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78화 (78/315)

# 78

078. 잘한다 (3)

잡아먹을 듯한 조세원의 눈과 태연한 천중명의 눈이 똑바로 마주친 상태에서 면도날 같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가르듯 지나갔다.

“내 앞에 그런 말을 꺼내다니 젊은 회장의 용기가 놀랍기는 하군.”

말을 던진 조세원이 픽 웃었다.

“나야 여기에서 밀려나도 3년에 100억쯤 벌 수 있고, 다음에는 국회에도 나설 수 있어. 그때 되면 지경그룹은 어떤 꼴이 될까?”

그는 천중명의 말에 전혀 상관없다는 투로 씹듯이 말을 뱉어냈다.

“원하는 대로 해 봐. 형사 처벌 대상은 아니니까 기사쯤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될까? 요즘 그 또래가 좋아하는 SNS나 인터넷에 올려도 좋아. 그런 다음에 지경그룹은 어떻게 될지도 생각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조세원이 이 사이로 말을 뱉어낸 직후였다.

“약점이 드러나면 상대방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더니 정말 그러시군요.”

천중명은 곧바로 대꾸를 던졌다.

“내가 하겠다는 게 아니라 강승애 이사장이 그런 약점을 물고 늘어질 거란 뜻이었습니다. 사위를 통해 이미 저쪽도 다 알고 있을 테니까요.”

천중명은 피식 웃은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 한 번 청장님이 원하는 대로 해보십시오. 누가 더 철저하게 망가지는지 보는 것도 제 인생에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천중명은 조세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조세원은 약해 보이는 사람에게 동정을 베푸는 스타일이 아니다.

욕심이 많은 대신에 가진 것을 빼앗기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제 돌을 던졌으니 선택은 그의 몫이 되었다.

나가라고 하던가, 아니면 천중명의 제안을 받아들이든가.

“정말 바라는 게 뭐야?”

결론은 후자였던 모양이었다.

굴욕을 누른 듯한 조세원의 질문이 천중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강성학원의 세무조사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손대지 않아도 어차피 무너질 집안을 굳이 세무조사해서 회장이 얻을 게 있나?”

늙은 너구리는 확실히 강승애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었고, 결과를 지켜보고 움직이려 했던 게 분명했다.

“결국, 내 손을 이용해 둘째도 잡아내겠다는 뜻인가?”

“그건 따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흐음.”

신음을 뱉은 조세원이 테이블을 노려보며 시간을 끌었다.

“왜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나오나?”

“헛된 욕심에 큰형을 죽게 하고도 반성이 없으니 누군가는 벌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네의 큰형이 몸을 던졌기 때문에 지경건설의 세무조사가 뒤로 미뤄졌다는 것은 알고 있잖나.”

“그보다는 총수님이 깨어나셔서 여기까지 왔다는 게 정확한 표현 아니겠습니까?”

조세원은 확실히 대가 부러져 있었다.

“강성학원 강종환 이사장은 나와 사돈 관계야. 내가 그쪽을 털어내면 언론이 떠들 수밖에 없어.”

“언론사 하나가 사운을 걸고 청장님의 결단을 기사화할 겁니다. 대신, 강성학원이 그만큼 썩었다는 것을 증명하셔야 할 겁니다.”

“그것도 준비했나?”

질린 표정의 조세원을 향해 천중명은 답을 하지 않았다.

“근득이의 일과 딸아이의 문제도 막아줘야 돼.”

“강승애 이사장이 반항할 수 없도록 완벽하게 무너트리면 좀 더 안전할 겁니다.”

조세원의 입술이 안으로 몰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사는 쪽으로 결심이 선 눈치였다.

“사채 자금은 적당한 선에서 검찰에 고발하는 것으로 끝내지. 박승양을 지키는 세력은 나도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워. 그리고 증권거래법 위반은 증권선물위원회에 고발하는 것으로 끝내고.”

“사채업자는 금융감독원을 통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크-흐음.”

이번 조세원의 신음은 크고 길었다.

“자네는 정말 무섭군. 부친을 정말 꼭 빼닮았어.”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이왕 하실 거라면 주가가 더 오르기 전에 서둘러 주시길 바랍니다. 개인투자자의 피해도 생각하셔야 할 테니까요.”

“내일 언론이 준비되겠나?”

조세원이 결심을 굳힌 듯 질문을 던졌고,

“몇 시에 어디로 가면 되는지만 알려주십시오.”

천중명이 자신 있게 답했다.

**

허선영과 통화를 마친 고상득 상무는 빌라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그녀가 빌라의 주차장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앞으로 대표님을 모시게 된 지경디자인의 고상득 상무입니다. 회장님이 처음 사업에 발을 들이실 때부터 쭉 함께 해왔으며….”

막혔던 물줄기가 뚫린 것처럼 고상득은 대략 3분에 걸쳐 천중명과의 친분, 자신의 능력을 숨 쉴 틈 없이 쏟아냈다.

