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79화 (79/315)

# 79

079. 고객의 요청으로 (1)

곽대출과 점심을 먹으며 천중명이 해준 말은 한마디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머리통이 깨지더니 자신감도 빠졌냐? 뭘 그런 걱정을 해? 그나저나 누가 생각해 낸 제안이야?”

“주인영 과장 아니겠습니까.”

놈의 얼굴에 담긴 자부심이 웃겨서 천중명은 웃고 말았다.

이어서 조세원과의 만남을 이야기했고, 다음으로 주식이 돌아가는 꼴을 알려주었다.

“회장님은 어쩐지 딱 맞는 일을 찾으신 느낌인데?”

“밥이나 먹어.”

그렇게 점심을 함께한 곽대출이 내려가고 천중명은 허세직에게 전화를 넣었다.

“언제가 편하십니까?”

- 자네만 괜찮다면 나는 언제고 나갈 수 있네.

비굴하게 느껴질 정도로 허세직은 몸을 낮춘 음성이었다.

“어디에서 뵐까요?”

- 괜찮다면 논현호텔의 비즈니스 룸이 어떤가? 내가 아는 사람이 있으니 자네만 괜찮다면 그곳을 예약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한 시간 뒤에 그곳에서 뵙지요.”

- 고맙네. 이따 보세.

허세직과 약속을 잡은 천중명이 시간을 확인할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휴대전화기가 울었다.

뜻밖에도 조세원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천중명입니다.”

- 천 회장. 나요.

그는 말투까지 바뀌어 있었다.

“말씀하십시오.”

- 말했던 기자들 말이오. 그쪽에서 특종 보도를 하는 바람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발표한다는 식으로 갔으면 하는데. 그렇게 준비가 되시겠나?

확실히 늙은 너구리들에게서는 세상 사는 법을 배울 것이 아직 많았다.

“기자들에게 최소한의 자료가 넘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 정도는 준비했으니 염려 마시고. 혹시 언론사 이름을 알 수 있겠소?

“<오늘의 아침>입니다.”

놀란 모양인지 조세원의 “후.”하는 짧은 숨소리가 먼저 들렸다.

-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소. 천 회장을 건드렸던 언론의 특종이라 연결고리를 상상하기 어려울 테니 말이오. 내게 연락하라고 알려주시오. 가능하면 대표와 편집국장이 함께 왔으면 싶소.

“바로 전화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 그래 주시오.

조세원의 대꾸를 마지막으로 조세원과의 통화가 끝났다.

전화기를 내려다보던 천중명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이로써 강성학원의 강종환, 강승애는 지옥보다 처참한 현실과 마주해야 하고, 강준수는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며 좌절의 늪에 빠지게 된다.

천중명은 들고 있던 휴대전화기에서 번호를 찾아 눌렀다.

- 유진교입니다, 회장님.

“조세원 청장이 <오늘의 아침> 대표와 편집국장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락하면 특종이 될 만한 기본 자료를 넘길 모양인데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고 지시해주세요.”

- 알겠습니다, 회장님.

놀랐는지 잠시 멈칫했던 유진교의 답이 건너온 다음이었다.

“나는 허세직 의원을 만나러 움직입니다.”

- 예, 회장님.

한 마디를 더 나누고 통화를 마쳤다.

이번 일은 반쯤 끝났다.

유진교가 놀라고, 조세원이 질린 얼굴을 했지만, 정작 천중명은 부족함을 새록새록 실감하고 있었다.

만약 조세원이 약점이 전혀 없는 인간이었으면 일이 어떻게 풀렸을까? 조세원을 설득할 방법은?

우선 다음은 천상기, 너다.

그런 다음에 나는 좀 더 강해지고 노련해질 거다.

재킷을 집어 든 천중명은 굳은 얼굴로 집무실을 나섰다.

**

천호득은 1층의 서재에서 이어셋을 귀에 꽂고 있었다.

“그렇다면 청장이 결국 항복했다는 뜻이 아닌가?”

- <오늘의 아침>에서 자료를 들고 나온다면 내일 세무감사 발표는 기정사실로 보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흥! 정말 괜찮은 몇 곳을 제외하면 사학재단 더럽게 운영하는 거야 누구나 다 아는 일 아닌가. 국세청이 그걸 몰라서 눈감았던 게 아니니까 강종환이는 이걸로 끝이겠군.”

- 급하게 전하는 자료로 언론이 터트릴 만큼 큰 게 있겠습니까?

“사학재단은 우리 기업들처럼 확실하게 회계를 꾸리지 않은 상태에서 주먹구구식으로 돈을 꺼내 쓰지. 워낙에 감싸는 세력이 많아서 그렇지 털려고 하면 살아남을 곳은 다섯 곳도 안 될 거야.”

