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94화 (94/315)

# 94

094. 다가오는 어둠 속에서 (1)

황성규와 소파에 앉은 뒤에 부속실 직원이 차를 놓아주고 나갔다.

“무슨 일입니까?”

“회장님. 전에 제가 CIA 출신이라고 말씀드렸던 일 기억하십니까?”

“그야 당연히 기억합니다.”

“제가 한국으로 향할 때 팀원들의 반대가 심했었습니다. 첫 번째로는 무모한 시도라는 의견이었고, 다음으로는 위험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천중명은 커피를 마시며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대계 자금이 표면 금리를 그대로 둔 채 통화량을 줄일 계획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시아 시장은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속에 담긴 개구리 꼴이 됩니다.”

“금리가 올라가는 효과를 노린다는 겁니까?”

“거의 비슷합니다. 달러가 급속하게 빠져나가면서 한국의 금리가 무섭게 치솟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천중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나라가 보유한 달러가 적지 않습니다. 통화 스와프를 체결한 것도 있어서 전처럼 쉽게 시장이 무너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천중명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황성규는 먼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 시장이 폐쇄되면서 한국을 고립하려 하는 것이 시작입니다. 그들에게는 한국의 경제력이 눈엣가시기 때문에 달러의 영향력에서 밀려나기를 바랍니다.”

중국의 변화까지는 계산하지 못했던 천중명은 황성규의 다음 말에 집중했다.

“다음으로 일본이 금리를 올립니다. 엔화를 시작으로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달러당 2천 원 또는 3천 원까지 변하게 될 테고 그때부터 시작입니다.”

“위안화, 엔화, 달러의 순서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견디지 못하는 부동산과 기업이 먼저 팔려나가고, 전기, 가스, 의료 시스템, 공항, 항만까지 산업시설 전반이 팔려나가게 됩니다.”

한국 경제가 그렇게 쉽게 무너질까?

솔직히 천중명은 황성규의 의견에 동조하기 어려웠다.

“욕구가 맞아떨어지는 미국과 중국, 일본에게 한국은 좋은 먹잇감입니다. 위기를 만들어서 싸게 사들인 부동산과 기업들을 나중에 되팔기에 한국만큼 적당한 나라도 없으니까요.”

“계속해 보세요.”

“숨만 쉴 수 있을 정도로 무너져도 대략 10년 뒤에 반드시 일어서는 한국인들의 근면함과 성실함, 책임감을 이용하려는 전략이고, 이미 전에 IMF 사태를 통한 경험도 있습니다.”

이건 또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는데 그렇다고 아직 황성규가 염려하는 부분을 받아들일 정도는 아니었다.

“자동차를 시작으로 한국에 생산시설을 두었던 회사들이 철수할 테고, 기술을 빼낸 회사들은 싸게라도 매각할 겁니다.”

“본격적인 시작은 언제라고 생각하세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틀 전부터 미국이 통화량을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금리 인상이 없다고 하지만, 앞으로 매달 0.25퍼센트의 금리가 인상된 것과 같습니다.”

“흠.”

천중명은 나직하게 숨을 토해냈다.

미국이 금리를 0.25퍼센트 올리면 국내 제1금융권인 은행은 대출 금리를 1퍼센트 이상 올린다.

환율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올릴 때는 과장되게 올리고, 내릴 때는 생색내기용으로 하던 버릇이 있어서였다.

뜨거워지는 물속의 개구리?

천중명은 이제야 황성규가 염려하는 것을 알 것 같았다.

발표를 통해 금리를 올리면 국내 금리가 따라서 올라가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지만, 통화량을 줄여 금리인상 효과를 만들면 숨통이 조이기 직전까지 그걸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걸 제게 말씀하시는 이유는요?”

“회장님께서 이 사태를 막아주셨으면 합니다.”

천중명은 기가 막힌 심정으로 웃었다.

막말로 ‘제2의 IMF 사태’가 온다는 이야기인데 그걸 개인에게 막아달라는 부탁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였다.

“작전을 구상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시장의 움직임을 보시면서 대응해 주시면 저들의 음모를 막을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말씀하신 기회를 위해 한국에 들어오셨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황성규가 묵직한 표정으로 답을 꺼내 놓았다.

“고민할 시간 정도는 주시겠지요?”

“제가 준비한 계획을 설명드릴 시간을 먼저 부탁드립니다.”

천중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터무니없게 들릴지라도 지금까지 공부했던 것들을 현장에서 배울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신가요?”

“네 시간 정도입니다.”

예상보다 길기는 했지만, 그 정도를 못 만들 수준은 아니었다.

“그럼 며칠 내로 연락드리죠.”

