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87화 (87/315)

# 87

087.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3)

강승애 입장에서 보면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든 상어나 하이에나, 그도 아니면 아마존의 악명 높은 물고기인 피라냐를 만난 느낌이었다.

강종환이 입원해 있는 병원과 재단, 그리고 오피스텔 입구마다 사진 기자와 방송카메라가 쭉 깔려 있어서 이건 뭐 옴짝달싹 못 하는 수준이었다.

아이들 학원도 포기하고 집에 데려다 놓았는데 한 시간에 한 번씩 기자들이 벨을 누른다는 연락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독한 것은 <오늘의 아침>이었다.

이것들은 무슨 부모 살해한 원수를 만난 것 모양으로 독하디독한 기사를 연달아 내놓았다.

종류도 다양해서 강종환 파트 하나, 정부보조금과 재단 공금 유용, 강승애와 강준수의 횡령, 직원 채용비리까지, 기사를 보다 보면 ‘그동안 나 모르게 이런 걸 해먹고 있었어?’ 하는 탄식마저 나올 지경이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는지….

마치 강종환과 강승애에게 악한 선택을 강요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내가 질 줄 알아?

강승애는 이를 악물었다.

조금 뒤에 시간 외 거래를 통해서 170억쯤 손에 쥐면 110억 아버지에게 건네고, 50억 챙기고, 남은 돈으로 당분간 휴식을 취하면서 미국에 살 집을 알아볼 요량이었다.

6개월 정도면 잠잠해진다.

영어야 외국인 강사 붙여서 어릴 때부터 교육시킨 터라 아이들이 적응하는 데 그렇게 큰 문제도 없다.

강승애는 노트북에 증권 시황을 올려놓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도 주가는 여지없이 하한가였다.

지독한 노인네!

아이들이 어떻게 크든 상관없다, 이거지?

최악의 순간에는 아이들만 평창동으로 보낼 생각도 있었다.

저것들이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천호득에게 찾아가 제 몫을 내놓으라고 조르게 만들 거다.

강승애가 모니터를 노려볼 때였다.

우우우웅.

문자가 들어왔고,

[주문을 넣으십시오.]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구역질나는 새끼들.’

천봉서가 살아 있을 때는 입안의 혀처럼 굴더니 이제 와서 이따위로 사람을 대해?

입술에 힘을 꾹 주고서 강승애는 준비했던 주문을 넣었다.

매도 물량이 올라왔다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끝났다.’

강승애는 안도감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게 있어서 그나마 마지막 순간에 더 무너지지 않고 천호득에게 고함이라도 지를 수 있었다.

‘두고 봐.’

강승애는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 네, 이사장님.

“주문이 체결됐어요. 확인하세요. 내일모레 인출할 건데 문제없지요?”

- 저기, 이사장님. 계좌에 압류가 들어왔습니다.

강승애는 전화기에서 손이 튀어나와서 뇌를 꽉 움켜쥔 것처럼 생각이 완전히 멈춰버렸다.

- 그동안 계좌 설정을 했던 박종양이라는 이름으로 압류를 걸었습니다. 저희는 그 압류가 풀려야 출금해 드릴 수 있습니다.

내용은 알겠다.

박승양이 동생의 이름으로 계좌 압류를 했다는 것은 분명하게 알았다.

그런데 생각이란 게 딱 멈춰서 안 움직이는 걸 어떻게 하겠나.

통장에 천만 원 정도 있는데….

다음 달 카드비용 내고 나면 그거 다 없어지는데?

생각은 엉뚱하게 다른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 이사장님? 듣고 계십니까?

“알았어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

- 네, 그럼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이건 꿈일 거야.”

강승애는 멍하니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계좌에 입금될 숫자가 저렇게 선명한데 실제로 당장 쓸 수 있는 돈은 천만 원 정도가 전부라니.

언제고 마르지 않는 우물 같던 재단은 세무감사 중이고, 마지막 보루라고 믿었던 주식 대금은 박승양이 움켜쥐었다.

게다가 주식을 사고 손해들을 보는 바람에 주변에 손 벌릴 곳 하나 남지 않았다.

강승애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휴대전화기를 들어 박승양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이 인간이 이제는 전화를 다 받는다.

“나예요.”

- 아, 강 이사장. 내가 지금 바쁜데?

“왜 내 계좌를 압류한 거죠?”

- 나한테 주식을 맡기고 돈을 빌려 가셨잖아. 그 주식이 연달아 하한가를 맞는 바람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부동산에서 남잖아요.”

