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86화 (86/315)

# 86

086.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2)

점심을 먹은 천중명은 유진교와 함께 본사 건물을 나섰다.

지경건설이 짓고 있는 용인 아파트 현장을 방문하기 위한 이동이었다.

“현재 부회장과 임원들은 이미 출발했습니다. 현장직 대부분이 용인 현장에 집중돼 있어서 지방에 있는 직원들은 부르지 않았습니다.”

유진교가 건네준 자료를 천중명은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최만호 실장에게 들었습니다. 용인에 건설 중인 아파트에 부실시공이 있다고 하셨다는데 그 점은 어떻게 파악하셨습니까?”

“전에 그 근방에 갈 기회가 있어서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질문이 있을 줄 예상하고 미리 준비해 둔 답이었다.

그리고 이 답에는 다음 행보를 위한 천중명의 한 수가 숨어 있었다.

용서고속도로를 달린 승용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직 색을 칠하지 않은 아파트 건물들이 서 있는 현장에 도착했다.

“차를 잠시 멈추세요.”

“예, 회장님.”

아파트 건설 현장의 입구에서 천중명은 차에서 내렸다.

유진교가 따라 내렸고, 뒤따르던 비서실 직원 세 명이 급하게 뒤에 서 있었다.

“여기부터입니다. 잠깐 걸을까요?”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며 천중명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양 전에 이 포장도로 좌우에 조경을 하겠지요. 보세요. 도로 양옆에 있어야 할 물 빠지는 곳이 전혀 없습니다.”

유진교가 굳은 얼굴로 좌우를 둘러보았다.

“저쪽부터 있네요.”

천중명은 아파트의 입구를 상징하는 커다란 아치 앞에서 도로 옆을 살폈다.

“나는 건설에 관해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물길이 잘려져 있으면 둘 중 하나 아닐까요. 여기에 고인 물이 저 아래로 도로로 흘러내리든가 역류해서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던가.”

천중명이 단지 안으로 들어가자 2층으로 올려놓은 컨테이너에서 임직원들이 급하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자료에서 본 지경건설 부회장이 고개 숙이는 것을 신호로 다가온 이들이 전부 인사를 마쳤다.

“회장님. 안전모를 착용하셔야 합니다.”

직원 한 명이 건네준 안전모를 천중명과 함께 도착한 일행이 착용한 다음이었다.

“여기 현장 소장이 어느 분이죠?”

“예, 회장님.”

뒤편에서 덩치가 빵빵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힘깨나 써 보이는 데다 시커멓게 탄 얼굴이어서 제법 성깔이 있어 보였다.

“엘리베이터 작동하는 동이 있습니까?”

“전원을 올리면 지금은 모두 작동합니다.”

“그럼 전원을 올리세요.”

소장이 뒤에 있던 직원에게 하는 고갯짓을 보며 천중명은 바로 앞에 있는 건물로 들어섰다.

“로열층이 어떻게 됩니까?”

“15층 건물일 경우 12층에서 14층을 로열층이라고 평가합니다.”

소장이 긴장한 얼굴로 꺼낸 답이었다.

“13층으로 가죠.”

“예, 회장님.”

천중명, 유진교, 부회장, 소장, 그리고 비서실 직원 둘이 먼저 오른 뒤에 엘리베이터가 위로 향했다.

분양 전이라 엘리베이터 안쪽의 파란색 비닐을 떼지 않았고, 그 위로 누런 종이상자들이 두껍게 붙어 있었다.

13층에 내려선 천중명은 그중 왼편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장 주방으로 움직여서 싱크대의 수도꼭지 아래를 주먹의 아랫면으로 두들겼다.

쿠웅. 쿠웅. 쿠웅. 쿠웅.

유진교와 부회장이 질책하듯 소장을 바라본 다음이었다.

천중명은 안방으로 들어가 벽을 두들겼고, 다시 거실 창을 이리저리 열어보았다.

이어서 천중명은 싱크대 위쪽의 구석과 화장실의 타일을 살폈고, 마지막으로 변기를 붙잡고 좌우로 흔들었다.

소장은 무척이나 곤욕스러운 표정이었다.

“소장님. 지하주차장에 배수시설은 완벽하게 준비했습니까?”

“네?”

“비가 왔을 때 습기가 남는다거나 곰팡이가 피는 일은 없겠냐는 뜻입니다.”

“하루 강우량 50밀리미터에서는 아무런 지장이 없도록 준비했습니다.”

“만약 장마나 태풍이 와서 하루 100밀리미터의 비가 내리면 물이 차거나 곰팡이가 핀다는 말씀입니까?”

소장은 답을 하지 못했다.

그때 뒤늦게 엘리베이터로 올라온 임원들과 계단으로 올라왔지 싶을 정도로 얼굴이 벌겋게 된 직원들이 거실로 들어섰다.

“이 옆집으로 가서 싱크대 앞에 서 보세요.”

“예?”

“옆집으로 들어가서 저기 싱크대 수도꼭지 앞에서 도착했다고 소리쳐보시라고.”

“예, 회장님.”

서른 후반의 직원이 급하게 달려갔다.

