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063. 믿을 사람은 너밖에 없다 (1)
미친개의 이빨 사이로 흘러내리는 침처럼 장만섭의 표정과 태도에서 사명감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믿을 사람은 너밖에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탁한다.”
똑바로 마주 선 상태에서 천중명이 건넨 당부가 화근이었다.
“목이 잘리든, 팔다리가 찢기든, 회장님과 사모님을 지켜내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이놈이 혹시 천호득의 목을 자르거나 팔다리를 뜯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장만섭은 광기에 사로잡힌 눈빛으로 답을 내놓았다.
목소리나 작은가?
그의 표정과 음성에 기획실장과 비서실장, 그리고 법무팀장은 아예 몸서리를 치는 상황이었다.
천중명은 휠체어에 앉아 고개를 저어대는 천호득을 향해 걸었다.
“지금은 우직한 게 낫습니다.”
“우직하게 김밥을 처먹겠지.”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서 천중명이 몸을 일으켰고, 비서실 직원이 휠체어를 밀었다.
“잠깐.”
천호득은 그런 직원을 멈춰 세웠다.
“너는 언제 집에 들를 거야? 평창동?”
무슨 뜻인지 몰라 천중명이 고개를 갸웃한 직후였다.
“다 함께 밥이라도 먹어야지.”
설명이 귀찮은 사람처럼 천호득이 말을 툭 뱉어냈다.
한 번이라도 더 천중명을 보고 싶은 욕심이 얼굴에 다 드러났는데도 천호득은 그걸 고집스러운 태도에 감추려 애쓰고 있었다.
“며칠 내로 들르겠습니다. 만나는 사람과 함께 가도 되지요?”
“뭐?”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기사까지 났는데 한번은 보셔야죠.”
“그거야 알아서 해라.”
천호득이 시선을 돌리자 휠체어가 움직였고, 장만섭이 대통령을 경호하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 곁을 따랐다.
“저희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법무팀장과 기획실장, 비서실장이 인사와 함께 병실을 나서면서 넓은 병실에 천중명과 유진교 둘만 남았다.
“일정이 어떻게 되십니까?”
“괜찮으시면 유 전무님, 아니 본부장님과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는데 일 있으면 먼저 움직이세요.”
“제가 그걸 마다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럼 제가 두 시간 정도만 모시겠습니다.”
앞선 유진교를 따라 천중명은 병실을 나섰다.
병실 밖이 한적할 줄 알았다.
그런데 복도에 여전히 대기했던 비서실 직원들이 천중명을 따라 함께 움직였다.
“회장님을 수행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불편하시겠지만, 비서실 직원들의 업무라고 이해해 주셨으면 싶습니다.”
천중명은 그렇구나 하는 얼굴로 직원들을 돌아보았다.
몸이 날래 보이는 직원 셋에 평범한 움직임의 남자 직원, 여직원 한 명이 정장 차림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제 차로 이동하시면 어떻겠습니까? 혹시 모르니 회장님의 차를 함께 움직이게 하겠습니다.”
“곽 부장이 가지고 가지 않았나요?”
“사모님을 모시는 일에는 평창동 관리 차량을 따로 배정해서 곽 부장은 그 차를 이용했습니다.”
몇 번인지도 모를 만큼 많은 인사를 받으며 현관을 나서자 유진교의 국산 대형 승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뒷좌석 문을 여는 것부터 타고 나서 닫아주는 것까지 비서실 직원이 다 하는 바람에 천중명은 아예 손을 쓸 일이 없었다.
“양평에 있는 갤러리로 가줘.”
“예, 전무님.”
유진교의 지시에 마흔 후반의 직원이 차를 움직였다.
움직이는 차를 향해 현관 앞의 직원들이 인사했고, 병원의 정문을 통과할 때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직원들이 쭉 서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한순간에 거만해지기 쉬운 환경이었다.
이런 거 못 하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회장이 된 첫날이고, 언젠가 지경디자인에 갔을 때 그곳의 경비직원을 곤란하게 했던 일이 떠올라 천중명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서경그룹의 양 회장님과 총수님의 관계가 별로 좋지 않은가 보죠?”
“서로 지기 싫어하셔서 그렇습니다.”
병원을 빠져나와 올림픽 도로를 타고 양평 방향으로 들어설 때까지 천중명과 유진교는 그저 그런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도착까지 35분 걸렸을 정도로 유진교가 말한 갤러리는 양평의 초입에 있었다.
1층의 전면을 유리로 만들어놓은 2층 건물이었다.
시원하게 내부가 들여다보는 구조도 그렇거니와 잔디 위로 놓인 파라솔과 탁자를 보면 레스토랑이나 커피전문점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차에서 내린 천중명은 1층의 거실 유리 앞에서 잘 관리된 파란 잔디와 하늘을 돌아보았다.
“처음이십니까?”
하마터면 ‘아니요.’라고 대답할 뻔했다.