- 빌려 간 돈을 생각해 보세요. 부동산 처분해도 600억가량 빕니다. 좀 전에 거래한 금액을 포함한 거니까 남은 600억을 얼른 갚아주셨으면 싶어. 그 정도 능력은 아직 있으시지?

강승애가 칼을 거꾸로 물고 달려들어도 박승양은 눈 하나 깜짝 안 할 인간이었다.

- 내가 지금 공을 치고 있어서 이만 끊어요. 아! 조언 하나 해드릴까?

느물거리는 말투로 박승양은 말을 이었다.

- 신임 회장 앞에서 가서 무릎 꿇고 사흘이든, 1년이든 버텨요. 내가 볼 때 그 방법밖에 없어. 아셨지? 그렇게 해서 내 돈 좀 얼른 갚읍시다. 아이고 이런. 내 차례라 사람들이 기다리네. 그럼.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강승애는 처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두렵게 느껴졌다.

돈이 한 푼도 없다니.

시선을 돌린 강승애의 눈에 스위트룸의 창이 들어왔다.

‘안 돼. 지금은 테라스로 나가면 안 돼.’

거실 창 저 멀리에서 천봉서가 손짓하는 느낌이어서 강승애는 앞에 놓인 탁자를 손으로 꽉 붙들었다.

“흐으. 흐으으. 흐으으.”

무서워서,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실감해서, 강승애는 느닷없이 울음을 터지고 말았다.

**

용인의 현장을 빠져나온 천중명은 유진교와 함께 근처의 깨끗한 카페로 움직였다.

양평의 갤러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야외를 깔끔하게 꾸며놓아서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다음 주에 지방에 내려갈 생각입니다. 비밀을 유지해야 해서 여태 말하지 않았는데 괜찮다면 본부장님과 기획실장님이 함께 가주셨으면 합니다.”

잔을 내려놓던 유진교가 의아한 느낌으로 얼굴을 들었다.

“그동안 지경은 더러운 물이 많이 들었습니다.”

변명할 말이 없다는 투로 유진교는 입맛을 다셨다.

“신규 사업만 봐도 답이 없습니다. 무조건 새로 형성된 시장을 잡아먹겠다는 방식입니다. TV와 컴퓨터를 생산하는 지경이 빵이며 떡볶이 시장까지 넘본다는 걸 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유진교는 묵직한 얼굴로 천중명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체질을 바꿀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경영진이 현장의 실태와 고충을 아는 데 있다고 믿습니다.”

“비밀리에 현장을 돌아보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의미라고 보시면 됩니다. 방식이 조금 다르겠지만요.”

“저는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회장님과 저, 기획실장까지 자리를 비우면 당장 그룹 전체의 일에 차질이 올 수도 있습니다.”

“급한 사안은 전자결재를 이용할 생각이고 아무리 지방이라고 해도 4시간이면 서로 얼굴 볼 수 있는 거리입니다.”

천중명의 결심을 본 모양이었다.

“오늘 현장을 둘러보고 조금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렇게까지 엉망일 줄 몰랐다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입니다.”

유진교가 속을 털어놓았다.

“지금까지는 어떤 방법으로든 한 푼이라도 손에 쥐는 사람이 성공했다고 인정받는 분위기였을 테니까요. 냉동창고나 지경건설을 보면 다른 설명이 필요 없지요.”

“흠.”

묵직한 유진교의 신음이 대꾸처럼 흘러나왔다.

“돌아보면 좀 더 정확하게 알게 될 겁니다. 현재 지경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는 것이 첫 번째 할 일입니다. 그런 뒤에 앞으로 나아갈 길을 함께 만들었으면 싶습니다.”

“예, 회장님. 기획실장과 준비하겠습니다.”

유진교의 답을 듣고 난 천중명은 모처럼 홀가분한 심정으로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형님의 일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축은행과 시행사를 가져오면 지금 사용하고 있는 건물에 있을 명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보내야죠.”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하는지 한 번만 더 고민해주셨으면 합니다. 외부의 눈도 생각하셔야 하니까요.”

“큰형이 지경건설을 저렇게 만들었습니다. 둘째 형이 저축은행을 어떻게 했을지 안 봐도 본 거 같고요. 그런 상태에서 지경이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회장님.”

천중명은 주변을 둘러보며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여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어머니를 모셨는데 지경그룹의 회장이 되었답시고 그곳 한 번을 찾아가지 못했다.

몸이 바뀌면 마음이 따라가는 건가?

이은명에게서 느끼는 어머니의 정이 새로운 만큼 진짜 어머니인 이진미는 생각조차 못 하고 지난날들이 더 많았다.

