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088. 갖출 것을 갖춘 뒤에 (1)
비서실 직원에게 도시락을 부탁한 천중명은 실제로 수원에 있는 지경디자인으로 향했다.
“회장니-임!”
허리를 구부린 고상득 상무가 마치 바닥을 미끄러지듯 달려왔고, 이어서 퇴근하지 않은 임원들이 나타나 고개를 숙였다.
“보내주신 도시락이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야근하는 계열사 임직원을 염려해서 식사를 직접 챙겨주시는 회장님이 세상에 또 누가 있겠습니까?”
북한 방송에서 나오는 사회자처럼 고상득의 음성에는 뱃속에서 끌어올린 감동이 담뿍 담겨 있었다.
직원들도 있는데 좀….
“얼른 식사들 하세요.”
만세삼창을 위해 움찔거리는 고상득을 능숙하게 제지한 천중명은 허선영에게 다가갔다.
“디자인실은 어디야?”
“이쪽이에요.”
전에 천중명이 사용하던 방 옆으로 커다랗게 공간을 마련했고, 그쪽에 패널로 벽을 세운 구조였다.
“안녕하십니까? 데이비드 패트셔입니다.”
어설픈 한국말로 인사하는 수석 디자이너와도 인사를 나눴다.
인사를 마친 천중명은 부속실 직원들을 돌려보낸 뒤에 지경디자인의 대표이사실에 들어가 허선영과 함께 도시락을 앞에 두었다.
“어쩐 일이에요?”
“보고 싶어서.”
살포시 웃는 허선영의 얼굴에서 달빛을 받은 벚꽃처럼 행복이라는 감정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들어.”
“먼저 드세요.”
천중명이 젓가락으로 밥을 뜨면서 둘이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도시락은 천중명이 먹던 것보다는 조금 덜했지만, 일반 전문점에서 주문하는 것보다는 월등히 좋았다.
“참. 엄마가 전화하셨어요.”
천중명은 시선만 들었다.
“오늘 안성에 가셨다가 사흘 뒤에 오신다고….”
“뭐?”
“함께 지내자고 하신 게 고마워서 거절하지 못했는데 정리할 게 있어서 다녀오신대요. 사흘 동안 맘에 걸리는 일이 없도록 부탁하신다던데 부탁한 일이 뭐예요?”
“응?”
이번엔 밥을 넣은 허선영이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엄마가 어떤 일을 부탁하신 건데요?”
“그거 말로 하기는 그렇고, 이따가 보여주면 안 될까?”
“삼성동 빌라에 있는 거예요?”
궁금해 하는 허선영을 향해 웃어준 천중명은 씩씩하게 도시락을 먹었다.
나이 있는 분들의 한 수는 확실히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도시락을 먹고 난 뒤에는 잠시 커피를 마시며 허선영이 시작한 디자인 초안들을 살펴보았다.
“지경화장품에서 신제품 콘셉트를 보내줬어요. 그럼 우리는 그 제품에 맞는 디자인을 이런 식으로 만들어요.”
일을 설명하는 허선영의 빛나는 눈빛이 좋았고, 그녀가 보여주는 디자인 초안들을 살피는 이 시간이 감사했다.
“나는 여기에서 검색할 것이 몇 가지 있으니까 선영 씨는 걱정하지 말고 디자인실에 가봐.”
“먼저 갈 거 아니죠? 한 시간이면 끝나요.”
“같이 갈 거야.”
편안하게 답해준 천중명이 책상에 놓인 모니터에 시선을 돌릴 때였다.
똑똑똑.
고상득이 반짝이는 작은 유리 캡슐을 들고 들어왔다.
“회장님. 집사람이 제가 힘든 것을 알고 준비한 귀한 약입니다! 남자는 힘! 힘 아니겠습니까? 과중한 업무에 지치셨을 회장님을 위해 가져왔습니다. 여기! 이걸 하나 드십시오.”
말릴 새도 없어 고상득이 작은 유리 뚜껑을 열고는 다시 투명한 비닐에 쌓인 금빛 환약을 내밀었다.
“사모님 정성인데 이걸 내가 받기는 곤란하죠. 나는 아직 괜찮으니까 상무님 드세요.”
“제가 이걸 먹을 때마다 아, 우리 회장님께서 지치시면 어떡하나, 나 혼자 이런 걸 먹어도 될까,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부디 저의 이런 정성을 외면하지 마시고….”
얼굴을 붉혀가며 거절하지 않는 한 고상득의 성의를 물리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이번 한 번만입니다. 다시 이런 식으로 뭔가를 가져오면 뇌물로 간주하겠습니다.”
