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071.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2)
<오늘의 아침> 일행과의 짧은 면담을 마친 천중명은 바로 집무실로 들어왔다.
모든 일에는 맥이 있다.
중요한 흐름을 모른 채 달려들면 결국 헛심만 쓰다가 엉망진창이 되거나 쓰러지는 일만 남는다.
강승애와 천상기를 잡을 큰 흐름은 준비됐으니까!
공격을 할 때도 타이밍이 필요한 것 혹시 아시나 몰라?
생각 못 한 곳에 찔러 넣는 주먹이 가장 아프거든.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기다리세요.
픽 웃은 천중명은 우선 가장 앞쪽에 있는 보고서 하나를 꺼내 내용을 살폈다.
사업 예산 270억 원을 배정받은 사업 계획이었고, 최종 지출을 남겨놓은 상태였다.
[블루오션 식품 새싹 주스]
제목 아래로 밀의 새싹을 이용한 주스라는 내용과 영양 평가, ‘밀밭’이라는 로고, 필요한 인원, 마지막으로 직영점을 꾸미는데 소요되는 인테리어 비용이 담겨 있었다.
천중명은 컴퓨터를 켜서 키워드에 ‘밀밭’이라는 단어를 넣었다.
[패스워드를 입력하십시오.]
이걸 출근하자마자 30분에 걸쳐 익혔었다.
30초 남짓 새로운 패스워드를 정하고 난 다음이었다.
자료가 화면에 올라왔다.
최초 사업제안서, 이어서 그동안의 회의록, 수정 사업계획서, 그 뒤로 직영점의 디자인과 준비품목, 단가까지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담당은 식품사업부 이장호 상무였다.
그를 포함한 신사업 진행팀은 강남에 매장도 정해 놓았고, 법무팀 검토와 내부결재까지 모두 통과했지만, 사업 예산이 200억 원을 초과하기 때문에 천중명의 최종 승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중명은 유진교 본부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신임 회장인 천중명이 이걸 취소시키는 순간, 소속 팀장과 팀원들은 좌절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게 분명했다.
그리고 눈동자의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불안한 심정을 안은 채, 피 말리는 날들을 보내게 된다.
“후.”
지경그룹이 주스까지 팔아야 하나.
생각난 김에 식품사업부의 계열사들을 살피던 천중명은 왼손 검지와 중지로 눈썹을 매만졌다.
뭔 떡볶이에 어묵, 튀김, 김밥을 팔고 있었던 건지.
실적을 내기 위해 또 얼마나 점주와 아르바이트생들의 목을 졸랐을까?
확 때려치우고 싶었다.
그러나 내내 진행해 왔던 사업을 사전 경고조차 없이 단숨에 취소시키면 직원들은 또 어떻게 할 건가.
자료를 들여다보던 천중명은 퍼뜩 떠오르는 엉뚱한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1년의 세월을 뒤로 돌아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에 휘말리는 바람에 살펴보지 못했는데 지경 바깥의 세상은 어떤지 궁금했다.
천중명은 포털을 열어 지금까지의 기사를 우선 살폈다.
특별히 눈에 띄는 기사는 없었다.
“아, 그렇지!”
기사를 검색하던 천중명은 탄성을 지르며 날짜를 살폈다.
두 달 뒤에 지경건설이 신도시에 지은 아파트의 입주가 시작되고, 그 두 곳 모두 입구와 지하주차장에 물이 고이는 참변을 겪는다.
그놈의 지경건설.
“너는 좀 뒤로 가 있고.”
기사를 살피던 천중명은 상체를 들고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네, 회장님.]
기다리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빠른 대응이었다.
“식품사업부 이장호 상무를 보고 싶은데 시간이 되는지 확인해줘요.”
[네, 회장님.]
궁금한 것을 짚고 넘어가려고 불렀다.
이장호에게 기회를 주는 대신 천중명은 임원들을 상대하는 경험을 얻을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곽대출 이놈은 뭐하는데 연락이 없지?
천중명은 슬쩍 창밖을 보았다가 다시 보고서로 시선을 돌렸다.
