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060. 이게 말이 안 되는 상황이긴 한데 (2)
6시가 되기도 전에 일어난 천중명과 곽대출이 무색하게 이미 아침 준비가 끝나 있었다.
여자 세 명이 준비하고 기다린 식사다.
뻘줌할 만도 하련만 세수도 안 하고 달려드는 곽대출은 반갑고 기쁜 얼굴이었다.
‘잘 잤어요?’
허선영과 눈을 마주친 천중명은 홈바에 연결된 식탁에 앉았다.
“같이 드세요.”
“먼저 들어. 우리는 나중에 편하게 먹는 게 좋아.”
이은명이 여자들을 대신해 나섰다.
남자가 잘나고, 여자가 못나서 따로 먹는 것이 아니라 아직 곽대출과 함께 식사하기 어색한데다, 이은명과 송순주 역시 편한 포지션은 아니어서 천중명은 잠자코 식탁에 앉았다.
푸짐한 아침상이었다.
다른 사람이 차려 준 밥이지, 음식 맛있지, 앞에서 곽대출이 쉴 새 없이 퍼 넣지, 깔끔하게 밥을 세 그릇씩이나 비우고 일어섰는데도 15분이 채 안 걸렸다.
“많이 바쁘니? 식사가 왜 그렇게 급해?”
“곽 부장이 빨리 먹으니까 이상하게 따라가네요.”
누명을 뒤집어쓴 충신의 눈빛을 한 곽대출이,
“잘 먹었습니다. 그럼 저는 준비하겠습니다, 대표님.”
하고는 욕실로 움직였다.
“어머니. 씻고 나와서 의논드릴 게 있는데요.”
“그래. 그럼 준비해서 나와.”
이은명과 짧은 대화를 나눈 천중명은 샤워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빈 그릇들을 싱크대로 옮기고 있어서 허선영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허선영과 함께 있는 것이 또 설렘으로 천중명에게 다가왔다.
씻고, 깔끔하게 차려입고, 거실로 나왔을 때는 커피가 준비되어 있었다.
“식사 안 하세요?”
“출근한 다음에 천천히 먹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려던 말이 뭐니?”
“서재에서 말씀드리는 게 좋겠어요.”
송순주와 허선영을 돌아본 이은명이 다른 말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서재의 책상 앞에 앉은 천중명은 맞은편의 이은명에게 천호득과의 일을 전해주었다.
“굳이 오늘 퇴원하겠다고 고집을 피우시니까 저도 더는 못 말리겠었어요.”
이은명은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라고 하지만, 정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모습이 천중명에게는 객관적인 시선을 다가왔다.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이 세월에 다져진 인상이었고, 허선영이 커다란 눈처럼 선이 분명한 미인이라면 이은명은 둥글둥글하고 포근한 느낌의 미모였다.
“아버지 고집을 누가 꺾겠니?”
이은명이 어쩌겠냐는 투로 씁쓸하게 웃으며 꺼낸 대꾸였다.
“네 생각이 그래? 엄마가 가서 살펴드렸으면 좋겠어?”
“어머니 판단대로 하시는 게 좋겠어요. 아버지랑 분명 연락하셨던 것 같은데 두 분 모두 따로 말씀을 안 하시니 그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은명의 질문에 천중명은 생각하던 말을 꺼냈다.
“용인에서의 생활도 있고, 어머니가 판단하셔서 아버지와 남은 시간을 함께 지내고 싶으면 가시고, 그게 아니라면 그냥 여기 계세요.”
“아버지가 위험하다면서?”
“예. 그래서 어머니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인데 그게 어머니를 불행하게 하는 일이라면 가시지 않았으면 싶은 겁니다.”
천중명이 생각을 전한 다음이었다.
“너는 아버지를 꼭 빼닮았구나.”
오래된 세월의 중간쯤을 불쑥 끄집어낸 얼굴로 이은명이 말을 건넸다.
“아버지도 그러셨어. 듣는 사람의 감정보다는 현실이 중요했지. 그렇게 냉정할 때는 한없이 냉정한데 또 느닷없이 따듯하게 다가와서 흔들고. 선영이에게는 그러지 마.”
뜬금없는 과거 이야기로 시작해 느닷없는 당부로 끝났다.
“좋은 아이더라. 세월이 그 아이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모른다만, 그게 너 하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
천중명은 그저 가볍게 웃기만 했다.
“그래서 네가 오늘 지경그룹의 총수가 되는 거라고?”
“예, 그렇게 됐어요.”
“그럼 엄마가 평창동으로 들어갈게. 김순례 씨도 함께 갈 수 있는 거지?”
“이따가 오면 물어보세요. 의사만 있다면 나머지는 비서실을 통해서 처리하면 될 겁니다. 정말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거 괜찮으시겠어요?”
일어서는 이은명을 따라 몸을 일으킨 천중명이 던진 질문이었다.
“큰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은명은 또다시 뜬금없는 이야기로 천중명의 말을 받았다.