“감사합니다, 회장님.”

황성규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

집념의 화신 천상기는 호텔의 객실에서 오늘의 첫 번째 미팅을 시작했다.

“지시를 주시면 바로 작업하겠습니다.”

용인의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쫓겨난 소장은 몸 전체에서 독기를 풀풀 풍기며 천상기에게 각오를 꺼내 놓았다.

“타이밍이 좋아야 해. 사고가 생기자마자 기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그 상황을 다 찍을 거거든. 단숨에 사망사고가 발생하기보다는 죽어가는 장면이 찍히는 거야! 어때? 효과적이지 않겠어?”

“맡겨주십시오. 어차피 타워크레인은 사용 연한이 없어서 제가 중국산 중고를 구입해 놓은 걸 이용하면 됩니다.”

천상기의 눈을 본 소장이 바로 입을 열었다.

“중국은 10년 넘은 타워크레인을 특별 관리하기 때문에 그 시점에 우리나라로 중고가 많이 넘어옵니다.”

“소장은 돈 많이 벌었겠어?”

쓸데없는 말을 떠벌인 소장이 ‘아차!’하며 얼굴을 바꾸었다.

“돌아가신 천봉서 회장님의 지시였습니다. 그렇게 비자금을 조성해서 올려드렸습니다.”

“알았어. 하여간 이번에 저 돼먹지 않은 회장 밀어내면 다시 현장을 맡아. 큰형님께 했던 것처럼? 알지?”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타워크레인 기사도 좀 사연 많은 사람들 있잖아. 노모도 있고, 자식들 바글바글한! 그런 인간으로 골라 봐.”

“예, 회장님.”

“이제 나가 봐.”

자리에서 일어난 소장이 탐욕 가득한 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섰다.

달칵.

문이 닫힌 다음이었다.

천상기는 테이블에 올려진 휴대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어! 나야! 701호로 올라와.”

통화는 짧게 끝났다.

대부업체에 이력서를 들고 빌빌거리는 박무일이 천상기가 있는 방으로 들어올 때까지 대략 5분쯤 걸린다.

“아하!”

천상기는 기분 좋은 탄성을 지르며 화장한 바깥을 바라보았다.

“무슨 염병을 한다고 공사를 야간까지 돌려! 그러니까 무리한 크레인이 기우뚱! 어! 기우뚱하는 거 아냐!”

천상기는 심지어 휠체어 왼쪽으로 상체까지 기울이며 야비하게 웃었다.

“불쌍한 기사가 야간 근무에 시달리다가 죽어요! 신임회장이 무리하게 지시한 공사를 하다가! 그 모습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거지. 국민적 분노? 어? 그런 거 아시나?”

딩동딩동.

한껏 들뜬 천상기의 음성 사이에서 벨이 울렸다.

“젠장!”

깜박 잊고 있었던 천상기는 휠체어의 바퀴를 굴리며 문으로 향했고 억지로 팔을 뻗어 손잡이를 잡았다.

“안녕하셨습니까? 회장님?”

“뭐해? 얼른 들어와.”

마지막에 욕을 잔뜩 퍼먹고 헤어져서인지 박무일의 표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저기 앉아. 필요하면 냉장고에서 뭐하나 꺼내 마시고.”

“괜찮습니다.”

박무일은 직장을 잃은 행색이었다.

힘이 빠진 헤어스타일, 사흘은 입고 다닌 것처럼 후줄근한 정장 차림이었다.

박무일을 들여다본 천상기가 눈과 입술만을 움직여 야비하게 웃었다.

“그래도 당신 불러주는 사람, 나밖에 없어.”

“예, 회장님.”

“어떻게 해? 불편하면 돌아가든가.”

천중명을 흉내 내듯 천상기가 말을 뱉자 테이블을 향해 있던 박무일의 시선이 바로 들렸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회장님을 다시 뵈니 느닷없이 직장을 잃은 제 자신이 비참해서 그렇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어떻게 면담 한번 없이 생계를 자르는 건지….”

“그러게 내가 뭐랬어? 단숨에 죽여야 한다니까 앞 재고, 뒤 재다가 타이밍 다 놓친 거 아냐? 나를 봐요. 양쪽 무릎 다 나갔는데 치료도 못 받아.”

“차라리 고소하시면 어떻습니까?”

천상기는 짜증이 확 올라온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 양반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야, 이 사람아. 내가 직원이면 그게 가능해요. 그런데 형제끼리 그렇게 나오면 가족 간의 일이거니 하고 사람들이 동정하지도 않아.”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처럼 박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애들 동원한 증거라도 나오면 오히려 내가 당하는데 고소를 할 수 있겠냐고?”

