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081. 고객의 요청으로 (3)
천상기는 믿을 만한 깡패 둘을 데리고 박승양의 대치동 오피스텔에 들어섰다.
조 단위로 돈을 굴린다는 박승양이었다.
그러나 그의 오피스텔은 삶의 의욕이 전혀 보이지 않는 여직원과 그녀가 앉은 책상, 그리고 싸구려 원형 탁자, 안쪽에 따로 만든 문이 당장 보이는 전부였다.
“회장님 뵈러 왔소.”
천상기의 휠체어를 밀어준 깡패가 용건을 말하자 안쪽 공간의 문이 열렸다.
“천 회장. 이리 들어와요.”
박승양이었다.
그는 조금 전에 골프라도 즐기다 온 사람처럼 편안한 복장이었다.
천상기가 들어선 박승양의 공간 역시 바깥과 비슷했다.
오래되고 낡은 소파, 잡다한 물건이 가득 올려진 책상, 구석에 놓인 퍼팅 연습기까지, 전체적으로 어수선하고 허접스러운 느낌이었다.
1인용 소파 하나를 빼내고 천상기의 휠체어가 자리 잡자 여직원이 종이컵에 봉지 커피를 성의 없는 표정과 태도로 가져다주었다.
“그럼 말씀 나누십시오.”
박승양을 익히 아는 깡패 둘이 방을 나선 다음이었다.
“회장님. 주식을 던지셨더라구요.”
“그랬지.”
천상기가 따지듯 던진 말을 박승양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내가 주식을 던져서 우리 천 회장이 손해 보신 게 있나?”
“더 먹을 수 있는 걸 못 먹었잖습니까?”
박승양은 입 끝을 움직여 웃었다.
“이봐요, 천 회장. 내가 분명히 말했잖소. 내가 정한 금액에서 75퍼센트 아래로 움직이면 바로 시장에 때린다고. 차 좀 들어요.”
뻔뻔하게 종이컵에 담긴 봉지 커피를 권한 박승양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안 때렸으면 우리 천 회장 물건이 나왔을 거 아닌가. 서로 다 아는 사이에 그런 말을 하면 좋은 사이가 괜히 불편해지잖소.”
박승양의 뻔뻔함에 천상기는 말문이 턱 막혔다.
확실히 박승양은 천상기보다 두 수쯤 위였다.
“우리 천회장이 가진 주식이야 내일 팔아도 원가에 넘기는 꼴이니까 손해는 없을 테고, 내일모레 정산되는 거로 한 700억쯤 먹을 텐데 뭘 더 욕심을 내시나?”
말을 마친 박승양은 손톱을 들여다보는 여유까지 보였다.
“박 회장님은 강승애의 부동산도 손에 넣으신 거 아닙니까?”
박승양이 또 묘하게 웃었다.
“주식에서 손해난 게 있으니까 부동산으로라도 만회해야지.”
“부동산 시세가 1,300억입니다. 그걸 500억에 혼자 먹겠다는 건 너무 큰 욕심 아닙니까?”
“그게 아쉬웠으면 천 회장이 돈을 돌려줬으면 됐을 거 아니오? 나는 내 고래 심줄 같은 500억을 넣고 부동산이 팔릴 때까지 돈이 묶여. 내가 500억으로 하루에 얼마나 벌 것 같소?”
천상기는 또 입을 다물었다.
“기분 나쁘면 금감원에 고발하시든가. 나는 뭐 장부에 이름 없는 사람이니까 내 동생이 한 2년 살다 오면 되는 거고. 그런데 천 회장은 괜찮겠소?”
말문이 막힌 천상기를 박승양이 비릿한 눈으로 보았다.
“통정 매매에 시세 조종, 내부자 거래로 들어가시면 초범이고 변호사 제대로 쓸 테니까 뭐, 집행유예로 나온다고 쳐도, 부당이익 환수나 추징금 걸리면 아프실 텐데?”
“협박하시는 겁니까?”
“협박은 깡패 몰고 온 우리 천 회장이 하신 거고. 나는 그런 거 몰라.”
