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059. 이게 말이 안 되는 상황이긴 한데 (1)
자정이 지난 것을 아는 놈들처럼 바람은 아까보다 훨씬 차갑게 달려들었다.
자는 이들을 깨울까 싶어 거실에 있던 차림으로 나온 길이어서 허선영을 위한 점퍼를 가져다줄까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모처럼 나선 둘만의 시간과 분위기를 망칠 것만 같았다.
허선영은 확실히 추운 기색이었다.
빌라를 나선 천중명은 재킷을 벗어 허선영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아프잖아요? 난 괜찮아요.”
“종일 바빠서 그랬는지 난 오히려 시원해.”
도로를 건넌 천중명은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탄천을 흐르는 물이 저 앞쪽 강의 품을 향하고, 천호득과 앉았었던 건너편 벤치에는 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포개져 있었다.
천중명은 천천히 강과 합류하는 지점을 향해 걸었다.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었어요.”
올림픽대로에서 울리는 자동차 소리를 배경으로 허선영이 말을 꺼냈다.
“집에 돌아오라는 걸 거절했어요. 오빠도 일단 집으로 돌아온 모양이에요.”
장례를 치르느라 근 닷새 이상을 돌아보지 못했으니 그 안에 일이 많았을 거다.
“용인 어머님이 오셨으니 엄마와 나는 다른 곳으로 옮길까 해요. 사실 급하게 들어와서 염치없이 오래 있었어요.”
허선영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우선 피하라는 의미에서 왔던 빌라에 앞으로도 계속 함께 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총수님이 내일 주식회사 지경의 대표이사로 임명하겠대.”
엉뚱한 대꾸에 허선영이 고개를 돌렸다.
“그룹의 총수가 된다는 의미야. 당장은 거부하기 어려운 상황이고.”
축하를 바라지는 않았다.
“잘됐어요. 중명 씨는 잘할 거예요.”
그런데 허선영은 어쩐지 아쉬운 얼굴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어머니께 평창동으로 가 주실 수 있는지 여쭤볼 생각이거든.”
그 뒤로 천중명은 병원에서 천호득과 있었던 대화를 간단하게 들려주었다. 천천히 걷는다고 걸었는데도 벌써 머리 위에 종합운동장으로 향하는 작은 다리가 있었다.
“저쪽까지 좀 더 걸어도 돼?”
“네.”
크게 휘는 산책로를 따라 방향을 틀면 왼쪽 위로는 올림픽대로가 있고, 오른쪽은 강이었다.
차가 다닐 수 없는 길이라 한적했다.
“무슨 걱정 있어?”
“아니요.”
“뭔데 말을 못해? 혹시 돈 문제가 더 남았어?”
“그런 거 아니에요.”
허선영은 고개까지 저으며 아니라고 답을 주었다.
이렇게 돌아가서 잠자리에 들면 또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빌라를 나서게 된다.
“잠깐만.”
산책로의 중간에서 천중명은 허선영을 불러 세웠다.
가로등의 불빛이 산책 도중 멈춰선 천중명과 허선영을 황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 당신에게 강요처럼 결혼할 사이라고 발표했던 게 아무 의미가 없어질 정도로.”
허선영은 각오한 얼굴이었다.
어떤 말이라도 받아들이겠다는 것처럼 고개까지 끄덕였는데 이상하게 그 모습이 천중명은 서운했다.
입술 앞쯤에 있는 허선영의 이마와 그 아래의 눈을 바라보며 천중명은 나직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우리 이야기도 제대로 못 나눠봤고, 엉뚱하게 결혼할 사이라고 발표해서 지금 이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이긴 한데, 괜찮다면, 혹시 그래도 된다면, 내가 진심으로 당신을 대해도 될까?”
커다란 눈이 가로등 아래에서 끔벅이는 걸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놀라고 당황한 데다, 기쁨과 이해하기 어려운 슬픔이 온통 뒤섞인 허선영의 빛나는 눈을 말이다.
“안 돼? 아무래도 내 옛날 모습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아?”
“그런 거 아니에요.”
허선영이 손을 들어 입과 코를 감싸는 동작으로 감정을 추슬렀다.
“지난 며칠 동안 내가 중명 씨에게 아무런 도움도 못 주면서 이렇게 빌라에 있으니까 그게 많이 미안했구요. 거기에….”
말을 잇기 위해 필요한 숨을 들이마시는 것처럼 허선영은 잠시 틈을 주었다.
“우리 엄마나 용인 어머님을 보면서 그런 생각 했어요. 사랑했어도 방법이 잘못되면 저렇게 아프게 살아야 하는데 내가 중명 씨에게 필요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요.”
말을 건넨 허선영이 천중명을 올려다보았다.
“나 있잖아요. 우리 엄마처럼, 용인 어머니처럼, 중명 씨가 다른 사람하고 그러는 거, 못 견딜 것 같아요. 그렇게 태어난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정말 뻔뻔하다는 건 알지만…, 미안해요.”
어렵게 말을 마친 허선영의 시선이 발아래로 떨어졌다.
“지금껏 세상에 없는 재벌이 돼보고 싶었어. 지경화장품과 냉동창고, 지경디자인의 직원들을 모두 정규직으로 바꾼 것도 그런 때문이고.”
“네.”
“적어도 시간을 좀 주면 안 될까? 내가 변했다는 것을 당신이 인정할 시간쯤? 재벌이 돼도 한 사람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이 확신할 시간.”