“예, 회장님.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한약 특유의 쓴 냄새가 올라오는 환을 먹은 천중명이 물을 마시는 것까지를 보고서야 고상득은 만족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그 직후였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휴대전화기가 울었는데 모르는 번호였다.
천중명은 일단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나요, 천 회장. 조세원이요.
“예, 청장님.”
연락이 있을 거라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다른 번호로 할 줄은 몰랐다.
- 1차 조사는 끝났소. 언론이 공정한 보도를 해준 덕분에 명분도 얻었고 결과는 나쁘지 않을 것 같소.
“원래 약속하셨던 대로 정리해 주시면 더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겁니다. 강 이사장이 다른 소리를 해봐야 지금은 흠집 내기밖에 안 되는 상황이고요.”
애초에 전화가 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천중명은 아예 그가 아쉬워하는 부분을 깔끔하게 정리해주었다.
- 흠. 젊은 분이 정말 무섭군. 내 지난번에 말이 심했던 건 대화가 그랬던 것이니 이해하리라 믿소. 우리는 이틀 후에 금감원과 증권선물위원회에 고발조치 할 예정이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 가까운 시간에 식사라도 한 번 합시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끝까지 확인하는 조세원의 꼼꼼함이라면 이런 전화쯤 열 번도 더 할 사람이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강승애의 기사들을 하나씩 살폈다.
언론은 국민적 관심에 기대 강성학원을 무너트리는 것이 최대의 과제인 양, 사돈의 팔촌까지를 뜯어대고 있었고, 다른 재단들은 행여 불똥이 튈세라 거리를 두기에 급급했다.
모든 건 튼튼하게.
천중명은 휴대전화기에서 최만호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 예, 회장님.
“이틀 뒤에 국세청에서 강성학원을 고발 조치할 겁니다. 강 이사장의 성품이 혼자 감당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 부분에 관해 법률적 대비를 부탁합니다.”
- 조치하겠습니다. 회장님. 참고로 인출계좌를 박승양 측에서 압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요? 알았습니다. 고생하셨어요.”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사채업자가 아무렴 그 돈을 그냥 지켜보겠나.
천중명도 짐작하던 일을 강승애가 저렇게 당했다는 것은 다른 면에서는 아직 세상을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제부터 더 차갑고, 냉정하게 변한 세상을 보게 될 테고,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빨리 얼굴을 바꾸는지, 그것이 얼마나 굴욕적이고 처참한지를 뼈저리게 받아들이는 과정이 남았다.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갔으면, 당신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도 각오해야지.
남의 손발을 자르는 것도 마찬가지고.
천중명은 감정을 털어냈다.
아직 천상기라는 남겨둔 숙제도 있고, 이런 식으로 감정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우선은 오늘 밤을 먼저 고민할 때였다.
**
주인영은 곽대출을 토담집이라는 식당에 데려가 된장찌개와 보리밥 정식으로 저녁을 먹었고,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압구정동의 ‘구름 위로 산책’이라는 재즈 바로 안내했다.
안 그러려고 해도 곽대출은 이상하게 이런 곳에 오면 주눅이 든다.
같은 옷인데도 저 사람들은 어쩐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고, 손동작, 몸짓, 음성까지도 세련돼 보이는 느낌이었다.
재즈라고 솔직히 이름만 들어봤지 아는 게 있나.
입구 옆으로 무대, 그 바로 앞에 테이블, 중간에 기둥, 다시 벽으로 붙은 조금은 으슥한 테이블, 이런 구조였다.
어쩐지 학을 따라온 여우의 심정으로 곽대출이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였다.
웨이터가 다가와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기둥과 기둥 사이로 무대가 보이고, 테이블 위로 일렁이는 촛불, 아직은 공연이 없어서인지 컴퓨터를 연결해 들려주는 음악 속에서 곽대출은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젠장!
곽대출은 어느 놈이 술이고, 어느 놈이 안주인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추천해 주실 게 있나요?”
주인영은 달랐다.
깜찍한 인상에 또 생글거리는 미소, 거기에 세련미를 더하자 압구정동 어디에 세워놓아도 뒤질 것 없어 보였다.
“부드럽게 마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네, 그럼 이게 어떠실지?”
그렇게 주문은 주인영이 맡았다.
웨이터가 주방으로 향한 뒤에 주인영이 시선을 주어서 곽대출은 어색하게 웃었다.
“불편하세요?”
“아니.”
불편하지! 더럽게!
그런데 주인영과 있으면 또 불편한 게 불편한 게 아닌 이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나.
