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077. 잘한다 (2)
유진교는 오전 8시 30분에 천중명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오늘도 공매도를 계속하실 생각입니까?”
“어제 5천6백억이라고 하셨으니까 오늘도 그 정도 수준으로 진행하세요. 그리고 오전에 거래를 주의하라는 경고도 한 번 더 내주시고요.”
유진교는 무척이나 궁금한 얼굴이었다.
“국세청장을 만나서 내밀 확실한 카드가 있으신 겁니까? 총수님께서도 어제 그걸 몹시 궁금해하셨습니다.”
“만나서 잘해보자고 말하려는 거죠.”
유진교는 어쩐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10시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굳이 함께 가실 필요가 있을까요?”
“국세청장을 만나시는 일입니다. 우선 예우를 하고 필요하시면 독대를 요청하시면 됩니다.”
천중명은 “알겠습니다.”하고 답을 했다.
유진교가 나간 후에 선수를 교체하는 것처럼 최만호 기획실장이 두툼한 결재판을 들고 들어왔다.
“오늘 급한 결재들입니다.”
그는 결재판 안의 내용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했고, 이어서 어제 남부증권의 일을 꺼내 들었다.
“오늘 본사로 임명한다고 들었습니다. 증권사는 한 사람만 거치면 내부 사정쯤 훤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아마 VIP 고객의 조카를 뒤늦게 입사시키기 위해 트집을 잡았던 모양입니다.”
“그 고객이 100억쯤 거래했나 보군요.”
“그 점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최만호의 보고는 거기까지였다.
그가 나갔을 때의 컴퓨터에 찍힌 시간은 오전 8시 55분이었다.
매수와 매도에 주문이 엄청나게 쌓이고 있었는데 9시에 장이 시작되면서 오늘의 거래 가격이 결정 난다.
이 거래에 부은 돈이 벌써 5천억을 넘었다.
오늘도 또 그 정도를 부으라고 했지만, 1조라는 돈이 얼마나 큰 금액인지 천중명은 여전히 실감 나지 않았다.
처먹지도 못할 회사를 남편 죽이고, 시동생과 몸 섞어 가져가면 자식들이 행복해할까?
천억 단위의 돈이 있는데 뭘 얼마나 더 필요해서 저토록 욕심을 피우는지 천중명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9시를 향해 시간이 흐를수록 매도와 매수에 쌓여있던 주문이 수시로 불어났다가 다시 줄어들기를 반복하면서 치열한 눈치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30만 원을 넘긴 가격인데도 이미 매수에 7만 주, 매도 잔량에는 6만 주가 넘는 주문이 들어와 있었다.
누군가 넣은 30주의 매수 주문이 천중명의 눈에 띄었다.
30주면 1천만 원쯤에 해당하는 주문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여윳돈일 테고, 또 누군가에게는 오늘 지경건설에서 수익을 내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는 주문일 수도 있었다.
이럴 땐 어둠이 달려들어 오늘 종가를 알려주면 좋을 텐데.
천중명은 픽 웃었다.
로또 번호를 기억하느냐는 곽대출의 질문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였다.
시간은 어김없이 흘렀고, 마침내 장이 시작되었다.
화면 안에서 숫자가 튀더니 장은 어제보다 1만 원가량 올라간 가격에서 출발했다.
천중명은 마우스를 움직여 황성규가 보내준 조세원의 성격을 천천히 다시 검토했다.
만만치 않은 인간이었다.
막판에 몰리면 함께 죽자고 달려들 근성도 있었고, 청장에 오르기까지 배신이라고 부를 만큼 도와준 이들을 냉정하게 잘라내는 성향도 있었다.
“그 자리에 있으면 적당히 욕심내지 그랬어.”
자료를 향해 천중명이 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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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기는 흐뭇해 아주 죽기 직전이었다.
“송도상인 이 인간, 배울 점이 아주 많아!”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그는 계속해서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혼잣말을 뱉어냈다.
“시작에 매수 주문 넣는 건 진짜 멋지네! 가격을 올려놓으니까 개미들 달려드는 것 좀 봐. 팔았던 놈들이 억울해서 다시 매수하고, 강승애는 비싼 가격에 우리 주식을 사주고!”
모니터를 향해 천상기는 고개를 저었다.
“항상 욕심이 문제야. 욕심이. 적당하게 처먹겠다면 얼마나 결과가 좋았겠냐고.”
그러면서도 그는 흐뭇한 얼굴로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잘한다.”
1만 원 오른 가격에 계속해서 50주, 70주의 매도 물량이 나오고 그걸 또 누군가 열심히 사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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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원에 관한 자료를 살핀 천중명은 부속실 직원이 정리해온 면담 요청서와 최만호가 가져왔던 급한 결재들을 책상에 앉아 살펴보았다.
