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062. 제가 책임져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고 (2)
곽대출은 마른침을 삼키며 올라온 감정을 추슬렀다.
해준 것 별로 없다.
저렇게 총수가 돼서 유진교와 기획실장, 비서실장의 인사를 받는 천중명에게 크게 도움 준 것도 없었다.
그런데 사람이 참.
고생, 고생해서 키운 자식이 멋진 법복 입고 재판정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는 막일꾼 노인네처럼 자꾸만 감정이 올라왔다.
‘멋지다, 중명아.’
속으로 축하를 전하던 곽대출은 재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총수님이다. 총수님!
그러자 어쩐지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멀리 떠난 것 같은 아쉬운 감정이 드는 것도….
그때였다.
천중명이 고개를 돌려 곽대출을 보았다.
그리고 정말이지 듬직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고맙다, 대출아.’
그의 눈이 의미하는 바를 못 알아먹을 곽대출이 아니다.
잊지 않고 전해준 미소에 눈물이 왈칵 나올 정도로 고마운 곽대출을 천중명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그래?’
‘아니야. 워낙 멋있어서.’
‘미친놈.’
곽대출은 울컥 올라왔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한마디 해야지?”
천중명을 따라서 곽대출을 보았던 천호득이 기대에 찬 얼굴로 건넨 권유였다.
“유 전무님.”
“예, 총수님.”
천중명은 확실히 깍듯해진 유진교를 보며 눈으로 웃었다.
“우리 그룹에 총수님은 한 분뿐이십니다. 제가 아버지를 모시는 동안, 제 마음이 변하지 않는 한, 저는 공석이든 사석이든 회장으로 불러주세요.”
멈칫했던 유진교가 “예, 회장님”하고 답했다.
“기획실, 비서실, 홍보실을 총괄하는 본부를 하나 만들어주세요. 앞으로 제 지시는 새로 만드는 본부를 통해 전달할 예정이고, 본부장은 사장급으로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런 것까지 생각해 뒀던 거야, 하는 눈으로 천호득이 바라보는 앞이었다.
“초대 본부장으로 유진교 전무님을 임명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천호득의 뒷모습을 향해 시선을 돌리느라 잠시 멈칫했던 유진교가 시선을 들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쪽에 저기 곽 부장을 이사급으로 발령 내 주세요. 장만섭, 저 친구도 적당한 직급으로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천중명의 지시는 계속 이어졌다.
“주식회사 지경, 계열사의 대표이사와 상무급 이상 임원의 사직서를 모두 받아주세요. 앞에 계신 기획실장님과 비서실장님은 제외하겠습니다.”
유진교가 뜨끔한 얼굴로 바라보았을 때였다.
“지시 도중에 미안하다만, 하나만 묻자. 받으려면 다 받아야지 여기 두 사람은 왜 제외해?”
궁금함을 이기지 못한 모양으로 천호득이 질문을 던졌다.
“법무팀장님이야 서류를 위해 부르셨다 하더라도 기획실장과 비서실장을 굳이 부르신 건 다른 의미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뢰한다는 뜻 아니셨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두 분은 존중하라는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존중하는 분들이라면 예우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다른 임원들은?”
천호득은 답을 듣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보였다.
“이제부터 저분들과 함께 의논해서 결정할 생각입니다. 임원의 입장에서 내리는 평가가 아버지의 판단과 다를 수 있으니까요.”
웃음을 참는 듯이 입술에 힘을 주었던 천호득이 상체를 뒤로 돌려서는 유진교를 보았다.
“들었지? 신임 회장이 한 말?”
“예, 총수님.”
“으헤헤헤헤헤!”
그는 느닷없이 경망스럽게 느껴지는 웃음을 터트렸다.
“흐하하하하하!”
웃음은 곧바로 통쾌하게 바뀌었다.
지이잉. 지이잉.
그리고 그런 웃음을 뚫고 두 개의 진동음이 들렸다.
기획실장과 비서실장이 동시에 손목을 움직여 문자를 확인했다.
“오늘의 아침이란 매체에 신임 회장님과 허선영 양의 데이트 관련 기사가 올라왔다는 보고입니다. 재벌 3세의 의심스러운 마약 데이트라는 타이틀을 사용했습니다.”
보고는 기획실장이 했다.
이건 또 어떻게 할 거냐는 투로 천호득이 시선을 주었다.
“실장님.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대응으로 어떤 방법이 있습니까?”
천호득이 아까와는 반대로 상체를 돌려 기획실장을 바라본 직후였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신뢰해 주신 만큼 확실하게 처리해 보고 드리겠습니다.”
