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080. 고객의 요청으로 (2)
지경그룹 본사로 들어간 천중명을 기다리는 것은 꽤 많은 분량의 결재 서류와 면담 요청 메모였다.
꼭 필요한 면담이라고 판단한 것만 올린다고 했는데도 이 정도면, 거절해야 하는 홍보실이나 비서실도 죽을 맛이긴 하겠다.
책상에 앉은 천중명은 결재 서류를 살폈다.
어제 2천6백억 원이 넘는 결재를 넘겼는데, 오늘 역시 비슷한 서류들이 천중명의 승인을 바라고 있었다.
계열사가 많은 탓도 있을 테고, 그동안 결재가 밀린 이유도 있었을 것이며, 어제 올라왔던 결재가 모두 통과되었다는 정보를 듣고 밀려들었을 공산이 컸다.
마음을 굳힌 천중명은 연필을 먼저 집어 들었다.
이런 과정은 가장 좋은 공부다.
하나씩, 악착같이, 꼼꼼하게 살펴서 현재 계열사들이 진행하려는 사업의 종류를 통해 그룹의 미래를 짐작해 볼 생각이었다.
천중명은 특히 보고 담당 임원들의 의도에 집중했다.
수익이 최우선인지, 사업의 성장인지, 아니면 본인의 승진을 위한 계기로 삼는지를 분석하기 위해 애썼다.
유진교와 최만호를 불러 설명을 들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해야 할 업무가 많은 데다, 이런 것을 혼자 판단하지 못하면 결국에는 그들의 의견을 따라 결재를 넘기는 무능한 리더가 될 수도 있었다.
서류 넘기는 소리, 자세한 데이터를 얻기 위해 키보드를 누르는 소리, 그 외에는 천중명이 끝내 이해하지 못한 점을 메모하는 연필 소리만이 집무실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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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아침>은 초긴장 상태였다.
“알아서들 해.”
평소라면 고함을 버럭버럭 질렀을 대표의 나직한 경고, 사명감에 불타 온몸에서 탄내가 풍기는 듯한 편집국장의 독한 눈빛이 기자들의 숨통을 조르는 느낌이었다.
“듣는 순간에 확실하게 인식되는 단어를 찾아내.”
편집국장은 기초적인 방법까지 들어가며 방향까지 제시했다.
“확정된 기사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과정은 선동과 다를 게 없어. 시각을 자극하는 그래프를 좀 더 유리하게 만들어!”
직원에게 지시를 내린 편집국장은 책상에 놓인 초고를 들었다.
“이건 뭐야? 강성 재단이 빼먹은 돈을 장학금으로 사용했다면, 그 혜택을 받았을 학생 기사를 만들어 오라고!”
단숨에 내용을 훑은 편집국장이 화가 난 것처럼 손에 들고 있던 A4 용지를 찢어버렸다.
“김 씨는 강성학원 소속 학교를 나와서 아직도 학자금을 못 갚은 상태다! 그때 장학금만 규정대로 나왔어도 김 씨는 원하는 공부를 제대로 마쳤을 테고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 거다!”
초고를 올린 기자를 향해 편집국장은 고함을 버럭 질렀다.
“이렇게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기사를 가져오라고! 여기에서 김 씨가 누군지 뭐가 중요해? 마지막은 5년 뒤 김 씨는 여전히 고시원에서 대출한 학자금을 갚기 위해 홀로 있을 것이다! 이런 거 좀 안 돼? 어?”
고개를 떨군 기자를 잠시 노려보던 편집국장은 바로 다음 초고에 시선을 주었다.
“그래! 현충기! 이래 줘야지!”
기자들이 보란 듯이 편집국장은 초고가 적힌 용지를 위로 들어 펄럭였다.
“좀 봐라, 봐! 보고 배우라고! 강성학원 아들이 사용한 법인카드 내역! 강준수는 이름만 임원인 채…! 이런 거 좀 가져오라고!”
편집국장의 불타오르는 시선을 피하듯 기자들은 모니터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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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기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자꾸만 왼쪽 가슴을 두들겼다.
점점 내려가던 지경건설의 주가는 어제보다 4만 원 빠진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었다.
“어떤 놈이지?”
분명 박승양이나 천상기 말고도 물량을 던지는 놈들이 확실히 있었다.
우우웅. 우우웅.
그때 휴대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어떻게 된 거야?”
재빠르게 통화 버튼을 누른 천상기의 질문이었다.
“모르겠다는 게 말이 돼? 언제 주식을 샀는데? 뭐?”
상대방의 답을 들은 천상기는 인상을 찌푸리며 책상 위의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담보로 넘긴 날이잖아! 그럼 이것도 박승양 쪽 주식이란 뜻이네. 그 마귀 새끼! 우리 물량은 얼마나 남았어?”
그나마 상대방의 답변은 만족할 수준인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천상기의 표정이 그랬다.
“장 마감 20분 근처에서 그냥 던져! 하한가고 지랄이고, 이거 어차피 깨졌어. 일단 다 던져, 알았어?”
