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090. 결국 한 배를 탄 것이겠군요 (1)
천중명은 곽대출에게 천호득의 지시를 알려주었다.
“그럼 제가 알아서 돌아봅니까, 회장님?”
“본부장과 기획실장을 불러서 의논하기는 하겠는데 이번 기회에 아예 암행어사 제도를 본격화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까 계획을 바꿔 봐. 일단 너만 알고 있고.”
또 하루가 기울어진 시간이었다.
선팅된 집무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볕이 부드러운 느낌으로 카펫 바닥에 펼쳐져 있었다.
“신문고 제도는 다음 주부터 테스트에 들어갑니다.”
“그래?”
“이메일 작성자의 이름을 확인할 아이디는 두 개만 만들었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암행어사 곽대출. 요렇게 두 사람입니다.”
곽대출이 뿌듯한 표정을 짓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유 본부장과 최만호 기획실장, 그리고 안 부장부터 주인영 과장은 내용만 읽을 수 있게 처리해놓았습니다. 말이 나가면 아무튼, 이렇게 여섯 명 중 한 명이 떠들었다고 보면 됩니다.”
천중명은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단단히 준비하고 말 새나가지 않도록 특히 조심해.”
“예, 회장님.”
이제는 제법 잘 어울리는 셔츠와 넥타이, 정장 차림의 곽대출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젤도 발랐네?”
“아, 요거?”
곽대출은 머리를 슬쩍 매만지며 흐뭇하게 웃었다.
“나한테 과분하긴 한데 또 내가 믿음직스럽다나, 뭐라나? 음하하하하!”
놈의 넉살에 천중명이 웃음을 터트릴 때였다.
지이잉.
천중명의 휴대전화기가 짧게 울었다.
[성태환 씨에 관한 기본 조사가 끝났습니다. 장소를 말씀해 주시면 보고 드리러 가겠습니다.]
황성규의 보고였다.
[회사에 있습니다. 6시쯤 퇴근할 것 같습니다.]
천중명이 답을 넣었고,
[20분 안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역시나 황성규의 답신이 있었다.
“황 선생이 이리 온단다. 실종된 아버지에 관해서 알아봐 달라고 했거든. 너는 오늘 저녁도 교육이냐?”
굳이 듣지 않아도 미소가 달린 놈의 표정에 답이 있었다.
“그럼 봐서 황 선생의 보고는 내일 알려줄게.”
“예, 회장님.”
계면쩍은 얼굴로 답을 한 곽대출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인사를 남기고 방을 나섰다.
20분 정도의 여유를 천중명은 리포트를 마저 보는 데 사용했다.
일이 많은 만큼 알아야 하고, 배워야 할 것들 역시 끝이 없는 느낌이었다.
똑똑똑.
노크와 함께 부속실 직원이 들어왔다.
“회장님. 황성규 씨의 방문입니다.”
“들어오시라고 해요.”
황성규는 배낭을 오른쪽 어깨에 걸친 모습으로 집무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어서 오세요. 그리 앉으시죠.”
시원한 음료를 부탁한 천중명이 소파로 앉았고, 음료를 마시며 가벼운 안부를 주고받았다.
“조사결과가 많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안부 끝에 황성규는 배낭에서 얇은 서류철을 꺼내놓았다.
“성태환 씨를 조사하면서 느낀 점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료를 삭제했다는 것입니다.”
서류철을 보던 천중명은 시선만 들었다.
“성태환 씨는 무한동력을 연구하는 개발자였습니다.”
“무한동력이요? 그게 사기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아니었습니까?”
“성태환 씨의 연구를 그렇게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최초 가동에 전기나 화석 연료를 사용하더라도 이후에 공기 압축이나 전기를 자가생산하는 방식의 동력 생산이 당시에는 획기적이라고 평가받았으니까요.”
무한동력 아니라 세상에 없는 연구라고 해도 결국은 가족을 불행에 빠트렸다는 생각에 천중명은 입술 한쪽을 비틀었다.
“자료를 보시면 성태환 씨는 모두 여섯 개의 특허를 획득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개발한 기계는 3일간 동력이 유지되는 놀라운 발전이 있었습니다.”
천중명은 그제야 서류철을 넘겨보았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세 장의 증명사진이었다.
“주민등록증 발급에 사용된 사진들입니다. 나이별로 있어서 바로 알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뒤에 특허 관련 기록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아버지구나.
덤덤할 줄 알았는데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아련하게 울렸다.
“성태환 씨는 벤처캐피털과 개인으로부터 모두 270억 원이라는 벤처 지원 자금을 투자받았습니다.”
결국, 그 빌어먹을 돈이 문제였던 건가?
천중명은 서류철에서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투자금을 모두 현금화해서 빼돌린 뒤에 잠적한 것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사건은 기소중지 상태이고 역시 서류에 당시의 기사와 고소장, 사전 구속영장까지 모두 첨부해 두었습니다.”