치켜뜬 박승양의 눈을 보며 천상기는 피가 흥건한 살점을 물고 있는 승냥이를 떠올렸다.
“한 가지만 들어주시죠. 내가 맡긴 주식 말이죠. 하한가로 계산하지 말고 하한가 직전의 가격으로 계산해 주십시오.”
“하한가로 팔린 걸 어떻게 그렇게 계산할 수 있소?”
“박 회장님은 부동산에서….”
“나도 하한가로 때리는 바람에 주식에서는 손해가 났다니까.”
이 인간이 정말!
내막을 빤히 아는데도 말이 통하지 않아서 천상기는 속만 바글바글 끓었다. 막말로 최악에는 교도소 가겠다는데 무슨 말이 통하겠나.
남몰래 산 주식을 팔아 돈을 잔뜩 처먹고는 강승애의 주식을 하한가에 던져 원금이 손해나게 만들 줄은 몰랐다.
오늘 오전에 산 500억 원의 주식을 담보로 돈을 빌려 오후에 또 주식을 샀던 강승애는 30퍼센트 수준의 하한가에 결국 남는 게 하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박승양이 만든 하한가 한 방에 강승애는 부동산을 담보로 빌린 돈 500억 원을 깨끗이 날리는 데다, 내일 하한가를 한 번 더 맞으면 오히려 담보를 다 날리고도 갚아야 할 돈이 생기는 꼴이 된다.
피도 눈물도 없는 마귀 새끼!
천상기는 박승양을 향해 속으로 욕을 뱉었다.
은행이나 저축은행에서 돈을 빌리면 최악의 경우에도 경매절차가 남지만, 사채는 다르다.
처음부터 인감증명서와 매매계약서를 공증해서 약속한 날에 돈을 못 갚으면 바로 명의를 넘긴다.
그것뿐이면 말을 안 한다.
박승양은 강승애가 원금을 갚지 못했다며 남은 금액에 대해 하루 10퍼센트의 이자를 계속 불리고, 불리고, 또 불릴 거다.
이 방에 들어온 깡패들조차 함부로 못 하는 박승양을 빈털터리가 된 강승애가 상대한다고?
천상기가 내심 고개를 저을 때였다.
“천 회장. 내가 충고 하나 드릴까?”
입을 다물고 있는 천상기를 향해 박승양이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거기 새로 지경그룹의 총수가 된 회장에게 붙어요.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야. 내 인간적으로 하는 충고요.”
천중명을 칭찬하는 듯한 말에 천상기는 눈에 불똥이 탁 튀었다.
게다가 뭐 인간적? 다른 말도 아니고 인간적?
“뭘 그렇게 불편한 얼굴로 그러시나? 내가 좋은 마음에서 한 말인데.”
“회장님이 그 개망나니를 알기나 하십니까?”
“뭐, 우리 천 회장만큼은 아니더라도 내 나름으로 알 것 같기는 합디다. 그 양반이 돈을 빌려달라면 내가 신용으로 돈을 빌려줄 수도 있을 것 같소.”
“가겠습니다.”
자존심이 팍 상한 천상기가 밖을 향해 “가자!”하고 고함을 질렀다.
깡패들이 들어와서 휠체어를 붙들었고,
“정산은 분명하게 해주십시오.”
천상기는 한마디를 남기고 그 길로 오피스텔을 떠났다.
“상대가 안 되네.”
천상기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박승양은 비릿하게 웃었다.
“천호득 영감님이 운이 좋았어. 저런 인간이 총수가 되었으면 지경그룹 절반은 내 손에 들어왔을 텐데.”
박승양은 흥미를 잃었다는 듯이 퍼팅 연습기가 놓인 구석으로 움직였다.
**
몇 번을 걸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내내 꺼져 있는 천상기의 전화번호를 강승애는 또 눌렀다.
세상에! 신호음이 가고 있었다!
- 여보세요?
느긋한 천상기의 음성이 들리는 순간, 강승애는 한쪽에서 불같은 분노가 일어나는 한편, 반대쪽에서는 맥이 탁 풀리는 신기한 경험마저 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 송도상인을 만나고 나오는 길입니다.
