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069. 목줄을 거머쥐고 계신 것이니까요 (2)
조수석과 뒷자리 사이를 늘려놓은 국산 리무진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세 명이 기다리더니 운전하는 직원은 따로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작 출근하는 길에 이 많은 직원이 왜 필요할까 싶었다.
2주 정도만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 뒤에 하나씩 바꾼다.
황량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넓은 뒷좌석에 천중명이 앉자 문을 닫아준 직원들은 뒤차를 향해 움직였다.
차는 묵직하게 출발했다.
도로를 달리는 동안, 천중명은 팔걸이에 놓인 버튼에 시선을 주었다.
열선, 통풍, 안마, 뒷좌석 각도 조절, 발 받침대, 조수석을 앞으로 최대한 밀어내는 스위치, 팔걸이에 달린 모니터를 통해, 차의 온도조절, 햇빛 가리개 작동의 스위치 등등.
몇 개가 더 남았지만, 천중명은 휴대전화기를 들었다.
앞에 직원이 있어서 내용을 들을 수도 있어서 천중명은 문자를 이용했다.
[조세원을 만나볼 생각입니다. 전에 조사한 자료에 그의 성향, 성격, 특별한 몇 가지 사례들을 부탁합니다. 그 외에 강승애의 주식매입과 자금을 지켜보고 수상한 점이 있으면 바로 알려주세요.]
황성규에게 보낸 문자였다.
[예. 회장님. 준비되는 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문자를 마친 천중명은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창밖을 보았다.
지경그룹 본사는 광화문의 미국 대사관 골목에 있었다.
삼성동에서 가는 길이라 본사로 출근할 일이 있다면 혼잡한 시간을 피하는 것이 좋겠구나 싶었다.
지이잉.
천중명이 지루할 것을 염려한 것처럼 문자 알림이 있었다.
[말씀하셨던 경고 메시지를 각 증권사와 언론에 전달했습니다.]
유진교 본부장의 연락이었다.
이 양반은 도대체 가정생활을 어떻게 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이른 시간에 온 문자였다.
말은 들었다.
임원이 되면 오전 7시 출근이 기본이고, 8시에 오전 회의를 끝낼 정도로 업무 강도가 대단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듣는 것과 보는 것은 확실히 달라서 과연 가정을 온전하게 꾸릴 수 있을까 하는 궁금함이 남을 정도로 유진교나 윤만석은 늘 일에 매달려 있었다.
지이잉.
문자가 또 들어왔다.
[지경증권을 통해 공매도를 지시해 두었습니다. 경고 메시지를 장 시작과 동시에 내보낼 예정이어서 공매도 시점은 오후로 잡았습니다. 참고로 지경건설 주식은 동시호가에서 상한가를 기록할 것으로 보입니다.]
9시가 다가오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문자로 바쁘게 들어오고 있었다.
아마도 유진교 역시 운전하는 직원이 들을 것을 염려해서 이렇게 문자로 보내는 모양이었다.
천중명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궁금한 것 하나가 계속 뒤통수에 매달려 천중명을 간질이고 있었다.
비자금의 계좌번호를 알려준 천호득이 왜 비밀번호에 관해서 여태 침묵하고 있을까?
돈이 탐난다기보다는 숨겨진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
<오늘의 아침> 일행이 기획실장 최만호를 방문한 것은 오전 7시 30분이었다.
간단하게 차를 내놓은 뒤부터 편집국장이 상황을 설명했는데 이야기가 끝날 때쯤, 최만호 기획실장은 좀 더 냉정해진 태도로 일행을 대했다.
“대교건설의 이야기까지 드리는 것은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저희는 이렇게 해서라도 다른 의도가 없었다는 속사정을 밝혀 드립니다. 그러니 실장님. 회장님을 알현하고 사과할 기회를 한 번만 주십시오.”
<오늘의 아침> 대표, 전무, 편집국장, 현충기, 서수미가 소파에 앉아 최만호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열심히 고개를 조아리는 네 명과는 달리 서수미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얼굴이었다.
“서수미 기자님.”
“네.”
냉정한 느낌으로 최만호가 불렀고, 아니꼬운 투로 서수미가 답했다.
“불편하시면 돌아가세요. 회장님 출근하시는 첫날이라 다들 비상사태로 뛰고 있는데 아침부터 그렇게 계신 것이 저 역시 내키지 않습니다.”
대표와 전무, 편집국장이 연신 눈짓을 던졌고, 현충기가 인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런 식으로 복수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서수미가 지지 않고 말을 뱉어내는 순간, <오늘의 아침> 대표와 전무, 편집국장은 사타구니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비틀었다.
“그러시군요.”
옅은 웃음과 함께 최만호는 소파 옆의 협탁에서 소형 디지털 녹음기를 꺼내놓았다.
“자신 있으신 모양이니까 지금부터 하는 대화를 녹음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자분이시고, 오프더레코드를 요구한다고 해도 왜곡된 기사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라 하는 조치입니다.”
“실장님. 그런 게 아니라….”
편집국장의 간절한 표정을 외면한 채 최만호는 탁자에 올려놓은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우리 회장님께서 마약을 흡입하거나 투여했다는 증거를 확보하셨습니까?”
