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083. 알아서 할게요 (2)
천호득은 고민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천중명은 믿는다.
그러나 결국 그는 떨리는 손을 움직여 책상 한 귀퉁이에 있던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실제로 천호득은 그런 심정이었다.
[저 쓸데없는 깡패들 좀 끌고 다니지 마. 하나도 안 무섭다니까.]
“그렇지!”
스피커를 통해 2층에서의 대화를 들은 천호득은 통쾌한 심정으로 맞장구까지 쳤다.
[조용하게 아버지께 죄송하다고 하고 가. 그럼 저축은행만 가져오는 것으로 끝낼 테니까.]
[그걸 네가 왜 결정해? 총수님이 주신 거야!]
“이놈아! 거기 있는 그 사람이 회장이야!”
아침 드라마를 바라보는 노인네처럼 천호득은 말 한마디가 나올 때마다 혼잣말을 쏟아냈다.
[그럼 둘 다 가져올 테니까 그렇게 알아.]
그래! 그렇게 강하게 나가야지!
천호득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콰작! 퍽퍽!
서재 창 앞에서 장만섭이 쓰러진 놈의 배를 연달아 걷어차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 덩치만 커다란 미련퉁이가 예뻐 보이는 날이 다 있다.
이어서 천중명이 천상기의 무릎을 밟았을 때 천호득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미안해.]
이건 또 뭔 소리야?
왜 거기에서 사과를 해, 이 사람아!
[오른쪽 무릎을 밟았어야 했는데 왼쪽을 밟았던 거지?]
[야! 안 돼! 안 돼! 안 되-애!]
콰아-악! 드드드득!
[끄으-! 끄아-아!]
천호득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타고난 강단, 일부러 왼쪽 무릎을 밟아놓고는 미안하다고 템포를 죽이는 여유, 그리고 다시 오른쪽 무릎을 밟아버리는 단호함까지, 미치게 좋았다.
[아버지가 휠체어를 타고 다니게 한 벌이니까 앞으로 2년간은 휠체어를 타고 다녀.]
이어서 천호득을 이렇게 만든 벌로 2년간 휠체어를 타란 그 말이 귀를 타고 들어와 가슴 속에서 커다랗게 자리 잡는 느낌이었다.
천호득 인생의 끝에서 지경그룹을 키워냈고, 그걸 저런 놈에게 넘겼으니까 내 인생이 그렇게 망가진 것만은 아니야.
나이를 먹으면 이런 건가 싶은데 울렁이는 가슴을 주체할 길이 없어서 천호득은 눈물이 왈칵 올라왔다.
[아버지께 감사 드려. 이번 지경건설을 가져올 때 죽게 만들까 싶었는데 큰형을 잃고 어깨에서 힘이 빠진 아버지를 보고 참은 거니까.]
“내가 언제? 무슨 어깨에 힘이 빠져?”
천호득의 눈물이 쏙 들어간 다음이었다.
[장만섭!]
천중명이 다부지게 불렀고,
“예에! 회장님!”
거실의 계단 앞에서 터진 장만섭의 답이 천호득의 서재까지 달려들었다.
[정문까지 모셔다 드려!]
“예!”
거실에서 우렁찬 답이 들리고 계단을 쿵쾅거리며 장만섭이 올라올 때 천호득은 얼른 스위치를 다시 눌렀다.
“하아.”
천호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뭐, 더 바랄 것이 없는 과정이요, 결말이 아닌가.
“흐헤헤헤헤헤.”
천호득은 속마음이 빤히 담긴 웃음을 쏟아냈다.
계단을 구보하는 사람처럼 일정한 속도로 뛰어 올라온 장만섭은 곧바로 천상기에게 다가갔다.
널브러진 휠체어, 그 너머에서 양쪽 허벅지를 움켜쥔 채 눈물범벅인 천상기를 보았으련만, 그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우는 꼴을 보이지 않도록 어깨에 메고 내려가.”
“예에.”
우렁우렁해서 저렇게 들리는 건지, 사명감에 불타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장만섭의 답은 평소보다 길게 들렸다.
덥썩! 휘익!
“끄으으!”
마네킹을 들 듯 천상기를 붙잡아 올린 장만섭이 그를 다리가 앞으로 오게 해서 오른쪽 어깨에 걸쳤고,
“끄윽!”
비명 따위 상관없이 왼손으로 휠체어를 들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저놈은 뭐가 저렇게 신나는 거지?
인사까지 꾸벅한 놈이 계단을 내려선 다음이었다.
천중명은 잠시 정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둠을 맞아서 예쁘게 불이 들어온 정원의 조명 사이로 어깨에 천상기를 짊어진 프랑켄슈타인이 왼손에 휠체어를 든 채 계단을 향해 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저기서 반항했다가는 아까 배를 얻어맞은 뒤에 짓밟혔던 깡패 꼴이 됐을 텐데 천상기는 얌전했다.
잠시 뒤에 장만섭이 재킷을 추스르며 계단을 올라오는 것을 보며 천중명은 아래로 내려갔다.
