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91화 (91/315)

# 91

091. 결국 한 배를 탄 것이겠군요 (2)

일주일이 훅 흘렀다.

오전부터 열기가 피어나는 정원을 바라보며 천호득은 휴대전화기와 연결된 이어셋에 집중하고 있었다.

“결국, 그렇게 됐구만. 회장에게 불똥이 튈 일은 없겠나?”

- 변호사비를 도와달라는 연락이 있었는데 회장님께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변호사비가 없었단 말인가?”

- 명품 백과 시계를 압구정동 중고 가게에 판 모양인데 통장에 들어온 순간에 카드 비용이 빠져나간 모양입니다.

천호득은 쓰게 웃었다.

‘부자 망해도 3년 간다’는 말과 달리 강종환의 집구석은 석 달을 견디지 못한 꼴이었다.

“아들이 있잖은가? 조세원 청장이 그 정도까지 몰라라 하기는 어려울 텐데?”

- 강종환 이사장의 병원비를 감당하는 것으로 도리를 한다고 생각하는 눈치입니다. 게다가 세무조사를 했던 청장이 변호사비를 지원하는 것은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는 일입니다.

“그렇군. 그 집안은 아예 끝난 꼴이로군.”

뜻밖에도 천호득은 그리 후련한 얼굴이 아니었다.

“애들은 어떻게 하기로 했다던가?”

그래도 죽은 큰아들이 남긴 아이들 둘이 마음에 걸려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 총수님. 비밀을 지켜주시겠습니까?

“뭐?”

유진교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라서 천호득은 황당한 표정이었다.

- 회장님의 뜻을 어기고 말씀드립니다. 아이들의 교육비는 천중명 회장이 사비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진 유진교의 말에 천호득은 목이 멘 것처럼 자꾸만 마른침을 삼켜댔다.

- 아파트, 보모, 그리고 교육비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지금 변호사 수준으로 강승애 이사장은 최소 3년, 최대 7년의 징역형을 예상하고 있어서 대학에 갈 때까지는 회장님이 책임지겠다고 합니다.

“회장이란 사람이 한가하게!”

- 말씀드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제가 처음으로 회장님의 뜻을 어겼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약해빠져서야 어디 그룹을 냉정하게 끌어가겠느냐 말이야!”

턱없는 불만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것처럼 유진교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 회장은 요즘 뭐하느라 코빼기도 안 보인다든가?”

- 대학교수 3명에게서 금융, 증권, 경제 이론을 새롭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한다고?”

- 빈말이 아니라 교수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수준이 높은 강의를 소화하고 있습니다.

“흐헤헤헤헤헤!”

자식이 공부한다는 말을 듣기 좋아하는 것은 천호득 역시 예외가 아닌 모양인지 특유의 경망스러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어서 내일부터 시작되는 신문고 제도, 암행어사 제도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 내일 취임식에서 직접 발표하실 계획입니다.

천호득은 고개만 끄덕였다.

“오늘은 이만 하세. 내가 시간을 너무 뺐었네.”

- 예, 총수님. 내일 뵙겠습니다.

종료 버튼을 누른 천호득은 귀에 걸고 있던 이어셋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공부를? 그것도 교수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수준으로?

헤벌쭉 웃은 천호득은 책상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예에. 총수님.”

우렁우렁한 답이 먼저 들렸고, 이어서 장만섭이 서재 문을 열었다.

“내일 취임식에 입고갈 옷을 사러 가야겠다.”

“사모님이 외출 중이신데 지금 바로 나가십니까?”

“내가 그 사람 허락받아야 나가는 사람이냐!”

“모시겠습니다.”

이제는 천호득이 어지간히 인상 써봐야 장만섭이 먹어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는 천호득의 타박을 한쪽 귀로 흘린 채 태연하게 휠체어를 움직였다.

**

곽대출은 원래 막노동판에서 활력을 얻는 남자였다.

용인의 지경건설 아파트 현장에 나타난 곽대출은 안전모를 쓰고 정장 바지를 작업화 안에 집어넣은 차림으로 사방을 헤집고 다녔다.

천중명의 특명을 받은 참이었다.

주인영 과장과 조진삼 대리를 동반한 그는 각 층마다 한 집씩 무작위로 선정해 벽이 보강되었는지, 화장실 변기와 세면대, 타일은 제대로 시공되었는지, 새시는 틀이 맞는지를 꼼꼼하게 살폈다.

“조 대리. 옆집으로 가서 여기에 소리쳐 봐.”

“예, 이사님.”

곽대출의 뒤에서 새로 온 현장 소장이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곽대출이 손에 들고 다니는 대형 해머 때문이었다.

“이사니-임.”

목청껏 외친 조진삼 대리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물 틀어봐!”

다행히 물소리도 나지 않았다.

“윗집으로 가!”

곽대출이 악을 바락바락 쓰자 건너편에서 비슷한 고함으로 “예!”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였다.

드르르르르르.

위에서 무언가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홱!

