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076. 잘한다 (1)
퇴근길이 막히는 것은 재벌 아니라 재벌 할아버지라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국, 천중명이 삼성동 빌라에 도착한 시간은 밤 8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빌라에 들어선 천중명을 허선영과 송순주가 맞아주었다.
“저녁은요?”
“아직 못 먹었는데 혹시 밥이 있어?”
“전화를 줘야죠. 어떡해요!”
“어서 씻어요. 얼른 할게요.”
당황하는 허선영을 보며 예쁘다는 생각이 들면 좀 고약한 건데 이런 게 행복인가 싶기도 했다.
천중명은 간단하게 씻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급하게 만들었으나 부족하지 않은 저녁을 먹은 천중명은 허선영과 함께 탄천으로 나섰다.
“우린 좀 뭔가 서운하지 않아?”
“뭐가요?”
“영화도 보고, 놀이동산도 가고 해야 하는 거 아냐?”
“출근하라면서요?”
이제 이런 농담을 하며 허선영이 웃는 것이 좋았다.
“하루 지났는데 많은 생각을 했어.”
천중명은 허선영의 손을 잡고 걸으며 돈에 사로잡히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룹 총수라는 자리가 묘하더라고.”
이제는 포근하게 변한 탄천을 손을 잡은 채 걸으며 천중명은 말을 이었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사람을 쓰는 것이 가장 위험한 일인데, 반대로 내 뜻을 이해하고 따라줄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내가 선영 씨를 굳이 대표이사로 올린 이유도 그거야.”
허선영은 가로등의 조명을 받아 빛나는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나이 먹어서도 선영 씨와 이렇게 걷고 싶거든. 가끔은 편안하게 찻집에 앉아서 차도 마시고 싶고. 그런데 그걸 돈이란 놈과 권력이라는 놈이 그냥 지켜보지는 않을 거야.”
아직은 천중명이 말하는 의미를 허선영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럴 때 내 사람이 필요해. 내게 직접 조언해 줄 사람들.”
“그럼 나는 조언하는 사람 역할이에요?”
“한 가지가 더 있는데 실력으로 그룹 임원들과 직원들의 인정도 받아야 하지. 안 그러면 정말 개인적인 친분으로 그 자리에 앉힌 꼴이 되니까.”
힐끔 허선영을 돌아본 천중명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왜요?”
“놀랄 줄 알았는데 각오가 보여서.”
“그런 게 보여요?”
“내가 눈치가 좀 있지.”
말을 건넨 천중명은 허선영의 손을 왼손으로 당겨서 오른손을 안게 만들었다.
“지금은 이거 바랐지?”
“아닌데요?”
“그래, 그럼.”
팔을 빼낸 천중명은 허선영의 상체를 부드럽게 돌려서 품에 안았다.
“이게 뭐예요?”
“내가 하고 싶은 거.”
예쁘게 웃은 허선영이 고개를 들었다.
이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그녀의 반짝이는 눈과 코, 입술이 천중명의 시선을 온통 사로잡았다.
눈과 눈이 마주친 직후에 천중명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숨결과 그녀의 입술이 이른 여름의 온기처럼 천중명의 입술에 따뜻하게 닿았다.
고개를 들었을 때 허선영은 쑥스러운 얼굴이었다.
“곽 이사님은 많이 늦나 봐요.”
“지금 부르면 화낼걸?”
“일이 그렇게 재미있데요?”
천중명의 팔을 안고 몸과 고개를 기댄 허선영의 앞에서 가로등을 품은 탄천이 아름답게 흐르고 있었다.
“우리 이렇게 걷자. 나이 먹어서도 함께.”
“고마워요.”
허선영의 커다란 눈이 천중명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
곽대출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새로운 부서라는 사명감에 안신우 부장은 부장대로, 주인영 과장은 과장대로 매뉴얼과 보고서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뜩이나 대리 둘이 연수를 받으러 간 참이라 넓은 사무실에 달랑 세 명만 있었다.
