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092. 결국 한 배를 탄 것이겠군요 (3)
천중명은 왼손 검지와 중지로 천천히 눈썹을 매만졌다.
어떤 답을 꺼낼지를 고민한다는 것쯤 눈치 빠른 허세직이 모를 리 없어서 접견실에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저는 솔직히 의원님께서 지경그룹에 모든 것을 걸어주셨으면 합니다.”
모든 것을 걸라고? 뭐를 어떻게?
허세직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제품을 개발해도 대기업에 기술만 뺏기거나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겨우 만든 제품을 수출조차 못 하고 있습니다.”
천중명은 계속 말을 이었다.
“벤처투자 부서를 신설할 계획입니다. 가능성 있는 개발에 과감하게 투자하고, 그들이 원한다면 개발에 함께 참여하거나 판로를 만들어 줄 생각입니다.”
“투자도 할 생각인가?”
“1조쯤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른침을 삼켰던 허세직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수습했다.
“의원님께서 힘겨운 개발자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들의 제품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하시는 겁니다. 실적이 나올수록 능력을 인정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익의 회수는? 이자라든가, 그런 게 세면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어.”
“투자입니다. 지분 참여를 기본으로 할 생각입니다. 그 외에 지경그룹의 기술이나 유통망을 이용하게 될 때 지분을 좀 더 요구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최대 40퍼센트 이상을 소유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수익이 나겠나?”
“온전히 의원님의 능력에 달리지 않겠습니까?”
허세직이 두 번째로 마른침을 삼켰다.
“1심에서 집행유예 이상의 형이 나오면 항소하지 마시고 먼저 의원직을 사퇴하십시오.”
번득하고 허세직의 눈이 움직였는데 천중명은 그런 것에 전혀 주눅 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새로 시작하십시오. 다음 선거까지 3년 동안 봉사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시고, 실적을 만들어 내시면서 해외에 인맥과 인지도를 쌓으십시오.”
“그래서 내게 남는 게 뭔가?”
“잘못을 인정하고, 바닥에서 다시 시작해 총리에 오른 정치가가 되시겠죠.”
달려드는 탐욕 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느라 허세직은 대꾸를 꺼내지 못했다.
“부담스러우시다면 약속했던 대로 사외이사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내게 원하는 게 뭔가? 총리가 된 뒤에 바라는 것을 말해보게.”
천중명은 허세직을 향해 똑바로 시선을 들었다.
“정당한 제도로 기업을 지원하고, 불공정한 거래를 응징하며, 경쟁력 있는 기업을 키워내는 정당과 정부.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자네는 정말 그런 세상이 올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의원님이 하시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대신 제가 말씀드린 벤처투자 부서에서 조금이라도 잡음이 나오면 모든 것을 잃게 되실 겁니다. 부당지원이나 야합, 편법은 아예 잊으시는 게 좋습니다.”
“흐음.”
평소 같으면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고 화를 냈을 허세직이 신음을 토해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꾸기는 어렵겠죠. 시기하는 이들도 나올 겁니다. 단숨에 없앨 수 없는 기득권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벤처투자를 성공시킬 인물로 의원님만 한 분이 또 있겠습니까?”
“나에 대한 대우는?”
“우리 주력인 건설의 대표이사 회장과 같은 대우를 해드리겠습니다.”
허세직이 붉은색 넥타이의 목을 매만졌다.
“발표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의원직에서 물러날 때 직접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희한하게 이런 사람들은 기자들 앞에 서는 걸 좋아한다.
허세직의 반짝이는 눈빛이 그 증거였다.
“고민하고 답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알았네. 이만 가봄세.”
말을 마친 허세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
황성규는 정신이 쏙 빠질 정도였다.
사무 공간 안쪽으로 다시 방 세 개가 있는 대형 오피스텔이었는데, 공동 공간 한쪽 벽면에는 10대가 넘는 모니터가 시시각각 변하는 수치를 표시하고 있었다.
“팀장님. 시작인 것 같습니다.”
경제 전문가인 한국계 미국인 제임스 김이 키보드를 두드리자 가장 중앙의 모니터에 특별한 수치가 올라왔다.
“특이한 것이 홍콩 쪽에서 지경그룹 계열사에 주문이 몰리는 것인데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상황이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빠릅니다.”
그의 옆 책상에서 함께 모니터를 보던 황성규가 인상을 찌푸렸다.
“주도하는 세력은?”
“아직 계좌를 특정하기가 어렵습니다.”
“흠. 내일 취임식을 앞두고 오늘 갑자기 이런다?”
턱을 매만지던 황성규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우연히 이렇게 된 건지, 아니면 두 세력이 연결된 건지를 모르겠으니.”
어떻게 하겠냐는 투로 문성훈이 황성규를 바라보았다.
“미국 상황은 어때?”
“여전히 통화량을 줄여나가는 분위기입니다.”
“우리가 한발 늦었나? 이렇게 되면 지경그룹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머리가 아픈지 황성규는 이마를 감싼 손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일단 지켜봐. 내일 취임식 끝난 뒤에 뵙고 말씀드려 볼 테니까.”