곽대출이 해머로 머리를 깨버릴 것처럼 노려보자 화들짝 놀란 소장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바닥 보강 공사는 사흘 뒤부터입니다. 그건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

“주 과장. 내용 적어 놔. 그리고 소장님과 연락해서 보강 공사 끝나는 대로 알려주고.”

“예, 이사님.”

주인영이 답을 한 다음이었다.

“야간 공사도 계속하는 거죠?”

“물론입니다.”

“내가 일정이 바쁘면 야간에 확인하러 와도 되는 거죠?”

“그러셔도 됩니다, 이사님.”

그제야 곽대출은 대형 해머를 어깨에 걸친 채 걸음을 옮겼다.

“거 좀! 회장님께서 이리 관심 두시고 지원해 주시는데, 소장님 평생토록 이곳에 입주한 분들이 고맙게 생각하는 그런 집! 예? 그런 거 한 번 제대로 지어주세요!”

문을 나서던 곽대출이 다짐처럼 현장 소장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소장은 얼이 빠진 얼굴이었는데 주인영은 눈에 피어오르는 하트를 감추려고 애쓰고 있었다.

**

천상기는 오피스텔에서 세 명의 남자와 함께 있었다.

“이 인간이 곽대출, 여기 이놈이 장만섭이, 그리고 여기 이 여자가 허선영, 이 여자는 주인영.”

그가 사진 네 장을 테이블에 펼쳐놓고는 함께 앉아 있던 남자 셋을 돌아보았다.

“지경그룹 회장은 몰라도 주변 인물은 그리 어렵지 않잖아? 여기 곽대출이란 인간이 워낙 독종이라서 조폭 애들 열여섯을 혼자 감당하거든. 그러니까 주변의 주변, 여자들을 먼저 손대자는 거다. 알겠어?”

남자 셋이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특히, 허선영은 납치를 하든, 물뽕을 먹이든 어떡해서든 뽕을 넣어. 그다음에는 알지? 보도가 터지면서 한 방에 쫙 끝나는 거지.”

“장만섭이는 여자가 없습니까?”

“오지은이라고 처음 만나서 잠자리 갖는 데는 귀신같은 년이 있거든. 그년이 약을 쓸 거야. 그렇게 되면 천중명 회장 주변에 뽕쟁이들이 잔뜩 있었던 게 되지.”

시선을 교환한 남자들이 다시 천상기에게 집중했다.

“혹시 모르니까 당분간 이 곽대출이란 놈을 따라다녀. 이놈이 최근에 주인영과 시간을 보내느라 늦게 다니거든. 이놈 동선을 파악하면 주인영은 무조건 걸린다.”

“곽대출이 혼자 떨어지면 작업해도 되겠습니까?”

“사람 말을 뭐로 들은 거야? 혼자서 열여섯을 상대하는 독종이라니까! 괜히 자만심에 일 그르치면 그 뒤에 너희는 다 죽어. 천중명 회장 말을 들어봤을 거 아냐?”

“그런 게 아니고 말씀입니다. 곽대출이에게도 약을 쓰면 어떻겠냐는 말씀이었습니다.”

천상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쓸데없는 짓 말고 따라다니면서 헤어진 이후에 주인영을 노려.”

“알겠습니다.”

“가 봐.”

“예, 회장님. 편히 쉬십시오.”

세 놈이 인사를 마치고 방을 나선 다음이었다.

천상기는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황 박사. 나야. 마카오 날씨 어때?”

상대가 뭐라고 했는지 천상기가 히죽 웃었다.

“내일이 신임 회장 취임식 아닌가? 우리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지?”

휠체어에 기댄 천상기가 야비한 표정으로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그래! 내가 이쪽에서 밀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시작해. 이번에 잘 되면 황 박사는 돈 잔뜩 벌고, 나는 나대로 자리 되찾는 거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 아니겠어요?”

천상기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장만섭과 함께 백화점에 들른 천호득은 그래도 지경그룹의 총수였다.

전용 엘리베이터를 통해 VIP라운지에 올라가기 무섭게 백화점의 사장이 달려 나왔고, 퍼스널 쇼퍼의 도움으로 이은명을 위한 정장을 한 벌 구입했다.

“살다가 여자 옷을 살 때가 다 있구만.”

쇼핑백을 노려본 천호득은 별로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여기 이놈 양복도 하나 골라줘.”

그런 뒤에 그는 고개를 돌려 장만섭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총수님. 저는 맞춤 양복이 아니면 몸에 맞는 게 없습니다.”

설마 하는 눈으로 고개를 돌린 천호득에게 백화점의 쇼퍼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저 정도 사이즈가 없단 말이야?”

“죄송합니다, 총수님.”

“아하, 참! 너는 어떻게 된 게 평범한 게 없어? 그럼 속옷은 어떻게 해? 그게 말이 돼?”

“속옷은 이태원에 매장이 따로 있습니다.”

