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82화 (82/315)

# 82

082. 알아서 할게요 (1)

천중명은 이미 정문에서 강승애의 승용차를 보았고, 직원들에게 그녀가 왔다는 사실도 들었다.

올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좀 더 빨랐을 뿐이었다.

덤덤하게 저택의 현관을 들어선 다음이었다.

난처한 표정의 직원들과 당황한 강승애가 천중명을 바라보았고, 서재를 나서는 천호득과 이은명의 복잡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난 얼굴로 시선을 주었다.

“저 왔습니다.”

“바쁠 텐데 어쩐 일이야?”

강승애와 아이들 둘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천호득과 천중명이 주고받은 대화였다.

“내일 단행하는 임원 인사에 관해 의논드리려고 왔습니다.”

“전부 유임한다고 한다며?”

강승애 들으란 듯이 천호득이 반문하고 있었다.

굳이 거실에서 떠들 내용은 아니었으나 노인네의 표정에 담긴 간절한 바람을 천중명은 외면하지 못했다.

“지경건설 임원 전부를 교체할 생각입니다.”

“흥! 그런 걸 뭘 내게 물어? 신임 회장이 알아서 할 일이지.”

늘어트린 볼에 자부심을 가득 담은 채 천호득이 대꾸를 건넸다.

대화에 끼어들 타이밍을 노리는 강승애가 이리저리 눈치를 살필 때였다.

“둘째가 온다고 했다.”

천호득이 고자질하는 투로 다시 말을 꺼냈다.

“잘됐습니다. 어차피 만나볼 참이었거든요. 아버지는 서재에 계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강승애의 놀란 표정을 거실에 있는 모두가 보았다.

아버지? 그냥 아버지도 아니고 아버지는 서재에 계시라고?

그 말을 천호득이 순순히 듣고 있다고?

“그래도 되겠어?”

“예. 저녁 먹고 가도 되죠?”

“그럼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려고 그랬어!”

여전히 무뚝뚝한 말을 던진 천호득이 뒤를 돌아보자, 이은명이 휠체어를 돌려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의 문이 닫힌 다음이었다.

천중명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과 4학년인 딸이 이상한 나라에 온 아이들처럼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었다.

“아이들이 있어서 양보하겠습니다. 지금 얌전히 나가면 가진 주식 전부를 내일 시간 외 거래에서 받아드릴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가는 거고요.”

강승애의 눈이 반짝였다.

내일 하한가를 맞으면 얼마나 손에 쥐는지를 계산하는 눈치였다.

“170억쯤 남습니다.”

계산은 천중명이 더 빨랐다.

오전에 470억 원의 주식을 담보로 잡히고 빌린 돈이 400억 원인데 두 번 하한가를 맞게 되면 정말 그 정도 남는다.

“여기에서 공연히 말이 오가면 그마저도 날아갑니다. 그리고 들으셨지만, 형이 오고 있답니다. 셋이 앉으면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나올 텐데 괜찮겠습니까?”

“아이들 키울 양육비는 지원해 줘요.”

시장에서 나물을 사던 사람이 덤을 달라며 까만 비닐봉지를 벌리는 것처럼 강승애는 결국 조건을 달았다.

“그리고 우리 그이가 남긴 비자금도 날 줘야 해요.”

초췌하다고 해도 웨이브를 강조한 헤어스타일에 투피스 차림과 브로치를 잊지 않은 강승애를 천중명은 차갑게 바라보았다.

“형이 가졌던 부동산과 예금, 주식까지 전부 받은 거로 압니다. 양육비를 원하면 내가 아니라 형에게 바라지요. 그게 도리에 맞는 것 같은데?”

무슨 뜻인가를 생각하던 강승애의 눈 끝이 파랗게 변해서는 부르르 떨렸다.

“장만섭.”

“예, 회장님.”

“정문까지 모셔. 그리고 다시는 이 집에 발 못들이게 하라고 지시하고.”

“예!”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답한 장만섭이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시키는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갈게요.”