“전에 가끔 왔었어요. 고객에게 너무 시달린 날은 여기에 오는 게 제게 주는 커다란 상이었거든요. 오늘 하루 잘 견뎠어, 그러니까 이곳에서 기분 풀어. 이렇게요.”
곽대출은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이곳의 가격이 조금 비싸요.”
“주인영 씨 수입이면 그렇게 부담되지 않잖아?”
“월급 받는 사람이 마음 놓고 오기는 어렵죠.”
“그래?”
곽대출이 반문했을 때 웨이터가 다가와 병을 보여주었고, 옆으로 비틀어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이 정도는 이제 곽대출도 배웠다.
잔을 흔들어서 와인을 굴린 뒤에, 냄새 맡고, 간단하게 맛을 보는 거 말이다.
“이거로 합시다.”
“만족하실 겁니다.”
그제야 웨이터가 두 사람의 잔에 적당하게 와인을 따라주었고, 이어서 치즈와 토마토가 함께 있는 안주도 내놓았다.
“건배해요.”
이럴 때가 제일 좋다, 곽대출은.
둘이서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와인을 마신 다음이었다.
무대에 밴드가 올라와 악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사님. 이쪽으로 옮겨요. 그래야 잘 보여요.”
“그래?”
곽대출은 또 주인영이 시킨 대로 벽에 기대는 자리로 옮겨 무대를 향해 앉았다.
사회자가 이런저런 인사를 하고 연주가 시작되었는데, 곽대출도 아는 곡, ‘플라이 미 투 더 문’이었다.
전화벨 대신 사용하던 친숙한 음악이 연주를 통해 되살아나자 이건 좀 감동이었다.
“참 좋네.”
이런 여유가, 그리고 귀를 통해 가슴을 울리는 음악이 좋아서 곽대출이 혼잣말을 뱉어낼 때였다.
그의 왼쪽 어깨에 주인영의 머리가 닿았고, 곧바로 숨을 턱 막히게 하는 부드러운 향수 냄새가 코를 파고들었다.
꿀꺽.
곽대출이 숨도 제대로 못 쉴 때 곡이 바뀌었다.
[우린 만났지. 제주도에서.]
이 역시 신기하게 곽대출이 아는 곡이었다.
와인 병 너머의 무대에서 가슴을 울리는 곡이 넘어오고, 주인영은 어깨에 기댄 채 두 팔로 곽대출의 왼손을 살포시 안고 있었다.
손을 잡아줘? 머리라도 쓸어줘야 하는 거야?
이대로 있는 게 매너야, 아니면 뭔가 반응하는 게 좋은 거야?
에이, 아무려면 어떠냐?
곽대출 살살 녹는데.
‘고맙습니다, 회장님.’
이런 삶을 선물해주고, 뒤를 지켜주는 천중명에게 곽대출은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밤이었다.
**
허선영은 한 시간쯤 뒤에 일을 마쳤다.
“지루했죠? 미안해요.”
“자료 보고 있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몰랐어.”
천중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선영과 함께 지경디자인을 나섰다.
일부러 부속실 직원들까지 돌려보낸 참이었다.
허선영을 조수석에 태운 천중명이 운전석에 올랐다.
“피곤하지 않으면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는데 가도 될까?”
“정말요? 하나도 안 힘들어요. 어딘데요?”
“내가 힘들 때 간혹 갔던 곳.”
함께 달리는 길이었다.
어둠을 배경으로 고속도로를 달린 천중명은 안섬포구에 도착했다.
“정말 예뻐요!”
공원 앞에 차를 세운 천중명은 허선영의 손을 잡고 함께 등대를 향해 걸었다.
도심의 중간에 움푹 들어온 서해의 정취와 공원과 등대의 불빛, 그리고 밤을 잊은 갈매기가 전부인 바다였다.
“선영 씨와 꼭 와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왔네.”
“이젠 혼자 오지 말아요. 내가 함께 와 줄게요.”
입으로 전하는 말만큼이나 꼭 잡은 손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가 두 사람의 감정을 연결해 주는 느낌이었다.
등대 앞에 도착한 천중명은 철망에 팔을 걸치고 허선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둘이서 그렇게 가슴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밤늦은 서해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중명 씨.”
천중명은 고개만 돌렸다.
“절대 내겐 이런 행복이 없을 줄 알았어요.”
“잘 견뎠어. 앞으로도 절대 포기하지 마. 못 견딜 것 같으면 나한테 기대고.”
커다란 눈으로 미소 지은 허선영이 천중명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파도 소리, 일렁이는 물결, 그 위로 쏟아지는 등대 불빛들 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지나갔고,
“사랑해요.”
허선영의 고백이 아름다운 선율처럼 천중명의 가슴에 깊게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