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074. 너무 늦게 알았다 (2)
점심을 먹은 천중명은 책상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역시나 부속실 여직원이 추천해주는 블루마운틴이라는 커피였다.
허선영이 좋아한다니 적응도 해볼 겸해서 도전했으나 역시 식사 후에는 달달한 커피가 최고라는 사실만 깨달았다.
입맛을 다신 천중명은 모니터에 시선을 주었다.
시세는 점점 떨어지고 그에 반해 거래량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당장 급한 일은 없으니까.
천중명은 부속실에게 가져다준 새 전화기로 허선영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는 허선영의 음성을 듣자 미소가 절로 피어났다.
“나야.”
- 정말 바뀌었네요. 아까 문자 받았었어요.
“부속실에서 요청이 있었어. 점심은?”
- 엄마랑 먹었어요. 점심 어떻게 했어요?
천중명은 도시락에 관해 짧게 설명해주었다.
“함께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혼자 먹으니까 별로였어.”
- 점심을 함께 먹을 사람을 찾아봐야겠네요.
이제는 좀 편안하게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는 되는 느낌이었다.
“발표를 아직 모르는 것 같아서 미리 말해주는데 선영 씨를 지경디자인의 대표로 임명했어.”
- 예?
“지경그룹 디자인실과 지경디자인을 통합했고, 지경디자인의 대표로 선영 씨를 임명했다고. 고상득 상무가 연락할 테니까 전화 받고, 내일부터는 출근 준비해.”
- 내가 그걸 어떻게…? 너무 급해요.
“어차피 실무는 고 상무에게 맡길 생각이었어. 그 양반이 아직 대표이사 하기에는 그릇이 좀 부족해서 그런 거니까, 선영 씨는 디자인 업무에만 전념해 봐. 아버님은 통화해서 내일 오후에 만날 예정이니까 그렇게 알고.”
- 저녁에 들어오죠?
전화로는 갑갑한 눈치였다.
“그래. 나머지는 들어가서 이야기해.”
몇 마디를 더 나눈 뒤에 천중명은 전화를 끊었다.
뒤통수도 때렸고, 따귀도 갈겼으니까 남은 것은 명치를 노린 한 방이었다.
악착같이 버텨라.
지옥인데 쉽지 않을 거잖아.
천중명은 인터폰을 눌렀다.
[네, 회장님.]
“그룹발전본부 곽대출 이사 좀 불러줘.”
[알겠습니다, 회장님.]
천중명은 황성규가 보내준 자료로 눈을 돌렸다.
이렇게 하나씩 준비한다. 순서대로.
**
대교건설 오상구는 처음이라 할 정도로 화난 얼굴로 오지은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지경그룹을 건드릴 생각을 해?”
“아빠는? 그럼 당하고만 있어요? 내가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오상구의 험한 인상이 오지은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이 녀석아. 생각해 봐. 지경그룹 지정업체에서 밀려나면 당장 우리는 견디기가 어려워.”
“내가 카드 좀 적게 쓸게요.”
“허허.”
세상 물정을 저렇게 모를 수가 있을까?
그러면서도 오상구는 오지은의 풀죽은 모습이 안쓰러워서 화난 얼굴이 스르르 풀리고 말았다.
“아빠가 찾아가 볼 생각인데 혹시 천 서방에게 연락은 되겠니?”
“꼭 그래야 해요?”
“아빠 소원 한 번 들어주라.”
“만나주지도 않을 거야.”
“누가 너더러 만나래? 아빠가 만날 수 있게 연락만 해 달라는 거지. 아빠는 아무리 해도 기획실장에게 전화하는 게 전부거든. 그러니 한 번만 자존심 숙이자, 응?”
허선영의 일을 오상구 역시 모르지는 않는다.
오지은이 밀려났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지금껏 키워왔던 대교건설이 위태로운 상황이라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우리 예쁜 딸, 아빠 소원 한 번만 들어주자.”
“알았어요. 대신 딱 한 번만이야.”
“그래.”
오상구에게 보이지 않는 께름칙한 표정으로 오지은이 휴대전화기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쯤 건너간 다음이었다.
- 네, 천중명 회장님 부속실입니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엉뚱한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천중명 회장님 번호 아니에요?”
- 네, 맞습니다.
“저, 오지은이라고 하는데요. 지금 통화할 수 있나요?”
- 메모 남겨드리겠습니다.
오지은이 슬쩍 시선을 들었을 때, 오상구는 완벽하게 실망한 얼굴이었다.
“여보세요? 나, 오지은이라고요. 기다릴 테니까 천중명 회장님께 바로 전해주세요. 그럼 받을 거예요.”
숨 막히는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여직원의 응대가 있었다.
“흥!”
오지은이 콧소리를 내며 전화기를 노려볼 때였다.
- 여보세요?
다시 여직원의 음성이 들렸다.
“네, 전화 바꿔주세요.”
- 회장님께서 업무 파악 중이셔서 당분간은 통화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여보세요?”
