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068. 목줄을 거머쥐고 계신 것이니까요 (1)
천호득, 이은명, 유진교와 함께 식사를 마친 천중명은 곧장 삼성동 빌라로 향했다.
밤 9시쯤이니 잠자리에 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곽대출에게 평창동에서 있었던 대화를 전해 주었고, 내일 할 일을 의논하느라 돌아오는 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몸은 좀 어떠냐?”
“하루 이틀 다치는 것도 아니고. 회장님은 어떠셔?”
“좀 뜨끔거리는 게 다야.”
“나도 그렇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멀리 빌라가 보일 때였다.
“회장님. 선영 씨와 손잡고 돌아다니면 마약 한다는 소문만 돕니다. 그래서 회장님을 위하는 일념으로다가 오늘 밤부터는 내가 딱 붙어서 함께 다니도록 하겠습니다. 음하하하.”
곽대출의 엉뚱하고 과장된 음성에 천중명은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좀 봐주라.”
“무슨 말씀을요, 회장님.”
“야! 너 자꾸 그러면 나도 방법이 있어.”
“외상으로 집도 잡혀 먹었던 놈인데 내가 뒤를 두려워할 것 같습니까?”
전혀 그럴 분위기가 아닌데도 이놈과 있으면 여유가 생긴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담배나 하나 피우고 올라가자. 씻고 나면 더 피우기도 그렇고.”
“그러시죠.”
빌라의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에 둘이서 담배를 피우는 공간으로 움직였다.
찰칵.
“후우.”
길었던 하루가 이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안신우 부장에게 뭘 공부하면 좋을지 물어볼 생각인데 괜찮겠지?”
“그보다는 주인영 매니저 오면 천천히 의논해 봐. 느닷없이 공부할 걸 알려달라는 것보다 함께 생활하면서 필요한 걸 하나씩 익히는 게 낫지 않겠냐?”
“그럴까?”
마지막 연기를 뿜어내며 곽대출이 담배를 재떨이에 눌렀다.
“들어가시죠, 회장님.”
이제부터 다시 회장과 수행 이사의 탈을 뒤집어쓸 시간이었다.
**
신임 회장이 선출되었고, 가장 먼저 내린 지시대로 전 계열사 상무급 이상 임원들의 사직서를 제출한 상황이었다.
혹시 불리한 발령이 나거나 자리에서 밀려날지 모른다는 불안함에 임원들 전체가 바짝 긴장해 있었다.
지경백화점 매니저 주인영은 우상학 사장의 방에 들어섰다.
“앉아요. 앉아.”
평소에 직원들 쥐어짜기로 유명한 사장의 호출이니 당연하게 주인영은 긴장한 얼굴이었다.
“오늘 고생 많았지? 뭐? 좀 시원한 걸 마실까?”
“괜찮습니다.”
사장 우상학은 비굴할 정도로 주인영을 친절하게 대했다.
“그러면 말이야. 내가 집에서 가져온 유자차가 있거든. 그걸 좀 따끈하게 마십시다. 어! 유자차 있지? 내가 가져온 거. 우리 집사람이 만들어 준 거 말이야. 그걸 가져다 줘요.”
백화점은 영업이 늦게 끝나고, 마감은 더 늦게 끝난다.
부속실 직원에게 유자차의 특별함을 몇 번씩이나 강조한 우상학이 고개를 돌렸다.
“VVIP 고객들 상대하는 게 힘들지?”
“아닙니다.”
이 양반이 왜 이러나 싶어서 주인영은 눈치를 살폈다.
“이게 우리 매니저도 알겠지만, 임원이 된 순간부터는 완전 정치판에서 사는 거거든. 능력이나 실력보다 연줄이 더 중요할 때가 있어. 거기에 실적. 그래! 그 실적을 얻어야 겨우 살아남는 거지.”
“네.”
주인영이 답을 할 때 부속실 여직원이 유자차를 가져다주었다.
“들어봐. 이게 먹을 만해.”
사장이 권하는 차였다.
주인영은 잔을 들어서 한 모금을 마시고는, “굉장히 맛있습니다.” 하는 적당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저기, 우리 주인영 씨가 회장님과의 관계가 있었나? 신임 회장님.”
“네?”
“이번에 새로 그룹을 맡으신 천중명 회장님.”
고개를 갸웃했던 주인영은 얼마 전에 있었던 곽대출의 일을 있는 대로 전해 주었다.
“그랬구나! 그걸 나한테 보고해줬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주인영의 질문에 우상학이 얼굴에 묻었던 아쉬움을 얼른 털어냈다.
“이번에 회장님 직속 부서로 그룹발전본부가 신설되었다는 말은 들었지? 전에 그룹 기획실과 비서실을 총괄했던 유진교 전무님께서 사장 직급으로 초대 본부장이 되셨고.”
워낙 열띤 눈빛이어서 주인영은 반듯한 자세로 우상학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주 매니저가 말한 곽대출 부장이란 분이 발전본부에 신임 이사로 발령 났어요. 소문으로는 회장님의 측근 중 측근이라는 평가던데, 그 곽대출 이사님께서 또 우리 주인영 매니저를 본부로 보내달라고 요청하셨지 뭔가?”
