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96화 (96/315)

# 96

096. 다가오는 어둠 속에서 (3)

병실에 앉은 천중명의 휴대전화기가 계속 울었다.

결재가 급한 문자가 몇 개 있었고, 이어서 유진교의 전화도 있었다.

“총수님은 크게 다치신 곳이 없으니까 굳이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 알겠습니다, 회장님. 총수님과 잠시 통화가 가능할까요?

“기다리세요.”

휴대전화기를 내린 천중명은 “유 본부장입니다.” 하면서 천호득에게 내밀었다.

“여보세요? 교통사고에 뭘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 이래서 회사가 돌아가겠어?”

하여간 불쑥불쑥 정나미 떨어지는 소리 하는 데는 천호득만 한 인물도 없었다.

“회장이 있는 것도 불편해. 상황 봐서 평창동에서 봐.”

할 말을 마친 천호득은 떨리는 손으로 통화 종료 버튼을 꾹 누른 뒤에야 휴대전화기를 건네주었다.

“지경병원으로 옮기세요.”

“그럴 게 뭐 있어? 특별히 다친 곳이 없다는데?”

“교통사고잖아요. 후유증이 있을 수도 있고. 며칠 계시면서 검사를 다시 받아보셔야죠.”

“됐어.”

처음 병실을 뛰어들었을 때의 감동을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천호득은 다시 고집스러운 노인네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나직한 노크와 함께 병실 문이 열렸고, 비서실 직원이 들어왔다.

“점심식사를 어떻게 할지 여쭤보러 왔습니다.”

“근처에 어디 불갈비 잘하는 집 있냐?”

질문은 천호득이 던졌다.

“골프장 근처에 몇 곳이 있습니다.”

“그럼 가서 인원수대로 불갈비 좀 포장해 오고, 여분으로 5인분만 따로 싸와라.”

어떻게 할까 하고 시선을 돌린 비서실 직원을 향해 천중명은 고개만 짧게 끄덕여주었다.

“하아, 참! 내가 지시한 걸 회장에게 허락을 다 받네!”

천호득의 타박을 뒤통수에 얻어맞은 비서실 직원이 전쟁터를 빠져나가는 병사처럼 병실을 나섰다.

병실에 있는 천중명과 윤만석, 이은명, 그리고 멀뚱하게 서 있는 대원은 수술 받는 장만섭의 몫으로 그가 갈비 5인분을 주문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거, 달달한 커피 좀 타 와라.”

“예.”

천호득의 지시를 받은 대원이 병실을 나선 다음이었다.

“백화점 지하에 갔을 때 내가 덩치 큰 놈에게 모진 소리를 했었다.”

심통 맞은 얼굴로 천호득은 또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이눔이 그곳에서도 내가 주문한 떡국을 먼저 떠먹는 거야. 그래서 개대가리, 소대가리를 찾았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떡국을 세 그릇이나 처먹더라고.”

평소와 달리 점퍼에 편해 보이는 면바지 차림의 윤만석이 하나뿐인 눈으로 천호득을 바라보는 앞이었다.

햇살이 창틀을 넘어서려고 넘실대는 병실에서 천호득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뒤에 과일 주스를 하나 주문해도 미련한 놈이 빨대를 먼저 꽂아서 처먹고, 아이스크림을 사도 그 분홍색 작은 스푼 있잖아. 그거로 콕 찍어 먹고. 사람이 이상하게 분통이 터지더라고.”

안쓰럽게 바라보는 이은명의 앞에서 천호득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놈이 내게 미련해서 죄송하다고 했어. 마지막에 이젠 꼼짝없이 죽었구나 했는데 의자를 힘으로 밀고 문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던 놈이 내게 한 말이라니까.”

말을 마친 천호득이 “에효!” 할 때 문이 열리고 종이컵을 올린 쟁반을 든 대원이 들어왔다.

실수했다.

대원은 예의를 차린답시고 천호득 앞에 가장 먼저 종이컵을 놓아준 건데 손이 떨리는 그에게는 힘겨운 일이었다.

“너는 생각이 없냐!”

단박에 천호득의 타박이 쏟아져 나왔다.

“손이 떨리는 내 앞에 그냥 종이컵을 놓으면 엎지르라는 거야!”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몇 번이나 입술을 움찔거리던 천호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부러야 그랬겠냐. 얼른 쭉 돌려주고 쟁반에 남은 거를 다오.”

“예, 총수님.”

심통을 냈다가 또 억지로 참는 모습이 이상하게 슬픈데 웃겨 보였다. 감동과 혼란이 존재하는 병실에서 다 같이 달달한 커피를 마실 때였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고 뜻밖에도 허선영이 병실에 들어왔다.

