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061. 제가 책임져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고 (1)
유진교는 8시 정각에 병실에 들어섰다.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그의 인상이 약속을 지키려는 강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싶었는데 정작 그는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곽대출이 장만섭과 함께 들어와 식사 준비를 도왔다.
그 바람에 열린 문으로 응접실 안쪽이 보였는데 천중명과 천호득은 동시에 웃고 말았다.
너끈히 열 줄 넘게 쌓아두었던 김밥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서였다.
냉장고에 넣어두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기운 넘치는 장만섭의 표정을 봐서는 아무래도 짐작한 것이 맞지 싶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저렇게 먹어봤으면 싶구나.”
텅 빈 테이블을 향해 혼잣말을 꺼냈던 천호득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말이 그렇다는 거야! 말이!”
“예, 총수님.”
확인처럼 건넨 타박을 장만섭이 특유의 음성으로 받았다.
아침은 조식용 도시락이었다.
비싸 보이는 찬합에 정갈하게 담긴 음식을 천호득이 채 반도 먹지 못하고 젓가락을 놓았다.
“거, 달달한 커피 좀 타 와라.”
“예, 총수님.”
장만섭이 도시락을 들고 응접실로 들어간 다음이었다.
“기획실장과 비서실장, 그리고 법무팀장에게 9시까지 도착하라고 전해놓았습니다. 발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물을 머금고 있는 천호득에게 유진교가 질문을 던졌다.
“시끄럽게 할 필요 있나? 큰놈을 잃고 급격하게 나빠진 내 건강 문제 때문에 업무 공백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하지.”
“알겠습니다.”
유진교가 답을 한 직후였다.
“당분간 인터뷰는 없는 것으로 해. 그리고 오늘 발표와 동시에 전에 허세직 의원과 함께했었던 기사들 전부 내리라고 지시하고.”
“그 기사들은 지난번 마약 사건 때 이미 삭제했습니다.”
천호득이 지시를 내렸고, 한 걸음 앞서 일을 처리해 놓은 유진교의 답이 있었다.
“그나마 자네가 있으니 일이 돌긴 돌았던 모양이구만.”
천호득이 탄식처럼 말을 하고는 버릇처럼 입술을 삐죽일 때였다.
장만섭이 쟁반을 들고 들어와 봉지 커피 석 잔을 간이 테이블에 놓아주었다.
“저 덩치 큰 놈에게도 여직원 한 명 붙여줘. 우직한 놈을 휘어잡을 정도로 강단도 있고, 또 센스 있는 아이로.”
이번엔 천중명을 향한 지시였다.
“허세직 의원과 손을 잡았던 일이 발목을 잡을지 모른다. 기자들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나머지는 여기 유 전무의 도움을 받고.”
“예.”
뭔가 더 전해줄 말이 없는지를 찾는 사람처럼 천호득은 급해 보였다.
“어디 가실 생각이세요?”
“내가? 가긴 어딜 가?”
“서두르시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저녁에도 뵐 거고, 전화도 있고, 부르시면 바로 찾아뵈면 되니까 여유 있게 생각하세요. 당장 제가 총수란 생각 안 할 겁니다. 아버지께서 정한 방향대로 천천히 움직이겠습니다.”
뜻밖이었던 모양이었다.
천중명을 바라보는 천호득의 눈빛은 그런 느낌이었다.
“여유 부릴 틈이 있어? 당장 오늘도 강승애 그년과 둘째가 주식을 사들이느라 지경건설의 주가가 오를 텐데? 건설을 먹으면 전자가 달려간다는 것을 알잖아?”
“아버지가 계획하신 대로 할 테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뭐?”
분통을 터트리려던 천호득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딱 때리면 아마 이런 표정이 나오겠지 싶었다.
“급하게 총수를 넘겨주시는 이유를 생각해봤습니다. 전면에 나서기 곤란하셨을 것 같고, 다음으로 이번 싸움이 끝나면 아버지의 위력이 더 공고해져서 나중에 임원들을 정리하기가 어려울 거고요.”
눈동자만 움직여 유진교를 본 천호득이 얼른 시선을 가져왔다.
“제가 계획했던 것을 한눈에 알아보셨던 분이 이사장과 형을 막을 방법도 생각해두지 않은 채 총수자리를 넘길 리는 없을 테니까, 오늘 일도 그 계획의 연장선에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계속, 계속해 봐.”
“제가 하는 걸 지켜보시다가 결정적인 잘못이 있다면 그때 바로잡으실 생각인데 성격 때문에 쉽게 물러나기 어려우실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천중명의 설명이 끝나는 순간에 천호득의 눈과 입술 끝에 숨기지 못한 웃음이 피어났다.
“잘할 수 있겠어?”
