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89화 (89/315)

# 89

089. 갖출 것을 갖춘 뒤에 (2)

행복했던 밤을 밀어내고 일상적인 아침이 하루의 문을 열었다.

송순주가 없는 아침이어서 천중명과 허선영이 일찍 일어나 함께 샌드위치를 준비했다.

“어?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도망갈 생각하지 말고 함께 아침 먹어.”

“예?”

“샌드위치 준비하는 중이니까 씻고 나와 함께 출근하자고.”

새벽 2시가 다 돼서 들어온 곽대출이 “예.” 하고는 샤워실로 빠르게 움직였다.

“우리도 오늘은 좀 늦게 들어올까?”

“그럴까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허선영의 입술에 천중명이 얼른 입을 맞췄다.

놀란 그녀가 샤워실 방향을 바라보았는데 곽대출은 다행히 없었다.

셋이서 함께 식사했고, 바쁘게 준비한 뒤에 천중명과 곽대출이 먼저 집을 나섰다.

“어제는 뭐 하느라 그렇게 늦게 왔어?”

곽대출이 운전하고 천중명이 뒤에 탄 채 둘만 하는 출근이었다.

“재즈 바에 가지 않았겠어, 회장님. 하! 좋더라고. 거기에 처음부터 내가 아는 음악이 나오는데!”

어젯밤의 행복을 곱씹는 곽대출을 방해하기 싫어서 천중명은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재즈 바의 이야기가 끝난 다음이었다.

“회장님. 그나저나 강승애는 어떻게 될까?”

곽대출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꺼내 들었다.

“내일 지나서 고발 조치한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구속되지 않을까 싶다. 증권거래법 위반, 금융거래법 위반, 횡령, 배임,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아서. 강종환을 구속하기는 나이도 그렇고 아무래도 강승애가 들어가게 되겠지.”

대강 설명을 마친 천중명은 진지한 얼굴로 곽대출을 향해 다시 말을 이었다.

“아마 이제부터 그동안 알게 모르게 해먹던 임원들이 우리를 노리는 일들이 벌어질 거다.”

설마 하는 눈으로 곽대출이 룸미러를 통해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건설, 저축은행, 시행사가 시작이지만, 다른 계열사에서도 천상기에게 몰려들 인간들이 꽤 있어. 이럴 때 네가 준비하는 일들이 그들에게 아플 거고, 그럼 너도 반드시 그룹 내에서 타겟이 된다. 잊지 마라.”

“나야 그렇다 쳐도 회장님께 덤빌 놈이 있을까?”

“너를 물고 늘어지는 게 첫 번째, 내가 새롭게 하는 일들이 실패했다고 비난하는 게 두 번째, 그룹 내 비리나 문제점을 엮어서 나를 망가트리려는 게 마지막 단계쯤 되겠지.”

“그룹에서 회장을 노리는 게 가능해?”

천중명은 먼저 픽 웃었다.

“언론이 이번과 거꾸로 움직인다고 생각해라. 지경화장품과 냉동창고의 정직원 전환으로 손실이 발생했다고 떠들고, 다음으로 안 해도 되는 아파트 보강 공사하다가 손실 났다고 흠을 잡겠지. 난 뭘 하든 손실만 내는 사람이 되는 거야.”

“언론이? 광고도 받아야 하는데?”

“우리 편만 있는 게 아니다. 천상기에게 붙는 놈들이 반드시 나온다. 그런 다음에 그룹 내에 문제를 터트려서 내가 책임자라고 몰아가겠지. 그럼 천상기만 남으니까.”

“흐음.”

곽대출이 답답한 심정을 숨소리로 토해냈다.

“그럴 거면 이번 기회에 천상기도 정리해 버리지, 회장님?”

“마지막 기회를 주고 싶었어. 안 그러면 몸뚱이 바뀐 나 때문에 영감님은 아들 둘을 잃는 거니까.”

“하여간 회장님은 너무 마음이 고와.”

“지랄!”

이렇게 마음 편히 대화할 수 있는 곽대출이 있다는 것이 다행인 출근길이었다.

“방심하지 마. 힘으로 노리는 게 아니라 어떡해서든 흠집을 잡으려 달려든다는 것 잊지 말고.”