“돌아가시기 전에 그분이 내게 부탁했었어. 불쌍한 분이라고, 가정이 뭔지, 따듯한 품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어서 그게 너무 안쓰럽다고.”
천호득의 첫 번째 부인이 이은명과 이런 이야기를 나눴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돈과 일에 잡혀 먹혀서 인생을 팔아버린 사람이니까 말년에 누구도 남아있기 어려울 거다. 그러니 혹여 늙고 병들어서 외롭게 있거든 돌봐달라고 하셨어. 그럼 날 용서하시겠다고.”
아픈 추억을 감추려는 것처럼 이은명이 애잔한 미소를 그려냈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표정을 얼른 바꾸었다.
“언제 출발하면 되니?”
“병원에 가보고 시간 결정되면 차를 보내드리든가 할게요.”
“그래. 그럼 김순례 씨 오면 물어보고 답을 전해줄게.”
“예.”
이야기가 끝났다.
천중명이 문으로 걸어가려 할 때였다.
“너, 그런 버릇 못 써.”
이은명이 뜻밖의 타박을 건넸다.
“아무리 오랜만에 만났다지만 엄마를 낯선 사람 대하듯 하는 거. 이리와.”
거부하기 곤란하게 다가온 이은명이 천중명을 안았다.
“보고 싶었다.”
팔을 축 늘어트리고 서 있는 것이 어색해서 형식적으로 이은명을 안았다.
어머니의 품?
늘 그리던 것이었는데 생각만큼 진한 감동이나 뭉클한 뭔가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런 것까지 아버지하고 똑같니?”
이은명이 웃으며 몸을 뗐고, 그 길에 문을 향해 움직였다.
아버지와 똑같다는 말을 두 번이나 들었다.
나이 들어 천호득처럼 된다고?
천중명은 고개를 저으며 방을 나섰다.
**
강승애는 표독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윤만석을 노려보았다.
지경건설 회장실 소파의 상석에 앉은 그녀는 왼편의 긴 소파에 앉은 윤만석을 향해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윤 실장님.”
“예, 이사장님.”
호칭부터가!
아직도 이사장이야, 아직도!
강승애의 눈이 더욱 악랄해진 느낌으로 빛났다.
“총수님을 얼마나 모셨죠?”
“정확하게 27년이었습니다.”
“그럼 잘 알겠네요. 불과 10년 전까지 주인을 함부로 대했던 가솔들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요?”
윤만석은 덤덤하게 눈을 껌벅였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총수님의 비자금 계좌를 알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걸 왜 말하지 않은 거죠?”
“묻지 않으셨습니다.”
질문에 곧바로 나온 답이었다.
강승애는 입 끝을 뒤틀며 뾰족하게 찌르는 듯한 미소를 그려냈다.
“지난 27년간 재벌가를 위해 일한 윤 실장이 주인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건가요?”
대꾸가 없는 윤만석이 강승애는 더욱 미운 눈치였다.
“뭘 더 숨기고 있죠? 아니, 그보다는 왜 내게 온 거죠? 혹시 총수님이 시킨 일인가요?”
“이사장님께서 제게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러니까요. 왜 내내 연락이 안 되던 윤 실장의 번호가 그때 우리 직원들 손에 들어오고, 또 내가 전화하기 무섭게 답을 주셨을까요?”
“제가 불편하시다면 그만두겠습니다.”
윤만석이 답을 건넨 다음이었다.
“아까 말했었죠? 주인을 함부로 대했던 가솔들이 어떻게 됐는지요?”
강승애가 던진 말이 윤만석의 어딘가를 찌른 느낌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표정이 그렇게 보였다.
“이사장님. 손목이나 발목을 자르던 일은 재벌가에서 직원들을 종으로 생각했던 때의 일입니다. 그나마 군부독재 시절 이후로….”
“그 뒤에는 아예 입을 못 열게 좀 더 독한 방법을 썼지요.”
“흐음.”
강승애가 들을 정도로 윤만석의 숨소리는 깊었다.
“명심해요. 지금은 내가 당신 주인이에요.”
“저는 직원으로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껏 일부러 피하던 시선을 든 윤만석이 강승애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직원으로 이사장님께 왔던 것이지, 종으로 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총수님은요? 그분을 위해 일할 때도 그런 생각이었어요?”
“오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총수님은 분명 재벌이시지만, 이사장님은 재벌이 아니시잖습니까?”
강승애의 입꼬리가 부르르 떨렸다.
“감히? 내가 지경그룹의 첫 번째….”
“이혼, 사별을 하게 된 며느리는 재벌가의 범위에서 제외됩니다. 비서실의 관리를 받고, 절대 경영에 나서서는 안 되며, 통제를 벗어날 때부터 관리 대상이 아닙니다.”
분노를 참지 못한 강승애의 거친 숨소리가 붉어진 얼굴만큼이나 살벌하게 소파 주변을 맴돌았다.
마주쳤던 시선은 윤만석이 먼저 돌렸다.