기획실장이 다부지게 답을 했고,
“그럼 이 기사는 실장님께 맡기겠습니다.”
천중명이 기획실장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흐헤헤헤헤헤!”
뭐가 좋은 건지 천호득은 또다시 경망스럽기 그지없는 웃음을 쏟아냈다.
**
곽대출이 삼성동 빌라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가 거의 다 된 시간이었다.
“모시러 왔습니다.”
혼자 온 게 아니라 처음 보는 세 명의 직원과 함께 왔다.
“어떻게 됐어요?”
“오전에 대표이사 취임 승낙서에 사인하셨습니다.”
이은명이 안도의 숨을 가볍게 내쉴 때, 허선영과 송순주는 두 손을 입 앞에 대며 복잡한 심정을 감추려 애썼다.
“잠시만 시간을 줄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사모님.”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건지 곽대출은 점잖은 음성과 그에 걸맞은 태도를 갖추고 있었다.
이미 투피스 정장으로 준비를 마쳤던 이은명이 허선영의 앞으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허선영의 두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잘 부탁한다.”
“네, 어머님.”
“그럼 못 써.”
“네?”
송순주까지 무슨 일이지 할 때였다.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면 어떻게 친해지겠니. 그냥 엄마라고 불러줘.”
“예? 제가 어떻게…?”
“그렇게 부를 수 있게 내가 더 잘할게. 알았지?”
이렇게까지 말하는 앞에서 또 무슨 토를 달겠나.
“예.”
허선영의 답이 있었다.
고운 미소로 허선영을 다독여준 이은명이 이번엔 송순주를 향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외롭게 지내서였던지 고작 며칠 사이에 이은명은 혼자 떠나기가 너무나도 아쉬운 얼굴이었다.
**
요즘 가장 뜨는 언론이었던 ‘오늘의 아침’은 누군가 사무실을 거꾸로 들어서는 있는 대로 흔든 뒤에 다시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야, 이 새끼야! 너는 선임이라는 새끼가 뭘 어떻게 했길래 이런 일이 벌어져!”
편집국장 전국조의 고함이 유리 칸막이로 만든 그의 방을 터트릴 것처럼 터져 나왔다.
“이 미친년 어디 있냐고!”
“아직 안 돌아왔습니다. 전화도 안 받고요.”
“기자증에 잉크도 안 마른 년이!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요강을 닦아서 찬장에 집어넣어도 유분수지!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할 거냐고!”
고함만이 아니었다.
와장창!
분을 못 참은 전국조는 양손으로 책상을 쓸다시피 해서 위에 있는 것들을 사무실 바닥에 패대기쳤다.
유리로 된 칸막이였다.
“여기까지 오는 데 7년 걸렸어! 7년!”
모니터, 노트북, 그 외에 자질구레한 비품들이 고개를 떨군 현충기의 발 앞에서 비참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우리 1년 예산의 절반이 지경에서 내려준 광고라는 걸 몰라?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렇지! 딱 봐도 다음 실세인 양반의 기사를 그따위 삼류소설로 덜컥 올려버리면 뒷수습을 어떻게 하라는 거야! 어!”
“천중명 신임 회장과 제가 일면식이 있습니….”
“야, 이 새끼야! 기사를 내려달라는 요청이나 항의가 아니라 아예 광고를 전부 취소했다니까! 전무님과 내가 찾아뵙겠다는데, 법적 검토가 끝나고 보자고 했을 정도로 독이 올랐어! 독이!”
현충기가 고개를 모로 틀고는 이를 악물었다.
“아니꼬워? 그래?”
“아닙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한 건지 화가 치밀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미친년을 빨리 찾아서 데려와! 만약 지경 법무팀이 나서서 명예훼손으로 소송이라도 거는 날이면 알 권리 어쩌고 해서 승소한다고 해도 우리 회사는 문 닫아야 돼!”
“예.”
얼마나 고함을 질렀는지 전국조의 목소리가 쩍쩍 갈라져서 나왔다.
“아! 이, 씨…! 신임 회장 홍보 기사로 언론사 전체가 꿀 빠는데 우리는 올해 광고가 다 취소됐어! 지경이 나서서 포털 메인 기사 권리까지 빼버리면 너랑 나랑 또 막노동판 헤매면서 이거 유지해야 돼! 여기 어떤 놈도 다른 언론사 못 들어간다고!”
현충기도 익히 짐작하는 일이었다.