엮여 들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강승애는 열흘 굶은 붕어처럼 미끼를 물 수밖에 없었다.
“내 전화를 안 받아요. 뭐래요?”
- 주식으로 손해가 났다고 불같이 화를 내던데요.
“그건 그쪽에서 주식을 던져서 그런 거잖아요!”
- 지금 나한테 화를 내시는 겁니까?
솔직히 강승애의 음성이 높긴 했지만, 충분히 화를 낼 만한 상황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강승애는 천상기의 반문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지금의 처지가 얼마나 서럽고 분하던지 강승애는 왈칵 눈물이 올라오는 지경이었다.
“화를 낸 게 아니라 내 상황이 그렇잖아요. 그러지 말고 돈 좀 돌려줘요. 우리 부동산 찾아오면 그거 팔아서 깔끔하게 갚아줄게요.”
- 우리 저축은행의 전무를 보내드릴까요?
이 개새끼가 진짜!
이번엔 강승애의 눈에서 불이 탁 튀었다.
“천 회장은 알잖아요. 그거 1,000억이 넘어요. 팔리는 대로 갚으면 되니까 그럼 저축은행에서 박 회장에게 빌린 돈 500억만 먼저 좀 갚아줘요.”
- 이사장님. 주식으로 손해난 걸 한 번에 갚아야 부동산을 풉니다. 나도 그걸 도우려고 박 회장에게 가본 건데 그 양반이 길길이 뛰고 난리라니까요.
강승애는 올라오는 분노와 해일처럼 터져 나오는 굴욕을 삼키느라 전화기를 든 상체를 책상에 처박으며 몸을 비틀었다.
어떡해서든 차분한 음성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니까 우리 천 회장이 저축은행에서 부동산 담보로 돈을 돌려서 박 회장에게서 빌린 돈 갚아주면 되잖아요. 안 되면 개인 돈을 좀 돌려줘요. 죽은 형을 봐서라도 한 번만요.”
- 저축은행은 규정 때문에 어렵고요. 저 역시 지금 주식을 샀다가 주변까지 다 무너져서 여력이 없습니다.
너, 이 새끼 진짜!
강승애는 결국 악에 받치고 말았다.
“내가 죽으면 혼자 죽을 것 같아요?”
- 그런 거라면 개망나니를 벼려야지, 왜 나한테 그럽니까?
확실히 뻔뻔한 면에서 강승애는 천상기의 적수가 아니었다.
“두고 봐요.”
- 정리되시면 전화 주십시오. 식사나 한번 하시죠.
전화를 끊은 강승애는 잠시 숨을 골랐다.
얼마나 분하던지 뱉어내는 숨소리가 흐느낌처럼 툭툭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강승애는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아줌마! 나예요! 지금 출발할 거니까 학원에 가서 애들 집에 데려다 놓으세요. 평창동에 갈 거거든요. 옷장에서….”
지시를 전하던 강승애가 멈칫했다.
“다림질 안 한 옷 찾아봐요. 허름한 거로.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허름한 옷이라고! 허름한 옷! 없으면 옷장에서 아무거나 꺼내서 발로 밟아! 말귀 좀 알아들어! 제발 좀!”
오피스텔이 떠나갈 것처럼 강승애는 악을 바락바락 쓰고 있었다.
**
천호득은 서재에 있었다.
이은명이 재미있게 읽었다던 책을 앞에 두긴 했는데 당최 취미가 없어서 눈이 가질 않았다.
평창동 서재에 있지만 그래도 천호득은 지경그룹을 이끌던 구렁이였다.
앉아서 구만리를 살피는 수준인데 요즘은 아주 오금이 저려 죽을 지경이었다.
보고 싶었다, 천중명이 일하는 모습을.
유진교가 전해주기는 하는데 어쩌면 일을 이렇게 풀어내는지 기특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하여간 보고 싶었다.
아버지라고 불러주는 천중명의 목소리와 표정이 귀와 눈에 선해서 핑계만 있다면 매일 불러들이고 남았을 천호득이었다.