통화를 마친 천상기는 인상을 버럭 쓰면서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그나마 강승애가 사들이는 바람에 눈먼 개미들이 20주, 30주 단위의 주문을 넣고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벌써 하한가 근처로 빠져 있을 게 분명했다.
“뭐지? 뭐가 있는데?”
천상기는 홱 시선을 들어 허공을 노려보았다.
강승애가 수를 쓰나?
그는 고개를 저어댔다.
사채까지 돌려 주식을 사는 강승애에게는 그럴 여지가 전혀 없었다.
주가 조작이나 인수합병을 위해 돈을 빌려 가는 회사의 주식을 늘 먼저 사놓는 사채업자 박승양, 그 마귀가 주식으로 장난질 칠 거라는 것쯤은 짐작했었다.
그 마귀가 얼마나 주식을 숨겨놓았을까?
남은 주식을 지금에라도 던져 버려?
천상기가 모니터를 향해 시선을 내린 직후였다.
그는 얼음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장이 마감되려면 아직 35분이나 남았다.
그런데도 엄청난 매도 물량이 쏟아져서 주가는 이미 하한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 잠깐 시선을 허공에 둔 사이에 말이다.
“박승양! 이 마귀 새끼야!”
천상기는 버럭 욕을 뱉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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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애는 물에 빠졌다가 겨우 살아나온 사람의 얼굴이었다.
목표한 지분 1.5퍼센트를 거의 채우는 순간에 주가가 하한가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삽시간에 하한가에 쌓인 주식이 9천 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하한가에 매도 주문이 계속 들어오고 있어서 이미 강승애가 어찌할 수준은 아니었다.
강승애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텅 빈 느낌이었다.
하한가라니?
이러면 사채에 담보로 넘긴 주식은 날아간다.
혹시 담보로 맡긴 주식을 내다 팔아서 일부러 하한가를 만들었을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더라도 증거를 찾지 못하는 한, 강승애는 오히려 주식을 담보로 빌린 돈조차 갚지 못하는 꼴이 된다.
당했나? 깨끗이?
부동산 담보와 달리, 담보로 맡긴 주식을 이렇게 팔 수 있다는 생각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휴대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고, 액정에 부친인 강종환의 이름이 올라왔는데도 강승애는 전화를 받지 못했다.
“어떻게 해? 어떻게 해야 해?”
얼이 빠진 얼굴로 강승애는 멍하니 있었다.
천상기, 이 개 같은 새끼!
악마 같은 새끼!
그녀가 떠올린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
천중명이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기획실장 최만호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나요?”
“회장님. 혹시 박승양 회장이라고 아십니까?”
황성규의 보고에서 들은 이름인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아서 천중명은 잠자코 시선만 주었다.
“돌리는 자금의 규모를 어림잡기 힘들 정도로 유명한 사채업자입니다. 그가 현금을 모으겠다고 마음먹으면 이름만으로 10조가 가능하다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요?”
“제게 연락이 있었습니다. 회장님을 잠시 뵙고 싶다는 뜻이었습니다. 지경건설 주식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에게 넘길 의사가 있으니 시간 외 거래에서 받아주면 어떻겠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천중명은 검지와 중지를 들어 눈썹을 매만졌다.
누군가 알아서 정보를 가져다주었든가, 아니면 말이 샌 게 분명했다.
박승양을 감싸는 인물이 많아서 그를 제대로 뒤지기는 어렵다는 조세원의 말도 떠올랐다.
“회장님을 뵙고 싶다는 요청이 있었는데 주가가 요동치는 시기이고 공연히 증권거래법 위반 정황이 될 수 있는 사항이라 제 선에서 거절해 두었습니다.”
“지금 주가가 어떻게 돼 있죠?”
천중명이 모니터에 올라온 시간을 확인할 때였다.
“10분 전에 이미 하한가로 내려갔습니다. 잔량이 쌓인 것으로 봐서 회복은 불가능하고 우리 증권사 직원들의 판단으로는 내일도 하한가일 확률이 높답니다.”
따각. 따각따각.
천중명이 마우스를 움직여 화면에 올려놓은 증권 시황에서 지경그룹의 현재 가격은 20만 원을 겨우 넘었고, 바로 옆에 하한가를 상징하는 파란색 화살표가 붙어 있었다.
“참고로 공매도 예상 수익은 2천억 원가량 됩니다.”
“내일도 하한가 확률이 높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회장님.”
천중명은 화면에서 시선을 들어 최만호를 바라보았다.
“공매도 주문을 통한 이익금이 내일은 4천억쯤 되겠네요.”
“예상하시는 것보다 1천억쯤 많을 것 같습니다.”
천중명은 고개를 먼저 끄덕였다.
“결국, 원래 가격대로 가겠죠?”
“인수합병이 어렵다면 평균가인 10만 원 초반에서 안정되리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내일 하한가에서 넘기겠다면 주식을 받겠다고 하세요. 물량은 공매도 이익금을 넘지 않는 수준에서 지분을 확보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예, 회장님. 그 정도면 박승양 회장이 원하는 물량은 충분히 확보할 것 같습니다.”
“잠시만요.”