강승애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꾹꾹 눌러놓은 자존심이 상해서 더는 버티기 힘겨운 얼굴이었다.

“내 주변에서 산 주식도 받아줘요.”

그러면서 마지막까지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헛소리를 자꾸 하면 내일 시간 외 거래가 없어집니다.”

진짜 아이들 먹일 것이 없어서 온 사람과 목돈을 노리고 온 사람은 표정과 행동과 눈빛이 다르다.

아마 강승애는 평생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내일 시간 외 거래는 어떻게 해요?”

“기획실장에게 지시할 테니 그렇게 아세요.”

슈퍼에서 가장 싸고 작은 쌀 포장을 들고도 이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치킨이 먹고 싶다는 아이들의 말이 가슴에 남아서 생닭 봉투를 들었다가는 다시 내려놓는 사람의 심정을 저 여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거다.

“약속 지켜요.”

“다음에 여기에 오게 되면 정문에서 수모만 남습니다.”

입술을 움찔거리며 이를 씹어댄 강승애가 아이 둘의 어깨를 당기며 몸을 돌렸다.

저 여자는 분명 다시 온다.

먹고 사는 것이 힘겨워서가 아니라, 살림의 규모를 줄이지 못해서 그럴 거다.

현관을 나서는 강승애를 보며 장만섭이 입맛을 다셨다.

이번에도 능력을 보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

픽 웃은 천중명은 천호득의 서재로 향했다.

“갔어?”

“예.”

“얌전히?”

“내일 시간 외 거래에서 가진 주식을 전부 받아주기로 했습니다.”

“고약한 년.”

눈치를 살핀 이은명이 조용하게 서재를 나선 다음이었다.

“아버지. 형이 남긴 비자금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천중명은 하려던 이야기를 꺼냈다.

“비자금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은데 그러면 부작용이 워낙 심합니다. 그룹 전체가 언론의 타깃이 될 수도 있고요.”

“네가 챙기면 되잖아.”

“그러면 약점이 잡힙니다. 그래서 그 돈을 아파트 부실시공을 보완하는 데 사용할 생각입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천호득을 향해 천중명은 아파트의 부실시공에 대해 먼저 설명했다.

“입주 시기 전에 끝내려면 야간 공사가 불가피합니다. 게다가 위아래 층의 방음, 옆집과의 벽 보강까지 하려면 시간이 부족할지도 모르고요.”

“건축 규정에 맞게 지었을 텐데 왜 그런 짓에 돈을 낭비해? 감리 통과하고, 시에서 주는 입주허가 손에 쥐면 우리는 더 할 게 없어. 네가 말한 건 전부 하청에서 해결할 일이지!”

“아버지.”

천중명은 나직하게 천호득을 불렀다.

“그렇게 빼돌린 돈이 비자금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바꿀 생각입니다. 글로벌 시대입니다. 우리의 가장 든든한 고객을 배신해서는 앞으로 지경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람아!”

천호득의 호칭이 바뀌어 있었다.

“아파트 하나만 해도 허가 사항이 몇 개나 되는 줄 알아? 아무리 우리가 제대로 해도 처먹지 않으면 도장을 찍질 않아! 코에 걸고, 귀에 걸어서 절대 통과시켜 주질 않는다니까.”

고함이 아니었다.

철부지 막내를 어떡해서든 설득하겠다는 진짜 아버지의 음성으로 천호득은 현실을 설명하려 애쓰고 있었다.

“떡값이라고 불러. 정부 공사는 순서를 정해서 우리가 받을 때면 떡을 친다고 적당하게 물러나는 건설 업체에 현찰을 돌리고. 그런 돈이 공식적으로 어떻게 나와?”

“그런 공사는 안 하면 됩니다. 앞으로 아파트는 선분양이 아니라 완전 시공 후 분양으로 돌릴 계획입니다. 빌라처럼요.”

기가 막혔는지 천호득은 흐느끼는 것처럼 웃었다.

“임대업으로 진출할 생각도 있습니다.”