“에이, 먹는 것 말고는 천하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

짜증을 털어내 봐야 없는 양복이 생기는 것은 아니어서 천호득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사장과 매니저가 눈치를 살피는 앞에서 뉘 집 개가 짖느냐는 표정으로 장만섭은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지하에 가서 뭐 좀 먹고 가자.”

옷을 못 사준 것이 아무래도 아쉬운 모양인지 천호득이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고,

“예에, 총수님.”

장만섭이 기쁘게 받았다.

**

윤만석은 잡아먹을 것처럼 매서운 눈으로 오른손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그락.

세상 참 좋아졌다.

특수 재질로 만들어진 그의 오른손 손가락이 천천히 구부러져서 공을 집는 게 그랬다.

“자꾸 연습하시면 반응이 빨라집니다.”

침대 옆에서 지켜보던 유헌우가 다독이듯 말을 보태주었는데 주변에 있던 대원들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바이오닉 의수와 의족이 보험이 안 돼서 그렇지,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는 수준이니까 자꾸 훈련하세요.”

“감사합니다, 원장님.”

“현찰이신데 최선을 다해야지요.”

하여간 감동 깨는 데는 유헌우 이상 가는 의사는 없지 싶은 답이 있었다.

“자, 그럼 가 볼 테니까 혹시 이상 반응이 있으면 바로 오셔야 합니다. 대략 3개월 정도를 넘기면 안심해도 됩니다.”

말을 마친 유헌우가 후련한 표정으로 병실을 나섰다.

“애들은?”

“계속 감시하고 있습니다. 말씀만 하시면 바로 별장으로 데려다 놓겠습니다.”

“내일 회장님 취임식인데 좋은 날을 망칠 필요는 없고, 모레로 하자.”

“여섯 놈이나 돼서 전에 함께 일하던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윤만석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성규가 조용한데?”

“최근에 전혀 움직임이 없습니다.”

“정보를 다루는 것만 알지, 아직 자체적으로 일을 해결할 조직은 구성하지 못한 모양이다. 혹시 모르니까 주변을 잘 살펴줘.”

“예.”

지시를 마친 윤만석이 다시 시선을 의수로 떨어트렸다.

자그락.

마치 손가락의 뼈마디를 꺾을 때 나는 듯한 소리가 병실에 나직하게 울렸다.

**

천중명은 오후에 한 시간씩 공부를 위해 시간을 빼냈다.

돈이 좋긴 좋아서 대한민국 최고의 교수로부터 일대일 강의를 듣는 수업이었다.

주로 지경경제연구소의 리포트를 읽고 난 뒤에 궁금했던 점들을 질문하면 교수가 설명해 주는 방식이었다.

누구의 어떤 이론인지 이름을 외우기보다는 도대체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어떤 해결 방법이 있는지를 배우는 것이 좋았다.

“고생하셨습니다.”

“별말씀을요. 이해가 빠르시니 오히려 이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준비를 하면서 저 역시 새로 공부할 수 있어서 좋고요.”

수업을 마친 천중명의 인사를 교수가 넉넉한 대꾸로 받았다.

“회장님은 정말 이런 공부를 전에 하신 적이 없습니까?”

천중명은 가볍게 웃기만 했다.

“기본이 워낙 탄탄하게 잡혀 있어서 늘 궁금합니다. 적어도 학사 이상의 수준은 충분히 될 것 같아서요. 아, 학력을 비하하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이전의 몸일 때 대학을 다녔다는 말을 할 것도 아니어서 천중명은 “괜찮습니다.” 하고 가볍게 넘겼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그럼 다음 주에 뵙지요.”

교수와 함께 회의실을 나선 천중명이 집무실로 향할 때였다.

“회장님. 허세직 의원이 접견실에서 기다리십니다.”

부속실 직원이 나직하게 허세직의 방문을 알려주었다.

약속 시각보다 20분쯤 일찍 왔는데 그걸 또 기다리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천중명은 바로 접견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허세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좀 일찍 와서 방해된 건 아닌가?”

“괜찮습니다. 앉으시죠.”

기름 바른 머리에 짙은 양복, 붉은색 넥타이를 매고 있어서 겉보기에 그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부속실 직원이 차를 가져다주어서 잠시 날씨가 어떻고, 요즘 정국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도 허세직의 눈이 얼른 본론을 꺼내주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의원님. 재판은 어떻게 되실 것 같습니까?”

“아무래도 집행유예가 나올 모양일세. 대법원까지 끌고 간다고 가정하면 1년 반 안에 의원직을 상실하게 되지 싶어. 국가를 위해 한평생을 산 내게는 너무 가혹한 형벌이지.”

허세직이 정치하는 사람 특유의 뻔뻔한 표정으로 답을 꺼내놓았다.

“겸직 조항 때문에 그런데 대법원까지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까짓 거, 사직 권고가 전부인데 조용하게 처리하면 되지 않겠나?”

하여간, 돈이든 권력이든 가진 자들은 이상하게 규정이나 법을 우습게 아는 느낌인데 허세직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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