기로 했다.

운전기사 역시 이은명과 비슷했다.

꽤 충격이 큰 교통사고에서 그는 목 뒤가 뻣뻣하다는 증상을 제외하고는 아직 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검사에서도 특별한 소견이 나오지도 않았다.

천중명은 그를 조용한 곳으로 불러 마주 앉았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교통사고는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다만, 당시의 상황을 좀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싶습니다.”

고개를 떨구었던 기사가 먼저 고개를 갸웃했다.

“트럭이 브레이크를 한 번만 밟았어도 절대 추돌사고가 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뒤에 또 트럭이 따라오고 있어서 거기에서 멈추느니 진입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트럭이 달려오는 것을 봤습니까?”

“예. 트럭을 보고 나서 급하게 속도를 높이려고 했는데 늦게 우리를 발견했는지 하필이면 트럭 기사가 우리 방향으로 핸들을 트는 바람에….”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전기사가 브레이크를 밟지 않아서 트럭이 방향을 틀어야 했고, 그 짧은 사이에 장만섭이 의자를 젖힐 수 있었으니 천호득은 정말 운이 좋았던 게 분명했다.

“비서실에 이야기해서 휴가를 잡아놨습니다. 저녁에 함께 지경병원에 가서 하루쯤 검사를 더 받고, 한 달 정도 쉬다가 오세요.”

일자리를 잃는가 싶었던지 직원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유급휴가입니다. 급여도 그대로 나갈 거고, 그 뒤에 와서 다시 총수님을 모셔주었으면 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회장님.”

천중명은 그를 향해 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가족들도 많이 놀랐을 겁니다. 교통사고가 쉽게 머리에서 떨어지지도 않을 거구요. 그러니 편안하게 휴가 다녀오고 혹시 조금이라도 불편한 곳이 있으면 바로 비서실에 알려주세요.”

이 말을 믿어야 하나?

그가 멍한 눈으로 천중명의 명치쯤을 바라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돈이 좀 많은 것 말고 이 사람과 천중명이 다를 거 없다. 그런데도 가장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직장을 잃고 싶지 않아서 그는 천중명의 눈을 함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현명하게 대처해 줘서 총수님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자녀분들이 있나요?”

“안식구와 대학 다니는 아들, 고등학생인 딸이 있습니다.”

“좋으시겠네요.”

이건 또 어떤 의미인가 싶었는지 운전기사가 슬쩍 천중명의 눈치를 살폈다.

“학교 다니는 자녀분이 있다니까 휴가 기간에서 주말을 한번 잡으세요. 2박 3일로 강릉에 있는 우리 그룹 휴양소를 정해드릴 테니까 그곳에 다녀오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회장님? 제가 어떻게?”

“비용은 전부 비서실에서 부담할 테니까 꼭 다녀오세요. 거기에서 아내분과 자녀분들에게 말씀하세요.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이 이렇게 챙겨주는 분이라고요.”

울컥 뭔가가 올라왔는지 50 중반 직원의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뒤에 총수님을 부탁드려요.”

“제 목숨을 걸고 모시겠습니다.”

“그럼 안 되죠.”

“네?”

눈물이 쏙 들어간 얼굴로 직원이 반문했고,

“그런 일 없이 모셔주세요. 절대 다치는 일 없이 안전하게 모셔주시면 됩니다. 아셨죠?”

“예, 회장님.”

감정이 이리저리 날뛰는지 운전기사는 아예 또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말이 나온 김에 처리하는 게 좋다.

천중명은 멀찍이 서 있던 비서실 직원을 불렀다.

“예, 회장님.”

“이분과 의논해서 강릉에 있는 우리 휴양소를 예약해 드려. 주말을 이용해서 2박 3일로 하고, 가장 좋은 방을 배정해 드리고, 식사는 어떻게 되지?”

“뷔페가 준비됩니다.”

“세 끼 모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걱정할 것 없겠네. 처리해 줄 수 있지?”

“예, 회장님.”

자리에서 일어난 천중명은 다급하게 따라 일어선 운전기사의 손을 잡아준 뒤에 몸을 돌렸다.

누군가 천호득을 노린 게 분명했다.

윤만석이 움직이고, 황성규가 이미 확인하는 중이라니까 조만간 꼬리가 나올 일이었다.

천중명이 천호득의 병실을 향해 계단을 올라갈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기가 울었다.

유진교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여보세요?”

- 회장님. 용인의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크레인이 꺾이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어떤 일에도 묵직한 음성이었던 유진교가 급하게 말을 전하고 있었다.

- 크레인의 상단을 지지하는 붐대가 꺾인 것으로 보고 받았습니다. 현장 상황이 여과 없이 인터넷을 통해 올라오고 있고, 보도 방송이 그 자료를 방송하고 있습니다.

“피해자는요?”

- 타워크레인 기사가 아직 안에 있습니다. 소방차나 구급대가 도착했다는데 높이가 40미터가 넘다 보니 당장 구조가 어려운 모양입니다.

“일단 출발하고서 전화할게요.”