“예, 회장님.”

승용차는 벌써 회사 앞에 도착해 있었다.

차를 세우기 직전이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그런 것까지 짐작하는 거야, 회장님은? 이럴 때 진짜 무섭거든.”

곽대출이 진심에서 나온 질문을 슬며시 건넸다.

“책을 읽어.”

“책? 읽는 책 말하시는 거야?”

“전에 교수님이 나를 지경그룹에 소개한 이유도 이런 거였다. 틀에 갇히기보다 넓은 곳에서 마음껏 능력을 펼쳐보라는 거였는데 일이 이렇게 꼬인 거지.”

“뭐야? 날 때부터 뛰어났다는 말인 거잖아?”

곽대출을 향해 웃어준 천중명은 또다시 산더미처럼 기다릴 업무를 향해 차에서 내렸다.

**

대나무의 화신 같은 인간 천상기는 휘면 휘었지 절대 꺾이거나 부러지는 인간이 아니었다.

삼성동 사무실에서 쫓겨난 그는 가장 먼저 오피스텔을 구했고, 부티크에 있던 직원들을 불러들였다.

“이제부터 주식 담보 대출을 해야 하니까 조용하게 지점장들 섭외해. 이 바닥 룰은 알지? 가능하면 인수합병이나 작전 걸린 거로 찾아봐.”

우선 송도상인 박승양을 롤 모델 삼아 주식 담보 대출을 시작하기로 한 천상기는, 이어서 천중명과 어울리며 개망나니짓을 하던 인간들의 이름을 추렸다.

“1번은 누가 뭐래도 오지은이고.”

협력사에서 밀려난 대교건설 소문이야 이 바닥에 쫙 퍼진 일이고, 이어서 통화조차 거절당한 뒤에 이를 갈며 벼른다는 말은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빤히 들리는 것들이었다.

“멍하니 당해서 그렇지, 이게 말이 안 되는 상황이거든.”

천상기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한순간에 바뀌냐고? 내 앞에서도 벌벌 떨던 놈이 깡패를 두들기고, 주식도 제대로 모르던 놈이 공매도 주문을 넣는다고? 이게 말이 돼?”

그러면서 그는 또 이번에 천중명이 해고한 임원들의 명단을 추렸다.

“그나저나 적을 너무 만들었어요, 천중명 회장님.”

삼성동 건물을 시원하게 쓰던 것과 달리 오피스텔 안쪽에 따로 만든 공간은 좁았다.

“내가 이대로 찌그러들 줄 알았다면 큰 실수하는 거야. 내게도 숨겨진 무기가 있거든. 이렇게 안 보이는 곳에 있다가 제대로 찔러드리지.”

포기할 줄 모르는 인간 천상기는 야비하게 웃었다.

**

오늘 천호득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움직였다.

“오셨습니까?”

“점심 전이지?”

“예.”

천호득이 뒤를 돌아보자, 이은명이 함께 있는 남자들에게 여유 있게 도시락을 건네주었고, 천호득과 윤만석 사이에도 두 개를 놓아주었다.

“먹자.”

윤만석은 병실에 있던 남자가 가져다준 포크를 왼손에 들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동작이어서 밥을 자꾸만 흘렸고, 반찬도 떨어트렸는데 그건 천호득도 비슷했다.

덜덜 떨리는 젓가락 사이에서 밥알이 떨어졌고, 반찬을 집을 때마다 국물이나 일부가 도시락 주변에 흩어지고 있었다.

“의수는?”

“병원에 부탁했습니다.”

“원장이 돌팔이 같던데?”

“현찰을 요구해서 그렇지, 실력은 믿을 만한 것 같습니다.”

윤만석의 평가가 있은 다음이었다.

지켜보던 남자들이 움직여 뒷정리를 한 뒤에 천호득의 요구대로 봉지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총수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둘이서?”

“예.”

고개를 끄덕인 천호득이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만 자리를 비켜줘.”

“예, 총수님.”

그의 지시를 누가 어기겠나.

한 사람만 빼고.

“너는 왜 그러고 있어?”

“저는 못 나갑니다.”

천호득의 이마에 빠직하고 핏줄이 올라오는 순간이었다.