“이사님. 이 부분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응?”
주인영이 곽대출의 자리로 다가와 결재판을 펼쳐주었다.
“지시하셨던 계열사 현황인데, 이 부분이 정규직 숫자, 여기가 계약직, 그리고 급여, 이쪽은 일용직 숫자입니다.”
펼쳐놓은 결재판 안의 항목을 가리키며 주인영은 곽대출이 알아보기 쉽게 형광펜으로 목록을 하나씩 알려주었다.
“이사님이 돌아보실 일정을 어떻게 짜면 좋을까 해서요.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방향으로 하실지, 아니면 서울에서 가까운 쪽 먼저 하실지를 알려주셨으면 싶습니다. 그리고 이건.”
주인영은 또 다른 결재판을 펼쳐주었다.
“올해 사업계획을 간략하게 만든 건데요, 보시고 혹시 수정이나 삭제할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이제 하루 됐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도 모르는 팀에서 어떻게 올해 사업계획이 나올 수 있을까?
곽대출은 쏟아져 나오는 감탄을 삼키며 보고서를 들여다보았다.
“회장님 지시대로 최말단 직원들의 목소리가 바로 들어올 수 있는 조치들입니다. 지경그룹 신문고쯤 되는 시스템인데,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좀 더 수월하게 애로사항을 인터넷에 올릴 수 있습니다.”
“오호.”
“이사님께서 보시고 회장님께 직보하시는 방식인데 괜찮을까요?”
곽대출은 고개를 들어 주인영을 바라보았다.
사무실 천장에 박힌 형광등 아래에서 그녀는 예뻤고,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마음에 안 드세요? 다시 만들까요?”
“괜찮아. 이대로 한번 해 봐요.”
주인영의 미소를 보며 헤벌쭉 나오는 웃음을 곽대출은 초인적인 의지로 참아냈다.
**
곽대출은 새벽 한 시가 넘어서 들어왔다가 다시 천중명이 일어날 시간에 이미 정장 차림으로 나섰다.
새벽 6시쯤이었다.
“아침 안 먹어?”
“사무실에서 샌드위치 먹겠습니다.”
정말이지 옷만 갈아입고 나가는 꼴이어서 천중명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일이 많아?”
“적당하게 넘어가려면 몰라도 배우려면 끝이 없습니다.”
곽대출의 답에 천중명은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회장이라는 천중명 역시 딱 그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내일부터는 샌드위치를 준비할 테니까 꼭 드시고 나가요. 오늘은 이거라도 들고요.”
그나마 허선영과 송순주가 붙들어서 홍삼과 영지버섯 달인 물이라도 먹인 것이 위안이 될 정도였다.
“다녀오겠습니다.”
현관 앞에서 인사하고 바쁘게 나서는 곽대출은 흔히 상상하는 샐러리맨의 모습 그대로였다.
거기에 주인영을 볼 수 있다는 기대와 일을 배운다는 열의를 온몸에서 내뿜고 있어서 천중명은 “수고해.”라는 말 한마디만 던졌다.
지켜볼 참이다.
어디까지 해낼지는 모르지만, 저놈은 조만간 저렇게 바삐 나간 만큼의 결과물을 들고 올 테고, 그 대신 언젠가는 지쳐 허덕거리거나 주저앉을 때도 있을 게 분명했다.
주인영에게 절대 말하지 못하는 좌절의 순간에 옆에서 조용히 지켜주는 사람이 천중명이면 되는 게 아닐까.
“식사하고 씻을래요?”
“아니. 먼저 씻을게.”
답을 한 천중명은 송순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침은 함께 드시면 어떨까요? 어제 점심, 저녁, 전부 혼자 먹었는데 오늘 아침도 혼자 먹는 건 그래서요.”
허선영이 시선을 돌린 곳에서 송순주가 고마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준비할게요.”