“아, 예.”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저축은행 텁시다.”

“예?”

박무일은 말귀를 못 알아먹은 눈으로 천상기를 바라보았다.

“모른척하기는. 금융사고 하나 내라고. 그리고 홍콩으로 가 있어.”

“회장님?”

“적당하게 할 수 있잖아. 큰 금액이 아니라 눈에 띄는 금액으로. 몇 억쯤만. 전혀 우리와 상관없는 계좌로 보내.”

박무일은 이제야 무슨 뜻인지를 알아먹은 눈치였다.

“사고가 연달아 터지는 거지. 신임회장이 아무것도 모른 채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바람에 사고가 연달아 터지는 거야. 어떻게 되겠나?”

“복귀를 준비하시는 겁니까?”

“그렇다고 봐야지?”

“흠.”

나직하게 숨을 내쉰 박무일이 결심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에 해킹 조직이 있습니다. 그쪽에 의뢰하겠습니다.”

“통제가 돼?”

“아마 저축은행을 통째로 털어갈 겁니다.”

“그래. 어차피 그 돈 내가 먹을 것도 아니고. 알아서 잘 해봐. 증거 남지 않게.”

천상기는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준비되면 알려줘.”

“예, 회장님.”

박무일이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자! 다음은 서수미 기자와 오지은!”

천상기는 또다시 휴대전화기를 들었다.

**

병원을 나선 윤만석은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런 일은 또 처음이어서 그는 함께 움직이는 대원을 돌아보았다.

“다른 연락 온 건?”

“여섯 놈 중에 넷을 이미 데려다 놓았고, 두 놈은 기회를 보고 있다는 게 전부였습니다.”

대원의 답을 들으면 정말이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아직은 심하게 절룩이는 걸음으로 주차장으로 향한 윤만석은 세워놓았던 중형승용차의 뒷자리에 올랐다.

부르릉.

운전석에 탄 대원이 시동을 건 직후였다.

“잠깐만.”

출발을 못 하게 막은 윤만석이 휴대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잠시 전화기를 노려보다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울린 다음이었다.

- 여보세요?

천호득의 음성이 자동차 소리를 배경으로 들렸다.

“윤만석입니다, 총수님. 지금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 집에만 있으면 뭐해? 갑갑해서 전에 안 사람 살던 용인 쪽에 바람 쐬러 간다. 칠첩반상 알지? 강된장에 밥이나 먹고 올까 해서.

천호득은 모처럼 기분이 좋은 음성이었다.

- 너는 어디야?

“이제 막 병원에서 나왔습니다.”

- 일없으면 이리 와. 나랑 밥 먹자.

살면서 저토록 인간적인 냄새 가득 풍기는 천호득의 음성을 들을 줄은 몰랐다.

“언제까지 그쪽에 계십니까?”

- 온 김에 저녁 먹고 가야 않겠냐? 모처럼 이 사람이 살던 집에 들르는 거라 달달한 커피도 마시고 천천히 올라갈 생각이다.

마음이 불안하다는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윤만석은 고개를 저었다. 모처럼 가슴 후련하게 나선 천호득의 재미를 굳이 깨고 싶지 않아서였다.

“퇴원하는 길에 전화 드렸습니다. 그럼 총수님, 즐겁게 보내시고….”

윤만석이 인사를 전하는 순간이었다.

콰자자-작!

섬뜩한 충돌음이 전화를 타고 귀를 찢을 것처럼 파고들었다.

“총수니-임! 총수님!”

고함을 지르던 윤만석이 무서운 눈으로 운전석에 있던 대원을 노려보았다.

“용인으로 달려! 용담저수지! 얼른!”

“예!”

부아아아앙! 끼기기긱!

승용차가 요란하게 병원을 빠져나올 때는 이미 전화가 끊겨 있었다.

젠장!

복수니 처벌이니 하지 말고 천호득을 따라갔어야 했다.

마지막에 그의 진심을 알았고, 이제부터라도 그의 말대로 함께 늙어가려던 참이었는데….

“뭐해! 좀 더 밟아!”

고함을 버럭 지른 윤만석은 휴대전화기를 꺼내 천중명의 번호를 눌렀다.

- 네. 회장님 부속실입니다.

전화는 여직원이 받았다.

“회장님께 연락드려요! 총수님께서 교통사고가 난 것 같다고! 비서실과 기획실, 유진교 본부장께도 알려드리고!”

- 여보세요? 실례지만….

“나, 윤만석이야! 서둘러! 용인 별장이라고 하시면 아셔!”

전화를 끊은 윤만석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차장 밖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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