“이제 새롭게 대표님을 모시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하며 앞으로도 이 고상득이 회장님을 모시는 것처럼 열과 성을 다해 대표님을 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길었던 설명이 끝나고 고상득은 명함을 건네주었다.

“잘 부탁드려요.”

“부탁이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혹시라도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모두 제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혹시나 또 길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던 고상득이 바로 말을 마쳐서 허선영이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쉴 때였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가시면서 간단하게 회사 소개와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대략 한 시간이라 시간이 빠듯하기는 한데 제가 브리핑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다시 시작한 고상득의 말이 2분쯤 이어졌다.

“타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허선영은 어쩐지 오늘 사용할 에너지의 절반쯤을 차를 타기 전에 소모한 느낌이었다.

**

조세원과 헤어진 천중명은 유진교와 함께 집무실로 향했다.

내일이면 하나는 끝난다.

강종환, 강승애, 강준수, 세 사람에게 쉽지 않은 하루가 될 거고, 그 꼴을 지켜본 천상기는 또 살아나기 위해 좀 더 깊은 구덩이로 달려들 게 뻔했다.

집무실로 돌아온 천중명은 유진교에게 강성학원의 세무조사가 있을 거라는 말과 강성애, 천상기, 사채업자가 어떻게 얽혀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정말 조세원 청장이 그런 약속을 했습니까?”

어떤 일에도 묵직하고 태연한 반응을 보였던 유진교가 놀란 얼굴로 던진 질문이었다.

“내일 기자들을 준비해 달라고 했으니까 그 연락이 온다면 확실하다고 봐야죠.”

“언론은 물론 <오늘의 아침>을 이용하실 계획이시구요?”

“더 적당한 곳이 있으면 추천해주세요.”

“회장님. 이 모든 일을 계획하셨던 겁니까? 그래서 제게 청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셨습니까?”

유진교는 진심으로 궁금한 얼굴이었다.

“국세청장을 만나는 일이 즉흥적으로 부탁할 일은 아니잖습니까.”

유진교가 멍한 얼굴로 있으면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오늘 공매도는 중단하겠습니다. 이 이상 공매도가 나간다면 내부거래로 오인 받을 소지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천중명이 답을 한 다음이었다.

“회장님. 만약 조세원 청장이 약속을 어기고 우리에게 세무조사의 칼날을 돌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조세원 청장은 분명 강성학원을 노릴 겁니다. 그가 살아온 행보를 보면 다음 걸음이 왼쪽일지, 오른쪽일지가 분명하게 보이니까요. 만약 우리를 노린다면 그때는 누가 죽든 끝을 봐야죠.”

유진교는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표정을 수습했다.

“기획실장에게 <오늘의 아침>과 연락해두라고 하겠습니다.”

“내용은 전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유진교가 단단한 음성으로 답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

이은명은 아까부터 표정이 이상한 김순례를 조용하게 따로 불렀다.

“무슨 일이 있지요? 괜찮으니까 말해보세요. 혹시 힘들면 며칠 쉴 수 있도록 말해 놓을게요.”

“죄송합니다, 사모님. 표시 내면 안 되는데….”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이은명은 사람 좋은 미소를 그려냈다.

“힘들 때는 털어놓기만 해도 한결 편안해져요.”

“힘든 게 아닙니다, 사모님.”

그러면서 김순례는 딸인 이명선이 본사에 근무하게 된 과정을 쭉 설명했다.

“지나가는 말씀처럼 여쭤보셨는데 그렇게까지 신경 써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사모님. 어제저녁에 그 소식을 듣고 저희 세 식구가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감사해요. 잘됐네요.”

이은명이 김순례를 다독일 때였다.

“거기! 물 좀 다오!”

천호득의 괄괄한 음성이 거실에서 들렸고,

“예, 총수님.”

우렁우렁한 장만섭의 답이 뒤따라 주방 옆의 공간으로 달려 들어왔다.

“야, 이놈아! 바로 들여온 병을 땄는데 왜 그것까지 네놈이 먼저 처마셔!”

“회장님의 지시입니다. 못마땅하시면 차라리 한 대 때리시고 이해해주십시오!”

“이 곰보다 미련한 놈아!”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저기 나가봐야 해서요.”

당장 저 상황을 중재할 유일한 사람이 지금은 이은명뿐이었다.

그녀가 급하게 거실로 향했고, 홀로 남은 김순례는 두 손을 가슴에 올리고는 울컥했던 감정을 긴 숨에 토해 쏟아냈다.

“왜 그러세요? 어차피 잔에 따라서 먹는 건데요.”

“바로 딴 거 아냐! 그걸 꼭 저놈이 먼저 처먹을 필요가 있냐고!”

어쩐지 천호득은 어린애처럼 굴었다.

김순례가 주방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총수님을 위한 일이잖아요. 이렇게 잔에 드시면 되죠.”

“마음이 불편하잖아! 나도 새것, 뭐라도 저놈이 입 대기 전에 먹고 싶다고!”

거실에서의 고함은 그치지 않고 있었다.