천중명의 표정을 살핀 황성규가 아쉬운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시에 일했던 직원 두 명 찾았고, 통화했습니다. 회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고생을 많이 했던지 말을 꺼리는 분위기였습니다. 우선 준비한 것은 여기까지고, 나머지는 시간을 두고 더 알아보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자료를 삭제한 것 같다고 하셨는데?”
천중명은 애써 만든 덤덤한 얼굴로 보고서를 덮었다.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던 참입니다. 이 사건에 관한 기사나 보도가 전혀 포털 자료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기사의 경우, 신문사에서 직접 열람해 복사해야 할 정도로 인터넷에서 기록을 삭제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잠적했다는 성태환 씨가 했을 수도 있잖습니까?”
“통상 잠적한 사람은 그런 식으로 뒤를 정리하지 않습니다. 신분을 세탁하는 것이 빠르죠. 시간을 두고 살펴보겠습니다.”
확실히 황성규는 이런 사람이 CIA 출신의 정보통일까 싶을 정도로 털털한 외모였다.
“황 선생님. 괜찮으면 그룹발전본부에 자리를 만들어 드릴 테니 그쪽에서 일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분위기를 바꿀 겸 해서 천중명은 전부터 생각하던 제안을 꺼내놓았다.
“알 만한 사람들은 어차피 황 선생님의 존재를 다 알 테고, 그럴 바에는 아예 제대로 지원을 받으며 일하시는 게 어떤지 해서 드리는 제안입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 점은 고민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진중한 점도 나쁘지 않았다.
“그럼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필요한 정보가 있으시면 언제고 연락 주십시오.”
황성규가 인사를 마치고 집무실을 나선 다음이었다.
“후-.”
천중명은 답답한 심정을 털어내고서 다시 보고서를 천천히 다시 살폈다.
270억을 위해 아픈 아내와 어린 자식을 버리고 잠적했다는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들르고 싶었던 곳도 있고.
천중명은 몸을 일으켜 재킷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회사를 나선 천중명은 운전 직원과 단둘이 분당의 납골묘에 들렀다.
먼저 꽃을 샀고, 다음으로 복도를 걸어 어머니를 만났다.
아버지 소식 들었습니다.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 않네요.
재벌 원하지도 않았고, 어머니랑 조금 더 여유롭게 사는 게 꿈이었는데 이러고 있어요.
대략 30분쯤 천중명은 가슴 속에 있던 이야기들을 주절주절 떠올렸다.
마치 어머니에게 전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대강 전할 말을 다 털어놓은 천중명은 어머니의 영정을 향해 슬프게 미소 지었다.
갈게요, 어머니.
지금처럼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들를게요.
밖은 이미 반쯤 어둠이 깔려 있었다.
그냥 돌아서기 서운해서, 잠시 이곳에 더 머물고 싶어서 천중명은 납골 공원의 벤치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다 때려치운답시고 지리산에 내려갔다가 이제는 지경그룹의 회장이 되어 이러고 앉아 있는 꼴이었다.
뭐 급해서 그렇게 일찍 가셨을까?
젊은 시절 병원에서 다 보냈는데 조금이나마 호강이라는 것도 해보고 가시지.
“후.”
다 피운 담배를 벤치 옆의 재떨이에 넣었을 때였다.
지이잉.
주머니 안에 있던 휴대전화기가 짧게 울었다.
하여간, 쉴 틈을 안 준다.
천중명은 얼른 휴대전화기를 꺼내 내용을 살폈다.
[허세직 의원이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아들을 병원에 입원시켰노라고 발표했고, 당분간 자숙하며 반성의 시간을 보낼 계획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기획실장 최만호의 문자였다.
허세직이 자숙하며 반성하는 시간을 보낸다는 말이 천중명에게는 힘을 되찾을 때까지 이를 날카롭게 갈며 지내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이럴 줄 알았다.
허세직은 절대 천중명의 제안을 거절할 사람이 아니었다.
천중명은 픽 웃으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제 얼굴 볼 때가 되었나, 박승양 회장?”
그리고 그를 만나는 순간부터 천상기, 너는 진짜 큰일 나는 거야.
천중명이 다가가자 운전 직원이 공손하게 뒷문을 열었다.
**
최만호는 올라온 보고들을 앞에 두고 눈살을 찌푸렸다.
국회의원과 언론사 간부들을 통해 들어온 취업청탁, 부서 이동 요청이 오늘만 다섯 건이었고, 납품과 승진 청탁이 또 열 건이 넘었다.
관례적으로 해왔던 일이다.
거부하기 어려운 명단을 추려서 내려주면 알아서 처리되었던 일이기도 했다.
