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064. 믿을 사람은 너밖에 없다 (2)
화면이 또렷해지면서 가장 먼저 블라인드로 완전히 가려놓은 창이 보였다.
윤만석은 그 창에서 멀찍이 떨어진 의자에 꽁꽁 묶여 있었다. 그가 묶인 의자 아래로 넓게 깔린 비닐을 보는 순간, 천중명은 급하게 강승애를 바라보았다.
“하마터면 속을 뻔했던 거지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기역자로 구부러진 벽에 처박히듯 묶인 윤만석을 강승애가 야비하게 노려보았다.
기껏 윤만석을 꼬드겨 데려가 놓고 지금 뭐하는 거지?
비닐을 깔아놓은 이유가 정말 바닥에 피 묻는 것을 막으려는 거 맞아?
천중명이 상황을 이해하려 애쓸 때였다.
“지난번 일 때문이라면 제가 그만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왜 이러시는지 말씀을 하셔야 알지 않겠습니까?”
“총수님이 깨어나신 것을 보고 줄곧 생각해 봤어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약이었거든요. 그러고 보니까….”
옆에 서 있는 남자 두 명을 돌아본 강승애가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총수님의 세 가지 숨겨둔 카드가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윤 실장이었다는 사실을 내가 뒤늦게 깨달은 거죠. 그렇지 않나요, 윤 실장?”
뭐야?
윤 실장이 강승애에게 갔던 게 다 쇼였다는 거야?
천중명은 얼른 윤만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는 시키시는 대로 했습니다. 약효가 떨어진 것이 제 잘못은 아니었고, 달라시던 정보도 모두 구해드렸습니다.”
강승애가 코로 웃었다.
“윤 실장을 따르던 특수 부대 출신의 팀원들은 어디 있지요?”
강승애가 던진 질문에 윤만석은 답을 하지 못했다.
“오늘이 마지막 테스트였어요. 이렇게 함부로 데려왔는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네요? 그럼 다르게 질문해 보죠. 왜 내게 온 건가요?”
“제 답은 늘 같습니다. 이사장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강승애가 웃었다.
“내가 급한 틈을 파고든 것은 아니고요? 총수님이 뭔가를 지시했겠죠? 나를 어찌하라든가 뭐 그런 거요?”
윤만석은 대꾸가 없었다.
“총수님께 충성하는 거 좋아요. 그런데 내가 일어서고 나면 윤 실장님은 팔다리가 없어져요. 내가 말했었죠? 종놈의 배신은 늘 몸에 남는 교훈으로 가르친다는 거요.”
윤만석은 묵직한 눈으로 강승애의 옆에 있는 두 명의 남자를 볼뿐 여전히 말이 없었다.
“각오가 되셨나 보네?”
강승애가 돌이킬 수 없는 독기를 피워냈다.
어떤 답을 내놓던 윤만석은 끔찍한 꼴을 면치 못한다는 의미처럼 보였다.
“얼마나 잘 견딜지는 조금 뒤에 보죠. 그 전에 우리 윤 실장을 애타게 그리워하던 분이 있거든요. 윤 실장에게는 고통스러운 만남이 될지도 몰라요.”
말을 마친 강승애가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지시였던 모양이었다.
고개를 숙여 보인 놈이 창 앞쪽에 있는 내실의 문을 열었고, 천상기의 건물 앞에서 보았던 깡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놈, 두 놈, 세 놈, 그리고 네 번째는 휠체어를 탄 천상기였다.
“윤 실장? 이게 얼마 만입니까?”
야비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천상기가 윤만석을 향해 웃었다.
강승애의 옆자리로 휠체어를 밀어준 깡패들이 천상기의 뒤에 병풍처럼 선 다음이었다.
“내 뒤를 파서 그걸 망나니에게 넘기셨겠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흐! 흐히히! 급하니까 우리 윤 실장 같은 분도 모른다고 하시네? 총수님 옆에 오래 있더니 이제 정치인 흉내도 내시나?”
상황은 잘 모른다.
윤만석이 쇼를 한 건지, 강승애와 천상기가 오해를 한 건지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조금 뒤에 윤만석은 최소한 손목이나 발목이 잘릴 거고, 더 나쁜 경우에는 눈알이 뽑힐 거라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았다.
천중명은 장소가 어디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책상이나 벽, 문에 시선을 집중했다.
“내가 당신 때문에 무릎이 이렇게 되고도 말 한마디 못했어. 그때 다짐한 게 있지. 비겁하게 망나니에게 붙은 당신의 혀를 자르고 눈알을 파내겠다고.”