“최선을 다할 겁니다. 혹시 정규직 채용처럼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말씀하셨던 제가 책임져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고 해보겠습니다.”
“임원들은?”
“냉동창고 보셨잖습니까?”
“흐흐. 흐하하. 흐하하하하!”
느닷없는 웃음이 얼마나 컸던지 응접실에 있던 곽대출과 장만섭이 급하게 문을 열어봤을 정도였다.
“봤어? 유 전무? 내 아들 중에 이런 놈이 있어! 으하하! 서경그룹의 양진우가 그렇게 내 앞에서 자식 자랑을 해댔는데 그 모자란 놈들 전부를 데려다 놔도 안 될 것 같은 아들! 흐하하하하!”
이럴 때 정말 신기했다.
언론이나 방송에서만 보던 서경그룹도 그렇지만, 총수 양진우란 이름을 옆 동네 아저씨처럼 부르는 환경이라는 것이 말이다.
**
오지은의 친구인 서수미 기자는 마침내 제대로 한 건 해냈다는 뿌듯한 감정을 안은 채 노트북에 매달렸다.
그냥 얻은 거 아니다.
선배 사진기자들에게 온갖 아양 떨어가며 매달렸고, 아침과 밤마다 삼성동 천중명의 빌라 앞에서 버틴 끝에 잡아낸 특종이었다.
기사까지 멋지게 작성했다.
나가기만 해도 틀림없이 조회 수가 폭발할 거라 확신한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 기사를 돋보이게 할 짜릿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보는 순간 클릭할 수밖에 없는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제목, 궁금해서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런 제목이 필요했다.
‘재벌 3세와 허세직 의원의 숨겨진 딸’
이런 밋밋한 건 안 된다.
모니터를 노려보며 고민하던 서수미는 마우스를 움직여 화면에 사진을 띄워놓았다.
한강공원의 조명 아래에서 천중명이 허선영을 조심스럽게 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달각.
사진이 바뀌었다.
이번엔 손을 잡고 걸어가는 두 사람의 앞모습이었다.
허선영을 향해 고개를 돌린 천중명의 얼굴을 보며 서수미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이건 누가 봐도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오지은의 행실이야 누구보다 서수미 본인이 잘 안다.
마음에 드는 남자를 보면 어떡해서든 잠자리로 꼬드겨 막 준다고 해서 대학 시절의 별명조차 ‘막지은’이었다.
마음에 드는 남자만 품었나?
저보다 예쁘거나 인기 있는 여학생의 남자도 늘 막지은의 타깃이었다.
그러니 오지은의 말만 듣고 천중명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천중명과 허선영에게 사진을 보여준 뒤에 인터뷰를 요청해?
이미 결혼을 약속한 두 사람이 밤에 손잡고 걸은 게 문제 될 리도 없을뿐더러, 그들이 마약을 했다고 진술하지 않는 한, 이 기사는 그저 그런 관심끌기용밖에 되지 않는다.
“아, 몰라! 기자가 기사를 쓰는 게 당연한 거지!”
서수미는 허세직 의원의 아들인 허광렬의 기사에서 경험했던 클릭수와 댓글을 떠올리며 양심을 슬쩍 내려놓았다.
데스크의 칭찬은 말할 것도 없고, 임원들이 달려와 서수미를 다독여주었으며, 금일봉까지 받았다.
그리고 추가로 얻은 것이 ‘선등록 후보고’ 특권이었다.
데스크에 보고하느라 특종을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기사를 먼저 올리고 나중에 보고해도 되는 권리를 가진 기자가 바로 서수미였다.
이번 기사까지 연달아 터트리면 서수미는 이 바닥에서 일약 스타로 떠오르고 종편의 스카우트 명단에 오를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오지은에게 받았던 돈값도 해낸 꼴이었다.
‘재벌 3세의 의심스러운 마약 데이트’
마지막까지 마약이라는 타이틀이 걸렸다.
의심스러운 정황이라고 해야 허세직의 아들 허광렬이 마약을 했고, 허선영이 그 집에 함께 살았었다는 것뿐이었다.
서수미는 왼손에 턱을 걸치고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달랑 데이트만 했다는, 그저 그런 수준의 기사라면 데스크에 보고해야 하고 돈이 되질 않는다.
어쩌면 퇴짜를 맞을 수도 있었다.
‘허세직의 숨겨진 딸, 심야에 재벌 3세와 마약 데이트?’
제목을 수정한 서수미가 작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삼성동 빌라에서 함께 지낼 이유가 없잖아? 숨겨줄 이유는 더더욱 없는 거고?”
천중명과 허선영이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는 것은 안다.
그 기사를 쓴 사람이 선배 기자인 현충기였다.
엄지와 검지를 입술에 대고 망설이던 서수미가 마우스를 잡았다.