지경그룹이 ‘오늘의 아침’ 소속 기자를 배제하겠다고 압박하면 다른 언론사에 재취직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뭐 종편이 데려갈 정도로 인지도를 쌓은 기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나가! 가서 그년 잡아와! 돈 때문만이 아니잖아! 어디서 햇병아리 같은 년이 소설을 휘갈겨? 휘갈기길! 사장님과 전무님이 달려가셨으니까 너랑 나는 그년 머리채를 잡고 가서라도 사과해봐야 할 것 아냐!”
“예.”
현충기가 몸을 돌리자 지켜보던 동료들이 얼른 전화기를 들거나 모니터에 고개를 처박았다.
홍보실이 신임 회장을 위해 이렇게까지 독기 있게 달려든다고?
그룹 전체가 나서서 ‘오늘의 아침’을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양?
현충기는 그때 보았던 천중명의 얼굴을 떠올렸다.
눈매가 매섭다고 생각만 했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본처의 자식들을 밀쳐내고 그것도 가장 막내인 천중명이 그룹을 물려받다니?
“젠장!”
휴대전화기를 들어서 서수미의 번호를 누른 현충기가 욕을 뱉어냈다.
이런 날은 원래 꿀 빠는 기사 하나 멋지게 쓴 뒤에 다 같이 회식으로 하루를 마감해야 했다. 게다가 천중명과 안면이 있는 현충기였다. 그런데도 광고 잘린 수습을 위해 뛰자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
기사를 접한 강승애의 분노는 사람들이 짐작하는 선을 월등히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강요하기 남사스러워 넘어가고는 있지만, 괘씸한 지경건설 직원들은 아직도 그녀를 ‘이사장’이라 불렀다.
그뿐이랴.
“이혼, 사별을 하게 된 며느리는 재벌가의 범위에서 제외됩니다. 비서실의 관리를 받고, 절대 경영에 나서서는 안 되며, 통제를 벗어날 때부터 관리 대상이 아닙니다.”
내심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아들인 윤만석의 말에 어찌나 자존심이 상했던지, 죽여 버리고 싶은 욕구가 싸구려 냉장고 안쪽의 성에처럼 두껍게 피어나 있었다.
터보 라이터의 불꽃처럼 파랗게 독이 오른 강승애는 주체하지 못하는 분노를 뿜어내며 모니터에 집중했다.
[지경그룹의 세대교체.]
[3세 경영 신호탄 지경건설이 쏘았다.]
[젊게 출발하는 지경그룹]
제목은 또 왜 이렇게 유치하고 닭살 돋는 수준인지.
[주인 없는 지경건설의 미래, 새로운 회장에게 달렸다.]
이를 깨물던 강승애는 마침내 휴대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찾았다.
- 여보세요?
천상기는 여유만만인 음성이었다.
“나예요.”
- 결심이 서셨습니까?
야비하긴 해도 천상기와는 뜻이 참 잘 통했다.
“주식을 넘기죠. 대신 자금을 마련해 주는 것 외에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어요.”
- 더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어서요.
엉뚱하게 잠자리를 요구한다는 말로 알아들은 것도 억울할 판에 거절까지 당하자 강승애는 아예 너덜너덜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추슬러야 한다.
“윤만석 실장이 내게 와 있어요. 아무래도 총수님이 지시에 따라 나를 속인 것 같은데 적당한 처벌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기억에 눈을 파내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마음이 바뀌었나요?”
- 흠.
천상기는 신음 같은 짧은 숨소리만 전했다.
“신임 총수가 무서워 숨죽이는 거면 그만두고요.”
- 윤 실장에게 속은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확실히 천상기는 만만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다시 손을 잡는 마당인데 서로 아픈 곳 자꾸 건드려서 좋을 건 없겠지요. 알았어요. 주식은 어떻게 넘겨드려요?”
- 차명 계좌는 제가 지정해 주는 증권 계좌로 이관시키고, 특수 관계인과 대주주 지분으로 지정된 물량은 계좌 설정을 하면 됩니다.
“알았어요. 업무를 볼 직원을 보내세요.”
그나마 일 이야기가 정리된 다음이었다.
- 윤 실장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전혀 관심 없을 것 같던 미끼를 천상기가 슬쩍 건드렸다.
- 우리끼리 약점 잡는 일이 없었으면 싶으니 윤 실장의 일은 만나서 의논하시지요.
어쩐지 끈적거리는 듯한 천상기의 말에 강승애는 고개를 돌렸다.
회장실의 창에 비친 강승애는 아직 나쁘지 않은 몸이었다.
“어디서 볼까요? 다른 곳에서 만나면 신임 총수의 눈에 띌 텐데요?”
- 제가 연락드리지요.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윤만석을 던져주면서 천상기가 빠져나가지 못할 약점을 손에 넣는다.
강승애는 모처럼 만족한 듯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