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75화 (75/315)

# 75

075. 너무 늦게 알았다 (3)

곽대출을 내보낸 뒤로 일이 쏟아져 들어왔다.

첫 번째는 엄청난 양의 서류를 들고 들어온 유진교와의 의논이었다.

“취임식은 내부 정리를 마친 뒤에 하는 것으로 발표하겠습니다. 조세원 청장과는 내일 서울지방국세청으로 직접 방문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시간은 오전 10시 30분입니다.”

“잘 됐군요.”

“냉동창고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표를 받아놓은 임원을 전부 해고하고, 부장급부터 위로 올리세요. 대표이사는 본부장님이 알아서 결정하셨으면 싶습니다.”

의논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전원을 해고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썩은 가지는 한 번에 잘라내야 합니다. 과거의 악행에 물든 인물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뒷거래는 반드시 다시 일어납니다. 일벌백계의 의미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근 한 시간에 걸쳐 내부적으로 급한 일들이 모두 정리되었다.

“회장님. 면담을 요청하는 외부 인사는 적당한 선에서 만나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사진은 홍보실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해서 얼굴이 알려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그건 내용을 보고 나서 차례대로 하지요.”

그 외에 자질구레한 의논까지도 끝났다.

유진교가 일어서려 할 때였다.

“본부장님. 전에 총수님께 세 가지 숨겨놓은 카드가 있다고 했었는데 하나는 본부장님이고, 다른 하나는 윤 실장, 남은 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천중명은 오래전에 있었던 질문을 새롭게 꺼내 들었다.

“그 문제만큼은 총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천중명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난 다음이었다.

“갑자기 왜 그 부분이 궁금하셨습니까?”

“어쩐지 지금쯤 나올 때인 것 같아서요.”

그것으로 끝이었다.

유진교는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고, 인사를 한 뒤에 집무실을 나섰다.

이제 좀 쉬나 싶은 순간에 노크와 함께 최만호 기획실장이 꽤 많은 양의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

계열사가 많은 만큼 밀어두었던 일들이 그야말로 산더미 같았다.

200억 이상은 천중명의 결재가 필요했고, 그중에서도 처리가 시급한 것들만 들어왔는데도 그 정도였다.

“실장님. 건설이나 전자만 해도 200억 결재는 그리 큰 금액이 아닌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새로운 사업에 투자하는 것만큼은 반드시 총수님께서 직접 살피셨습니다. 결재 도중에 담당 임원을 직접 부르시곤 했는데 사장단의 독주를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렇군요.”

식품 사업부의 이장호 상무를 만나본 터라 천중명은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또 말하지만, 비서실장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한 마디면 단숨에 끝날 일이고, 반대로 하나씩 궁금한 것들을 묻고 따지자면 내일 아침까지 계속 앉아 있어도 끝나지 않을 일이었다.

“다음은 지경케미컬에서 올라온 결재들입니다.”

적당해 보이는 것은 그런대로, 궁금한 것들과 의아한 것들은 또 그것대로 천중명은 묻고 사인하며 보고서를 넘겼다.

A4 한 장이나 두 장에 간략하게 작성된 서류들이었다.

보고서에 없는 궁금한 것들은 다시 컴퓨터를 이용해 세부 사항을 살펴야 했다.

달랑 서류만 보는 일인데도 과장 조금 보태서 말하면 뼈마디에서 진이 쪽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한 달만 살면 골병들어 죽겠구나 싶을 때,

“그럼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최만호가 흡족한 표정으로 서류철을 덮었다.

그동안 혼란스러웠던 상황 탓에 밀려있던 일들을 처리했다는 홀가분함이 그의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최만호가 나가고 나자 천중명은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움직였다.

결재 서류 하나에 최소 200억 이상이니 최만호와 함께 있는 동안 천중명은 적어도 2,600억 이상의 지출을 허락한 꼴이었다.

2,600억이 얼마나 큰돈인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마우스를 움직여 확인한 주식 현황에서 지경건설 주식은 상한가에서 2만 원 빠진 수준에서 마감되어 있었다.

똑똑똑.

노크 소리 뒤에 들어온 부속실 직원이 소파의 찻잔을 정리하고는 책상으로 다가왔다.

“회장님. 저녁은 어떻게 준비할까요?”

“벌써 그렇게 됐나?”

질문과 달리 점심을 먹고 한 사흘은 지난 느낌이었다.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저녁은 내가 알아서 하지.”

“이 시간 이후로 정해진 일정은 없습니다, 회장님.”