주인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상학을 바라보았다.
“백화점 파견 직원이 아니라 그룹에서 직접 고용하는 방식이고, 과장 직급을 준다던데, 특이사항으로 본인이 거절하면….”
“가고 싶습니다.”
우상학은 당연하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화점과는 비교할 수 없는 봉급과 근무 환경, 그룹 핵심인 회장 직속 부서에서 근무한 경력은 어디서 함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 매니저. 아니지. 이제는 주 과장님이 되셨네. 주 과장님. 다른 거 안 바랄게. 회장님 뵙거든 나, 이 우상학이가 백화점 관리 정말 잘하고 있다고 꼭 좀! 자알! 알지? 자알! 잘 말씀드려줘요.”
우상학의 당부가 주인영의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한 번 봤다.
매섭게 생겼고, 성격에 안 맞으면 당장 주먹을 날릴 것처럼 우락부락했던 곽대출의 인상만 자꾸 떠올랐다.
덜컥 가겠다고 했는데, 갑질하는 사람들에게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여서 대답은 했는데, 과연 곽대출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저 내 바람은….”
기도문처럼 길어지는 우상학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주인영은 곽대출이 왜 한 번 본 자신을 불렀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
문을 열고 들어갈 때 허선영은 웃는 얼굴이었다.
“다녀왔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저녁은요?”
입술이나 눈을 길게 늘이지 않았지만, 천중명은 허선영의 눈에 담긴 반가움과 미소를 알아보았다.
“저녁은 먹었습니다. 저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회장님 된 거 축하해요. 나도 보던 드라마가 있어서 방에 먼저 좀 들어갈게요.”
곽대출과 송순주가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았는데 그걸 굳이 말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오늘은 뭐하면서 지냈어?”
“책 읽었어요.”
씻고 나와야 하는데 당장은 허선영과 마주하는 것이 좋아서 천중명은 홈바를 돌아 주방으로 움직였다.
“왜요?”
“물 마시려고.”
“달라고 하죠.”
허선영이 냉장고를 여는 천중명의 옆으로 다가오는 순간, 여자들이 사용하는 화장품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천중명은 물병을 꺼냈고, 허선영은 잔을 내놓았다.
“저기 그거 있잖아.”
주방 안에 함께 서 있는 것보다는 천중명이 거실 쪽으로 돌아가서 마주 앉는 게 훨씬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종일 보고 싶었던 허선영에게서 한 걸음도 더 멀어지기 싫은 걸 어쩌겠나.
“아까 축하한다는 문자. 그거 말로 해주면 안 될까?”
짜그락.
물병을 따며 건넨 천중명의 요구에 허선영은 먼저 맑게 웃었다.
“통화로도 했었잖아요.”
“그래도 이렇게 직접 보면서 하는 거랑 좀 다르지.”
“축하해요.”
“어? 그게 끝이 아니잖아. 뒤에 뭐 있었는데?”
멈칫했던 허선영이 아까보다 더 크게 미소 지었다.
“얼른.”
“그걸 어떻게 해요?”
“듣고 싶잖아. 자, 눈 똑바로 보고.”
천중명은 허선영의 앞으로 한 걸음 움직여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싸움을 하는 것과는 다르게 심장이 뛰었고, 그녀의 눈에 담긴 감정과 숨결, 그리고 은은하게 풍기는 향기까지, 그 모든 것이 좋았다.
언제 없어졌는지 허선영의 눈가에 웃음기는 사라져 있었다.
천중명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을 마주 대하는 순간, 이상하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듣고 싶었고, 확인받고 싶었다.
허선영도 같은 마음이라는 걸.
천중명의 고개가 천천히 허선영에게 다가가고 있었는데 그녀 역시 피하지 않았다.
숨결이 진하게 느껴질수록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리고 그녀의 숨결이 천중명의 입술에 닿았을 때,
“저기….”
곽대출의 음성이 사랑을 시기하는 괴물의 울부짖음처럼 느닷없이 튀어나왔다.
“아? 흠흠. 이거를…. 제가 찾았습니다! 찾았어요! 네! 들어갑니다! 계속! 회장님, 일보십시오!”
허선영이 먼저 웃었고, 천중명은 허탈하게 따라 웃었다.
한숨이 푹 나왔지만 이미 깨진 분위기를 되돌리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씻고 올게. 산책할 수 있어?”
“그럼요.”
천중명은 드레스룸으로 향하며 곽대출의 방을 노려보았다.
너 진짜, 두고 보자.
요건 진심이 조금은 묻어 있었다.
**
식사를 마친 후에 출근 준비를 하는 천중명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문자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회장이 되신 걸 축하하네. 그룹을 맡아 많이 바쁘겠지만, 잠시 만나 의논했으면 하는 일이 있으니 스케줄 확인해서 연락 부탁하네.]
오늘의 첫 번째 문자는 뜻밖에도 허세직이 보낸 것이었다.
“회장님. 저는 본부장님 지시로 그룹발전본부로 바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래에 회장님 전용차와 비서실 직원들이 대기 중이라는 말씀도 있으셨습니다.”