**
곽대출 인생 이 정도면 꽃 폈다, 진짜.
신임 회장의 최측근이라는 평가에 그룹발전본부 수행기획팀의 수장으로, 이사 타이틀까지 달았다.
“안녕하세요?”
“아, 예. 앉으세요.”
바싹 긴장한 얼굴로 들어온 주인영에게 곽대출은 소파를 가리켰다.
“우리 차 좀 주죠.”
“예, 이사님.”
성공한 남자의 모습이라니!
“어떤 차로 준비해 드릴까요?”
“커피 부탁드려요.”
주인영의 답을 들은 여직원이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에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
개인적인 감정을 품은 채 주인영을 부른 것이 반칙인 거 안다. 그러나 일을 제대로 배우려면 차라리 호감 가는 직원 한 명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핑계를 붙였다.
침묵이 이어지자 주인영은 뻘쭘한 표정이었다.
‘뭐라고 시작하지?’
오늘 새벽부터 계속됐던 질문이 곽대출의 뇌리에서 다시 피어났다.
‘잘 왔어요. 내가 신임 이사요. 으하하하하.’
이건 미친놈 같고,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당신, 나랑 일 하나 같이합시다.’
이건 또 조직원을 모집하는 깡패 부두목스럽다.
곽대출의 고민이 깊어질 때 여직원이 들어와 차를 놓아주었다.
곽대출은 또 찻잔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차 마셔요.”
“감사합니다, 이사님.”
사람 다루는 일, 그것도 백화점에서 1년에 1억 이상을 구매하는 VIP 고객만 상대하던 주인영이었다.
그녀의 상냥하고 친절한 표정에 곽대출은 스르륵 녹는 기분이었다.
‘안 돼! 회장님을 위해서라도 정신줄을 잡아야지.’
“차 안 드세요?”
“마십니다. 마셔요.”
아차!
경망스럽게 대꾸했음을 깨달은 곽대출은 일부러 묵직한 태도로 찻잔을 잡았다.
“이사님.”
하필이면 뜨거운 커피를 들이켜는 순간에 불러서,
‘끄으-!’
곽대출은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참아가며 주인영을 바라보았다.
“지난 인연으로 불러주신 점 우선 감사드립니다. 어제 생각이 무척 많았습니다. 회장님의 최측근이라시는 이사님께서 왜 저를 부르셨을까 하고요.”
늘 눈을 보며 말하던 주인영이 지금은 고개를 약간 숙인 것처럼 시선을 아래로 두었다.
“그날 쇼핑을 도와드렸던 건 제 업무의 일환이었습니다. 그걸 잊지 않고 계셨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감사합니다. 중위권 대학 나와서 회장님의 직속 부서에 근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압니다.”
속을 진솔하게 털어낸 주인영이 후련한 미소와 함께 시선을 들었다.
“혹시 고민되신다면 저는 이대로 돌아가도 괜찮습니다.”
별말 아니다.
그런데도 곽대출은 갑자기 뭔가 뜨거운 게 울컥 올라왔다.
“주인영 씨.”
“네, 이사님.”
“나는 고졸이거든. 그럼 나도 여기 있으면 안 되겠네?”
“아니,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좀 못 배웠어. 솔직히 공부가 적성에도 안 맞았고.”
느닷없이 주먹을 연달아 날리는 것만큼이나 곽대출은 도전적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내일부터 출근해.”
“네?”
“싫어?”
“아니. 그게….”
“나, 솔직히 주인영 씨에게 이것저것 가르쳐 달라고도 할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그날 백화점에서 도와준 것처럼 앞으로 내가 회장님 제대로 모실 수 있게 도와주면 안 돼? 안 되냐고?”
단숨에 말을 뱉어낸 곽대출이 각오를 보이듯 찻잔에 남은 커피를 단숨에 마셨다.
달칵.
거칠게 내려놓는 박력도 보였다.
“딱 말해요. 근무해? 안 해?”
곽대출이 강렬한 눈으로 주인영을 노려보았다.
