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084. 알아서 할게요 (3)
아침을 먹은 천중명은 곽대출과 함께 회사로 향했다.
대형 리무진과 비서실 직원들이 하릴없이 뒤를 따랐는데 그런 건 상관없었다.
“어제 뭐 하다 늦게 들어왔어?”
“영화 봤습니다.”
“협박했냐?”
“내가 그럴 사람이냐, 회장님?”
“그러고도 남지.”
장난스럽게 웃은 곽대출이 표정을 바꾸었다.
“먼저 저녁 먹고 영화 보자고 하지 뭡니까. 파스타 집에 가서 작은 피자와 스파게티, 또 뭐더라, 빵에 수프 담겨 나오는 걸 먹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런 걸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천중명은 뒷좌석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다 나은 줄 알았더니 용인에서 깨졌던 곽대출의 뒤통수 부분에 머리털이 없는 게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극장에 가서는 핫도그 먹을 때 냅킨을 쥐고 있는 게 좋다. 콜라나 커피는 후루룩 소리를 내지 마라. 데이트인 줄 알고 기대했더니, 아효! 거기에 영화는 또 왜 그런 건지.”
“뭘 봤는데?”
“무슨 영화가 끝날 때까지 사람이 딱 한 명 죽는데 그것도 늙어 죽어. 그게 재미있겠냐고?”
천중명은 흐느끼듯 웃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가 <람보>였거든. 그냥 나오는 족족 어? 그냥! 다! 싹 죽이잖습니까? 그런 거 생각하고 갔더니 세상에 아버지 한 명 딱 늙어 죽는데….”
고개를 젓던 곽대출이 룸미러로 천중명을 보았다.
“우리 선영 사모님은 어제 출근 어떠셨대?”
“유학했을 때 공동 작업하던 프랑스 놈이 디자인 파트에 있었다나 봐. 그놈이 전에 그렇게 선영 씨에게 미국에 남아서 꿈을 펼치라고 했었던 놈이라네.”
“저런!”
“왜?”
반문하는 천중명을 곽대출이 오히려 룸미러로 살폈다.
“싹을 자르셔야 합니다, 회장님. 그런 자식은 단칼에 싹!”
핸들을 붙잡은 오른손 손날을 옆으로 그으며 곽대출이 꺼낸 말이었다.
“미친놈. 그 정도도 못 믿으면서 어떻게 직장 생활을 하라고 그러냐? 그리고 만약 그런 유혹에 넘어갈 것 같으면 내 사람이 아닌 거지.”
“크흠.”
모처럼 둘이 함께하는 시간이라 길 막히는 것이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오늘 지경건설 임원을 전부 새로 임명할 거다. 내가 부탁했던 일은 어떻게 됐어?”
“우선 여수로 출발하면 됩니다. 지경케미컬을 거쳐서 부산, 울산, 청주, 이 순서로 준비했습니다.”
천중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문고인가 하는 건?”
“그룹 전산실을 족치고…. 아니지, 그룹 전산실을 재촉하고 있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모양입니다.”
며칠 되지 않았는데 곽대출은 회사 생활에 제법 적응한 눈치였다. 저렇게 되기까지 저놈은 또 얼마나 속을 끓이고 화를 삭여야 했을까.
“회장님에 관한 소문 들었습니까?”
“뭔데?”
“웃는 얼굴 뒤에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함이 있어서 찍히면 그 계열사 임원 싹 날아가니까 조심해야 한다는 소문입니다. 꼴통 회장이라고.”
“누가 그래?”
“소문이라니까, 회장님아. 소문! 그래도 1차 목표는 이루셨잖아. 꼴통 회장이 되는 거.”
둘이서 그렇게 떠드는 동안, 그룹 건물이 앞에 있었다.
“저녁에 보자.”
“이제 나도 슬슬 독립할 때가….”
“아직 일러. 내가 그 꼴을 볼 것 같냐?”
마지막 농담을 던진 천중명은 표정을 바꾸며 차에서 내렸다.
집무실로 들어선 천중명을 결재를 바라는 서류가 한가득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 좀 부탁해.”
“네, 회장님.”
천중명이 부탁한 커피는 유진교와 함께 들어왔다.
아직 오전 8시가 안 된 시간이었다.
“그리 앉으세요.”
“회장님. 말씀하셨던 지경건설 임원 추천자 명단입니다.”
천중명이 앉기를 기다린 유진교가 소파의 테이블에 결재 판을 놓아주었다.
“나는 대표이사 회장만 결정할 테니까 남은 자리는 본부장님이 기획실장과 의논해서 정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부담스러울지 모를 요청을 유진교는 말 한 마디로 받았다.
“공개적으로 모집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해서 추천할 수 있는 명단이 한정되었습니다.”
명단을 넘기던 천중명은 ‘강태황’이라는 이름의 서류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경력이 굉장하네요.”