부속실 직원이 인사를 하고 나갔다.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는 순간이었다.

화려한 집무실과 점심 도시락이 나쁘지 않았지만, 천중명은 하여간 회장실을 빨리 나서고 싶었다.

우선 이놈이 퇴근을 어떻게 할지를 알아보고.

천중명이 새로운 전화기로 멋지게 곽대출의 번호를 누른 다음이었다.

- 예, 회장님.

“퇴근 안 하냐?”

- 일이 좀 남았습니다.

뜻밖에도 곽대출은 퇴근을 뒤로 미루는 반응을 보였다.

“그럼 먼저 퇴근한다.”

- 예, 회장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일에 매달리는 곽대출이라니?

그것도 서류 업무와 회의가 거의 전부인 첫날에.

천중명은 픽 웃으며 책상에 기대서서 집무실의 거대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루를 마감하는 주황색 태양이 끝없이 펼쳐진 빌딩의 머리를 비추는 시간이었다.

오늘을 아직 마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멀리 보이는 빌딩의 옥상에서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들이 삼삼오오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주가는 흔들리면서 박승양이라는 사채업자와 천상기의 물량이 쏟아져 나왔다.

내일 오전에 조세원 청장을 만나서 담판을 지으면 지옥으로 한 집안이 들어간다.

천중명이 무거운 얼굴로 바깥을 바라볼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잉.

휴대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 강승애 이사장이 사채업자 박승양을 통해 5백억을 융통했습니다. 만든 자금은 전부 강승애 이사장이 가지고 있는 주식 계좌로 나눠 들어갔습니다.

“결국, 막판까지 가는군요.”

천중명은 창밖으로 시선을 들었다.

부족한 주식을 채우려는 모양이었다.

- 박승양과 천상기 회장이 주식을 판다는 것은 전혀 모르는 눈치입니다.

“내일 오전 장을 분명하게 살펴주세요.”

- 예,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상체를 책상으로 돌려 인터폰을 눌렀다.

[네, 회장님.]

“퇴근할 테니까 준비 부탁해.”

[예, 회장님.]

인터폰에서 손을 뗀 직후였다.

똑똑똑.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지?”

“모시러 왔습니다.”

천중명은 새삼 깨달았다.

퇴근이든, 외출이든 바로 나갈 수 있도록 언제고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남부증권 한남지점 지점장은 점심시간 이후부터 의자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들썩였다.

남부증권 사장이 들뜬 목소리로 걸어온 전화가 원인이었다.

- 그 지점에 이명선 씨라고 있지요? 인턴 직원?

“예, 사장님.”

- 이명선 씨 덕분에 지경그룹에서 우리 증권사로 계좌를 개설했어. 이 정도면 보통 관계가 아닌데?

지경그룹과 관계가 있다고?

지점장이 놀라 답도 못할 때였다.

- 당신 혹시 모르고 있었던 거야?

“아, 예! 지경그룹. 이명선 씨가 관계있을 겁니다.”

- 어떤 관계인데?

“예?”

아예 몰랐다고 솔직하게 말한 것보다 더 나쁜 상황이었다.

- 이봐요. 지경그룹 기획실장님이 내게 직접 전화를 주셨어! 앞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고! 지경그룹이 증권사가 없어서 그런 소리를 했겠나!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 당신 뭐야? 뭐 있지? 이제라도 똑바로 말해봐.

“그게 우리 지점에 100억가량을 거래하는 VIP 고객이 조카를 뒤늦게 부탁하는 바람에 이명선 씨를 부적격으로 인사과에 보고했습니다.”

- 흠.

사장의 깊은 신음이 건너왔다.

증권사라는 게 현금 크게 넣은 고객이 왕인 세상 아니던가.

거래액이 20억만 넘어도 지점에 조그맣게 방과 컴퓨터 넣어주고, 무리하면 명함도 찍어주는 현실에서 거래액이 100억이면 여직원 한 명쯤 슬쩍 밀어 넣는 거 얼마든지 눈감아야 했다.

- 이명선 씨를 본사로 발령 낼 테니까 그렇게 알아. 그 친구에게 미리 알려주고.

“예, 사장님.”

통화는 그렇게 끝났고, 그때부터 지점장은 내내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똑똑하고 일 잘하는 여직원을 자르려면 그만한 이유를 만들어야 해서, 대놓고 100억을 거래하는 고객과의 마찰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그 이명선이 예치금 5백억에 기획실장이 직접 전화를 줄 정도로 지경그룹과 인연이 있었다니?