“뭐?”

“인구는 계속 줄어듭니다. 그래도 서울은 늘 집이 부족할 겁니다. 적당한 장소에 단단하고 좋은 아파트를 지은 뒤에 아예 월세로 돌릴 계획도 있습니다.”

“필요한 자금은?”

“그룹에 유보금이 제법 있습니다. 은행에 넣어서 이자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임대업에 투자하는 것이 백 번 현명한 일입니다.”

천호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분양도 할 겁니다. 그래야 여유 자금이 계속 회전될 테니까요.”

“당장 하는 건 아니지?”

“우선 임원들 전부 교체하고, 이어서 부실시공 정리한 뒤에 천천히 진행할 생각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천호득이 픽 웃더니 눈을 들었다.

“일부러 그랬지?”

“뭐 말씀하십니까?”

“시공 후 분양이니, 임대업이니 하는 말. 그 말을 듣고 나니까 부실시공을 바로잡는 데 비자금을 사용한다는 건 오히려 평범하게 들리잖아.”

천중명의 눈을 들여다보던 천호득이 묘한 웃음을 그려냈다.

“유 본부장과 기획실장이 속 좀 타겠구만.”

“그런 건 잘 모르겠습니다.”

“흐헤헤헤헤.”

천중명과 마주 앉은 시간이 좋은 모양이었다.

어떤 말을 하든, 이렇게 지켜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천호득은 행복한 얼굴이었다.

노인네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재의 창으로 천상기가 들어서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계단을 올라오기 위해 휠체어를 든 세 놈은 깡패들이 분명했다.

평창동을 찾아오면서도 저런 놈들을 데려오는 것을 보면 강승애나 천상기, 두 사람 모두 한결같은 맛은 있었다.

“형이 왔습니다. 제가 먼저 만나보겠습니다.”

“나는 보고 싶지도 않다!”

“알아서 할게요.”

천중명이 몸을 일으킨 틈에 서재의 창을 바라보았던 모양이었다.

“밑에 있는 아이들을 불러.”

천호득이 정문에 있는 직원들을 부르라는 뜻을 전했다.

“괜찮을 겁니다. 2층에서 조용하게 말할 거니까요.”

그대로 서재를 나선 천중명은 거실에서 기다리던 장만섭에게 시선을 주었다.

“형이 쓸데없는 놈들 셋을 데려왔다. 그놈들 치우고 형만 데리고 들어와.”

“예, 회장님!”

사명감 넘치는 음성이 거실을 가득 울린 직후였다.

혹여 지시가 바뀔 것을 염려하는 것처럼 완벽하게 프랑켄슈타인으로 빙의된 얼굴을 한 장만섭이 바쁘게 거실을 나섰다.

“너는 뭐야!”

천상기의 고함이 들렸고,

“정문에 있는 직원들더러 올라오지 말라고 하세요.”

겁에 질린 메이드를 향해 천중명이 지시했으며, 김순례가 인터폰을 들었을 때였다.

퍼억! 콰작!

광대뼈 하나는 주저앉혔구나 싶은 소리가 두꺼운 현관문을 뚫고 거실로 들어왔다.

천중명이 픽 웃은 다음이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천상기의 고함에 이어서 콰작, 퍽, 퍼버벅, 콱, “끄아!” 같은 효과음들이 연달아 들렸다.

서재 문을 빼꼼히 연 천호득이 현관을 바라보았고, 이은명이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김순례에게 다가가 손을 맞잡았을 때, 현관문이 열렸다.

천중명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다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거실 안으로 천상기가 앉은 휠체어를 앞으로 든 장만섭이 들어서고 있었다.

“2층 거실에 가져다 놔.”

“예에! 회장님!”

우렁우렁하게 답을 한 장만섭이 거짓말처럼 휠체어를 앞으로 든 자세 그대로 계단으로 걸었다.

놀이기구를 처음 타서 놀란 아이처럼 천상기는 눈만 껌벅일 뿐 아예 입도 떼지 못했다.