- 좋은 하루 되십시오.
통화는 그렇게 끊겼다.
기대가 깨진 오상구가 소파에 몸을 묻었고, 얼굴이 새빨개진 오지은은 전화기를 노려보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
곽대출은 공손한 태도로 천중명을 찾았다.
부속실 직원이 나가고 난 다음이었다.
“둘만 있으니까 편하게 하자.”
“그래도 되겠습니까?”
천중명의 말에도 곽대출은 조심스러운 태도를 풀지 않았다.
“어때? 할 만하냐? 오전엔 뭐 했어?”
“인사하는 법부터 배웠습니다.”
“인사?”
곽대출은 자리에서 일어나 좀 전에 했던 것처럼 공손한 인사를 보여주었다.
“주인영 과장이 내가 하는 인사가 깡패스럽다고 바꿔놨는데 목덜미부터 등 쪽으로 쥐가 나는 기분이라니까.”
자세가 풀어지자 이제야 천중명이 아는 곽대출의 모습이 나오기 시작했다.
천중명은 먼저 오전에 있었던 일을 전해주었다.
“분위기로 봐서 지경건설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다. 내일 조세원 청장 만나서 담판 지으면 대강 끝나지 싶은데?”
“이사장이 좋게 끝나지 않겠지, 회장님?”
천중명은 픽 웃는 것을 본 곽대출이 비슷하게 웃으며 찻잔 옆의 한과를 집어 들었다.
“그거 말하려고 부르셨습니까?”
“계약직 직원 전환문제 때문인데, 여기 임원들은 최소 은수저는 물고 태어났던 사람들이거든.”
천중명은 하려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어릴 적에 고생했던 사람들이라고 해도 실적에 목을 매단 꼴이라 쉽게 변하지를 않는다. 그러니까 본부장하고 기획실장, 너, 나, 이렇게 둘러볼 수 있도록 사전 작업이 필요해.”
“사전 작업이라 하면 어떤 걸 말씀하시나, 회장님?”
“안 부장하고 의논해서 순서를 정해 놔. 우리 정체가 탄로 나지 않게 인원수만큼 비정규직이나 일용직 자리도 만들어놓고.”
놀란 모양인지 곽대출은 눈만 껌벅였다.
“저 사람들은 몰라. 피부에 안 와 닿으니까. 너랑 나도 이렇게 몇 년? 아니 1년만 지나면 이 삶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너무 무리한 거 아닐까? 회장님 얼굴이야 몰라본다고 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것 같은데?”
“못 갈 때 못 가더라도 일단 준비는 해 놔. 꼴통 재벌 되겠다고 시작했는데 얼토당토않게 이런 자리에 앉았다고 기본을 잊지는 말자.”
“하, 진짜 꼴통!”
“뭐, 인마?”
천중명의 대꾸가 있고 나서 둘이 잠시 킬킬거렸다.
“내가 먹은 점심이 어느 직원의 하루 일당쯤 될 거다. 말 한마디에 몇 천억 주문 들어가고, 내가 지정한 사람이 턱턱 대표이사 되고, 이사가 되지.”
웃음을 지운 곽대출에게 천중명은 앞에 놓인 찻잔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우리가 마시는 차도 그렇고, 그 옆에 약과와 한과도 마찬가지야. 이런 것들이 당연하게 여겨지면 이보다 못한 것들을 우습게 보게 된다.”
“우리가?”
천중명은 픽 웃고 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자리가 자꾸 사람을 끌어당겨. 내가 특별한 사람처럼 여겨지고, 하루 만에. 부속실 직원들을 내 마음대로 부려도 되는 것 같기도 하고.”
“흠.”
곽대출이 진지한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을 내려다보기 시작하면 나 역시 결국에는 천봉서나 천상기처럼 될 거고, 우리도 총수님과 윤 실장처럼 상처만 남는 사이가 될 수도 있겠지.”
“그건 안 되지요, 회장님.”
“그래. 그러니까 기본부터 다시 시작하자. 지경건설 정리가 끝나면 꼴통 재벌이 되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그 출발점이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알겠습니다.”
대강 뜻은 전했다.
이어서 전화번호를 바뀐 이유를 알려주었고, 나머지 소소한 일들을 이야기하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준비합니다.”
“그래, 부탁할게.”
자리에서 일어난 곽대출이 준비운동처럼 목을 좌우로 꺾은 뒤에 배운 대로 공손한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
허선영은 송순주에게 천중명과의 통화 내용을 전해 주었다.
“늘 하고 싶어 했던 일이잖니?”
“대표이사는 다르잖아요. 괜히 나섰다가 중명 씨에게 누가 되면 어쩌나 싶어, 엄마.”
“실무는 상무님이 계신다면서?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디자인 일을 먼저 익혀봐. 그리고 도저히 능력에 부치면 그때 가서 인정하고 그만두는 게 낫지 않겠니?”
송순주의 권유에도 허선영은 선뜻 결정이 서지 않은 눈치였다.