뒤에 선 깡패들을 둘러본 천상기가 만족한 미소를 그리며 윤만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느 쪽을 먼저 하실지 선택권을 드리지. 눈알? 혀? 아니면 손목이나 발목? 아! 안심하세요. 여기 이 친구들이 전부 전문가들이라 절대 죽지는 않을 테니까.”
어디지? 뭐 주소 나온 거 없어?
그 흔한 배달 전단이라도 하나 보이라고!
화면의 장소를 둘러보던 천중명은 섬뜩한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만약 이 장면이 과거에 있었던 일이라면 윤만석은 이미 끔찍한 몰골로 어디엔가 던져져 있을 게 분명했다.
이제 그만 보여줘!
최소한 천상기나 강승애에게 전화라도 하게 해달라고!
아무리 애썼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선택을 못 하시겠어? 무서워? 그럴 걸 왜 내 뒷조사를 해서 망나니에게 넘겨?”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아이, 씨발! 진짜 그럼 안 되는 거예요, 윤 실장님. 총수님을 모셨던 분답게 당당하게 눈알입니다, 이렇게 답을 해야지.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읍시다.”
천상기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인간처럼 보였다.
“원본 어디 있어요? 그것도 모른다고 하실 거야? 호텔! 호텔 CCTV 영상 원본! 그거 어디 있냐고!”
윤만석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지 않았다.
“좋아….”
천상기가 말을 뱉어낼 때였다.
갑자기 그의 말끝이 길게 늘어지며 어둠이 천중명을 감쌌다.
어둠은 숨을 막듯 천중명의 몸통을 조이며 달려들었다.
그것도 잠시, 어둠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바람에 밀려나는 안개처럼 한순간에 사라졌다.
한순간, 차창 밖으로 듬직하게 서 있는 종합 운동장이 눈에 들어왔다.
‘윤 실장!’
천중명은 급하게 옆에 두었던 휴대전화기를 들었다.
가장 먼저 번호를 누른 것은 천상기였다.
두루루룩. 두루루룩. 두루루룩.
‘받아봐, 이 개자식아!’
- 지금은 고객의 사정으로….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러는 사이 윤만석의 몸뚱이가 잘리고 있을지 모른다.
급하게 종료버튼을 누른 천중명은 다시 황성규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 황성규입니다.
답은 바로 있었다.
“황 선생님. 질문하지 말고 지금 당장 윤만석 실장의 위치를 알아봐 주세요. 보기에 오피스텔이나 사무실 건물 같습니다. 강승애! 천상기가 함께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급합니다! 모든 걸 동원해서 무조건 찾아주세요!”
- 예, 회장님. 연락드리겠습니다.
운전하던 직원이 놀라 룸미러로 뒤를 살필 때였다.
승용차는 이미 탄천 옆의 도로를 달리고 있어서 바로 앞에 빌라가 보였다.
천중명은 곧장 곽대출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어디야?”
- 빌라에 거의 도착했습니다.
어쩐지 맥이 빠진 음성이었다.
“나도 빌라 앞이거든. 급해. 서둘러!”
- 예, 회장님.
통화를 마치기 무섭게 승용차가 빌라로 들어섰다.
운전석에서 내린 직원이 뒷좌석으로 오는 것을 보면서도 천중명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밖에 차가 와 있나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그럼 비서실로 가 있어요. 나는 이곳에서 곽 이사 만나서 움직일 테니까.”
“수행 규칙에 따라 대기하겠습니다.”
직원은 난처함을 가득 담은 얼굴이었다.
자칫 규정을 지키지 못했다며 문책을 받아도 이 직원은 항의조차 할 곳이 없었다.
“알았어요. 일단 규정대로 하세요.”
공손하게 인사한 직원이 정문을 빠져나가는 사이, 천중명은 다시 휴대전화기를 들어서 천상기의 번호를 눌렀다.
두루루룩. 두루루룩. 두루루룩.
“받아라. 받아. 지금 받으면 내가 한쪽 무릎은 남겨준다. 그러니까 일단 전화를 받으라고.”
간절한 천중명의 바람과 달리 천상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종료버튼을 누른 직후였다.
끼이이익!
빌라의 정문을 향해 거칠게 들어서는 중형 승용차가 보였다.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곽대출이었다.
천천히 열리는 정문을 파고들 듯 몰아댄 곽대출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운전석에서 내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주변을 살핀 천중명은 곽대출을 향해 입을 열었다.
“대출아. 어둠 속에서 또 장면을 보았는데….”
급하게 전했다.
상황이 상황이라 대강 어떤 일이었는지만 빠르게 간추렸다.