**

<오늘의 아침> 대표는 심지어 책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말이십니까? 정말 우리 회장님께서 저희에게 다시 기회를 주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그는 감동의 도가니였다.

“실장님! 제가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한 톤 높아졌던 대표의 표정이 불쑥 바뀌었다.

“예? 예! 기획기사요. 심층취재에 특종?”

그는 급하게 메모지를 당겼고, 연필까지 잡았다.

“아! 준비만….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일부터라고 하셨으니 저희의 모든 기자를 동원해서 만족하실만한 기사를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저 실장님….”

<오늘의 아침> 대표의 표정이 또 바뀌었다.

“예에?”

그야말로 변화무쌍이라는 말 외에 다른 표현은 없을 정도로 대표는 또다시 놀란 얼굴을 번쩍 들었다.

“3개월 동안, 세 배! 앞으로 3개월간 그러니까 기존의 광고량의 세 배를 주신다는! 신제품으로! 그리고 연간 계획은 이후에 쭈욱! 그러니까 쭈욱 저희에게 광고를 맡기신다는!”

벌떡 일어난 그는 책상 앞에 최만호 기획실장이 서 있기라도 한다는 양, 허리를 냅다 접었다.

“감사합니다, 실장님! 저희 <오늘의 아침>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현장을 취재하고, 그렇게 취재한 내용을 피로 찍어 쓰는 기사가 어떤 것인지를 이번에 분명하게 보여드리겠습니다!”

통화가 끊어질 타이밍이었다.

“실장님. 지난번에 문제를 일으켰던 서수미 기자는 현재 대기발령 상태라는 것을 회장님께 꼭 말씀드려 주십시오.”

그 짧은 순간을 붙들고 <오늘의 아침> 대표는 공을 세우듯 말을 건넸다.

“그저 실장님께 충성하며 살겠습니다! 살펴 들어가십시오!”

통화가 마침내 끝났다.

권투 경기에서 이긴 사람처럼 양팔을 위로 들어 보인 대표는 그대로 방을 박차고 나갔다.

그런 뒤에 그는 구내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전무하고 편집국장, 현충기 기자 빨리 내 방으로 오라고 해. 서두르라고! 얼른!”

숨 가쁘게 지시를 내린 대표의 눈이 이번엔 또 살벌할 정도로 번들거렸다.

“뭐든 물리기만 해 봐. 아주 사돈의 팔촌까지 난도질을 해줄 테니까.”

그는 등 뒤에서 파랗게 불꽃이 올라올 정도로 투지를 불태우며 달려올 세 사람을 기다렸다.

**

천중명은 책상에 올라온 새로운 메모들을 살폈다.

“미친놈.”

그리고는 픽 웃고 말았다.

곽대출의 면담 요청을 보고 나서였다.

요청 내용은 내부기획안에 관한 의논으로 달아놓았는데 달랑 그게 전부였다.

천중명은 재킷을 걸어둔 상태에서 집무실을 나섰다.

다섯 명의 부속실 직원들이 바로 일어섰다.

“곽 이사가 근무하는 곳이 어디지?”

“아래층입니다, 회장님.”

“거기 다녀올게.”

“예, 회장님.”

답을 한 뒤에 한 명이 재빠르게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냥 버튼만 눌러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부속실의 베테랑으로 보이는 서른 초반의 직원이 함께 들어와 버튼을 눌렀다.

뭘 또 이렇게까지.

아래층까지만 안내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는 곽대출이 근무하는 그룹발전본부로 함께 들어서고 있었다.

“건물 내부를 다닐 때는 부속실 직원이 수행하나?”

“그렇습니다.”

이건 또 새롭게 안 일이었다.

천중명이 들어서자 열 명 남짓한 직원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중간에 안신우와 주인영도 있었다.

“곽대출 이사를 찾으십니다.”

“안쪽입니다.”

부속실 직원이 빠르게 움직여 직원이 가리킨 문으로 움직였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그놈 참 적응은 정말 빠르다.

픽 웃은 천중명이 바로 들어서자 멍하니 보던 곽대출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보자고 했어?”

“그게 말입니다.”

“점심 안 먹었지?”

“예, 회장님.”

천중명은 부속실 직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제 먹었던 도시락 두 개 준비해줄 수 있을까?”

“준비하겠습니다, 회장님.”

부속실 직원의 답을 들은 천중명이 고개로 밖을 가리켰다.

“내 방에 가서 점심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부르시면 되지 그걸 굳이 내려오셨습니까?”

천중명은 아직 곽대출의 방에 들어서지 않아서 직원들이 모두 바라보고 있었다.

“그룹발전본부도 볼 겸 왔어.”

서둘러 재킷을 걸친 곽대출이 몸을 돌린 천중명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아직 여러 가지로 부족할 곽대출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도움 되겠다고, 조직의 틀에 맞추려고 애쓰는 곽대출을 돋보이게 하고 싶었다.

지금은 내 등 뒤에서 뛰어봐.

그리고 정말 내가 힘들 때 등을 빌려줘.

천중명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곽대출은 다부진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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