다들 멍한 눈으로 바라볼 정도로 허선영의 큰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네가 어쩐 일이냐?”

“괜찮으세요?”

“커피 마시잖냐.”

달려오는 동안, 걱정이 컸던지 허선영은 단박에 커다란 눈물을 주르륵 떨어트렸다.

“얼마나 마음 쓰고 달려왔으면 저럴까. 이리 와. 우리는 괜찮아.”

이은명이 손짓으로 불러서 허선영을 안아주면서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되나 싶었다.

“누가 보면 내가 죽은 줄 알겠다.”

그러나 천호득은 그걸 또 가만 지켜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너는 나가서 점심 사러 간 놈에게 한 명 더 먹어야 한다고 연락해.”

“예, 총수님.”

대원이 또 바삐 병실을 나섰다.

“회장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직후에 나가는 대원의 뒤를 붙잡는 것처럼 윤만석이 천중명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버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점심은?”

“도착하면 여기에서 먹겠습니다.”

“늦지 마.”

천호득에게 말을 건넨 천중명은 윤만석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일부러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닌데 그가 절뚝이며 걸을 때마다 자그락거리는 묘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멀리 가실 것 없습니다.”

윤만석은 병실 앞의 벤치를 가리켰다.

병실 앞 복도에 있던 비서실 직원 두 명이 대화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양, 조금 멀어진 다음이었다.

“오늘 제 손목과 발목을 이렇게 한 여섯 놈을 청평의 별장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오른손을 들어 들여다본 윤만석이 그걸 또 움켜쥐었다.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 것을 털어내고 총수님과 여행이라도 다닐 생각이었습니다.”

복도를 내려다보며 잔잔하게 말을 털어낸 윤만석이 천중명을 보기 위해 고개를 크게 돌렸다.

“괜히 제게 쌓인 원한 때문에 총수님께 해가 될지 몰라서 놈들을 적당하게 돌려보낼까 합니다. 그리고 허락해 주시면 총수님을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아버지를 용서하셨어요?”

윤만석은 먼저 나직하게 웃었다.

“제가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 교통사고에 수상한 점은 없습니까?”

“아직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청평 별장의 일을 마치면 바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아버지를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천중명은 가볍게 웃었다.

“고맙다는 인사는 내가 해야죠. 윤 실장처럼 믿을 수 있는 분이 생겼는데요.”

“제 인생에서 세 번째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너무 거창한데요?”

둘이서 비슷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나는 수술실에 들렀다가 올라올 테니까 먼저 들어가세요.”

“예, 회장님.”

병실로 들어가는 윤만석을 지켜본 천중명은 수술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벽에 붙은 기다란 의자였다.

복도의 끝에서 힘겹게 내리는 ‘수술 중’이란 불빛에 의지한 채 곽대출이 앉아 있었다.

“뭐 하러 오셨어?”

복도를 슬쩍 본 그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건넨 말이었다.

천중명은 말없이 그의 옆에 털썩 앉아서 다리를 길게 폈다.

“황 선생이 오전에 왔었거든.”

그리고는 오전에 황성규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조용하게 들려주었다.

“이상하게 일이 꼬인다.”

“도깨비가 꼴통 회장을 하는 건데 일이 편하면 그게 이상하잖아.”

“그런가?”

곽대출이 먼저 씁쓸한 눈빛으로 웃었고, 천중명이 비슷하게 따라 웃었다.

둘 다 장만섭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저 믿을 뿐이었다.

장만섭이 악착같이 생명의 끈을 붙들고 살아주기를 말이다.

도깨비라는 이름이 주는 고된 훈련이, 그 처절했던 시간이 그의 삶을 연장해주기를 바라며 말없이 바랐다.

시간이 꽤 흐른 다음이었다.

발걸음이 들리고 비서실 직원이 복도에 들어섰다.

“회장님. 점심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 판국에 밥이 들어가겠느냐마는 그래도 또 천호득이 기다린다.

천중명이 안쓰러운 얼굴로 수술실을 바라본 직후였다.

안쪽에서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녹색 수술 모자와 수술복을 입은 의사 두 명이 걸어 나왔다.

천중명이 먼저 일어섰고, 곽대출이 뒤지지 않겠다는 투로 뒤따라 움직였다.

“장만섭 씨 보호자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의사는 지친 얼굴이었다.

“상태를 봐야겠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근육이 워낙 발달해서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마취가 깨면 중환자실로 옮길 텐데 두 시간은 걸릴 것 같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지친 기색으로 의사가 걸어가자 곽대출이 기다란 안도의 숨을 토해냈다.

“됐다. 가서 밥 먹고 오자. 이따 중환자실에 올라가 보게.”