“장 비서님. 내가 책임질게요. 그럼 되지요? 회장님께는 내가 지시한 거로 하세요.”

이은명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장만섭을 다독였다.

“그럼 나가 있겠습니다.”

뜨거운 김을 쏟아내는 천호득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인 장만섭이 그제야 병실을 나섰다.

“믿음직해서 좋습니다.”

“너도 하나 붙여주랴?”

“그것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고가 있고 나서 처음으로 두 사람이 비슷한 얼굴로 웃었다.

“총수님께서 지시하신 마지막 일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두 사람만 남은 병실에서 윤만석이 뜻을 밝히고는 하나뿐인 눈으로 천호득을 바라보았다.

반갑게 받아줄 줄 알았다.

“그러지 마라.”

그런데 뜻밖에도 천호득은 고개를 저었다.

“궁금하지. 지금도 알아보고 싶고. 성격이야 숨길 수 있다고 치지만, 이번 일에서 보여준 배포와 강단, 판단력은 감춘다고 감춰지는 모습이 아니거든. 만약 회장이 나를 속이는 거라면 차라리 지난번에 죽는 게 나았을지 모를 일이고.”

떨리는 손으로 천호득은 커피를 마셨다.

말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눈치였다.

“지금도 회장의 눈을 보면 저 사람이 과연 전에 내가 알던 막내가 맞을까 하는 의심이 불쑥불쑥 든다.”

잠시 시선을 떨궜던 천호득이 고개를 들었다.

“혼자 생각이 많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긴 숨을 내쉰 천호득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녀석이 나를 아버지라고 부를 때 보여주는 눈빛을 믿기로 했어. 내게 남은 것이 유 전무와 윤 실장, 그리고 그 사람밖에 없으니까.”

“사모님과 미국에 있는 그분은 왜 빼십니까?”

천호득이 씁쓸하게 웃었다.

“굳이 잘 지내는 사람을 부를 필요가 뭐가 있어? 안사람도 마찬가지고. 조만간 놓아주어야지.”

윤만석이 하나뿐인 눈으로 천호득을 바라보며 시간이 흘렀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그런 뒤에 그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전했다.

“그러지 마라.”

덜덜 떠는 손을 움직여 천호득은 붕대를 감은 윤만석의 오른손을 덮었다.

“이건 내가 잘못 살아온 데 대한 벌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정도에서 끝난 것에 감사하지. 자네가 아니었다면 살아서 회장이 활동하는 것을 못 봤을 테니까.”

마지막 남았던 의심을 털어버려서 그런지 천호득은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우리 함께 늙자. 가끔 산책도 하고. 낚시라는 것도 다녀보고.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의지하며 살아보자. 진짜 가족처럼.”

“회장님이 총수님을 정말 많이 바꿔놓으셨습니다.”

윤만석의 감탄 섞인 말이 나온 직후였다.

“흐헤헤헤.”

천호득은 경망스러운 웃음이 병실을 가득 메웠다.

둘이서 한참을 이야기한 뒤에 밖에 있던 일행을 불러들였다.

장만섭이 천호득을 보살펴 나간 다음이었다.

윤만석은 붕대가 감긴 손목을 이리저리 살피며 주변에 있는 대원들에게 고개를 들었다.

“손가락이 있는 것처럼 그 부위가 가려운 걸 이해하겠나?”

그러고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 뒤에 쓰게 웃었다.

“죽은 자식 놈이 항상 여기 얹혀 있었지. 그놈 하나를 지켜주지 못하면서 멍청하게 살고 있다고 여겼는데, 지난 며칠이 내 인생에서 가장 멍청했던 모양이야.”

윤만석은 다시 잘린 손목을 들여다보았다.

“자식을 잃고도 이렇게 멍청했다니. 후! 아무튼, 이렇게 눈과 손목, 발목을 잃고서야 세상을 제대로 보게 됐으니까 나도 적당한 벌을 받은 셈이지.”

결심이 선 듯한 눈으로 윤만석이 고개를 들었다.

“강승애 이사장과 천상기 회장은 몰라도 똘마니를 그대로 두는 건 자존심이 상한다. 내 손목과 발목, 눈을 이렇게 만든 놈과 그 자리에 있었던 놈들을 알아 봐.”