지시를 마친 그는 몸을 일으켜 가장 왼쪽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성태환의 과거를 파악하는 팀이 하나, 지경그룹과 관계된 주식 거래를 지켜보는 팀이 하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상훈이 있는 정보실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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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전 10시에 지경그룹 신임 회장 천중명의 취임식이 있었다.
확실히 천중명은 달랐다.
화려하고 웅장한 장소를 거부하고 본사의 대강당을 선택한 것이 그랬다.
천중명이 취임사를 할 단상 뒤로 천호득과 이은명, 주식회사 지경의 임원, 유진교, 최만호 등이 앉았고, 계열사 대표들만 참석해 자리를 지켰다.
취임식은 중계 화면으로 각 계열사로 보내지고, 이를 계열사의 임직원들은 사내 통신망을 통해 시청한다.
“지경그룹 명예 회장이신 천호득 총수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따라 휠체어에 앉은 천호득을 유진교가 단상 앞으로 옮겨주었다.
“친애하는 지경 가족 여러분.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습니다.”
천호득은 날카로운 눈매와 카리스마 넘치는 음성과 태도로 준비해 온 A4 용지 다섯 장 분량의 축사를 읽어 내렸다.
대략 요약하면 이제부터 천중명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니 더욱 발전하는 지경그룹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천중명 신임 회장님의 취임사가 있겠습니다.”
자리로 물러난 천호득에게 인사한 천중명은 천천히 단상으로 나왔다.
방송용 카메라와 극히 제한된 인원의 기자들이 바쁘게 셔터를 누르는 앞에서 천중명은 마이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지경 가족 여러분. 새로운 시대에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된 천중명입니다.”
먼저 천중명은 천호득과 함께 지경그룹을 이끌어온 임직원들의 노고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나는 지경그룹이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그 변화의 중심에 직원들이 있다고 믿습니다.”
천호득의 축사 때와는 달리 앞에 앉은 사장단들이 긴장한 얼굴로 천중명의 축사를 듣고 있었다.
“오늘부터 순차적으로 지경그룹의 모든 계약직, 파견직 직원들을 정직원으로 전환하겠습니다.”
천중명의 발언이 사내 통신망을 통해 실시간으로 계열사 전체에 송달된 직후였다.
생산 라인에 있던 계약직과 파견직 직원들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천중명의 발표에 “와아!” 하는 함성을 질렀다.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의 계열사 사장들 앞에서 천중명은 계속 말을 이었다.
“지경 신문고 제도를 오늘부터 도입합니다. 여러분이 일하는 부서에서 일어나는 부조리, 비리, 그리고 제품 결함의 은폐, 비인간적인 대우, 그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모든 내용을 내가 직접 확인하고 그에 합당한 조치를 반드시 취하겠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일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발표였다.
“말도 안 돼.”
중간 간부들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모니터를 들여다보았고, 진짜 저렇게 되는 거야, 하는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직원들이 취임사에 집중했다.
“지경그룹의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 암행어사 제도를 시행합니다. 이는 앞으로 달라져야 할 지경그룹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제도입니다.”
기자들조차 서로를 바라볼 정도로 발표가 주는 놀라움은 작지 않았다.
“부정과 부패, 악습의 고리를 끊겠습니다. 최선을 다한 투자에 실패한 것에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관례라는 변명으로 기존의 악습을 반복한다면, 반드시 그에 따른 처벌이 있을 것입니다.”
직원들이 힐끔거리며 중간 간부들을 돌아보았다.
평소에 바른 행동을 보였던 이들은 몰라도 켕기는 것이 있는 간부들은 표정이 좋지 못했다.
“직원들이 행복한 지경그룹을 만들겠습니다. 그들의 행복이 우리가 생산하는 제품에 담길 때 지경그룹은 발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천중명은 방송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상으로 취임사를 마치겠습니다.”
강렬한 인상을 끝으로 취임사가 끝났다.
단상에서 몸을 돌린 천중명이 천호득에게 인사하는 장면에서 송출되던 화면은 끝났다.
회의실의 가장 뒤쪽에서 지켜보던 곽대출은 그제야 “후-.”하는 숨을 토해냈다.
주식회사 지경의 대표이사 취임서에 사인하는 것도 봤고, 지금까지 함께 출근했었던 곽대출이었다.
그런데 그저 요식행위일 거라 생각했던 취임식을 보며 곽대출은 또 가슴이 뭉클했다.
‘멋있다, 회장님.’
곽대출이 보기에 천중명은 시간이 흐를수록 변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사소한 시선이나 말투에서조차 위엄을 풍겼고, 작은 동작 하나에도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다.
그렇다고 곽대출이나 허선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나?
만약 천중명이 그랬다면 지금의 감동은 절대 없었을 일이었다.
곽대출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몸뚱이가 으스러지는 한이 있어도 천중명의 곁을 지키리라.