“오너들과 단 한 번도 좋게 끝난 적은 없지만, 해외 인맥과 실력만큼은 최고라고 평가받는 사람입니다.”
“오너들과 관계가 안 좋은 이유는요?”
“충돌이 잦았다고 들었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꺾지 못하는 성격이라서요.”
천중명은 가볍게 웃으며 다음 장으로 서류를 넘겼다.
“저는 회장님께서 강태황 회장에게 관심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이 분이 옳다는 방향이 어떤 건지는 모르겠는데, 제 지시가 안 먹힐 사람을 뽑아서 나쁘게 끝낼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왕 시작한 이야기여서 천중명은 서류에서 상체를 세우고 유진교에게 생각하는 바를 전했다.
“독불장군은 나 한 명으로 충분합니다. 오너의 뜻에 대드는 분이 지경건설의 임원이나 직원들의 의견을 들을까요?”
의심스럽다는 투로 고개를 저은 천중명은 다시 서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는 오너의 뜻을 이해하고 규정대로 공사하며 직원들을 배려할 줄 아는 분이 필요합니다.”
서류를 다 보았으나 마음에 드는 인물은 없었다.
공사 성과, 이름난 건물들을 실적으로 적어놓은 것이 전부여서 당장 결정을 내리기도 어려웠다.
“회장님이 직접 지경건설의 대표이사 회장직을 맡으시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준비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규정상 문제는 없나요?”
“등기 임원의 경우는 주총을 거쳐야 합니다만, 현재 공석인 대표이사를 대행하는 형태로 먼저 취임하시면 오히려 건설의 안정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다른 임원도 이사회 선임으로 처리하고, 주총에서 정식 임명하는 방식으로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부회장부터는 본부장님이 판단해서 결정하시고 적당한 시기에 지경건설의 회장직을 넘겨주는 방식이 좋겠습니다.”
“부회장이 될 분에게도 동기부여가 확실할 겁니다. 지시하신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현장에 나가볼 예정이니까 서둘러주세요.”
“예, 회장님.”
유진교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선 뒤에도 천중명은 잠시 소파에 있었다.
천봉서가 남긴 비자금을 찾는 일도 있었고, 그룹의 첫째가 운영하던 상징적인 의미도 있으니 어쩌면 천중명이 지경건설의 회장직을 직접 맡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결정인지도 몰랐다.
커피를 마신 천중명은 휴대전화기를 들어 시간을 보았다.
오전 8시 20분이었다.
누군가 지옥에 빠져들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
휴대전화기를 든 천상기는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때론 독하고, 때론 야비하게,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그가 멍한 눈으로 휴대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 천 회장, 듣고 있어요?
“아, 예. 그럼요.”
- 내가 신임 회장에게 딱 붙으라고 하지 않았소? 강성학원과 조세원 청장이 사돈 관계요. 그런데도 세무조사를 나간다면 능력과 수완은 더 말할 게 없는 거지.
박승양의 느물거리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눈알을 콕콕 찌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천상기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 나도 이번엔 피할 방법이 없을 것 같으니까 천 회장도 대비를 해두시오. 공연히 천 회장 쪽에서 일이 터지면 적당한 선에서 겨우 덮은 내 쪽에 불똥이 다시 튀니까. 아시겠소?
이제야 왜 박승양이 이런 전화를 했는지를 천상기는 분명하게 알았다.
- 천 회장?
“염려 마십시오. 잘 알아서 하겠습니다.”
- 혹시 부티크를 이용했으면 그쪽에서 증권거래법 독박 쓰는 거로 처리해요. 그리고 자금 이동 조심하고. 내 쪽에서 천 회장에게 넘기는 돈도 당분간은 못 움직일 테니 그렇게 아시고.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 어허. 1천억 가까운 돈이 움직이면 천 회장 그대로 증권거래법으로 골인될 텐데 그렇게 해드려?
염병할, 마귀 새끼!
천상기는 결국 승냥이에게 목줄을 물린 새끼 사슴쯤 되는 꼴이었다.
“박 회장님이 능력을 발휘하시면 그 정도는 처리하실 수 있잖습니까?”
- 이봐요, 천 회장. 내가 이번에 금감원 조사받으면 무조건 검찰로 이첩되는 거요. 아무리 적게 받아도 추징금 300억에서 500억이 나올 텐데 나더러 혼자 죽으라고?
천상기는 올라오는 분노를 누르려고 이가 드러날 정도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자는 겁니까?”
- 내가 맞은 추징금은 천 회장이 보상해 줘야지. 막말로 내 선에서 사건 덮느라고 들어간 돈은 내가 알아서 감당하는 거 아니오.
“뭐요?”
- 뭐요라니? 어디에다 대고? 아니면 내 동생이랑 함께 증권거래법으로 교도소를 가시든가. 이왕 막 가는 거 나도 다 털어버리고 이참에 깨끗하게 살아볼 테니까.