- 저도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계단을 달려간 천중명은 비서실 직원에게 곽대출을 부르라고 알렸다. 그리고는 천호득의 병실 앞에서 숨을 고른 뒤에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저는 이제 회사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천호득은 물론이고, 이은명과 그 옆에 앉아 있던 허선영까지 아쉬운 얼굴이었다.

“지경병원으로 옮기시면 그리 갈게요.”

“바쁜데 올 거 뭐 있어?”

노인네가 또다시 심통을 툭 병실 바닥에 뿌렸다.

그러나 지금은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윤만석에게 눈인사를 전한 천중명은 “다녀오겠습니다.”하고 병실을 나섰다.

복도에 나섰을 때였다.

“중명 씨.”

뒤따라 움직인 허선영이 천중명을 불렀다.

“다른 일 있는 거 아니죠?”

“용인 아파트 현장에 일이 있나 봐. 거기에 들렀다가 상황 봐서 연락할게. 함께 못 있어서 미안해. 와줘서 고맙고.”

천중명의 급한 느낌을 알아챈 허선영이 예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복도가 아니었다면 안아보고 싶었고, 시간이 급하지 않다면 설명해주고 싶었다.

허선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상태에서 부드럽게 웃어준 천중명은 곧장 계단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회장님?”

곽대출은 2층 계단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용인 현장으로 가!”

“들었습니다.”

둘이서 계단을 날다시피 뛰어서 내려간 뒤에 현관을 향해 달렸으며, 주차장에 세워둔 곽대출의 차에 몸을 실었다.

조수석에 앉았다.

지금은 비서실 직원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뭐 이런 일이 자꾸 생기지? 회장님?”

“나쁜 일은 절대 혼자 오지 않거든. 비겁한 새끼들이 떼로 몰려와서 죽으라고 지랄을 떨지. 그걸 견디고 나면 거짓말처럼 좋은 일이 찾아오는 거고.”

답을 한 천중명은 유진교의 번호를 얼른 눌렀다.

- 네, 회장님. 지금 가는 길입니다.

“상황은요?”

-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구조 헬리콥터가 다가가기도 어려워서 크레인에 있는 기사가 위험한 상황입니다.

끼기기기긱!

구부러진 국도를 향해 급하게 방향을 트는 바람에 천중명의 몸이 휘청했다.

- 방송들이 모두 무리한 공사 일정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인가요?”

그아아앙! 끼긱! 끼기기긱!

그 와중에도 곽대출은 2차선 국도에서 연신 앞차를 추월했다.

- 확인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빠아앙! 빠아-아앙!

맞은편 차들이 거칠게 라이트를 번쩍이거나 요란한 클랙슨 소리로 항의하며 지나가는데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얼마나 걸려?”

“10분 안으로 도착합니다.”

그아아아앙! 끼기기긱!

속도를 더 높인 곽대출의 답이었다.

“10분이면 도착한답니다. 일단 현장에서 뵙죠.”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굳은 얼굴로 앞을 보았다.

“무리한 공사 일정을 비난하는 보도가 있단다.”

“인터넷에 바로 중계된다는데 이거 또 누가 작업한 거 아니겠어? 회장님?”

끼기긱! 빵! 빠아아앙!

“야! 일단 운전에 집중하는 게 좋지 않겠냐?”

“안심하셔, 회장님아!”

하긴 직원이 위험하다는데 더 무슨 말을 하겠나.

천중명은 잠자코 앞을 노려보았다.

**

천중명이 나간 뒤였다.

천호득의 병실은 어쩐지 맥이 쭉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천호득은 심통 난 얼굴이었고, 이은명과 허선영은 눈치를 살폈으며, 윤만석은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시간을 보냈다.

우우웅.

그리고 그때 윤만석의 휴대전화기가 짧게 울었다.

뻑뻑한 분위기였던 참이었다.

다들 시선을 돌린 앞에서 문자를 확인한 그가 대원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TV를 틀어봐. 보도 전문 채널.”

대원에게 지시한 윤만석이 이번엔 천호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용인의 아파트 현장에서 크레인이 꺾이는 사고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처음에는 인터넷에만 중계되었는데 지금은 아예 보도 방송이 현장에서 직접 방송 중이랍니다.”

불쑥 고개가 나온 천호득이 TV를 향해 시선을 주었을 때 화면이 나왔다.

[아-!]

탄식에 가까운 비명이 쏟아지며 거칠게 흔들리는 화면이 크레인을 보여주었다.

[방금 크레인이 좀 더 꺾였습니다. 구조 헬기와 구조대원들이 대피하고 있습니다. 크레인이 계속 꺾이고 있어서 당장 구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기자가 흥분해서 내용을 설명했고, 그 뒤에서 남자들의 거친 고함이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오늘 사고는 입주를 앞두고 내려온 무리한 공사 지시가 원인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현재 크레인에 있는 기사는 42세, 김봉근 씨로 세 딸과 아내가 있고, 노모를 모시고 있어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카메라가 달려가는 것처럼 화면을 당겨서는 기울어진 크레인의 운전석을 보여주었다.

흔들리는 화면 속에서 기울어진 크레인의 운전석이 나왔고, 애처롭게 버티는 김봉근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천호득이 매섭게 눈을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비켜! 앞에 비켜줘!]