[기사 올림]
그리고는 화면 오른쪽 아래의 기사를 올리는 칸에 화살표를 움직였고,
달각.
왼쪽 버튼을 눌렀다.
[이 기사는 데스크를 거치지 않습니다. 작성된 기사를 올리시겠습니까?]
마른침을 삼킨 서수미가 오른손 검지를 움직였다.
달각.
그녀가 마우스 버튼을 누르고 3초쯤 지난 다음이었다.
[요청하신 기사가 등록되었습니다.]
마침내 기사가 등록되었다는 문구가 화면 중앙에 올라왔다.
“후.”
의자의 등받이에 털썩 등을 던진 서수미는 짧은 숨을 토해냈다.
**
출근한 김순례와의 의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시만 하셔도 되는 걸 이렇게 의논까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모시겠습니다.”
내용을 듣기 무섭게 김순례가 내놓은 답이었다.
“그럼 준비 부탁할게요.”
“네, 사모님.”
의논을 마치고 난 이은명은 그 길로 송순주의 방을 찾았다.
“들어오세요. 저는 나가 있겠습니다.”
“그러잖아도 부를 참이었는데, 급한 일 없으면 잠시 함께 있을 수 있겠니?”
“네.”
몸을 일으킨 허선영을 이은명이 다독여 자리에 앉혔다.
“짐작하셨겠지만, 오늘 제가 평창동으로 옮겨갈 것 같아요. 밖에 김순례 씨도 함께 가게 되어서 그 점을 말씀드리려고 들어왔어요.”
송순주에게 말을 건넨 이은명이 고개를 돌려 허선영을 보았다. 그리고는 당황하는 허선영을 향해 미소 지었다.
“어려운 부탁이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허선영이 답을 한 직후였다.
“어젯밤에 둘이 나갔다가 들어온 걸 보면 네게는 이미 말한 모양이지?”
송순주를 한 번 바라보았던 허선영이 부끄러운 얼굴로 “네.” 하는 답을 내놓았다.
“중명이가 오늘 그룹 총수자리에 앉는 모양이다. 그것도 들었니?”
“네.”
송순주가 바라보는 앞이었다.
“결혼을 했다가도 헤어지는 세상이니 이런 말을 하는 게 염치없다만, 네가 중명이와 만나는 동안만이라도 가끔은 나도 좀 만나 줄 수 있겠니?”
“네?”
당황한 허선영을 향해 이은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총수가 되면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달려들 거야. 중명이 모르게 너를 찾아서 헐뜯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생길 테고, 또는 조건이 어쩌니 하며 상처 주는 사람들도 있을 거다.”
“네.”
고개를 떨구는 허선영의 손을 이은명이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닌 일들로 견디기 어려울 때면 꼭 나를 찾아주렴. 그래 줄 수 있겠니?”
입술을 모은 허선영이 시선을 든 다음이었다.
“그룹이 성장하려면 정권의 집안도 필요하고, 때론 같은 재벌의 집안과 묶일 필요도 있다고 들었다. 그런 결혼은 당연히 행복하기 어렵지. 나를 보면 알잖니?”
“아니에요.”
“아침에 출근하는 중명이의 눈이 답을 주더구나. 혹여 두 사람이 다투거나 헤어지기로 했다면 모를까, 내가 말했던 어려움에 견디기 어렵다면 꼭 내게 와다오. 알았지?”
“네.”
공손하게 답하는 허선영의 손을 이은명이 꼭 잡았다.
“이제부터 정말 힘들 거야. 대신 네가 중명이와 함께 하는 동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편이 되어 주마.”
마지막으로 허선영의 어깨에 손을 올려 가볍게 안아 준 이은명이 상체를 세웠다.
“염치없는 말을 했습니다.”
“이 아이를 이렇게 예뻐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송순주와 조심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난 뒤에야 이은명은 몸을 일으켰다.
**
법무팀장은 아예 서류를 준비해 병실을 방문했다.
기획실장, 비서실장, 법무팀장에 수행원들까지 인원이 제법 돼서 천중명은 천호득과 함께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대표이사 취임 승낙서입니다. 이곳에 사인하시면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법무팀장이 고가의 만년필과 함께 서류를 천중명의 앞으로 내밀었다.
주식회사 지경의 대표이사 취임 승낙서라는 이름 아래 취임을 승낙한다는 몇 줄의 문장이 전부인 서류였다.
어쩐 일인지 비서실장과 기획실장, 그리고 유진교까지 천호득의 뒤에 서 있었고, 분위기에 눌린 곽대출과 장만섭이 문 앞에 서서 바라보는 앞이었다.
천중명은 서류를 천천히 읽어본 뒤에 천호득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천호득이 분명하게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류에 이름을 적은 천중명이 상체를 세웠을 때였다.
유진교와 비서실장, 기획실장이 천중명을 향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