그가 각오를 되새길 때였다.
무대 위에서 인사를 마친 천중명이 몸을 돌려 회의장 안을 둘러보았다.
쏟아지는 조명 탓에 눈을 찌푸린 천중명이 마침내 곽대출을 찾고는 둘만 알 수 있는 눈빛을 통해 웃어주었다.
왜 그럴까?
곽대출은 바보처럼 왈칵 눈물이 올라왔다.
**
취임식을 마친 천중명은 허선영과 함께 평창동으로 향했다.
사흘이면 온다던 송순주는 여태 돌아오지 않은 참이었다.
꽃과 와인을 준비한 허선영과 함께 천중명은 저택의 정문을 들어섰다.
계단을 올라 현관에 도착하자 장만섭이 문을 열고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우렁우렁한 인사를 받으며 들어선 거실 앞에 뜻밖에도 휠체어에 앉은 천호득과 이은명이 있었다.
쭉 서 있는 메이드의 가장 왼쪽에서 김순례가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숙여주었다.
“저 왔습니다. 이쪽이 허선영 씨고요. 선영 씨, 아버지세요.”
“안녕하세요? 허선영입니다.”
“들어와.”
투박하게 말을 던진 천호득을 장만섭이 소파로 이끌어주었다.
“안녕하세요? 저기, 이거.”
“꽃이 정말 예쁘다. 그래, 잘 지냈니?”
긴장한 허선영을 다독인 이은명이 그녀를 소파로 안내했다.
“뭘 멀뚱거려? 앉아.”
허선영이 놀란 얼굴로 얼른 자리에 앉았다.
“선영이가 꽃하고 와인을 사 왔어요.”
입술 끝을 늘어트린 천호득이 꽃과 와인을 노려보았다.
그런 뒤에 다시 허선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왜? 뭐가 불편해?”
“아닙니다.”
천호득의 심통을 천중명과 이은명은 이해한다.
내 잘난 아들에게 이 여자가 괜찮을까 싶은 그런 욕심을 말이다.
이은명의 눈짓을 받은 천중명은 화제를 슬쩍 바꾸었다.
“지경갤러리의 이름을 산청재단으로 할까 합니다. 아버지 호를 따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여기 선영 씨가 디자인 쪽을 맡고 있어서 지경그룹과 별개로 산청재단의 로고를 다시 만들까 합니다.”
“그럴 필요가 있어?”
“경영이 아닌 봉사활동이라는 느낌을 주는 디자인이었으면 싶어서요. 괜찮으시면 맡겨보고 싶습니다.”
“그게 되겠어?”
천호득의 시선이 허선영에게 향할 때였다.
주방에 들어갔던 이은명이 차를 가져와 테이블에 올려주었다.
“조금 전에 중명 씨를 바라보시던 총수님의 눈빛을 디자인으로 사용하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면 시안을 몇 개 만들어보겠습니다.”
“내 눈빛이 어땠는데?”
“염려하시는 와중에 자부심이 담겼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해나갈지가 궁금한 눈빛이었습니다. 함부로 말씀드렸다면 죄송합니다.”
“흐헤헤헤헤. 그래?”
천호득의 웃음을 들은 허선영이 “예.” 하고 답을 건넸다.
“오랜 세월 그룹을 이끄시던 연륜에 후대를 바라보고 염려하시는 총수님의 심정을 디자인에 담아보고 싶습니다.”
“크흠. 차 들어. 차. 내가 갑자기 달달한 커피에 빠졌잖아. 이게 위로가 된다니까.”
천호득이 떨리는 손으로 잔을 권했고, 허선영이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마셨다.
“맛있습니다.”
“그렇지?”
“중명 씨가 총수님 말씀을 자주 했습니다.”
“내 얘기를?”
차를 마신 허선영이 건넨 말에 천호득이 부쩍 관심을 보였다.
“책상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총수님께서 쓰시던 책상이 가르침을 주는 것 같아서 못 바꾼다는 말이었습니다. 건강 상하실까 걱정 많이 하고, 또 혹시 결혼 허락하시면 함께 잘 모시고 싶다고.”
먹먹한 눈으로 천호득이 천중명을 돌아보았다.
“뭐,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
그러면서도 그는 또 투박하기 그지없는 투정을 쏟아냈다.
이런 거, 천중명과 이은명, 그리고 장만섭과 김순례는 이미 적응을 마친 일이었다.
천호득이 곧바로 이은명에게 시선을 주었다.
“저녁은?”
“준비됐어요.”
“그럼 저녁 먹자.”
이제는 시선을 주지 않아도 뜻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는지 천호득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만섭이 다가와 휠체어를 움직였다.
“굴비 좋아하나?”
“예, 총수님.”
“갈비는?”
“좋아합니다.”
“그래. 그렇게 가리는 게 없어야지.”
식당으로 향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천호득은 계속 허선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음성만 들으면 구박하는 느낌일지 몰라도, 그의 어깨에 담긴 외로움이 조금씩 녹고 있는 것을 천중명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