독한 눈을 하던 천호득이 다시 아련한 얼굴로 서재 바깥으로 시선을 들었다.

“그나저나 도대체 뭐로 그 독한 조세원을 굴복시켰는지 정말 모르겠나?”

- 그건 저도 짐작조차 못 하겠습니다. 정보를 얻는 것은 분명한데 그렇더라도 독대해서 청장을 꺾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거야 원. 조세원은 어떻게 굴복시킨 건지,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궁금해서 살 수가 있나. 물어 봐야 또 이상하게 웃기나 하겠지. 그래, 회장은 지금 본사에 있나?”

- 허세직 의원을 만나기 위해 외출했습니다.

“흠.”

매달린 아쉬움을 털어내는 것처럼 천호득은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쓸었다.

“나를 중심으로 돌던 세상이 어느 틈에 회장을 중심으로 도는 느낌이군.”

유진교의 가벼운 웃음이 들렸는데 천호득은 기분 나쁘지 않은 얼굴이었다.

“알았네. 다른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해주게.”

역시나 떨리는 손으로 종료 버튼을 누른 천호득이 이어셋을 빼고는 입맛을 다셨다.

**

천중명이 호텔 7층의 비즈니스 룸으로 들어섰을 때 허세직은 이미 와 있었다.

묵직한 색의 정장에 넥타이, 단정하게 매만진 머리를 하고 있어서 얼핏 보아서는 전혀 기죽지 않은 모습이었다.

“여기야.”

그가 손을 들자 보좌관인 듯한 남자가 얼른 움직여 유리문의 바깥에 섰다.

“일찍 오셨습니다.”

악수를 나눈 천중명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보좌관인 남자가 들어와 커피를 앞에 놓아주고는 다시 나갔다.

“커피 괜찮지?”

“예.”

유리문이 닫히자 비즈니스 룸에는 천중명, 허세직 두 사람만 있었다.

“선영이는 잘 지내고 있나? 아, 참! 안성에 있는 사람도 자네가 보살피고 있다는데 고맙다는 인사가 늦었네. 고마워. 차 드세.”

허세직이 권하는 대로 천중명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따님을 지경디자인의 대표로 임명해서 오늘 첫 출근날입니다.”

“고마워. 그저 내가 할 말은 고맙다는 말밖에 없네.”

커피 잔을 내려놓는 허세직의 눈이 꿈틀한 다음이었다.

“바쁠 테니 바로 이야기하지. 나 좀 도와주게.”

그러면서 그는 낮게 숙인 몸에 감춰왔던 욕심을 드러냈다.

“향정신성 의약품 유통이지만, 의료용이라는 명분에 초범을 감안하면 나와 광렬이는 당연히 집행유예로 끝나지. 문제는 그리되면 내 정치인생이 끝난다는 데 있어.”

그는 혀를 내밀어 입맛을 다신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적당한 사외이사 자리 하나 주게. 형이 확정될 때까지는 의원직을 버틸 수 있으니 그 뒤에 내 조직을 다질 기반이 필요하거든.”

지경그룹이 자신의 뒤에 있음을 보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괜찮다면 자네가 재판에 도움을 좀 주면 어떻겠나? 그쪽 장학생 출신 법조인도 있을 테고, 그들이 또 법무팀과 연결되어 있지 않나?”

그렇게 이어진 허세직의 제안은 천중명의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었다.

“아직 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이런 부탁을 하는 게 미안하네. 하지만 내가 다시 일어서야 자네에게도 힘이 될 게 아닌가. 그렇지 않나?”

슬쩍슬쩍 천중명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허세직은 원하는 바를 모두 꺼내놓았다.

“고민은 해보겠습니다.”

“어?”

천중명의 반응이 뜻밖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 늙은 너구리 역시 만만치 않아서 눈 한 번 껌벅이는 순간에 표정이 돌아와 있었다.

“그래. 이왕이면 좋은 결과를 만들어 주게.”

그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천중명을 다독인 직후였다.

“혹시 아드님을 병원에 입원시키실 수 있습니까?”

이어진 천중명의 질문에 허세직의 몸과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집행유예를 받더라도 정상적인 생활을 위해서 6개월가량 입원을 시키실 수 있는지를 여쭤보는 겁니다.”

“내 아들을 정신병원에 넣으란 말인가? 이 허세직의 아들을?”

씹듯이 말을 뱉어낸 허세직의 눈이 번들거렸다.

“의원님을 지원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의원님 역시 이번에 털고 가지 않으면 더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실 겁니다.”

“자네는 무서운 사람이었군.”

그는 결국 마지막까지 감추던 날카로운 눈빛을 꺼내 들었다.

“의원님은 누굴 위해 정치를 하십니까?”