‘지방 내려가기 전에 한번 갈게요.’

천중명은 태양이 기울어진 산언저리를 보며 마음속으로 약속을 건넸다.

**

보고서를 들여다보던 곽대출은 머릿속에서 툭 하고 인내의 끈이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염병할 인간들이 그냥 ‘글자’라고 쓰면 될 걸 꼭 텍스트라는 표현을 써야 하는 건지.

척 듣기에 배운 거 같고, 있어 보인다는 건 알겠는데 당최 볼 때마다 뱃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오는 걸 막을 방법은 없었다.

“이사님. 이거 잠시 먼저 봐주세요.”

그리고 그럴 때면 어떻게 아는 건지, 주인영이 특유의 혼을 쏙 빼는 미소와 함께 다가왔다.

[화 푸세요. 무서워요.]

결재판 위에 적힌 글자를 보며 곽대출을 “흠! 흠!” 하는 헛기침을 내놓았다.

[모르시는 부분이 있으세요?]

시선을 든 곽대출은 주인영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긋.

살살 녹는다, 곽대출.

주인영의 미소를 보면 곽대출은 하여간 이렇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곽대출의 이 마음을 주인영이 과연 모를까?

보고서를 더 봐달라는 의미로 주인영이 눈짓을 했다.

시선을 내리며 곽대출은 이 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무식하지, 학벌 부족하지, 내놓을 거라고는 천중명 회장의 측근이라는 거 하나 빼곤 없는 곽대출에게 주인영이 매력을 느끼는 게 좀 이상하긴 한 거니까.

남자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직급 때문에 챙겨주는 걸 거고, 평소에도 저렇게 예쁘게 웃는 사람이니까 이쯤에서 만족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이런 시간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곽대출은 주인영이 내민 결재판의 서류를 넘겼다.

[오늘 저녁에도 시간 되세요?]

뭐 이런 질문이? 사람을 뭐로 보고?

곽대출은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텍스트라는 글자 덕분에 이런 배려를 받는 거니까 좀 더 어려운 용어들을 던져다오!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그래요.”

고개를 숙이기 직전에 살짝 보인 주인영의 눈짓이 곽대출의 심장을 현관 로비까지 쾅하고 던져 버렸다.

“후.”

심장을 가라앉힌 곽대출은 다시 보고서에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어디로 데려가 주려나?

요즘은 치안이 좋아져서 그런지, 세상에 밤길을 걷는 동안 깡패 새끼 하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놈들이 시비를 걸어주면 단박에 곽대출도 잘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텐데 말이다.

“가만있자, 시간이?”

곽대출은 월급쟁이처럼 퇴근 시간을 확인했다.

**

본사로 돌아온 천중명은 면담 요청과 전화 메모를 먼저 살폈다.

‘이놈들 봐라?’

전화 메모에 있는 이름은 몸이 바뀌기 전에 천중명과 개망나니 짓을 하던 두 놈이었다.

한 놈은 식품회사 회장 아들, 다른 놈은 전자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의 아들이었다.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쓰레기라는 단어로 정리되는 인간들이 천중명의 소식을 듣고 연락했었던 모양이었다.

연락은커녕 신경 쓸 이유조차 없는데 걸리는 게 있다면 딱 한 가지, 이놈들이 오지은과도 잘 어울린다는 거였다.

이번 일로 오지은도 정신 차렸겠지 싶었다.

아니면 앞으로 삶이 너무 고되지 않을까?

천중명은 전화기를 들었다.

“퇴근은?”

- 먼저 하십시오.

“너 오늘도 데이트야?”

- 교육입니다, 회장님.

천중명은 기가 막혀서 웃고 말았다.

사근사근한 음성의 곽대출이라니.

“알았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얼른 허선영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몇 시에 끝나?”

- 늦을 것 같아요.

“회사야?”

- 네. 새로 시작하는 디자인이 있어서 그거 의논하고, 또 기존에 있던 디자인들 살펴보느라고요. 언제 퇴근해요?

눈치를 살피는지 속삭이는 듯 들린 음성이었다.

“나도 일이 좀 있어. 그럼 저녁은 회사에서 먹겠네?”

- 도시락 먹을 것 같아요.

허선영은 손으로 입을 가린 모양이었다.

- 맛있는 거 드세요. 보고 싶어요.

귀에 대고 간질간질하게 말하는 듯한 음성이 건너왔다.

“알았어. 수고해.”

천중명은 전화를 끊었다.

이제부터 열심히 지경디자인에 달려가서 저녁을 먹자고 하면 놀라겠지?

천중명은 휴대전화기와 재킷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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