“받은 돈을 돌려드리고 저는 그만 일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사장님.”
자리에서 일어난 윤만석이 고개를 짧게 숙여 보이고는 회장실을 나섰다.
“끝까지 이사장….”
강승애의 눈에 무서울 정도로 파랗게 독이 피어올라 있었다.
**
곽대출과 함께 병실에 들어선 건 오전 7시와 8시의 중간쯤이었는데 천호득은 이미 평상복 차림이었다.
“벌써 준비하셨어요?”
“밥은?”
“먹었습니다. 아침 어떻게 하셨습니까?”
천중명의 질문에 천호득은 기도 안 찬다는 고갯짓으로 응접실이 있는 옆방을 가리켰다.
이 양반이 못마땅해 하는 것들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싶었는데, 무슨 일인지 알아나 보자는 심정으로 천중명은 응접실로 움직였다.
곽대출과 함께 문을 열고 응접실 안을 들여다본 천중명은 천호득을 흉내 내듯 기가 막힌 웃음을 그려내고 말았다.
이 시간에 저걸 어떻게 구했을까?
테이블 위에 피라미드를 연상시킬 정도로 많은 김밥이 쌓여 있고, 그 앞에 장만섭이 우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너는 정신이 있는 놈이야, 없는 놈이야?”
응접실 안으로 들어간 곽대출이 당장에라도 프랑켄슈타인의 목줄을 물어뜯을 것처럼 으르렁거려서 다른 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어디서 샀어?”
“병원 앞에 24시간 하는 가게가 있습니다.”
“총수님이 그걸 원하셨어?”
“문을 연 가게도 없고, 아침이라 다른 것보다 밥을 드셔야 할 것 같아서 준비했습니다.”
천호득도 빤히 들을 정도로 우렁우렁한 장만섭의 답이 있고 난 다음이었다.
“저놈은 모자라! 모자란 놈이야!”
아니나 다를까, 천호득의 타박이 쏟아졌고, 그만큼 프랑켄슈타인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아침 안 먹었지? 얼른 먹어. 총수님은 알아서 준비할 테니까.”
“예, 대표님.”
곽대출을 향해 적당히 하라는 눈짓을 준 천중명은 문을 닫은 뒤에 몸을 돌렸다.
침대 옆의 1인용 소파에 앉은 천호득은 확실히 기력이 달리는 얼굴이었다.
“병원에서 아침을 준비했을 테니까 그걸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놔둬. 유 전무가 8시까지 준비해 오기로 했어.”
다른 사람 아닌 유진교였다.
그가 8시 정각에 식사를 준비해서 병실에 들어설 거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어머니가 평창동에 가시겠답니다. 김순례 씨는 출근한 뒤에 의논해서 답을 주겠다고 하고요.”
“그깟 일에 무슨 의논을 해? 그냥 일하는 장소를 옮기라면 되는 거지.”
“이왕이면 기쁜 마음으로 일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천호득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천중명을 노려보았다.
“일하는 사람은 일하는 수준에 맞게 대해. 고개를 숙이는 것이 반드시 잘하는 일은 아니다. 하나를 주면 둘을 얻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야.”
“조심하겠습니다.”
답을 내놓은 천중명을 천호득이 삐뚜름하게 보았다.
“오늘은 왜 그리 고분고분해?”
“배워야 할 것을 알려주신 거니까요.”
“말은?”
“유 전무 오면 비서실에 연락해서 차를 보내라고 하겠습니다. 어머니가 움직일 교통편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럴 거면 저기 밖에 덩치 큰 놈을 보내.”
천호득이 건넨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
누구도 함부로 믿지 말라는 뜻이었고, 방심하는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조언이기도 했다.
“그럼 곽 부장을 보내겠습니다. 장만섭은 반드시 아버지 곁에 있어야 합니다. 드시는 것부터 지켜야 할 것을 저렇게 챙겨드릴 친구도 별로 없습니다.”
“저놈은 지경그룹의 총수였던 나를 굶겨 죽일 놈이야.”
웃겨서 그런지, 기가 막혀 그런 건지, 말을 던진 천호득이 응접실 쪽을 보고는 픽 웃었다.
“총수가 될 마음의 준비는 됐어?”
“생각만 많았습니다.”
“변호사가 도장 찍는 거 보다가 대표이사직을 수락한다는 증서에 사인만 하면 끝나는 일에 생각할 게 뭐 있어.”
말은 진짜 쉽다.
“총수는 지경이란 세상의 왕이다. 그룹을 둘러싼 모든 것이 적이라고 생각하며 행동해. 충신, 간신, 모리배, 역적들이 바글바글하고, 그 안에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사는 직원들이 있어.”
천호득이 나직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지경은 번성할 수도, 망해서 사라질 수도 있다. 오늘부터 지경이란 왕국이 어떤 모습을 보이든, 그 책임은 오로지 총수인 너의 몫이다.”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천호득의 말에는 거부하지 못할 위엄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