“그래?”
“예.”
저놈의 눈에 왜 갑자기 생기가 돌지?
천중명은 무언가 숨기는 듯한 곽대출을 향해 눈을 갸름하게 떴다.
“혹시 오늘 그 매니저라는 직원 면접이 있나?”
“예? 아, 예. 그건 안 부장이 따로 보고했습니다.”
허선영과 송순주가 무슨 일인가 하고 보는 앞이었다.
천중명은 느긋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출발해. 나도 어차피 그리 갈 것 같으니까 이따 사무실에서 보면 되겠지.”
“예, 그럼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곽대출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뒤에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곽 이사.”
“예, 회장님.”
천중명은 곽대출을 불렀다.
“이따가 주인영 매니저 면접 끝나면 보내지 말고 꼭 내게 연락해줘. 시간 되면 나도 한 번 보게.”
곽대출의 눈이 흔들렸다.
‘꼭 그럴 필요 없잖아.’
‘어제 네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잊었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천중명은 곽대출의 시선을 외면했다.
“얼른 가 봐.”
“네, 회장님.”
불안한 표정으로 곽대출이 빌라를 먼저 나섰다.
“선영 씨. 미안한데 나 커피 한 잔 줄 수 있어?”
“그럼요. 내가 맛있는 원두 준비했는데 그거로 해도 괜찮아요?”
“힘들지 않나?”
“그게 뭐가 힘들어요? 정말 드실 거죠?”
허선영이 기쁜 얼굴로 차를 준비하는 동안, 송순주는 또 적당히 방으로 들어갔다.
“유학 다녀왔다고 했었지? 전공은 뭐였어?”
“시각디자인이요.”
원두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허선영이 건넨 답이었다.
주방에서 홈바를 향해 진한 커피 냄새가 훅 달려들었다.
예쁜 잔에 커피를 따른 허선영이 몸을 돌려 홈바 위로 잔을 올려놓았다.
“드셔 보세요.”
“고마워.”
천중명은 허선영이 만든 커피를 조심스럽게 마셨다.
좋은 원두라더니 쓴맛이 무척 강했다.
“맛있네.”
“그렇죠?”
“그러게. 진짜 좋은데?”
천중명은 잔을 코 아래에 대고 향을 맡은 뒤에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이번엔 좀 더 많이 마셨고, 그만큼 많이 썼다.
그러나 지금 허선영이 곰의 쓸개를 타줘도 천중명은 눈 끝 하나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일을 해보면 어때?”
“내가요?”
“응. 전에 지경디자인이라고 그룹에서 사용하는 포장지를 제작하는 회사를 관리했었거든. 다른 건 모르겠는데 경쟁이 없어서 그런지 내가 봐도 디자인이 좀 떨어져.”
허선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보기에 지경은 오히려 그룹 CI가 굉장히 세련됐고, 상품 포장이나 박스도 무척 실용적이었는데 중명 씨는 아니었어요?”
이번엔 천중명이 오히려 고개를 갸웃했다.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그런가? 솔직히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거든. 선영 씨가 디자인 쪽의 일을 도와주면 어떨까? 내 의도가 디자인 측면에서 어떤 느낌인지를 솔직하게 말해주었으면 싶은데.”
충분히 관심 가는 눈빛이었다.
“경력이 없어서 지금껏 일하던 분들께 누가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면서도 허선영은 마음에 걸리는 점을 말해주었다.
“그건 좀 알아볼게. 일단 생각은 있는 거지?”
“기회가 된다면 저야 오히려 감사하죠.”
취직과 관련한 의논은 일단락되었다.
“아버님이 문자를 하셨어. 의논할 게 있어서 잠시 봤으면 한다고.”
천중명은 허세직이 보낸 문자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 오전 8시가 안 된 시간이었다.
“놀랄 것 없어. 상황이 많이 바뀌어서 아버님도 선영 씨와 어머니에게 함부로 강요하지 못할 거야. 나 믿지?”
슬쩍 시선을 들었던 허선영이 안쓰럽게 웃었다.
“만나 뵙게 되든, 통화를 하든, 저녁에 말해줄게. 이제 이런 일에 불안해하지 마.”
“고마워요.”
꼭 다문 입술을 움직여 허선영이 미소를 그려냈다.
“가볼게.”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천중명이 일어서자 송순주가 바로 나왔다.
TV를 본다고 해놓고는 출근할 때 인사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을 그녀가 웃겨서 천중명은 가볍게 웃었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셋이서 함께 움직였다.
이제 빌라를 나서면 천상기, 강승애와 싸워야 하고, 그룹 임원들의 인사기록을 살펴야 하며, 그 외에 산더미처럼 달려들 일들을 감당해야 한다.
“다녀오겠습니다. 갔다 올게.”
웃는 낯으로 인사를 마친 천중명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유가 있을 거다.
미래나 과거가 보이는 이유, 이렇게 회장이 된 이유 말이다.
그 특별한 이유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세상에 없던 꼴통 재벌이 될 때까지 달릴 참이었다.
때앵.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나오셨습니까?”
세 명의 직원이 천중명을 향해 상체를 깊게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