다른 놈들은 부르면 왔는데 이상하게 천중명은 부르기가 켕겼다.
그룹 회장실에 책상을 하나 놔달라고 해?
천호득이 서재 창으로 정원을 바라볼 때였다.
정문 앞에 멈춰 선 익숙한 승용차가 눈에 들어왔다.
내린 사람은 강승애와 죽은 천봉서가 남긴 아이 둘이었다.
천호득의 눈 끝이 독하게 변한 직후였다.
우우웅. 우우웅.
그의 휴대전화기가 울었다.
액정에 올라온 천상기의 이름을 확인한 천호득은,
“개 같은 놈.”
단박에 욕을 뱉어냈다.
우우웅. 우우웅.
이놈은 목적한 걸 손에 넣을 때까지 달려든다.
온갖 야비한 짓을 서슴지 않으면서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걸고 또 걸 놈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나 본다는 심정으로 천호득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총수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손가락을 깨물어서 당장 피라도 먹일 것 같이 애절한 천상기의 음성이 전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무슨 일이냐?”
- 염치가 없어서 고민만 하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전화 드렸습니다. 정말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게 왜 이제 와서 왜 궁금해?”
- 총수님. 오해하셔서 그러신 겁니다. 강승애 이사장이 중간에서 얼마나 이간질을 시키는지….
“지금 정문을 들어서는 저년 말이냐?”
- 예? 이사장이 지금 평창동에 도착했습니까?
천호득은 차갑게 웃기만 했다.
- 지금 악에 받쳐 있어서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제가 지금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필요 없어!”
- 아닙니다. 총수님께 매를 맞든, 꾸중을 듣든 이사장만큼은 제가 막아드리겠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천호득이 거실 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강승애는 양쪽에 아이들을 세운 채 정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죽일 년!”
다부지게 욕을 뱉으면서도 천호득은 천중명이 아쉬웠다.
뱀보다 징그럽게 느껴지는 강승애와 교활하기 그지없는 천상기를 상대하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저 천중명이 옆에 있기만 해도 힘이 될 것 같아서였다.
정원을 지나 현관으로 돌아서는 강승애를 보며 천호득은 씁쓸하게 웃었다.
‘잘못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벌이라면 벌이겠지.’
그는 숨을 들이마신 뒤에 천천히 내뱉었다.
천봉서를 죽이고, 윤만석의 팔다리를 자른 독한 여자가 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아이들을 앞세운 채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저 뱀 같은 여자와 손을 잡았던 둘째 놈이 또 그 핑계로 천호득을 찾겠다며 달려오고.
명분으로 이만한 것도 없겠지.
지금 지닌 것을 더 확실하게 움켜쥐려면 가장 먼저 천호득을 꼬드겨야 할 테니까.
지금쯤 강승애는 거실에 도착했을 거다.
“나도 늙었네.”
천호득은 떨리는 손으로 셔츠의 끝을 매만졌다.
독기가 떨어졌다.
똑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어두운 표정의 이은명이 들어왔다.
“큰 며느님이 왔어요.”
“며느님이 뭐야! 당신이 왜 그년을 그렇게 불러!”
“아이들 들어요.”
“흥!”
천호득이 거칠게 인상을 찌푸릴 때였다.
이은명이 상체를 기울여 거실 창밖으로 바라보았다.
천상기 이놈이 벌써 왔나?
“시끄러울지 모르니까 당신은 안에서 나오지 마.”
천호득이 독한 음성으로 말을 건넨 직후였다.
“중명이도 부르셨어요?”
뭐? 중명이? 중명이를 불렀다고?
이은명의 시선을 따라 홱 고개를 돌린 천호득은 바보처럼 입술을 삐죽였다.
정원을 향해 기울어진 저녁노을을 등지고 정말 천중명이 들어서고 있었다.
황야의 무법자를 흉내 내듯 거칠 것 없는 걸음이었다.
“저놈이 왜 왔지? 바쁜 녀석이?”
천호득의 타박은 어쩐지 우는 것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