천중명의 승인이 없으면 사업이 멈춰있어야 할 말 그대로 급한 결재였다.
한참 서류를 보던 천중명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회장님.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유진교가 들어올 때까지 한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노크 소리를 못 들으셨습니까?”
“그랬나 본데요?”
책상에서 일어선 천중명은 재킷을 집어 들었다.
그는 천중명의 집중력에 놀란 눈치였다.
“조세원 청장이 서울지방국세청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착하면 그 점에 대해 고맙다는 인사를 먼저 건네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유진교와 함께 집무실을 나서자 부속실에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젠가 금융감독원의 송우근 부원장보를 방문했을 때 보았던 모습과 같았다.
“1시간쯤 걸린다.”
“예, 본부장님.”
직원 한 명은 엘리베이터 스위치를 누른 채 기다리고 있었다. 천중명이나 유진교가 손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직원들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우선 지켜보기로 했던 일이라 천중명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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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대출은 하루 만에 일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무엇보다 업무 내용이 딱 그의 취향이어서 더 그랬다.
내부비리, 부당한 대우를 받은 직원은 누구라도 비밀 메일을 통해 곽대출에게 그 내용을 전하는 제도와 시스템이라니?
이야말로 암행어사 곽대출이 아닌가.
내부 결재 받고 이메일 계정 하나 열어주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단순해 보이는 기안을 작성하기 위해 사이트 구축에 필요한 비용, 보안, 그 외에 내부비리 고발자에 대한 보상과 후속조치까지 준비할 일은 끝이 없었다.
회의는 수시로 계속되었다.
“이사님. 계열사 사장단이나 임원들의 반발도 고려하셔야 합니다.”
안신우 부장은 노트를 펼쳐놓은 채 의견을 꺼내 들었다.
“실적을 위해서 때로는 강행군도 필요하고, 내부 분위기를 망치는 직원들을 압박할 수도 있는데 그런 것들이 모두 이사님께 직접 보고된다면 임원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겁니다.”
“정당하게 처신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리고 내가 바보야? 그런 것들은 조사해서 처리할 거 아냐?”
“관행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 외에도 임원들이 아끼는 중간 간부들이 문제가 될 경우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것들은 규정을 어겨도 관행이라는 말로 때운다는 건가?
똑바로 하면 아무 문제 없잖아!
곽대출의 표정이 사나워지는 순간이었다.
“이사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오후까지 보완책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전에 혹시 회장님께 의견을 먼저 여쭙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인영이 적절하게 끼어들어서 곽대출의 시선을 가져갔다.
그녀의 눈을 보면 이상하게 곽대출의 가슴에서 봄바람이 분다.
“알았어요. 그럼 그 건은 내가 회장님께 말씀드려 보고 뒤에 따로 의논하기로 합시다.”
“제가 회장님 일정을 알아보겠습니다.”
빌어먹을 회의, 못 알아듣는 말이 너무 많았다.
가서 만나면 되는 거지 뭔 일정을 알아봐, 하는 얼굴로 곽대출은 주인영을 보았다.
“오늘 오전에는 외출이 잡혀 있으시고, 오후 일정은 아직 확정된 게 없어서 이사님이 뵐 시간이 어떨지 알아보려 하는 건데요.”
그제야 곽대출은 적어도 회사에서만큼은 함부로 천중명을 만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정 확인하고 알려줘요. 지금 의논한 문제는 회장님 뵙고 결정할 테니 그렇게 알고, 나머지는 문제없죠?”
“그룹 전산실에 의견서 받는 대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럼 일어납시다.”
오늘도 곽대출은 여러 가지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있었다.
**
서울지방국세청은 지경그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건물 현관에서 내린 천중명과 유진교는 운영지원 과장의 안내를 받아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기업 하는 사람들에게는 저승사자보다 무섭다는 국세청이었다.
그런 말을 증명하듯 오가는 이들은 뻑뻑한 인상, 굳어 있는 표정을 지녔고, 건물 전체에서 풍기는 무거운 분위기가 천중명을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곧장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고, 말 한마디 없이 5층에 도착했다.
“이쪽입니다.”
과장은 천중명과 유진교를 복도의 가장 안쪽에 있는 두꺼운 철문으로 안내했다.
“명함을 주시겠습니까?”
유진교가 부속실 직원에게 명함을 건네자 과장이 다시 안쪽 문을 노크한 뒤에,
“들어가십시오.”
하고는 손으로 안을 가리켰다.