“너 뉴욕 전시회에 초대받았다고 좋아했었잖아. 세계적인 광고 회사에서 제안도 있었고. 대표이사라는 부담만 아니라면 좋은 기회가 생겼다고 기뻐했을 일이잖니.”
부드러운 말로 다독인 송순주가 팔을 뻗어 허선영의 손을 잡았다.
“회장님이 되셨으니 일반 직원으로 넣는 게 오히려 부담스러울 수 있었을 거야. 너를 받아들여야 하는 임원은 또 얼마나 불편하겠니? 그래서 아예 디자인실을 합쳐서 맡긴 거 같은데?”
“정말 그런 걸까요?”
허선영의 커다란 눈을 향해 송순주가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보면 볼수록 강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더라. 힘이 되어줘. 그리고 엄마처럼 살지 말고, 너는 네 꿈을 펼쳐봐.”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는 조언에 허선영은 미안한 얼굴이었다.
“아버지는 네가 일을 하는 걸 싫어하셔서 막았어. 경력이 생기면 당신 말을 안 들을 거라고 걱정했고, 너를 소개할 집안에서 부담스러워할 것을 염려하셨지.”
허선영의 예쁜 손을 들여다본 송순주가 고개를 들었다.
“너는 회장님 믿니?”
쑥스러운 얼굴로 허선영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남자가 너에게 기회를 줬는데 뭘 망설여? 세 번이나 디자인 대상도 받았고, 해외에서 작품 초대도 몇 번이나 받았던 인재가?”
“고마워요, 엄마.”
“고맙다는 인사는 회장님께 해. 엄마까지 이렇게 살펴주고, 기회도 주었으니까. 앞으로 어떤 관계가 되든, 이 은혜는 잊지 마라. 알았지?”
“예.”
송순주가 허선영을 포근하게 안았다.
**
천상기는 아예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증권 방송과 모니터를 번갈아 보았다.
[지금 거래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만, 오히려 가격은 안정되고 있거든요. 지금 잠시 내려앉은 5일 이동평균선이 20일 선을 의지해 다시 올라오면 엘리어트 3파를 완성하게 됩니다. 보이시죠?]
TV 화면에 나온 전문가가 차트의 마지막 윗부분에 붉은색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여기에서 마지막 축포를 쏠 것이냐, 계속 파동을 이어가서 엘리어트 5파를 완성할 것이냐의 기로인데요, 확실한 건 3파는 무조건 그려낼 것으로 보인다는 거죠.]
[그렇다면 지금을 매수 타이밍으로 보신다는 뜻입니까?]
[차트로 보면 매수 타이밍입니다. 소문에 사고, 발표에 팔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매입했다가 임시주총 신고가 나오면 매도해도 충분한 수익 구간이 나옵니다.]
방송을 보던 천상기가 얼른 모니터에 시선을 떨궜다.
“매수 들어오는 대로 조금씩 풀어. 강승애는 아직 주식을 사느라 정신없을 거야. 송도상인 쪽에서도 물량 풀고 있으니까 눈치채지 않게 자전 확실하게 돌리고. 지금 얼마나 풀었어?”
전화기 너머의 답이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천상기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 연구소 애들 있잖아. 오늘 밤에 룸에 데려가서 거하게 먹이고, 내일부터 매수 신호 터트리게 만들어. 내일까지 반쯤은 털어낼 수 있게. 그래.”
통화를 마친 천상기가 전화기를 내려놓은 다음이었다.
[임시주총을 신청하면 물량이 쏟아지지 않겠습니까?]
증권 방송의 앵커가 질문했고,
[임시주총 의결권 확정일까지는 누가 뭐래도 물량을 쥐고 있어야죠. 거기에 경영권 확보 싸움인데 물량을 던질 수가 있겠습니까?]
해설자가 고개까지 저으며 주가가 내려갈 일은 없다고 강조했다.
“잘한다!”
천상기는 모처럼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오늘만 2백억쯤 챙겼으니 일단 나는 한시름 덜었고.”
그가 혼잣말을 쏟아낸 다음이었다.
[지경그룹이 공매도 주문을 또 냈습니다. 이번엔 거의 1천억 가까운 주문인데요. 이건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앵커가 화들짝 놀란 눈으로 해설자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뭐야? 이 미친 새끼가 진짜!”
천상기가 덜컥 쏟아낸 욕을 들은 것처럼 해설자가 입을 열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지경그룹은 어쨌든 수익이 나는 꽃놀이패예요. 임시주총 신청 이후에는 어차피 주가가 내려갈 것이라는 판단에서 미리 수익을 확보하려는 행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한 마디로 그때까지 버틸 여력이 충분하다?]
[지경그룹의 유보금은 5조에서 7조가량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저라도 그 정도를 여유가 있다면 지금은 공매도를 해놓고 만약에 지경건설을 빼앗기더라도 최소한의 수익을 확보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네가 진짜 전문가다! 내가 인정한다!”
천상기는 다시 기분이 좋아진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