최만호는 신임회장 천중명의 눈빛과 그가 아파트 현장을 방문했을 때 건넸던 말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당신들은 썩었어.”
그때 섬뜩했던 심정이라니.
그런데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기업을 하겠다는 사람이 정치권과 언론을 무시하며 독불장군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것도 재계 서열 3위의 위치를 차지한 지경그룹이?
최만호는 결국 청탁 서류들을 들고 그룹발전본부의 유진교를 찾아 나섰다.
퇴근 시간 직전인데도 그룹 발전본부는 숨이 막힐 정도로 업무에 집중하는 분위기였다.
“안에 계시지?”
“예, 실장님.”
노크와 함께 최만호가 들어서자 책상에서 서류를 보던 유진교는 눈만 들었다.
“의논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그리 앉지.”
몸을 일으킨 유진교가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취업과 납품 청탁들입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방침이 있었으면 싶습니다.”
“자네 생각은 어때?”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회장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실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계속 외면했다가는 후폭풍이 적지 않을 것 같아서 염려도 됩니다.”
유진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먼저 결정을 내려야지. 회장님의 방침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옷을 벗는 한이 있더라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씀드릴 것인지.”
“그런다고 회장님께서 뜻을 굽히시겠습니까? 말이 나온 김에 말씀드리는데 암행어사 제도와 신문고 제도에 대한 계열사 임원들의 염려와 불만이 예상외로 거센 상황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의외로 유진교는 태평한 얼굴이었다.
“자네는 회장님께서 냉동창고와 지경건설, 저축은행, 시행사의 임원들을 전부 교체한 의도가 뭐라고 생각하나?”
“본부장님. 내부적으로 임원을 교체하는 것과 외부의 환경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천상기 회장이 존재하는 한 그쪽으로 임원들이 쏠리는 것도 염려하셔야 합니다.”
“자네가 기획실장에 계속 앉아 있는 이유를 잘 생각해.”
유진교의 답에 최만호는 입을 다물었다.
냉정한 유진교와 차가운 최만호의 대결처럼 보였다.
“결국, 한 배를 탄 것이겠군요.”
“지금껏 대한민국에 없었던 그룹을 만드는 일이니까. 실패하면 자네와 나도 회장님과 함께 손가락질 받으며 사라질 테고, 성공하면 새 길을 연 주역쯤 되지 않겠나?”
“자신 있으십니까?”
“우리야 월급쟁이 아닌가. 오너의 뜻에 따르지 않을 거라면 이 자리에 있을 이유도 없지.”
최만호가 입술에 힘을 꾹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경건설의 부회장을 추천했을 때 독불장군은 회장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고 하셨던 말씀과 같군요.”
“내일 의논드리고 회장님이 지시하는 방향대로 처리해. 청탁을 거절하느라 자네가 감당해야 할 곤란함은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것 잊지 말고.”
“예, 본부장님.”
답을 하는 최만호는 홀가분해진 얼굴이었다.
**
홀로 들어선 천중명을 삼성동의 빌라는 사람 사는 모습으로 반겨주었다.
식기건조기에 가지런하게 서 있는 접시와 컵, 그 옆으로 누운 포크와 수저, 싱크대 옆으로 잘 말려놓은 행주까지, 혼자 지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정겨운 풍경이었다.
곽대출은 암행어사와 신문고를 준비하느라 정신없고, 허선영은 지경화장품에서 의뢰한 첫 프로젝트를 위해 여념이 없었다.
각자 천중명이 맡긴 일에 최선을 다하는 상황이어서 이렇게 집에 있는 것이 오히려 미안할 지경이었다.
간단하게 씻은 천중명이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홈 바에 올려놓은 천중명의 휴대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 날세.
“예. 기자회견 소식은 들었습니다. 고민이 많으셨을 텐데 뜻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역시 알고 있었군. 허허허.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허세직의 조심스러운 음성이 건너온 다음이었다.
“복귀하시기 좋은 자리를 알아보겠습니다. 당장은 그렇고 일주일 정도 뒤에 연락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때 뵙고 말씀하시지요.”
- 그래 주겠나? 그럼 기다리겠네.
당장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꿀꺽 삼킨 허세직이 아쉽게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몸을 일으켜 서재로 들어갔다.
알아볼 것이 있었고, 그에 따른 자료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인터넷을 통해 지경경제연구소의 리포트 세 개를 읽고 났을 때였다.
허선영이 돌아왔다.
밤 11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힘들지?”
“언제 왔어요? 저녁은요?”
“분당 쪽에서 간단하게 먹었어. 뭐 마실 거 줄까?”
“아뇨, 괜찮아요.”
허선영이 답을 한 다음이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천중명의 품을 파고들었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그래.”
허선영의 힘겨웠을 하루를 위로해주고 싶어서 천중명은 그녀의 머리를 쓸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