이전에 천중명이 이곳에 왔었는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답하면 안 되는 건데 말이다.
“밖에 있어도 되죠? 바람도 좋고, 담배도 하나 피우고 싶어서요.”
천중명은 엉뚱한 대꾸로 질문을 피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유진교가 눈짓을 하자 직원 둘이 움직여 파라솔 아래의 테이블에 재떨이를 놓아주었고, 바로 이어서 커피를 가져왔다.
“총수님은 홍차를 즐기시지만, 이곳은 역시 커피입니다.”
“그러네요.”
담배에 불을 붙인 천중명은 느긋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시작하나 싶었던 봄이 벌써 여름에 등을 밀리는 느낌이었다.
“취임식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경건설을 정리해야 하는 문제도 있고, 큰형의 상을 치룬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취임식을 하는 것도 남부끄러우니까 당분간은 비상체제로 갔으면 싶습니다. 취임식은 그 문제들이 해결된 뒤로 하지요.”
그렇게 시작한 대화는 주로 행사나 처우에 관한 천중명의 생각을 묻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얼추 궁금했던 내용을 다 물어본 느낌이었는데 끝내 유진교는 지경건설에 관한 질문을 꺼내지는 않았다.
유진교가 커피를 마시는 사이 천중명은 잔디와 화창한 하늘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재벌, 돈 많은 거, 참 좋다.
이런 공간을 관리하면서 언제고 혼자만의 시간이나 혹은 조용한 대화를 나누고 싶을 때 사용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런 것들에 만족하지 못하면 천상기처럼 되겠지?
엉뚱한 생각에 천중명이 입가를 움직여 웃었을 때였다.
지이잉.
천중명의 휴대전화기가 울렸다.
[지시하셨던 자료를 모두 준비했습니다.]
황성규가 보내온 문자였다.
“이제 어디로 가실 예정입니까?”
“특별한 일 없으면 집에 있을 생각입니다. 곽 부장, 아, 참! 곽 이사 올 때까지 알아볼 것도 있고요.”
“그럼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제 차를 가져왔는데 그럴 필요가 뭐 있어요? 편안하게 움직이세요. 일이 많잖습니까?”
“감사합니다.”
유진교의 깍듯한 답에 천중명은 가벼운 미소로 답했다.
**
평창동에 이은명이 들어선 다음이었다.
서둘러 돌아서는 곽대출에게 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
“곽대출 이사님. 저는 이제부터 이사님을 모실 비서실 안신우 부장입니다.”
명함을 건네받은 곽대출은 눈만 껌벅였다.
“곽 이사님 아래로 세 명의 직원이 배정됩니다. 제가 부장 직급이기 때문에 과장, 대리 순으로 직원을 선발할 예정입니다. 혹시 생각해 둔 직원이 있으십니까?”
대강 말귀는 알아들었다.
“이사들마다 이런 식으로 직원을 배당받나요?”
“대개는 맡은 업무에 따리 팀을 구성하기 때문에 따로 배정하는 일은 드문 경우입니다. 아무래도 회장님 직속 조직이어서 좀 더 배려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안신우는 와이셔츠와 넥타이가 잘 어울리는 전형적인 사무직 엘리트의 느낌이었다.
“없으시면 제가 복수로 선발해서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다른 회사에서 데려와도 됩니까?”
“스카우트를 하시겠다면 별도의 결재가 필요합니다.”
“그게 지경백화점에 근무하는 직원인데요.”
잠시 갸웃했던 안신우가 바로 입을 열었다.
“말씀해 주시면 인사과를 통해 조율해 보겠습니다.”
“주인영 매니저라고, 지경백화점 VIP 담당이었습니다.”
안신우는 휴대전화기를 꺼내 곽대출이 불러준 이름과 직급을 확인했다.
“만약 본인이 거부하면 굳이 강요하지는 마세요.”
“예, 이사님. 그렇지만 신임 회장님이 만드신 직속 조직을 거부할 직원은 아마 없을 겁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안 부장님이라고 하셨죠? 그건 안 부장님이 알아서 처리하세요.”
“그럼 본부 구성 때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평창동의 주택 앞에서 이야기를 마친 안신우가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몸을 돌렸다.
세상 참, 곽대출이 출세해서 지경그룹의 비서실 직원을 부리는 날이 다 온다.
많이 배운 티가 저렇게 나는 사람을 말이다.
좋은 대학 나왔을 거다.
유학을 다녀왔을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더라도 영어쯤 곽대출이 봉지 커피 타듯이 쉽게 지껄이는 수준일 수도 있었다.
직원을 추천하라니까 덜컥 백화점 매니저를 골랐다.
매니저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안신우가 어떻게 생각했을까 싶어서였다.
공연히 천중명의 얼굴에 먹칠을 한 건 아닐까?
운전석 앞에 선 곽대출은 고개를 돌려 이은명이 들어간 평창동 저택을 돌아보았다.