이런 당황스러운 장면을 녹여내는 것이 업무였는데도, 막상 주인영은 얼이 빠진 얼굴로 답을 꺼내지 못했다.
똑똑똑.
그때 노크 소리에 이어 여직원이 들어왔다.
“이사님. 회장님께서 면담 끝나시면 반드시 주인영 씨와 오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곽대출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여직원이 나갔다.
천중명 회장의 말 한마디면 백화점 사장은 당장 내일부터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런 그룹의 총수가 주인영을 직접 찾고 있었다.
“한번 해봅시다. 도저히 못 하겠으면 말해요. 내가 회장님의 발목에 매달려서라도 백화점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까.”
굉장히 다부진 얼굴이었는데 주인영은 그 얼굴에 담긴 간절함을 분명하게 보았다.
“받아주시면 이사님과 일해보고 싶습니다.”
“그래야지.”
통쾌하게 찻잔을 들었던 곽대출이 다 마신 것을 알고는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
식품사업부 이장호 상무가 날다시피 들어왔다.
“앉아요.”
“네, 회장님.”
부속실 옆에 있는 제1회의실이었다.
노트북과 연결되는 대형 모니터, 열 명이 동시에 통화할 수 있는 스피커폰 장치, 자리마다 녹음이 가능한 마이크가 이장호 상무를 윽박지르듯 놓여 있었다.
“사업계획서 봤거든요.”
노트북을 펼친 이장호가 습관처럼 “네, 회장님”하고 답을 내놓았다.
“궁금한 게 있어서요. 우리 지경그룹이 새싹 주스 시장까지 넘봐야 할 정도로 할 만한 사업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이 사업이 그만큼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다는 판단인가요?”
천중명은 들고 왔던 결재판을 펼쳤다.
“여기에 보면 내년 매출을 200억으로 보던데, 이게 우리 그룹의 직원들에게 할당하는 분량 없이 채울 수 있어요?”
“중공업과 전자, 그 외 세 곳의 급식에 납품하는 매출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만 더 묻죠. 우리에게 납품할 농가의 수입 구조는 왜 없어요?”
“네?”
“농가에서 새싹을 그냥 키우지는 못할 테고 여기 보면 유리로 된 설비를 따로 해야 한다면서요? 그 설비를 했는데 우리가 사업을 접으면 농가는 어떻게 되는지 대책이 있냐고 묻는 겁니다.”
시커멓게 변한 이장호의 얼굴을 보면 대책은 전혀 없어 보였다.
“우리야 손실 처리하고 접으면 그만이겠지만, 우리와 손잡았던 농가에게는 그냥 죽어라가 전부인가요? 상무님의 실적을 뒷받침한 분들인데?”
“죄송합니다.”
“이전의 총수님께서 하시던 업무 방식이 있으니 죄송할 일은 없지요.”
“아닙니다, 회장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장호가 참담한 표정으로 답을 한 다음이었다.
“이 기획서 만드는 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4개월입니다.”
“상무님을 포함해서 팀원 6명이 4개월 걸렸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천중명은 사업계획서 요약본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이 건은 분사시키는 거로 합시다. 지금까지 신청한 농가들이 협동조합 형태로 이 사업을 인수하는 시스템으로 가고, 우리는 투자한 돈만 상환하는 것으로 바꾸세요. 가능합니까?”
“투자한 금액만 말씀이십니까?”
“예. 예상 기간과 이후 지원 사업까지 전반적으로 작성해서 직접 보고하세요. 원하시면 상무님이 운영하는 방식도 괜찮습니다. 식품사업부에서 지분 투자를 하는 식으로 구상하세요.”
눈과 귀로 밀고 들어간 천중명의 말이 아직 이장호의 뇌에 도착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내가 사장단 미팅에서 따로 말하겠지만, 식품사업부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전환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먹는 것 가지고는 이윤을 우선하지 맙시다. 아셨죠?”
“예, 회장님.”
자리에서 일어나는 천중명을 따라 이장호가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회의실을 나서자 밖에서 대기하던 직원 두 명이 움직였다.
한 명은 천중명의 앞에서 문을 열었고, 다른 한 명은 이장호를 챙기기 위해 회의실로 들어갔다.