“예.”

“아! 그리고 하기 싫은 사람이나 중요한 가족 행사가 있는 사람은 미리 말해라. 멍청하게 산 것은 나 하나로 족하다.”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두 명의 남자가 병실을 나섰다.

내내 어두웠던 그들의 표정에 담긴 생기를 윤만석은 분명하게 보았다.

**

일은 끝이 없었다.

게다가 지경그룹 경제연구소에서 올려놓은 새로운 리포트가 천중명의 시선을 사로잡아서 도시락을 먹어가며 내용을 읽었다.

미국 금리 변동에 관한 세계 경제와 한국경제의 변화.

천중명이 근 두 시간에 걸쳐 리포트에 푹 빠져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어? 어쩐 일이세요?”

고개를 든 천중명의 눈에 휠체어에 탄 천호득이 들어섰고, 이어서 장만섭, 이은명이 뒤따라 들어왔다.

“이쪽으로.”

“예, 회장님.”

천중명은 상석의 소파를 직접 밀쳐내고 천호득의 휠체어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걸 왜 빼! 그리고 왜 회장이 그런 걸 직접 하나!”

“그러니까 얼른 건강해지세요. 그럼 이렇게 안 해도 되잖아요.”

웃는 얼굴로 주는 대꾸가 좋았는지 천호득의 눈가에 미소가 아른거렸다.

“그래도 그렇지! 허리 다치면 평생 고생이야!”

그러면서도 그는 끝내 고운 말 한마디를 내놓지 않았다.

“어머니가 회장 일하는 곳이 궁금하다고 해서 들렀어!”

“잘하셨어요.”

이은명의 눈치로 봐서 절대 아니었으나 천중명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책상이랑 안 바꿔?”

“어쩐지 저 책상이 방심하지 말라고 가르침을 주는 것 같아서요. 긴장도 되고 나쁘지 않습니다.”

“흐헤헤헤헤헤!”

경망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던 천호득이 화들짝 얼굴을 바꾸었는데 늦은 감이 있었다.

“바쁠 텐데 공연히 방해하는 거 아니니?”

“마침 쉬려던 참이었어요.”

이때만큼은 장만섭도 밖에 있어서 모처럼 세 식구가 널따란 집무실 소파에 앉아 차와 한과를 즐겼다.

가족이란 건 이런 건가 싶은 생각에 천중명도 모처럼 웃는 얼굴로 보낸 시간이었다.

“자! 이제 가 봐야지?”

이제 일어서려나 싶을 때였다.

“회장.”

“예.”

천호득이 전에 없이 나직하게 천중명을 불렀다.

“지방 계열사를 도는 일. 그건 안 하는 게 좋겠다.”

그리고는 뜻밖의 조언을 꺼내 들었다.

“정 필요하면 본부장이나 기획실장을 대신 내려 보내. 그게 좋아. 아니면 당당하게 방문을 하든가.”

천중명의 눈을 바라본 천호득이 고집스러운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아직 취임식도 안 한 회장이 격식을 너무 떨어트리면 처음엔 환호하다가도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사람 심정이야. 갖출 것을 갖춘 뒤에, 그들이 아, 내가 감히 함부로 대할 분이 아니구나 싶을 때 자세를 낮춰.”

이번에도 천호득의 음성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간곡한 당부처럼 들렸다.

“예, 아버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천중명이 단단하게 답을 했는데 오히려 천호득이 놀란 눈이었다.

“왜 그러세요?”

“난 회장이 지난번처럼 끝까지 고집 피울 줄 알았다.”

“가르쳐주시는 거잖아요. 배우겠습니다. 부족한 모습이 보이면 언제고 알려주세요.”

“에효!”

천호득의 한숨에 천중명과 이은명이 무슨 일인가 하고 그를 바라본 다음이었다.

“지경갤러리! 그거 내가 맡아서 해볼 테니까 처리해.”

천호득은 뜻밖의 결심을 꺼내놓았다.

“정말이세요?”

“그게 그렇게 좋아?”

천중명이 환하게 웃는 것을 본 천호득이 흐뭇한 아버지의 미소를 그려냈다.

지켜보던 이은명이 울컥 올라온 감정을 삼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