고함이 들렸고, 화면이 홱 움직이더니 승용차가 화면에 올라왔다.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이 도착했습니다. 이번에 무리한 공사 일정을 강요한 장본인으로, 현재 방송국과 정부부처에 천중명 회장을 강력하게 처벌하라는 항의가 쇄도하고 있습니다.]

이은명과 허선영이 손을 꽉 잡은 앞에서 화면은 차에서 내린 천중명과 곽대출을 비춰주었다.

천중명은 가장 먼저 근처에 있던 여자에게 다가갔다.

“회장이 저길 뭐 하러 가! 당장 전화해! 얼른 나오라고! 저렇게 했다가 희생자가 나오면 모든 게 회장 책임이 돼!”

천호득의 고함에 윤만석이 얼른 새로운 번호를 누르고는 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

천호득이 고통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앞에서 윤만석은 고개를 잘게 고개를 저었다.

“비서실에 해보겠습니다.”

“유 본부장에게 연락해! 그게 빨라!”

윤만석이 빠르게 번호를 찾아 눌렀다.

**

현장에 도착한 천중명에게 소장이 가장 먼저 다가왔다.

“크레인 기사의 부인이 와 있습니다. 회장님, 일단 뒤로 물러나 계시는 게 좋습니다.”

그의 조언에도 천중명은 우선 울고 있는 크레인 기사의 부인에게 다가갔다.

“우리 남편 좀 살려주세요!”

공포에 질린 여자를 지경건설 임원들이 붙잡고 있었다.

“우선 미안합니다. 구조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건설사 임원들을 제지한 천중명은 김봉근 아내의 손을 잡고 눈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천중명이 의지를 전한 직후였다.

“회장님!”

독이 잔뜩 오른 얼굴로 곽대출이 다가왔다.

“잠시만요.”

천중명은 곽대출과 함께 크레인 쪽으로 걸었다.

오는 길에 휴대전화기를 통해 보았던 것과 실제로 기울어진 크레인을 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끄드드등!

“비켜! 물러나라고!”

“제발 우리 남편 좀 살려주세요!”

또다시 크레인이 기울었고, 남자들의 고함과 지켜보던 크레인 기사의 부인이 울부짖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기울어지고 있어서 구조대원이 올라가라는 건 무리입니다. 저기 보이시지?”

곽대출이 크레인이 기울어진 방향의 아파트 옥상을 가리켰다.

“누가 크레인을 타고 올라가서 기사와 함께 있고, 저기 옥상에 줄을 걸어서 빠져나오는 게 가장 효과적이야, 회장님.”

“남은 시간은?”

“짐작도 못 하겠어. 구조용 사다리로 올려줄 수 있냐고 물었는데 지금은 위험해서 어렵다고 하고.”

그래도 건설 현장을 누볐던 곽대출이 하는 말이고, 함께 훈련했던 도깨비의 의견이었다.

“대출아. 네가 옥상으로 올라가서 줄을 걸어. 내가 크레인으로 올라갈게.”

“무슨 소리야? 내가 크레인으로 올라갈 테니까 회장이 옥상으로 가.”

둘이서 매섭게 눈을 노려본 직후였다.

“정신 좀 차려! 그냥 도깨비가 아니라 지금은 지경그룹 회장이셔, 이 생각 없는 회장님아!”

“마지막 훈련에서 누가 널 지켰는지 잊었어?”

곽대출을 향해 천중명이 독한 말을 뱉었고,

“씨발.”

곽대출이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말을 뱉어냈다.

“설마 여기에서 뒈지거나 하는 거 아니지?”

“선영 씨와 겨우 가까워졌다. 꼴통 재벌도 제대로 해보지 못했고. 건너편에서 로프나 잘 던져. 시간 없다.”

볼을 씰룩했던 곽대출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조용 로프는?”

“저기 있어!”

곽대출과 함께 달리면서 천중명은 재킷을 벗어 던졌다.

“로프 줘봐! 여기!”

직원들이 얼결에 들고 있던 로프를 곽대출에게 넘긴 다음이었다.

곽대출이 둥그렇게 말린 로프를 연달아 넘겨주었고, 그걸 천중명이 어깨에 가로 걸쳤다.

“회장님! 설마?”

“저쪽으로 물러나요! 지금 다른 방법 있으면 말하고!”

건설사 임원들이 황당한 얼굴로 천중명을 바라보았고, 구조대원들이 저 인간들이 뭐하려고 저러나 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신발 그거로 되겠어?”

“갈아 신고 어쩌고 시간이 되겠냐? 올라간다!”

곽대출이 구조용 로프를 어깨에 걸고는 또다시 독이 잔뜩 오른 눈으로 천중명을 노려보았다.

“혼자서 되시겠어?”

“내가 왜 혼자야? 숫자도 못 세는 무식한 도깨비가 옆에 있는데. 오늘 저녁은 함께 먹자.”

고개를 짧게 끄덕인 곽대출이 아파트 건물을 향해 달렸고, 천중명은 곧장 크레인을 향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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