작지 않은 공간에서 몸을 일으킨 사람은 언젠가 어둠이 보여주었던 조세원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청장님. 지경그룹 발전본부 유진교입니다. 이쪽은 천중명 회장님이십니다.”
“어서 오시오.”
“천중명입니다.”
“앉읍시다.”
형식적인 악수를 나눈 조세원이 자리를 권했다.
상석에 조세원, 문을 등진 1인용 소파에 천중명, 그 옆에 유진교가 앉았다.
“오시는 길이 막히지는 않았소?”
“세종시로 찾아뵀어야 했는데 이곳으로 정해주셔서 오히려 감사합니다.”
유진교의 조언에 따라 천중명은 감사의 인사를 먼저 전했다.
차가 나왔고, 길이 막힌다는 따위의 형식적인 대화를 몇 마디 나눈 뒤에 조세원은 불편한 시선을 천중명에게 돌렸다.
“이렇게 만나는 것이 공연히 오해를 살 일이기는 한데, 국가의 경제를 위해 애쓸 분이 만나자고 하니 무턱대고 거절하기도 뭐해서 일단 시간은 냈소.”
말을 건넨 그는 시선을 유진교에게 돌렸다.
“우리 본부장과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해서 무리하기는 했는데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소?”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조세원이 천중명을 마뜩찮게 여긴다는 것쯤은 바로 알아볼 정도로 그의 표정과 음성, 태도는 거만했고, 불편했으며, 차가웠다.
“잠시 청장님과 둘이서만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뭐 이런 부탁을 하지?
조세원이 질책하듯 유진교를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그럼 편히 말씀 나누십시오.”
기다렸다는 것처럼 유진교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 나갔다.
“크흠.”
조세원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천중명을 바라본 다음이었다.
“제가 성격상 말을 돌리지 못하고, 바쁘실 테니 바로 용건을 꺼내겠습니다.”
천중명은 날카로운 조세원의 시선 따위 상관없다는 투로 말을 꺼냈다.
“강승애 이사장이 지경건설을 인수하는 것은 이미 끝난 일입니다. 그건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반말처럼 들리는 질문에 천중명은 먼저 픽 웃었다.
“어제 사채를 통해 현금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불행하게 오늘 매입하는 물량은 모두 사채업자와 둘째 형에게서 풀리는 주식들입니다. 공연한 욕심에 되지도 않을 주식을 사는 겁니다.”
천중명의 거침없는 설명을 들은 조세원의 눈알이 꿈틀했다.
“이렇게 되면 강승애 이사장에게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청장님을 뵙고 우리 그룹에 세무조사를 내보내 달라는 것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친구가 회장이 되더니 못하는 말이 없군. 우리 세무 공무원이 누구 청탁을 받고 세무조사를 하는 곳인 줄 알고 있나? 더 이야기할 것도 없어. 이만 일어나시오.”
일어서려는 것처럼 조세원은 소파의 팔걸이를 잡았다.
“지금 일어서시면 청장님은 곤경에 빠지게 됩니다.”
반쯤 일어섰던 조세원이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매섭게 천중명을 노려보았다.
“후후.”
그리고 그는 묘한 웃음을 웃으며 다시 소파에 몸을 기댔다.
“나를 협박해? 감히 서울지방국세청에서 대한민국의 조세를 관장하는 나를?”
자리에 앉은 조세원은 천중명을 같잖다는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강승애 이사장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놈이 무슨 수를 쓰려고?
조세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상태에서 천중명은 다시 입을 열었다.
“담보로 잡은 부동산을 빼앗기고,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 동원해 사게 만든 주식은 원금을 못 찾게 됩니다. 결국, 손 벌릴 곳도 없이 빈털터리가 되는데 그렇게 물에 빠진 사람이 청장님께 곱게 매달릴 것 같습니까?”
조세원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천중명은 분명하게 보았다.
“큰형님이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부끄럽지만, 둘째 형과 지저분한 관계로 엮였고, 며칠 전에는 사람의 손목과 발목을 잘랐습니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가 청장님께는 어떻게 나올 것 같습니까?”
“하고 싶은 말을 해.”
적당한 선에서 빠져나가려는 의도가 분명한 조세원의 대꾸가 나온 직후였다.
“강성학원과 재단의 세무조사를 해주시면 적어도 망신스럽게 물러나지는 않게 도와드리겠습니다.”
“뭐?”
“아드님 조근득, 5년 전에 산부인과에 보호자로 사인한 따님, 부동산 불법 취득, 차명 계좌, 인사 청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드립니다.”
이를 꽉 깨문 조세원이 당장에라도 주먹을 날릴 것처럼 무서운 눈으로 천중명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