“내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지금은 그렇습니다.”

거친 숨소리가 대꾸를 대신해 들렸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내게는 지켜야 할 18만 명의 식구들이 있습니다. 따님과의 데이트만으로도 마약을 했을지 모른다는 오해를 받는데 아드님을 그대로 둔 채로 의원님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궁지에 몰렸더라도 내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나?”

날카로운 허세직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상태에서 천중명은 입을 열었다.

“따님 때문이 아니라 처음 뵀을 때 도움 주셨던 모습을 기억해서 나온 겁니다.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고, 판단은 의원님의 몫입니다.”

“내 아들을 정신병원에 넣어라?”

“팔다리가 잘리면 병원에 입원하는 것이 당연한데 정신이 온전하지 못해서 입원하라는 말은 이상한 겁니까? 여동생을 노리는 오빠가 정상이라고 말씀하시고 싶으십니까?”

허세직은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아픈 아드님을 집에 계속 두시겠다면 저는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만에 하나, 다시 또 여동생인 선영 씨에게 손을 뻗치면 그때는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흐음.”

나직하게 허세직이 신음을 토해냈다.

“자네의 말대로 병원에 입원시키면 내가 말했던 것들을 들어주겠나?”

“법조계에 힘을 쓰는 것은 어렵고, 사외이사는 고민하겠습니다.”

굴욕의 크기가 크긴 컸던 모양이었다.

목에 걸린 것을 억지로 넘기려는 것처럼 허세직은 고개까지 움찔거렸다.

“알았네. 고민해 보고 답을 하지.”

“결심이 서면 기자회견을 하십시오. 부끄러운 모습을 이번 기회를 통해 바로잡고 새롭게 출발하겠다는 내용이면 좋겠습니다.”

“내가 이런 부탁을 할 걸 짐작했었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건넨 말은 이 자리에서 생각한 건가?”

별거 아닌 것을 마치 굉장한 일인 것처럼 묻는 터라 천중명은 당장 답을 하지 않았다.

“자네 나이를 생각해서 물어보는 걸세. 그 나이에 나와 마주 앉아서 이런 식으로 말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어서. 자네는 차라리 정치를 할 걸 그랬어.”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답을 한 천중명은 내심 쓰게 웃었다.

혹시 국회의원이나 혹은 정부의 고위 관직을 하던 사람과 몸뚱이가 바뀌었다면 지금쯤 정치를 한답시고 돌아다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럼 이만 일어나세.”

“그러시죠.”

“먼저 나가. 함께 나가다가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서로 곤란한 일이니까.”

“예.”

허세직과 악수를 나눈 천중명은 비즈니스 룸을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복도에서 기다리던 비서실 직원 세 명이 천중명을 호위하듯 따르고 있었다.

호텔의 로비에서 승용차에 올라탄 천중명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화폐라는 것이 생겨난 이후에 힘을 잃은 적은 없지만, 지금처럼 강력하게 세상을 지배한 때도 없지 싶었다.

그 정점에 있는 재벌이 되어서 원하는 대로 못 해본다면 나중에 천호득의 나이가 돼서 얼마나 후회되겠나.

마음 같으면 이 길로 양평의 갤러리로 가서 잠시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가롭게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었다.

더구나 지경건설의 일이 정리되는 대로 얼굴이 알려지기 전에 해야 할 일들도 있는 마당이어서 천중명은 아쉬움을 삼켰다.

가는 길에 휴대전화기를 든 천중명은 지경건설의 주가를 살펴보았다.

주식시장은 참 무섭다.

내막을 알고 그러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시초가보다 3만 원이나 내려간 상태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천중명은 넓은 도로의 양옆에 늘어선 커다란 빌딩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강승애는 지금 어떤 심정일까?

천봉서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열심히 주식을 채우느라 바쁠까, 아니면 뭔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숨이 막힐까.

천중명은 시선을 내리며 생각을 털어냈다.

공부가 필요했다.

대학에서 배웠던 것들을 현실에서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공부가 말이다.

승용차가 한남대교를 막 건넜을 때였다.

지이잉.

천중명의 전화기가 울었다.

[유진교입니다, 회장님. <오늘의 아침>에서 연락이 있었습니다. 자료를 받아서 나왔고, 특종은 내일 세무조사가 시작되는 시점에 내기로 했다는 말이었습니다.]

문자를 읽은 천중명은 픽 웃었다.

“정말 끝났네.”

그리고는 뒷좌석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내일은 그래도 떵떵거리던 한 집안이 주저앉는 날이니까.

허선영과 함께 양평의 갤러리에 가서 한 시간쯤 시간을 보내도 되지 않을까?

어쩐지 천호득이 함께 갈 것 같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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