“저기 이명선 씨.”

“네, 지점장님.”

직원들은 또 시작이겠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어떡해서든 이명선을 잘라내려는 지점장은 그녀가 숨 쉬는 것조차 미워하는 사람처럼 행동했었다.

“이명선 씨가 본사로 발령 날 거예요.”

“예?”

이명선 본인만큼이나 주변에 있던 직원들이 놀라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저기 말이지요. 내가 그동안 엄하게 대했던 것은 다 우리 이명선 씨가 잘되라고 그런 거니까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시지 말고.”

지점장은 아예 말이 꼬이는 수준이었다.

“우리 이명선 씨가 혹시 지경그룹과 관계가 있으신가요?”

얼핏 망설이던 이명선이 시선을 가져왔다.

“아니요, 지점장님.”

“에이, 다 들었어요. 많이 서운했던 거지? 마음 풀어요. 본사에는 나도 2주에 한 번씩 들어가니까 그때 보자고. 가요. 가서 자리 정리하고 준비해.”

고개를 숙인 이명선이 몸을 돌린 다음이었다.

“들었지? 이명선 씨가 본사로 가게 돼서 오늘은 회식이야. 회식! 알았지?”

지점장의 과장된 음성이 사무실에 크게 울렸다.

**

해가 넘어가는 평창동 저택의 2층 거실에서 유진교는 천호득과 둘이 있었다.

장만섭은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낼 정도의 놀라운 식성이나 괴력을 보여주곤 했는데 오늘이 그 최고봉이었지 싶었다.

천호득이 앉은 상태에서 휠체어를 앞으로 들고서 계단을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모처럼 홍차를 놓고 둘이 앉았다.

“저 괴물 같은 놈이 내가 마실 홍차를 먼저 먹어보고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그렇습니까?”

“다 쓸데없는 짓이지. 어지간한 독을 처먹여도 저놈은 화장실 한번 다녀온 거로 다 털어낼 거야.”

고개를 저어대는 천호득을 보며 유진교는 실없는 사람처럼 웃음을 쏟아내고 말았다.

“든든하시잖습니까?”

“미울 때도 많아. 여직원은? 저 덜떨어진 놈에게 한 명 구해주라고 했었는데?”

“신원을 확실히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서둘러 조치하겠습니다.”

“오늘은 어땠나?”

툭 말을 뱉은 천호득이 떨리는 손으로 홍차를 마셨다.

“업무에 적응하는 속도, 사업을 이해하는 감각이나 지능, 센스, 흠잡을 것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냉정한 판단과 그에 따른 결단은 제가 가늠할 수준이 아닙니다.”

“흐헤헤헤.”

언제부터인지 천호득은 천중명의 소식을 들을 때면 지금처럼 주책없는 노인네의 웃음을 쏟아냈다.

“이사장의 해임 건도 그렇습니다. 저런 생각을 어떻게 하고 있었지 싶은 정도였는데 시장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내일 청장을 만난다고?”

“예, 오전 10시 30분에 서울지방국세청을 방문하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내놓을 카드가 있을까?”

“지금까지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는 준비하지 않았나 예상만 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갑갑한 듯 천호득은 어둠이 내려앉는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갑자기 총수님께 있는 세 가지 카드 중 나머지 한 명이 누구냐고 물었었습니다.”

유진교의 말에 천호득의 고개가 퍼뜩 돌아왔다.

“총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게 좋겠다고 했더니 그럴 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게 갑자기 궁금했을까?”

“저도 그렇게 질문했었는데 때가 된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천호득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려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판단은 총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천호득은 의미를 알기 어려운 고갯짓으로 유진교의 말을 받았다.

“내일 결판이 나겠군.”

“그럴 것 같습니다.”

“시장 흐름은?”

“우리 증권사 전문가들의 분석으로는 강승애 이사장 쪽만 아무것도 모른 채 주식을 사들이는 것 같다는 판단입니다. 이대로 주식이 계속 흘러나오면 강승애 이사장이 기대하는 수량은 이미 어렵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떨리는 손을 든 천호득이 눈썹을 가볍게 긁었다.

“저녁을 먹고 가도 되겠나?”

평소의 천호득 답지 않은 조심스러운 음성이었다.

“총수님. 저는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쩌면 윤만석을 빗대 던진 아픈 대꾸일 수 있었다.

“그럼 저녁을 먹지.”

천호득은 또 그걸 모른 척 답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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