“정황상 의심할 여지가 있잖아요.”
“다시 묻겠습니다. 우리 회장님께서 마약을 흡입하거나 투약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입술을 씰룩이던 서수미는 결국 답을 하지 못했다.
“국내 계열사, 해외 법인을 포함해 직원 수가 18만 명에 이르는 우리 지경그룹을 대표하는 분이 천중명 회장님이십니다.”
최만호는 서슬 퍼런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서수미 기자님의 정황이란 변명 한마디에 저를 포함한 18만 명의 직원들은 마약을 투약하는 분을 대표로 모시는 꼴이 되었습니다. 말씀대로라면 신임 회장에 올라서는 안 되는 분을 오늘 모시게 되었고요.”
직원 수를 듣고 나서야 서수미는 잊고 있었던 겁이 덜컥 나는 모양이었다.
“그룹의 하루 매출은 말씀드리지도 않겠습니다. 다만, 서수미 기자님의 상상력에 기반을 둔 기사 덕분에 우리가 어떤 피해를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소송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려드릴 예정입니다.”
현충기의 매서운 눈,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달려들어서 목을 조를 것 같은 대표와 전무, 편집국장의 시선을 돌아본 서수미가 느닷없이 얼굴을 가린 채 울음을 터트렸다.
“뭐하는 거야?”
편집국장이 나직하게 타박을 던진 직후였다.
“내가 여자라서 이러는 거죠? 여기자라고 무시하는 거잖아요!”
둘러앉은 이들의 뒤통수를 갈기는 듯한 항변을 서수미가 쏟아냈다.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오늘은 일이 많아서 더는 시간을 내기 어렵습니다.”
녹음기의 버튼을 누른 최만호는 아예 일어설 태세였다.
“실장님. 회장님께서 전에 인터뷰하셨을 때 제게 언제고 기회가 되면 꼭 찾아오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가 소파의 팔걸이에 손을 올리는 순간,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현충기가 마지막 끈을 부여잡았다.
“대표님과 전무님, 국장님이 가시더라도 저는 기다리겠습니다. 회장님께서 진심으로 주신 약속을 팔아먹는 것 같아서 죄송한데 언질이라도 한번 주십시오.”
“명함을 받으신 게 있습니까?”
최만호의 질문에 현충기는 보다 적극적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당시에는 회장님께서 명함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내렸지만, 당시 기사를 작성한 사람이 접니다. 굉장히 우호적인 기사였습니다. 회장님을 다룬 최초의 기사일 겁니다. 바쁘실 거 압니다. 1분, 1분이면 됩니다.”
묵직하게 고개를 숙이는 현충기를 따라 대표와 전무, 편집국장이 함께 상체를 기울였다.
“사죄만 드리고 가겠습니다. 그도 시간이 안 되신다면 다시는 이렇게 번거롭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말씀 한 번만 드려봐 주십시오.”
최만호는 울음을 그친 채 고개를 모로 틀고 있는 서수미를 먼저 보았다.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오늘의 아침> 대표의 멘트가 적절한 타이밍에 나왔고,
“회장님께 직접 말씀드리는 것은 어렵고, 본부장님께 여쭤보고 답을 드리겠습니다. 죄송하지만….”
“로비에 있는 커피숍에 있겠습니다.”
이번에는 <오늘의 아침> 전무의 빠른 눈치와 훌륭한 처신이 뒤를 따랐다.
“그럼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네 사람과 달리 마지막까지 뻣뻣함을 간직한 서수미가 최만호의 방을 나섰다.
**
지경그룹 회장 집무실은 21층 전체를 사용했다.
제1접견실부터 제3접견실까지 접견실만 세 개가 있었고, 부속실이 한 개, 회의실 세 개, 침대와 샤워시설을 갖춘 휴게실, 퍼팅과 간단한 운동을 할 수 있는 피트니스 공간, 업무 공간의 구성이었다.
하루에 집무실을 다섯 번만 돌아도 건강에 필요한 운동은 거의 다 했겠지 싶을 정도로 하여간 넓은 규모였다.
집무실에 들어간 천중명은 우선 부속실 직원들의 인사를 받았다.
비서실에서 관리하는 부속실은 여직원 세 명에 남자 직원 두 명이 한 팀이었다.
이어서 천중명은 리모컨과 인터폰의 사용법에 대해 간단하게 익혔는데 그 과정을 모두 끝내자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책상과 테이블, 앞쪽에 소파가 놓인 실질 집무실만 해도 들어선 사람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할 정도로 넓었다.
천중명이 출근하지 않으면 이 넓은 공간과 다섯 명의 직원이 일없이 하루를 보낸다.
책상에 앉은 천중명은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작은 탁자 위로 일간 신문이 열 부가량 단정하게 접혀 있었고, 그 위로 A4용지가 하나씩 올려져 있었다.
천중명은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신문사별로 주요 기사를 요약해 놓은 메모였다.
편리하긴 한데 이걸 만들려면 부속실 직원들은 또 몇 시에 출근했을까?
천중명이 기사 내용을 살필 때였다.