이상하게 강승애와 얽힌 뒤로는 만나는 사람마다 만만한 놈이 없었다.
- 추징금 나오면 그거 제하고 보내드릴 테니까 그렇게 아시고. 내가 송도상인 박승양이오. 돈은 꼭 보낼 테니까 그건 염려하지 마시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대법원에서 추징금이 확정될 때까지, 그냥 1년이 날아간다.
그 안에 박승양은 천상기에게 돌려줘야 할 돈으로 추징금 이상을 벌어들일 인간이고.
“이게 다 강승애가 재수가 없는 년이라서 그래! 그래서 형이 죽은 거고, 내가 이 꼴이 된 거야! 어떻게 몸을 섞은 사람은 다 골로 보내! 이 독거미 같은 년!”
천상기가 입에 올리기조차 더러운 욕을 뱉어낸 직후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박무일 전무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총수님의 비자금과 허선영 관련 기사를 보고 드리려고 합니다.”
천상기는 느닷없이 양쪽 무릎이 새로 부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언론이 자꾸 몸을 사려서 힘들었습니다만.”
“야, 이 밥버러지 같은 인간아!”
박무일의 묵직한 보고를 천상기의 고함이 단박에 덮쳤다.
“무릎 다 나가고, 다음은 목이라는데! 당신이 내 목을 지켜줄 거야! 어! 내가 당신 무릎 한 번 부러트려 줄까? 그래?”
목이 갈라지도록 고함을 지르는 천상기나 느닷없이 막말을 듣는 박무일 모두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당신은 가서 책상이나 지키고 있어! 이 밥버러지야! 저축은행을 신임 회장이 가져간다니까 그쪽에서 어떤 처분을 내리는지나 얌전히 기다리라고!”
“회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축은행이 신임 회장에게 넘어가다니요? 그럼 저는? 저는 어떻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나가! 꼴도 보기 싫어!”
이 정도로 눈이 뒤집힌 천상기를 처음 본 박무일이 쫓기듯 방을 나섰다.
**
세무조사는 차분하고 무섭게 진행되었다.
긴급이라는 표현 하나로 모든 상황이 정리되는 느낌이어서 직원들은 “어? 어?” 할 뿐, 말 한마디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회계 관리야 당연히 담당 회계법인에서 관리한다만, 어지간한 전표는 또 회계 담당의 컴퓨터에 모두 들어있다.
“통장 사본 제출하세요.”
“예?”
“재단에서 사용하는 통장 사본이요.”
“예.”
차갑고, 냉정하고,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세무 공무원의 요구에 여직원이 홀린 것처럼 움직였다.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이라면 국세청의 중수부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찰칵! 찰칵찰칵! 찰칵! 찰칵찰칵!
원래대로라면 사진기자쯤은 몸으로 막았을 직원 역시 멍하니 있었다.
강종환은 병원에 있고, 강승애는 전화 연결이 안 되는 데다, 아들이라는 강준수는 미국에 있어서 또 연락이 제대로 안 되고 있었다.
“여긴 끝났어.”
그나마 제법 연륜이 있는 직원이 그 말 한마디를 겨우 꺼내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
강승애는 8시에 호텔 조식 뷔페에서 아침을 시작했고, 9시에 사우나에 들러 어젯밤에 못 잤던 잠을 잠시나마 채운 뒤에 방으로 올라왔다.
오늘 시간 외 거래를 통해 170억이 들어오면 강종환에게 대략 110억 정도 건네주고 남은 돈을 움켜쥘 생각이었다.
사채를 해서라도 악착같이 불리면 돈은 또 금방 불어난다.
그러니 지금은 저녁을 위해 충분한 휴식을 취할 때였다.
지경건설의 회장실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던 남자 직원을 부를까도 생각했었는데 당장은 모양새가 빠지는 것 같아서 참았다.
잘못된 것들을 털어내고, 이렇게 정갈한 여유를 즐긴 뒤에 새롭게 출발한다.
방으로 돌아온 강승애는 일부러 두고 나갔던 휴대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부재중 전화 173통]
무슨 일이지?
왜 오늘 들어올 거라 예상한 173억이라는 숫자가 이렇게 찍혀있지?
느닷없이 덮치는 불길한 심정을 누르며 강승애는 문자를 먼저 확인했다.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에서 세무조사가 나왔습니다.]
제목에 올라온 글을 본 강승애는 서둘러 내용을 확인했다.
[주식 매입에 관한 자료와 재단 지원금 이용 내역, 운영비의 순서대로 조사 중입니다.]
그 뒤로는 급하다고, 연락 달라고, 무방비로 당하고 있다는 내용이 붙여넣기 수준으로 들어와 있었다.
호텔의 침대가 먼저 강승애 주변을 빙글빙글 돌더니 곧바로 테이블과 창, 천장, 스탠드, TV가 함께 돌았다.
털썩.
강승애는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