“현관문 다 닫아요.”

양쪽의 현관문이 닫힌 다음이었다.

[도착했습니다, 회장님.]

싱크대 수도꼭지 앞에서 직원의 말이 너무도 또렷하게 들렸다.

유진교가 매서운 눈으로 부회장과 소장을 돌아본 다음이었다.

“이제 됐어요. 다시 이쪽으로 오세요.”

[네, 회장님!]

시원한 대답이 들리자 소장이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싱크대 위를 노려보았다.

긴장해서 그럴 거다.

생각이 좀 있었다면 조용하게 답했을 텐데, 워낙 기습적인 방문에 당황해서는 저렇게 씩씩하게 대꾸했을 게 분명했다.

“진입도로 양쪽에 있어야 할 물 빠지는 통로는 왜 만들다가 말았습니까?”

“설계상으로 거기까지입니다.”

“진입도로로 빠져나가지 못한 물이 역류하면요? 그것도 하루 50밀리미터까지 준비했으니까 더 많은 비가 오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닌 겁니까?”

천중명이 질문을 던질 때 옆집에서 시원하게 답을 한 직원이 돌아왔다.

“나는 아파트 건설은 잘 모릅니다. 이 공사도 분명 감리와 우리 회사에서 파견한 직원들이 지켜보았을 텐데 어떻게 이따위 공사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규정에 문제는 없습니다.”

소장이 버티듯 내놓은 답을 들은 천중명은 픽 웃었다.

그리고는 거실로 걸어가 창을 열고 베란다로 나섰다.

“본부장님. 부회장님. 이리 잠깐 와 보세요.”

유진교와 부회장이 천중명의 옆으로 다가왔고, 세 사람을 둘러싸듯 소장과 임직원들이 뒤로 쭉 섰다.

“저 앞의 진입로가 물에 잠기면 여기에서 가족들이 아침, 저녁으로 바지를 걷고 드나드는 것을 모두 봐야 합니다. 규정대로 지었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걸 지켜보는 심정이 어떨 것 같으세요?”

유진교와 부회장의 나직한 한숨이 답을 대신했고, 소장과 임직원들이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도시락을 파는 사람은 하루에 백 개를 팔든, 천 개를 팔든 사가는 사람에게는 그게 유일한 점심이고, 저녁이며, 어쩌면 하루에 한 번 겨우 먹는 식사일 수 있습니다.”

천중명의 말뜻을 알았는지 듣고 있던 임직원이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우리에게는 3천 가구지만, 이곳에 입주하는 분들은 하나밖에 없는 집입니다. 갈라지는 타일, 흔들리는 창, 물이 올라와 곰팡이가 피는 지하주차장, 개울을 건너듯 지나야 하는 입구.”

이렇게까지 지적을 받을 줄은 몰랐는지 유진교는 침울한 표정이었다.

“이게 지경그룹의 대표 회사인 지경건설이 지은 아파트가 맞습니까?”

대꾸는 없었다.

무거운 정적이 흐르는 사이에서 천중명은 고개를 돌려 지경건설의 부회장과 소장을 차례로 보았다.

“당신들은 썩었어. 간절한 사람들의 희망과 꿈을 짓밟으며 먹고 사는 당신들은 그 자리에 있을 이유도, 자격도 없어.”

천중명이 독하게 말을 뱉어낸 직후였다.

“오너의 지시였습니다.”

어차피 좋게 끝나기는 틀렸다고 판단했는지 소장은 막가자는 얼굴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알아서 현금도 올려드려야 하고, 주무관청에 인사도 해야 하고, 또 뭐….”

“먹을 것도 챙겨야 하겠죠.”

소장의 볼이 씰룩했다.

“상황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천중명의 말에 소장이 희망을 담은 눈을 퍼뜩 들었다.

“그렇더라도 최소한 사람이 살 집은 지었어야죠. 현장 소장이 돼서 나도 알아내는 하자에 눈 감을 게 아니라 최소한 사람이 살 수 있게는 했어야지. 규정대로 지었다는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그의 눈이 꿈틀했는데 천중명은 그게 오히려 반가웠다.

힘을 믿고 달려들었으면 싶었다.

세상에 그깟 알량한 힘으로 건드릴 수 없는 상대도 있다는 것을 주먹으로라도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소장의 도발은 딱 거기까지였다.

“본부장님. 이 현장의 감리업체를 별도로 지정해서 처음부터 전부 조사해서 보고해 주세요. 새로 짓는 한이 있어도 이대로는 분양 못 합니다.”

“예, 회장님.”

“비용이 얼마가 들어도 좋습니다. 24시간 주야 교대로 보수 공사를 시작하시고, 철근이 부족하게 들어가서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면 다 부수세요.”

이게 무슨 개소리야?

아무리 물정을 모른다고 하지만, 저게 회장이란 사람의 입에서 나올 소리야?

지경건설 부회장부터 임직원들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룹 감사실에서 이 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조사해서 철근 하나라도 빼먹은 일이 있다면 관련자들을 전원 고발 조치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어진 천중명의 지시에 지켜보던 이들의 표정이 복잡했다.