똑똑똑.
고개를 든 천중명의 시선 속에 부속실 여직원이 들어왔다.
감색 재킷과 무릎까지 오는 치마, 흰색 블라우스가 유니폼인 모양이었다.
“본부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요.”
“네, 회장님.”
키며, 인물이며, 태도까지 나무랄 데 없는 여직원이 나가고, 곧바로 유진교가 들어왔다.
그가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며 천중명은 가볍게 웃었다.
“소파에 앉을까요?”
“편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책상에서 일어난 천중명이 소파로 움직이는 동안, 여직원이 차를 가져다주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아직은 불편합니다.”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다만, 회장님이 만나셔야 하는 분 중에는 이런 집무실이 아닐 경우 무시당했다고 여기는 분들이 있으니 그 점을 고려하셔야 합니다.”
우선 받아들인 뒤에 시간을 두고 천천히 바꿔 나갈 생각이어서 천중명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 살피셔야 할 서류입니다.”
유진교가 결재판 세 개를 천중명 앞으로 놓아주었다.
“제목과 간단한 메모 수준의 보고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책상 위의 컴퓨터로 보실 수 있고, 더 깊게 알고 싶은 부분이 있으시면 담당 임원을 부르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천중명은 가장 왼쪽에 놓인 결재판을 들어서 커버를 넘겼다.
신문을 볼 때와 같았다.
계열사 임직원 현황, 매출, 순이익이 가장 앞장에 정리되어 있었고, 뒤로 넘길수록 상세한 내역이 있었다.
“이렇게 보면 결국 실적만 평가하게 되겠군요.”
“기업의 설립 목적이 이익창출과 이윤추구에 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대학교에 다닐 때 배웠던 내용이었다.
그러나 지금 유진교가 전해주는 말과 앞에 놓인 보고서만큼 실감 나게 와 닿았던 적은 없었다.
“사장단과의 상견례는 언제 하시겠습니까?”
“급한 일인가요?”
“올해 정례 인사이동이 없었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임원들의 조바심이 상당합니다. 계열사별로 한두 명씩 눈의 혈관이 터진 임원들도 나오는 실정입니다.”
천중명은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유진교를 바라보았다.
“임원들이라면 대개 50이 넘은 나이입니다. 퇴직하게 될 경우, 1년 동안은 본봉의 70퍼센트, 그다음 해에는 본봉의 50퍼센트를 지급 받습니다. 재취업이 안 될 경우입니다.”
유진교가 묵직한 얼굴로 건네는 설명이었다.
“굉장한 지원 같지만, 50 중반의 나이에 직장을 잃으면 생활이 굉장히 힘겨워집니다. 재취업이 어려울뿐더러 다들 대학에 다니는 정도의 자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만하겠다 싶어서 천중명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회장님께서 사장단 인사를 단행하시면 그에 따라 줄줄이 임원들의 인사가 뒤따릅니다. 그러니 자기가 모시는 대표가 계속 유임될지, 옮겨갈지, 옮기면 어디로 가는지에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습니다.”
“그런 거군요.”
천중명은 병원에서 보았던 기획실장과 비서실장의 뿌듯해하는 표정을 이제야 제대로 이해했다.
다른 사람 아닌 천호득 앞에서 천중명의 신임을 받은 격이니 얼마나 든든하고 기뻤을까.
“그렇게 따지면 지경화장품과 냉동창고는 지금쯤 폭격 맞은 꼴이겠군요.”
“지경화장품이야 그나마 회장님의 업무 지시가 있어서 다행이지만, 냉동창고는 아마….”
그 독하던 유진교가 안 됐다는 느낌으로 옅은 미소를 보였다.
“<오늘의 아침> 대표와 간부들이 최만호 기획실장을 아침 일찍 방문했었습니다.”
그러면서 유진교는 대교건설 오지은이 서수미와 연결되었던 상황을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결국, 오지은이 말썽이었다.
이전의 천중명을 진심으로 사랑했었던 걸까?
아니면 밀려난 것이 억울해서 그런 걸까?
듣고 나니 가슴이 답답해지는 설명이었다.
“우선 그룹 협력업체에서 대교건설을 제외하겠습니다.”
천중명의 속마음에 상관없이 유진교는 냉정한 대처를 꺼내놓았다.
“개인적인 친분으로 대교건설에 온정을 베풀면 잘못을 저지르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후에도 온정을 베풀지 않았다고 원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점점 독하고 고집 센 인간으로 변하는 건가?
천중명의 생각을 읽은 모양이었다.
“<오늘의 아침> 현충기 기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나보셔도 좋지만, 혹시 바로 용서하실 것 같으면 지금은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습니다.”
유진교의 날카로운 조언이 천중명을 향해 건너왔다.
“나를 만나자는 이유가 어떻게 됩니까?”
“어떡해서든 매달릴 방법을 찾는 겁니다. 목줄을 거머쥐고 계신 것이니까요.”
유진교의 질문에 천중명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만나보죠.”
“예, 회장님.”
지금 유진교의 대답에 분명하게 하나 알았다.
의견을 물을 때와는 달리 결정이 내려진 일에 유진교는 토를 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