“윤 실장에게 전화해 봤어?”
“아!”
사람이 멍해지니까 생각이 짧아진 모양이었다.
천중명은 바로 윤만석의 번호를 눌렀다.
물론 천상기에 이어 윤만석의 벨까지 연달아 울리면 저쪽에서 더 몸을 사릴 위험은 있었다.
그렇다고 이미 벌어진 일을 멈출 인간들도 아니어서 전화를 해보는 것이 맞았다.
“아니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사람의 팔다리를 자르는 인간들이 있지?”
엄지손가락으로 눈알을 파내려던 놈이 할 말은 아니었다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도 아니었다.
방법이 정말 없나?
경찰에 신고해?
고민하는 천중명에게 곽대출이 담배를 내밀었다.
“황 선생이 알아본다고 했다며? 좀만 기다려 보자.”
그래도 이놈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찰칵.
“후.”
둘이서 담배에 불을 붙인 뒤에 두어 모금쯤 피웠다.
빌라의 주차장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 올라가면 축하한다는 그 짧은 문자 보내려고 몇 번이나 망설였을 허선영이 있었다.
그걸 못 보고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니.
‘천상기. 너는 진짜 뒈진다!’
담배를 입에 문 천중명은 습관처럼 곽대출을 보았다.
하필이면 이런 때 독종이라는 놈이 몸살 걸린 살쾡이처럼 기운 빠진 얼굴이지?
천중명이 왜 그러냐며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이었다.
지이잉. 지이잉.
휴대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 회장님. 윤만석 실장을 찾았습니다.
“어디에요?”
곽대출이 험악한 인상으로 궁금함을 이겨내는 앞이었다.
- 자택에 있었습니다.
늦었구나!
그냥 집에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황성규의 답을 듣는 순간, 확신처럼 천중명의 가슴 한쪽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 왼쪽 눈과 오른쪽 손목, 오른쪽 발목을 잃었습니다. 함께 있는 대원들 말로는 오늘을 지나봐야 알겠지만, 생명을 잃을 수준은 아니라는 답입니다.
사람을 어떻게 그런 식으로….
치미는 분노를 누르기 위해 천중명은 있는 대로 이를 악물었다.
“황 선생님. 윤 실장을 방지병원으로 옮기라고 전해주세요. 나도 지금 곽 이사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 윤 실장이 병원을 거부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정도 상처면 병원은 의무적으로 신고하게 돼 있습니다.
“방지병원은 신고 없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일단 그리로 옮기도록 해주세요.”
- 알겠습니다,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설명을 기다리는 곽대출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왼쪽 눈과 오른쪽 손목, 발목을 잃었단다.”
“이 씨발….”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깡패도 아니었고, 설사 조직원이라고 해도 눈알을 파내고, 손목과 발목을 자르는 것은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다.
“병원으로 가자.”
타고 왔던 승용차로 움직이려던 곽대출이 주춤하며 시선을 주었다.
“내 차로 가. 얼른 와.”
“키!”
천중명은 손을 내민 곽대출에게 키를 넘겨주었다.
“뒤로 타셔, 회장님! 밖에서 직원들 본다니까!”
나직하게 으르렁대는 곽대출의 말에 내키지 않는 뒷좌석에 앉았고, 그렇게 둘이서 빌라 정문을 나섰다.
병원에서 회장이 된 탓일까?
핑곗김에 허선영도 보고, 잠시라도 곽대출과 둘이서 킬킬거리고 싶었던 천중명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병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원장님. 천중명입니다.”
- 아! 현찰 손님! 이번엔 어디를 다쳤습니까?
정말이지 사람 속 긁는 거 하나는 이 양반이 우주 최강이지 싶었다.
“환자가 그리 출발했습니다. 왼쪽 눈, 오른쪽 손목과 발목을 잃었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한 15분이면 도착할 거구요.”
- 봉합 수술은요?
환자의 상태를 들은 유헌우의 음성이 단박에 달라져 있었다.
“못 들었어요. 하여간 바로 도착할 테니까 부탁드립니다.”
- 일단 오세요. 그리고 환자 쪽에도 최대한 서두르라고 해주세요. 필요하면 구급차를 보내드릴 수도 있습니다.
“예.”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날씨 쓸데없이 진짜 좋다.”
천중명의 혼잣말에 곽대출은 대꾸가 없었다.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윤 실장의 상태를 확인한 뒤에 이야기하자.
서운하더라도 그때까지만 있어.
알았지? 이 꼴통아.
천중명은 곽대출의 뒤통수를 보며 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