“예.”
송순주의 답이 있고 나서 천중명은 샤워실로 걸음을 옮겼다.
**
강승애는 아침 일찍 휴대전화기의 번호를 눌렀다.
- 예.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인간 중의 한 명인 천상기는 전화를 받는 음성조차 달라져 있었다.
“우리 주식 잘 있지요?”
- 먹는 것도 아니고, 썩는 것도 아닌데 별일 있겠습니까?
“똑바로 말해요. 잘 있어요?”
- 그런 걱정은 마십시오.
유들유들한 천상기의 대응이 어쩐지 강승애는 불안했다. 그러나 지금은 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제 자금을 만들었어요.”
- 알고 있습니다. 오늘 주식을 매입하면 계좌를 알려주세요. 담보 설정해서 자금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내가 돈을 만든 걸 어떻게 알고 있지요?”
- 송도상인 쪽에 도움을 요청하셨으니 제 레이더에 걸리는 거죠. 몇 백억 하는 사채는 어차피 다 알게 됩니다.
어차피 빤한 바닥이라 강승애도 다른 말을 하지는 못했다.
금방 끝난다.
- 이제 1.5퍼센트 정도만 더 매입하면 승산 있습니다.
천상기의 말을 들은 강승애는 통화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마음도 놓였다.
“오늘 매입한 주식을 오후에 담보로 넘길 거예요. 이관은 바로 안 되니까 계좌를 설정할게요.”
- 제가 지정하는 증권사로 하십시오. 그래야 소문나지 않게 일이 진행됩니다.
“알았어요.”
강승애는 통화를 마쳤다.
어제 남동생인 강준수가 매달렸고, 부친인 강종환이 간곡하게 부탁해서 사돈인 조세원 국세청장과 오늘 오후에 약속도 잡았다.
천중명이 주식회사 지경의 주식을 소유하게 된 과정과 그룹의 자금 흐름을 확인하기 위해서 지경그룹에 대한 세무조사를 시행한다면?
부친 강종환이 조세원을 만나 확답만 받는다면 지경건설이 손안에 들어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강승애는 휴대전화기를 들어서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무슨 일이냐?
강종환은 놀란 음성이었다.
“일은요. 오늘 약속 틀림없지요?”
- 난 또 아침 일찍 전화했길래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다.
가진 부동산을 모두 담보 잡힌 강종환은 간이 콩알만 해졌는지 이후로 계속 겁먹은 강아지 꼴이었다.
“아빠. 우리가 만든 현금이 있으니까요. 뭐하면 한 50억쯤 사돈에게 주겠다고 하세요. 계좌 알려주면 현금으로 돌려서 넣어준다고요.”
- 공연히 의심하지 않겠니? 어차피 건설 가져오면 전자를 가져가서 준수에게 주는 마당인데.
“그러니까요. 딸이 있다고 해도 사위인 준수에게 전자를 주고 나면 정작 사돈은 생기는 게 없잖아요. 그러니까 넌지시 계좌를 달라고 하세요. 50억쯤 여유 있다고도 하시고. 아셨죠?”
- 알았다. 오늘만 돌리면 임시주총을 신청할 수량은 분명히 확보하는 거지?
몇 번이나 듣는 같은 질문이라서 욱하고 짜증이 치미는 것을 강승애는 입술에 힘을 주는 것으로 참아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침에 우리 주식 무사하다는 말도 들었고, 또 저쪽에서도 오늘만 수량 모으면 충분하겠다고 좋아했어요.”
- 후유.
“아빠. 이제 정말 막바지예요. 지경그룹은 오늘도 공매도를 낼 거예요. 그럼 개미 물량이 나와서 어쩌면 일찌감치 필요한 수량 다 채울지도 몰라요. 이럴 때일수록 힘을 내셔야죠.
- 그래, 알았다.
통화를 마친 강승애는 자꾸만 불안해지는 심정을 누르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 오피스텔의 창으로 움직였다.