천호득은 거실에 있었고, 현관을 들어선 장만섭은 이유도 모를 인사를 꾸벅했다.
“형은 인사 못 하고 갔어요.”
“됐다. 저녁 먹자.”
“예.”
천중명은 천호득의 휠체어를 붙들고 식당으로 움직였다.
“저기 덩치 큰 놈은?”
“저는 조금 있다가 먹겠습니다.”
“부족하지 않게 좀 챙겨줘. 덩치를 봐. 많이 먹을 거 아닌가. 식사 때마다 고기 올려주고, 수시로 간식도 먹게 해.”
장만섭이 눈을 껌벅이며 당황할 정도로 세심한 배려였다.
당황한 장만섭의 앞을 지나 식당에 들어선 천중명은 그를 상석에 앉혔다.
“이 사람은 어디에 있어?”
천중명이 앉고 나자 천호득은 다시 이은명을 찾았다.
“여기요.”
밥과 국을 직접 들고 온 이은명이 이제야 자리에 앉았다.
먹는 것을 직접 들여다보며 끝까지 살핀 모양이었다.
천호득이 숟가락을 들어 국을 뜨려 할 때였다.
이번엔 김순례가 신선로를 들고 들어왔다.
식사 중간에 음식이 나오는 법은 없다.
천호득과 천중명이 고개를 들었는데 이은명은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대표님. 딸아이를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븐용 장갑으로 들고 온 신선로를 식탁에 내려놓은 김순례가 곱다랗게 고개를 숙였고,
“재료도 본인이 직접 사 왔고, 손질도 혼자 다 했어.”
이은명이 설명을 덧붙였다.
“뭐야, 이게?”
궁금해하는 천호득에게 김순례는 딸의 곤란한 처지와 그걸 해결해 준 천중명의 이야기를 전했다.
“흥! 회장이 한가하기도 했나 보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김순례가 주방으로 들어서자, 천호득은 천중명을 바로 바라보았다.
“받은 사람이 먼저 먹어야 나도 숟가락을 넣지.”
“먼저 드세요.”
“고마워서 준비한 걸 나더러 가로채라고?”
심통 난 노인네의 고집과 맞서기 싫어서 천중명은 얼른 국물을 작은 그릇에 담았다. 그런 뒤에 천호득의 그릇에 적당하게 떠서 앞에 놓아주었다.
“내건 내가 할게.”
이은명이 국물을 뜨면서 셋이서 함께하는 첫 식사가 시작되었다.
“굴비 좀 발라서 저 사람 위에 놔줘.”
“제가 먹을게요.”
“갈비가 좀 멀지 않아?”
“충분합니다.”
“밥이 부족한가 보다.”
이은명이 웃음을 감출 정도로 천호득의 관심은 온통 천중명에게 있었다.
식사를 마친 천중명은 천호득과 함께 그의 서재로 들어섰다.
“그날 이후로 어쩐지 홍차는 냄새도 맡기 싫어.”
노인네의 이런 고집은 천중명도 꺾지 못해서 결국 둘이서 달달한 커피를 앞에 두었다.
“내일 강성학원 전체에 대대적인 세무조사가 있을 겁니다. <오늘의 아침>에서 보도도 있을 예정입니다.”
“주식을 받아주는 건? 그럴 필요가 있겠냐.”
“그대로 하한가에 물량이 쌓여 있으면 개인들의 피해가 너무 심합니다.”
“욕심 부리다가 손해 보는 걸 왜 회장이 신경 써? 공매도 해놓은 주식이 하한가 하루 나올 때마다 3천억 이상 벌어들이는 건 알고 있지?”
“진심은 알 거라고 믿습니다. 공매도는 사채업자와 형을 흔들기 위해 내놓은 방법이지, 돈을 벌기 위해 했던 일은 아닙니다.”
아무리 눈에 예뻐 보여도 못마땅한 건 또 못마땅한 거라는 의미의 시선을 천호득이 폴폴 날려댔다.
“아버지,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뭔데?”
떨리는 손으로 잔을 내려놓은 천호득이 궁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지경갤러리 이사장을 맡아주십시오.”
뭐를 맡으라고? 이런 괘씸한….
훅 바뀐 천호득의 시선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경갤러리의 예산을 장학사업과 사회봉사, 문화사업에 사용하고 싶습니다.”
“그건 이미 하고 있잖아.”
“지경이라는 이름으로 말고 아버지 이름으로 해주십시오. 우리에게 도움 될 인재들을 고르는 게 아니라 삶이 어려운 이들을 돕는 진짜배기로요.”
“그걸 꼭 왜 내가 해야 돼? 엄마도 있잖아.”
천호득의 뾰족한 질문이 날아든 다음이었다.
“언젠가 오늘 저녁에 올라온 신선로처럼 아버지께 진심 담긴 선물을 하는 사람들과 아주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진심으로 울어줄 사람들이 있었으면 싶어서 그렇습니다.”
천호득의 볼이 씰룩였다.
대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건 언제 생각했어?”