고개를 숙인 뒤에 몸을 돌리는 최만호를 천중명이 다시 불렀다.
“내일 주식을 넘겨받으면 미뤄두었던 지경건설의 회장을 임명할 생각입니다. 그때까지 유 본부장님과 의논해서 적당한 인물을 추천해 주세요. 기존의 임원도 전원 해고할 예정이니까 그것도 참고하시고요.”
“예? 건설에 속한 임원 전체를 말씀이십니까?”
뜻밖의 지시였는지 최만호는 꽤 놀란 반응을 보였다.
“자격이 없는 강승애 이사장을 회장실에 들인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돌아가신 큰형님의 사람들이라고 해도 공과 사를 구별 못 하는 사람들에게 회사를 맡기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주식 시장이 요동쳤던 만큼 당분간은 안정을 택하시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천중명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하는 미래에서 2개 단지는 물난리를 겪는다.
그것도 사람들이 무릎까지 바지를 걷고 다니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언론을 통해 요란하게 보도될 정도였다.
“지금 지경건설이 분양 준비 중인 아파트 단지가 2개 있습니다.”
“예, 회장님.”
“그 2개 단지를 내가 직접 돌아볼 겁니다. 혹시라도 잘못된 점이 있다면 전부 법적 조치를 할 예정인데 현직에 있는 임원들이 형사고발과 민사소송을 당하면 지경건설이 안정되겠습니까?”
천중명의 앞에서 최만호는 아예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한 가구당 세 명만 잡아도 9천 명이 들어오는 3천 가구의 대규모 단지입니다. 투자를 목적으로 한 이들도 있겠지만, 지역을 봐서는 대개 실입주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왕 말이 나온 터라 천중명은 생각하고 있던 것을 꺼내놓았다.
“평생을 노력해 집을 마련한 가장의 희망을 비웃는 아파트를 지었다면 누구도 용서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원리원칙에 따라 건설을 이끌 인재를 찾으시고, 법무팀에 고발과 소송을 준비하라고 지시하세요.”
“회장님. 본부장과 다시 의논하겠지만, 지금 말씀하신 것만큼은 한 번 더 고민해 주십시오. 지경건설이 짓는 아파트의 브랜드 파워도 생각하셔야 하고….”
“실장님은 어디 사세요?”
“대치동입니다.”
말을 자른 천중명의 질문에 최만호가 바로 답을 내놓았다.
“물이 고이는 아파트인 줄도 모르고 기뻐했을 가장의 심정을 이해하세요? 실장님의 가족이 바지를 걷고 귀가하는 걸 바라보면 심정이 어떨 것 같습니까?”
그럴 수가 있나?
최만호는 설마 하는 얼굴이었다.
“브랜드 파워요? 9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지경이 지은 아파트를 원망하는데 그런 게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은 평생 지경을 원망할 겁니다.”
“혹시 알고 계신 사실이 있으십니까?”
“실장님.”
천중명은 보고서를 향해 있던 상체를 똑바로 세웠다.
“만약 지금도 입주자분들의 심정보다 임원들의 안위나 브랜드 파워 따위를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오른다면, 앞으로 그 생각을 바꾸셔야 할 겁니다.”
“죄송합니다.”
“이제 나가보세요.”
다시 고개를 숙인 최만호가 굳은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 대화였다.
곽대출, 이놈이 빨리 그 신문고를 울려줘야 할 텐데?
잠시 곽대출을 떠올렸던 천중명은 결재 서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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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환은 마지막 노끈을 잡는 심정으로 책상에 놓인 일반 전화기를 들었다.
늘 당당하던 딸 강승애가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의 의미쯤 짐작하는 나이다.
주가가 하한가에 떨어지고 나서 그의 휴대전화기와 이사장실의 모든 전화가 잠시도 쉬지 않고 울어대는 것을 보면 강승애의 처지 역시 짐작 못 할 바가 아니었다.
독이 오른 이들의 항의 전화를 강종환 역시 외면하고 있어서 그렇다.
번호를 누르는 강종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오늘 산 주식만 해도 1천억 원에 가깝다. 비록 가격이 떨어졌더라도 최소한 그 물량만큼은 남아 있었다.
이때 지경그룹에 세무조사가 들어가면?
생각에 거기에 미치자 강종환의 목이 저절로 움직여 또다시 마른침을 넘겼다.
어떡해서든 지경그룹을 물고 늘어져야 한다.
그래야 새로 회장이 된 천중명이라는 개망나니와 협상이라도 할 수 있다.
조세원이 세무조사라는 칼날을 지경그룹의 개망나니를 향해 휘둘러만 준다면!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사돈인데?
번호를 다 누른 강종환이 간절한 심정으로 수화기에 귀를 기울일 때였다.
[지금 거신 번호는 고객의 요청으로….]
강종환은 순간 눈앞이 캄캄하게 변했다.
내내 불안하더니….
털썩!
“이럴…. 이럴 수는 없어….”
의자에 쓰러지다시피 몸을 묻은 강종환의 옆에서 바닥에 떨어진 수화기가 줄에 매달려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