너는 여기까지야!
지금까지는 몰라도 이제부터는 배운 사람이나 일할 수 있는 시기가 온 거라고!
조용하게 떠나줘라, 괜히 회장님이 된 천중명에게 달라붙어서 망신이나 주지 말고.
저택이 곽대출을 향해 그렇게 충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좋은 대학 나왔을 안신우는 곽대출을 어떻게 판단했을까?
“후.”
숨을 내뱉은 곽대출은 운전석에 올라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 회장님 기사나 해야 하는 건데 괜히 우쭐대는 건가?”
유식하기 짝이 없는 붕어 앞에서 기가 팍 죽은 가물치처럼 곽대출은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그러고 보니 UDU 출신이라는 것 하나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는 곽대출과 달리 윤만석과 황성규는 또 미국 정보기관 출신이었다.
“자식 앞길 망치는 못난 아버지 꼴이네.”
평창동 골목을 내려와 큰 도로 앞의 신호를 기다리며 곽대출은 혼잣말을 뱉었다.
법복 입은 아들을 보았으면 됐다.
막일꾼 아버지가 법원에 가서 돕겠다고 설쳐봐야 주변 사람들에게 재판관인 아들 망신 주는 꼴밖에 더 되겠나.
빵! 빠앙!
뒤차의 클랙슨 소리에 정신을 차린 곽대출은 얼른 차를 움직였다.
보고서를 쓸 줄 아나, 컴퓨터를 잘 다루나.
그동안 내내 가슴 속에 있던 주인영을 덜컥 불러달라고 했지만, 정작 그녀가 곽대출의 무식함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조차 못 했었다.
솔직히 천중명을 모시는 이사 자리가 있다면 곽대출보다는 안신우가 백배는 더 적합한 인물이었다.
“사람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거지.”
곽대출은 유리 앞에 펼쳐진 하늘을 보며 픽 웃었다.
“송충이는 솔잎!”
그리고 그는 뜬금없는 말을 뱉어냈다.
**
양평에서 삼성동 빌라로 향하는 차 안이었다.
늘 타고 다니던 독일제 승용차의 뒷좌석에서 천중명은 황성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 황성규입니다. 회장님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그런 말도 하세요?”
- 제가 인간미가 부족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넉넉한 대꾸에 천중명은 기분 좋게 웃었다.
깍듯하게 바뀐 유진교의 태도보다 황성규의 이런 편안함이 훨씬 좋았다. 그러면서 속을 보일 수 있는 곽대출과 함께 움직이는 길이었으면 싶었다.
“지금 삼성동 빌라로 향하는 길입니다.”
- 근처에 가서 전화 드릴까요?
“그러시죠. 대략 40분 정도 걸릴 테니까 넉넉하게 한 시간 뒤에 연락 주세요.”
- 그때 뵙겠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문자가 엄청나게 들어오고 있었다.
지경디자인의 고상득 상무가 보낸 장문의 축하 문자도 있었고, 지경화장품, 냉동창고의 임원들까지 얼굴을 보았던 이들 모두 문자를 보내왔다.
[회장님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덕분에 큰돈도 받았습니다. 저는 회장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앞으로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손도운 개발자의 문자도 읽었다.
문자를 넘기던 천중명의 시선에 허선영이란 이름이 들어왔다.
뭐라고 보냈을까?
메일을 선택한 다음이었다.
[축하드려요.]
맥 빠질 정도로 간단한 문자였는데 천중명은 히죽 웃었다.
그 뒤에 하트 모양이 달려 있어서였다.
이 간단한 문자와 하트를 보내기 위해 허선영은 몇 번이고 지웠다 썼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결국 하트를 보내주었다.
사람이 이런 그림 하나에 이토록 행복해질 수도 있나 보다.
삼성동 빌라로 가는 길이다.
어차피 보게 된다.
그런데 좀 더 빨리 보았으면 싶었다.
휴대전화기를 내려놓은 천중명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꿈만 같았다.
어쩌다 꾸는 아주아주 긴 꿈 말이다.
이러다 잠에서 깨어나면 어떨까?
다른 건 아쉬울 게 없었는데 허선영이 딱 걸렸다.
보고 싶어서 분명 끙끙댈 텐데.
이렇게 하나둘 놓지 못하는 것들이 생기면 결국 돌아가는 것이 두려울 때도 올 거다.
천중명이 창밖에 펼쳐진 미사리의 풍경으로 시선을 돌릴 때였다.
먹구름이 몰려드는 것처럼 주변이 온통 어둠에 둘러싸였다.
또 뭔데? 도대체 왜 이러는데?
천중명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어둠의 중간이 뿌옇게 밝아지며 물을 뿌린 것처럼 흐릿한 화면이 펼쳐졌다.
윤 실장? 당신이 왜?
천중명은 어둠 속에 펼쳐진 장면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