이럴 때 윤만석이 있으면 시장의 흐름을 누구보다 잘 알아 올 텐데, 엉뚱하게 그의 팔다리를 잘랐고, 그 덕분에 전에 일 잘하던 사람들조차 멀어지고 말았다.
괜찮다.
누가 뭐래도 지경건설의 주인이 되면 다 끝난다.
그래서 이사장이라고 끝까지 부르던 그 부속실 계집년들을 모조리 잘라낼 거고, 뻔뻔하게 나가달라던 부회장도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잘하고 있어, 강승애.”
강승애는 창에 비친 또 다른 강승애를 단단한 눈으로 바라보며 용기를 북돋웠다.
**
강승애와 통화를 마친 천상기 역시 곧바로 휴대전화기에서 다른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나다. 오늘 강승애 쪽에서 오전에 500억을 매수할 건데 우리 물량을 거기에 먹여. 송도상인도 물량을 풀 테니까 겹치지 않게 소량으로 꾸준히 먹이는 것 잊지 말고.”
통화를 하면서도 천상기는 연신 모니터에 올라온 기사들을 훑었다.
“주식연구소는 어떻게 됐어?”
잠시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던 천상기가 만족한 미소와 함께 의자에 몸을 묻었다.
“회원들에게 매수 문자 넣을 때마다 알려달라고 해. 그때 우리가 물량을 풀어야지 자칫하면 송도상인 좋은 일만 시켜. 그 정도는 알지?”
고개를 두 번쯤 끄덕인 천상기가 다시 모니터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오전에 매입한 주식을 점심시간쯤 담보 설정할 테니까 변호사 준비시키고, 그 돈 건너가면 또 물량 풀고. 오늘은 10억, 20억 싸움이 아니라 천억, 2천억 싸움인 것을 명심해.”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던 천상기가 “수고해.” 하고는 통화를 마쳤다.
“멍청한 년.”
그가 휴대전화기를 내려놓으며 가장 먼저 뱉은 말은 강승애를 향한 욕설이었다.
“주식의 주자도 모르는 년이 무턱대고 사들이기만 하면 회사를 처먹는 줄 알았나 보네.”
모니터를 힐끔 본 천상기는 책상 한쪽에 놓인 결재판을 가져와 들여다보았다.
“지경건설이 정리되면 개망나니, 네놈이 저축은행하고 시행사에서 날 밀어내려고 하겠지?”
마치 천중명이 앞에 있다는 것처럼 천상기는 감정이 담뿍 담긴 혼잣말을 지껄였다. 그런 뒤에 그는 검지로 결재판 안에 담긴 자료를 천천히 아래로 짚어 내렸다.
“시행에서 뽑아 먹을 거 다 먹었고, 주식에서 한 천억 이상 챙길 거고.”
타악.
결재판을 통쾌하게 덮은 천상기가 양팔을 위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사채업계의 새로운 큰손이 탄생하는 날인가? 이렇게 되면 저축은행과 시행사를 계속하라는 게 더 불편하겠는데? 제발 날 좀 잘라주라, 개망나니 회장아.”
팔을 내린 그는 위로 올라간 와이셔츠를 아래로 단정하게 당긴 뒤에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장 시작하기 10분 전이어서 매도와 매수 물량이 위아래로 치열하게 쌓이고 있었다.
“거지새끼들. 무슨 주식으로 돈을 처먹겠다고. 너희가 얼마를 예치했는지, 어떤 주식을 언제 얼마나 샀는지 다 보고 거래한다니까.”
천상기는 실제로 모니터를 벌레 보듯 노려보았다.
“너희가 팔 때까지 가격을 빼다가 팔아야 올라간다고, 이 불쌍한 개미 새끼들아. 차트 백날 쳐다봐라. 사기만 하면 이상하게 뚝 떨어지지.”
천상기는 이상하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