“아까 신선로를 받았을 때입니다.”
“생각해 볼게.”
이렇게까지 양보하는 발언을 천호득이 할 줄은 몰랐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말은!”
그 뒤로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한 시간쯤 시간을 보냈다.
이제 그만 돌아가 쉬라고 할 만도한데 천호득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나쁘지 않았다.
내일부터 다시 정신없이 달려야 할 테니 지금은 이렇게 인간적인 감정을 나누는 일이 전혀 나쁠 것 없었다.
강승애에게는 지옥 같을 밤을 천중명은 천호득과 함께 그렇게 보냈다.
**
강승애는 호텔에 있었다.
주식을 산 사람들이 집으로 몰려오고 있어서 잠시 모기떼를 피하는 심정으로 호텔을 선택했다.
의식을 잃었던 강종환은 그 핑계로 병원에 입원시켰고, 면회금지란 푯말을 붙여두었으며, 앞에 사람까지 세워두었다.
- 고소한다고 난리다.
“아빠. 아무리 손해를 봤더라도 사라고 권한 것만으로는 절대 형사가 안 돼요. 아빠가 비밀번호 받아서 주문 넣은 건 없잖아요.”
- 그런 건 없지.
“그러니까요. 형사도 민사도 절대 걸 수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책임진다는 말을 녹취한 사람은 있다.
“법원 판례가 있다니까요. 누가 뭐라고 해도 본인이 주문 넣은 건 본인 책임이에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강승애의 다부진 답에도 전화기 너머에서 “휴우.” 하는 한숨이 건너왔다.
도의적인 책임을 벗어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 너는? 별일 없지?
“호텔에 있는 걸 어떻게 알겠어요? 내일 주식을 넘기면요, 우선 미국에 가 계세요.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정리할게요.”
- 사돈이 전화를 안 받는다는 말은 내가 했었지?
“비겁한 인간이 꼬리를 뺀 거죠. 아까 평창동 다녀와서 내일 주식을 넘기기로 했으니까 우선 100억 이상은 손에 쥐어요.”
또다시 기다란 한숨이 들려서 강승애는 인상을 찌푸렸다.
참자. 부친인 강종환에게는 100억 이상이라고 했으니까 적어도 50억 원 정도는 손에 쥘 거고, 그거로 다시 일어선다.
“우선 미국에 가 계세요. 내일 비행기 표 알아볼 테니까요.”
- 너는?
“애들 학교랑 알아보고 가야죠. 뒷정리도 해야 할 거고요.”
- 그래, 알았다.
전화는 그렇게 끝났다.
절반쯤 켜놓은 조명 아래에서 강승애는 화려한 강남의 밤을 내다보았다.
천봉서가 죽을 때만 해도 지경건설이 반쯤은 손안에 있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강승애는 천중명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쁜 새끼, 일 다 만들어 놓으니까 그 덕에 회장이 된 것도 모르고, 뭐 이번이 마지막 기회?
그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
천중명은 10시가 넘어서야 삼성동의 빌라로 돌아왔다.
“저녁은요?”
“먹었습니다. 드셨어요?”
“그럼요. 그런데 애가 아직 안 왔어요. 회식이라고 하던데.”
허선영이 늦게 들어온 것이 커다란 잘못이라는 듯 송순주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첫날인 데다 대표이사를 맡았으니 쉽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도 비슷할 테니 넉넉하게 지켜봐 주세요.”
“고마워요.”
“말씀도 편하게 하시구요.”
웃는 낯으로 송순주를 대한 천중명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들었을 때였다.
홍삼과 영지버섯 달인 물을 송순주가 내놓았다.
“저, 그런데 나는 이만 안성으로 가면 어떨까요?”
그리고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이곳 생활이 많이 힘드세요?”
“집을 오래 비워둔 것도 마음에 걸리고, 또 젊은 사람들이 괜히 나 때문에 가까워지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것도 걸리고….”
송준주가 말끝을 흐렸다.
더 가까워진다고?
송순주가 건네준 홍삼과 영지버섯 끓인 물을 마시며 천중명이 내심 흐뭇한 웃음을 지을 때였다.
삑삑삑삑삑삑삑삑. 띠루룩.
문이 열리며 허선영과 곽대출이 함께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힘들어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생기가 감도는 눈빛이었다.
“어떻게 함께 들어와? 앞에서 만났어?”
“예, 회장님. 그럼 저는 들어가서 씻겠습니다.”
“곽 이사는 회사에서 지금 오는 길이야?”
“예?”
곽대출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눈치를 살폈다.
‘발전이 너무 빠른 거 아니냐?’
‘좀 봐줘.’
‘이번은 넘어가 준다.’
천중명의 웃음을 본 곽대출이 계면쩍은 얼굴로 방을 향해 움직였고,
“씻고 나올게요.”
혹시라도 천중명이 잠들 것이 두렵다는 것처럼 허선영이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재킷과 정장 바지 차림이 세련돼 보여서 좋았다.
좀 더 가까워진다?
방을 향해 걸으면서 천중명은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