“곽대출 이사가 제1접견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무실로 향하던 천중명에게는 휴식과도 같은 언질이 있었다.
“혼자 왔어?”
“아닙니다. 곽대출 이사, 안신우 부장, 주인영 과장, 이렇게 세 사람이었습니다.”
통로를 따라 걷는 부속실 여직원은 세 사람의 이름을 외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질문할 때를 대비해서 말이다.
그나저나 요놈 봐라?
안신우 부장을 포함하는 잔머리를 굴려?
천중명이 속으로 웃는 사이 부속실 여직원이 제1접견실 문을 열었다.
천중명이 들어선 앞에서 세 사람이 일어서 있었다.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안신우 부장, 바싹 긴장한 주인영 과장, 그리고 주둥이를 얻어맞은 것처럼 입이 불편해 보이는 곽대출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고개를 숙이는 세 사람의 인사를 천중명이 가볍게 받았다.
“앉아.”
“예, 회장님.”
곽대출, 안신우, 주인영의 순서대로 앉은 다음이었다.
‘좀 봐줘.’
‘뭘?’
곽대출과 시선이 오갈 때, 부속실 직원이 차를 가져왔다.
천중명은 새삼 그룹 최고 결정권자가 된 현실을 실감했다.
곽대출은 말할 것도 없고, 바싹 긴장한 안신우와 긴장을 넘어서 꽁꽁 얼어붙은 듯한 주인영의 태도는 그런 느낌이었다.
“곽 이사 팀에 한 명 더 있다고 하지 않았어?”
“조진삼, 서우인 대리까지 두 명이 더 있습니다만, 내일까지 워크숍이어서 현재 원주에 있습니다.”
안신우가 빠르게 답을 내놓았다.
“다른 부서는 모르겠는데 우리 곽 이사가 관리하는 부서는 내 친위대 성격이 강해. 그래서 여기 부서원들에게는 존댓말 쓸 마음도 없어.”
곽대출이 의아해할 정도로 천중명의 말투는 직선적이었다.
“그룹의 모습을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꿀 생각이다. 반대하는 이들도 있을 테고, 모함하는 이들도 나오겠지. 실적을 고꾸라트려서라도 나를 꺾고 싶은 부류도 나오리라 본다.”
진중한 분위기에서 천중명은 대놓고 고개를 돌려 곽대출을 바라본 뒤에 다시 시선을 앞으로 가져왔다.
“나는 임원부터 직원 모두가 행복한 그룹을 만들고 싶다. 현실에서 터무니없다고 여길 내 계획의 가장 앞에 선 사람이 여기 곽대출 이사다.”
안신우가 마른침을 삼킬 정도로 분위기는 진지했다.
“안신우 부장.”
“예, 회장님.”
“곽 이사를 진심으로 도울 의지나 자신이 있어?”
“맡겨주십시오.”
“혹시 지치거나 마음이 변한다면 언제고 의견을 말해. 적어도 원하는 부서로는 보내줄 테니까.”
“그런 일 없습니다.”
안신우가 긴장해서 손이 떨리는 가운데 내뱉은 각오였다.
“주인영 과장.”
“네, 회장님.”
“곽 이사가 저돌적인 부분은 내가 아는 최고 수준이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조직 생활에 적응을 돕고 조언해 줄 사람이 필요해. 그 부분을 맡아주겠나?”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답을 들은 천중명은 다시 고개를 곽대출에게 돌렸다.
‘나는 이렇게까지 했다.’
‘크흑.’
감동한 곽대출의 눈빛에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천중명은 이를 악물며 참았다.
“모든 사업장의 최말단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내게 전달되도록 가감 없이 보고하는 팀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말을 전한 천중명은 몸을 일으킨 뒤에 곽대출부터, 안신우, 주인영과 차례로 악수를 나누었다.
달칵.
대기하던 부속실 직원 한 명이 천중명과 나서고, 다른 직원이 반대쪽 출입구에 섰을 때였다.
안신우와 주인영은 마치 환상적인 꿈을 꾸고 난 사람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