말을 마친 천중명은 천천히 거실을 나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도대체 어떤 놈이 떠들어댄 거야?”

소장의 원망 섞인 질문이 천중명의 뒤통수에 매달렸는데 이미 끝난 일이었다.

저런 수준의 인간들은 어딘가에 취직해서 천중명이 세상 물정을 모른다며 욕을 해대면 해댔지, 절대 고쳐지지 않는다.

부담스러웠을 텐데도 지경건설 부회장이 따라 나와 천중명과 유진교가 있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1층에 도착한 천중명이 곧장 건물을 나설 때였다.

“회장님.”

지경건설 부회장이 천중명을 불렀다.

“세상이 그렇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그는 진심에서 나온 듯한 묘한 조언을 건넸다.

예순이 다 된 부회장을 천중명은 잠시 바라보았다.

“쉽지 않은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이런 아파트를 지으셨다는 겁니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던 직원들이 민망한 듯 고개를 돌리는 앞이었다.

“정말 그런 생각이었다면 그 생각 먼저 고치세요. 앞으로 어떤 회사를 맡으실지 모르지만, 기본은 지키길 바랍니다.”

천중명은 가라앉은 눈으로 부회장을 바라본 뒤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직원들이 급하게 좌우로 벌려준 사이로 걸어서 승용차에 올랐다.

**

점심을 먹은 천호득은 과일을 챙겨서 집을 나섰다.

“너는 좀 평범하게 움직일 수 없겠냐.”

그렇게 계단을 내려선 천호득은 참았던 불만을 터트렸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장만섭이 팔을 앞으로 내밀어 휠체어를 들었으니 거기에 앉은 천호득의 오금이 얼마나 저렸겠나.

“예에, 총수님. 앞으로 높이 들어서 편안하시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아니잖아!”

욱하고 화가 치민 천호득의 왼손을 옆에 앉은 이은명이 조심스럽게 잡아주었다.

“당신도 들었지?”

“예. 그래도 믿음직하잖아요.”

“믿음직하기는?”

천호득의 불만과 장만섭의 꿋꿋한 대꾸, 이은명이 다독임이 연신 이어진 가운데 승용차가 방지병원에 도착했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기력이 완전히 빠진 얼굴로 창을 보고 있던 윤만석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병실에 있던 세 명의 남자가 급하게 일어서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는데 천호득은 그들을 힐끔 바라보기만 했다.

“오늘은 좀 어떠냐?”

“왜 이러십니까?”

“과일이 맛있어서 좀 가져왔다. 뭐해? 저기 저 친구들 거 내놓고 여기도 좀 줘.”

장만섭이 커다란 쇼핑백을 남자들에게 건네는 동안, 이은명은 아예 준비해 온 일회용 접시에 예쁘게 깎아온 과일을 올려주었다.

“먹어봐. 맛있다.”

천호득이 든 포크 끝에서 노란 망고가 애처롭게 떨렸다.

“먹여줘?”

“총수님?”

“그게 싫으면 얼른 하나만 먹어. 그거 보면 바로 갈게.”

망고를 넣은 천호득의 입가를 이은명이 닦아준 다음이었다.

불편하고, 죄송하고, 그 너머에 아직 원망이 남은 한쪽 눈을 한 윤만석이 왼손을 움직여 키위를 먹었다.

천호득이 씁쓸하게 웃고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달달한 커피 있으면 한 잔 다오. 설마 문병 온 사람을 그냥 가라고는 않겠지?”

남자 한 명이 바쁘게 움직여서 장만섭의 험악한 감시의 눈길을 견디며 만든 봉지 커피를 두 사람 사이에 놓아주었다.

“얼른 일어나. 일어나서 내가 부러울 정도로 번듯하게 살아. 의족과 의수 좋은 놈으로 해서 이렇게 다니는 내 앞에 당당하게 나타나. 그게 진짜 복수다.”

대꾸가 없는 윤만석 앞에서 천호득은 종이컵을 아슬아슬하게 움직여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가마. 자네가 내 앞에서 당당하게 설 때까지는 내가 이렇게 계속 찾아다니면서 귀찮게 할 거니까 그건 각오해두는 게 좋아.”

말을 마친 천호득이 시선을 들자 장만섭이 다가와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았다.

“정말 저를 원망하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그때 윤만석의 질문이 들렸다.

“나는 그런 거 없었다. 살려줘서 오히려 고맙지. 덕분에 이 달달한 커피 맛도 알았고, 신임 회장도 지켜볼 수 있거든.”

언제 휠체어를 돌려야 할지 장만섭이 눈치를 살필 때였다.

윤만석이 천천히 한쪽 눈을 들어서 천호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 얼른 일어나서 그런 눈으로 내 앞에 나타나. 그럼 나도 더는 귀찮게 안 할 테니까.”

말을 마친 천호득이 “가자.”라고 지시했고, 장만섭이 휠체어의 방향을 틀었다.

병실문이 닫힌 다음이었다.

“내가 어리석었던 것 같지?”

윤만석의 질문이 흘러나왔고,

“저희는 지시대로 따를 뿐입니다.”

언젠가 그가 천호득에게 했었던 것과 똑같은 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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