“금방 끝날 거거든요. 저녁 먹고 갈 거니까 식사 준비 좀 부탁드려요.”

천중명이 계단으로 몸을 돌릴 때였다.

급하게 아래로 내려온 장만섭이 먼저 재킷을 매만졌다.

“테이블 앞에 모셨습니다. 밖에 쓰러진 놈들을 버리고 오겠습니다.”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꺼낸 보고였다.

“고생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여간 존재의 이유를 증명한 밀란 쿤데라처럼 장만섭은 바깥을 향해 움직였고, 천중명은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한 칸, 한 칸 줄어든 계단 위로 2층 거실의 바닥이 보였고, 이어서 거실의 풍경과 테이블 건너편의 휠체어가 차례대로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걸은 천중명은 천상기의 맞은편 탁자에 앉았다.

분위기 참!

하필이면 그때 프랑켄슈타인이 축 늘어진 놈을 어깨에 하나, 다시 옆구리에 하나를 끼운 채 정문을 향해 걸어가는 건지, 그 모습을 거실 창을 통해 내려다본 천상기의 표정이 핼쑥하게 변했다.

“저 쓸데없는 깡패들 좀 끌고 다니지 마. 하나도 안 무섭다니까.”

마른침을 삼킬 뿐, 천상기는 대꾸가 없었다.

“조용하게 아버지께 죄송하다고 하고 가. 그럼 저축은행만 가져오는 것으로 끝낼 테니까.”

“그걸 네가 왜 결정해? 총수님이 주신 거야!”

존경스러울 정도로 일관된 모습이 이 인간의 유일한 매력쯤 되겠다.

“그럼 둘 다 가져올 테니까 그렇게 알아.”

콰작! 퍽퍽!

천중명의 말에 장단을 맞추는 것처럼 뜻밖의 소리가 정원에서 올라왔다.

끌려가던 놈이 꿈틀하기라도 했던 모양이었다.

놈을 시원하게 밟은 장만섭이 연달아 배를 걷어차며 나는 소리였다.

“저런 데 시선을 뺏길 틈이 있어?”

화들짝 놀란 천상기의 시선이 설마 하는 의문을 안고 달려왔다.

“내가 경고했었지?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지?”

“야, 이…! 내가 뭘! 내가 뭘 어쨌다고!”

“그걸 꼭 말을 해야 알아들어?”

천중명이 일어나자 천상기는 본능적으로 휠체어의 바퀴를 뒤로 밀었다.

휘익! 콰악! 콰다다-당!

“사람 살려! 사람 죽어요!”

벌렁 넘어간 휠체어 너머에서 천상기가 고함을 질러댔다.

“아, 진짜!”

바닥을 기어가는 천상기를 향해 천중명이 훅 다가갔다.

“제발! 제발!”

“발이 아니라 무릎이라니까!”

콰악! 콰드드득!

“끄아-! 끄아아-!”

참으로 실감 나고 한편으로는 처절하게 들리는 비명이었다.

“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그것도 그깟 잘난 돈 때문에? 그러고도 무릎이 아파?”

“흐으! 흐으으! 흐으!”

고통을 이겨내느라 신음에 울음을 섞어 토해내는 천상기를 보며 천중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미안해.”

울던 천상기가 눈물 가득한 시선을 퍼뜩 든 직후였다.

“오른쪽 무릎을 밟았어야 했는데 왼쪽을 밟았던 거지?”

“야! 안 돼! 안 돼! 안 되-애!”

콰아-악! 드드드득!

“끄으-! 끄아-아!”

“좀 오래 기억해. 그리고 아버지가 휠체어를 타고 다니게 한 벌이니까 앞으로 2년간은 휠체어 타고 다녀. 만약 내 말을 어기면 그땐 목을 밟아줄 생각이니까 앞만 보고 살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무릎을 움직이지 못해 상체를 비틀며 흐느끼는 천상기의 몸 위로 천중명의 차가운 경고가 서리처럼 내려앉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