“예, 회장님.”

비서실 직원을 의식한 곽대출의 공손한 답이 있었다.

**

대략 두 시간 정도 걸릴 거란 예상을 깨고 점심을 먹고 난 직후에 장만섭은 정신을 추슬렀다.

알고 그런 말을 했을 리는 없지만, 천호득의 짐작대로 어지간한 독을 먹어도 화장실에 한 번 다녀오는 것으로 털어낼 인간이 아닌가 싶었다.

중환자실의 면회는 천중명과 곽대출이 들어갔다.

“총수님은 어떠십니까?”

“덕분에 두 분 모두 무사하시다. 고맙다.”

천중명의 답을 들은 장만섭이 커다란 머리통을 돌려 곽대출을 보았다.

“잘했어.”

곽대출의 칭찬을 들은 뒤에야 그가 힘겹게 웃었다.

“운전기사를 조사하셔야 합니다.”

그런 뒤에 그는 조용하게 말을 건넸다.

곽대출을 돌아보았던 천중명은 장만섭에게 고개를 좀 더 가져갔다.

다른 사람이 듣는 것을 염려해서였는데 장만섭이 숨을 쉴 때마다 약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사고 직전에 트럭 기사가 승용차를 똑바로 보고 있었습니다. 작정하고 뒷좌석을 노린 게 분명합니다.”

천중명은 가까이 다가간 상태에서 장만섭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도깨비 출신인 그가 약에 취해 헛소리를 지껄일 리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천호득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려 애쓰고 있었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장만섭에게 천호득을 맡길 때 이렇게 잘해낼 거라 기대하지 못했던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그는 정말 헌신적인 모습이었다.

“저녁이나 내일 아침에 지경병원으로 옮길 테니까 그렇게 알고 쉬어. 다른 걱정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회장님.”

천중명이 고개를 끄덕여주고 상체를 세운 뒤였다.

“한숨 자. 얼른 일어나서 또 총수님 지켜드려야지.”

곽대출이 그의 어깨를 다독여준 뒤에 침대에서 물러났다.

둘이서 조용하게 중환자실을 나온 다음이었다.

“담배 하나 피우자.”

“그러시죠, 회장님.”

천중명과 곽대출은 그렇게 점심에 앉았던 병원 밖을 향해 조용하게 걸었다. 병원을 나선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았고, 함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떤 놈인지 감이 잡히셔?”

“나를 노릴 적은 많지. 그런데 총수님을 노리는 놈이 누군지를 모르겠으니 그게 문제지.”

“천상기는 어떤 거야, 회장님?”

“그 인간은 굳이 이런 위험을 감당할 이유가 없어. 만약 그랬다가는 내 손에 목이 부러질 걸 아니까.”

고개를 갸웃한 천중명은 휴대전화기를 꺼내 황성규의 번호를 눌렀다.

- 황성규입니다, 회장님.

“오늘 낮에 총수님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장만섭 비서가 목격하기로는 충돌 직전에 트럭 운전기사가 승용차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는데 조사를 부탁합니다.”

- 그 점은 이미 조사 중입니다.

“그러셨군요. 고맙습니다.”

-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결과가 나오는 대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둘째 형의 근황도 파악해주세요. 앞으로 어지간하면 동선에서 빠져나가는 일이 없도록 부탁합니다.”

- 그렇게 하겠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이미 조사 중이란다.”

“하여간 빨라요. 믿음직스럽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인 천중명은 담배를 끈 뒤에 벤치 옆의 쓰레기통에 담았다.

“전화기 꼭 가지고 있어. 화장실을 가든, 밥을 먹든 무조건 옆에 둬. 누군가 우리나 총수님을 노린다는 것을 알았는데 방심하다가 당하면 그건 너무 바보 같잖아.”

“예, 회장님.”

엉뚱하게도 곽대출은 모처럼 마음에 드는 일을 발견했다는 얼굴이었다.

“혼자 다니셔도 되겠어?”

“나 말이야?”

“그럼 여기 누가 더 있습니까, 회장님아?”

곽대출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내 앞에 나타나면 모가지를 비틀어줄 건데?”

“그전에 내가 눈알을 파버릴 겁니다.”

비서실 직원이나 이은명이 들었다면 화들짝 놀랄 대화를 둘이서 숨도 쉬지 않은 채 주고받았다.

“이왕이면 숫자가 많았으면 하는 곱다란 바람이 있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니까.”

트럭이 지나가며 흙먼지를 날리는 용인의 병원 앞 벤치에서였다.

터무니없는 대화를 주고받은 뒤에 둘이서 비슷하게 웃었다.

극한 훈련에 나서기 전에 나누던 도깨비들의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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