머뭇거리던 허선영이 어렵게 고개를 들었다.
“내가 중명 씨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그리고 던진 말이 그 무엇보다 천중명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천중명은 천천히 손을 내밀어서 재킷 안에 있는 허선영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당겼다.
“잠시만 이렇게 있을게.”
어깨를 감싸듯 안은 천중명을 허선영이 받아들였고, 숨을 두 번쯤 내쉴 때쯤 그녀의 고개가 오른쪽 가슴에 살포시 닿았다.
“며칠 힘들었었는데…. 지금 그 피로가 다 풀렸어.”
천중명을 위로하듯 허선영은 좀 더 꼭 안아주었다.
그렇게 잠시 있었고, 빌라까지 허선영의 손을 잡은 채 말없이 걸었다.
황색 가로등의 불빛을 벗어나 빌라가 눈에 들어온 다음이었다.
“내일 어머니가 평창동에 들어가신다면 빌라에 조금만 더 함께 있자. 당신이 있는 집에 돌아오는 행복을 조금만 더 느끼게.”
허선영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주는 거지?”
“네.”
조금이나마 밝아진 음성이어서 좋았다.
**
천호득은 새벽 6시에 잠에서 깨어나 의료진을 불렀다.
“퇴원할 테니 이것들을 정리해.”
잠이 부족해서 확실히 프랑켄슈타인처럼 보이는 장만섭이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앞이었다.
“정리하라니까!”
꼭 장만섭 때문은 아니겠지만, 천호득의 독촉에 의료진은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한 채 링거와 연결된 기계들을 정리했다.
“너는 가서 응접실에 있는 옷을 가져와. 아니다. 먼저 좀 씻어야겠다.”
침대에서 다리를 내린 천호득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장만섭을 노려보았다.
“뭐해?”
“예?”
“와서 부축하는 걸 꼭 말을 해야 알아?”
“아, 예.”
덩치가 커다란 장만섭이 천호득을 부축해 샤워실로 걸었다.
“한 가지만 해라.”
“무슨 말씀이신지….”
“우직하려면 끝까지 우직하고, 잔머리를 쓰려면 처음부터 잔머리를 굴려.”
“저는 잔머리가 없습니다.”
샤워실의 문을 열어준 장만섭이 답을 건넨 직후였다.
“네놈은 잔머리가 아니라 눈치라는 게 아예 없는 놈이구나. 걷는 것도 힘든 나더러 저 안에 들어가 혼자 옷을 벗고 알아서 씻으라는 거냐?”
“어디까지 해드려야 하는지 몰라서 그랬습니다.”
“네 눈에는 저게 뭐로 보이냐?”
“의자입니다.”
장만섭의 답을 들은 천호득은 기가 막힌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저 의자가 여기 왜 있겠냐고? 후! 그래! 잔머리에 눈치까지 없는 놈아. 의자를 샤워기 밑으로 옮겨. 그리고 나를 거기에 앉혀줘야 씻지!”
“아!”
장만섭이 얼른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준비됐습니다.”
“너랑 있다가는 마음의 병이 생기겠다.”
한숨을 푹 내쉰 천호득이 장만섭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이제 앉혀줘야지!”
“예!”
장만섭이 천호득을 안다시피 해서 의자에 앉혀주고는 그 옆에 단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
“물 틀 건데 그러고 있을 거야?”
“아!”
급하게 샤워실을 나서는 장만섭의 뒷모습을 보며 천호득은 슬프게 웃었다.
**
잔머리 하나는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천상기였다.
게다가 그는 목적한 바를 손에 넣기 위해 굴욕을 꿀처럼 삼키는 인내와 형의 부인을 품는 야비함마저 갖춘 인물이었다.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던 천상기는 뿌옇게 날이 밝아올 때쯤 책상에 앉아 진한 커피를 마셨다.
새로운 날의 태양이 떠오르며 사무실 바깥이 훤히 밝아지는 순간이었다.
잠이 부족해 벌겋게 변한 눈으로 그는 휴대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누른 후, 휴대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
새벽 6시 30분이어서 사실 누구에게라도 전화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승애였다.
“너무 일찍 전화를 드렸나요?”
- 그보다는 우리가 전화를 주고받을 사이였나 싶어서 그렇지요.
이른 시간인데도 강승애는 날이 날카롭게 선 음성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죽 쒀서 개를 준 모양입니다. 어젯밤에 망나니가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죠?
“총수님이 망나니를 후계자로 점찍은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강승애는 대꾸가 없었다.
“혹시 총수님의 비자금 어카운트를 아십니까? 어제 망나니 말로는 윤 실장이 이사장님께 몸을 의탁했다던데 그 정도는 들으셨겠지요?”
- 하고 싶은 말을 하세요.
강승애는 못들은 눈치였다.
“그 계좌를 아는 사람이 몇 없습니다. 총수님의 심복 세 사람, 돌아가신 형님, 그리고 저, 이 정도였습니다. 아마 큰형님이 이사장님께도 말씀드리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 내가 오늘 바쁜 일이 많거든요. 다른 할 말이 없는 거면….
“망나니가 그룹을 물려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주식회사 지경이 소유한 지경건설의 의결권에 총수님의 비자금이 검은 머리 외국인의 계좌를 통해 지경건설의 주식 매입에 나서면 그걸 이겨낼 자신이 있으십니까?”
화를 누르는 숨소리가 들리자 천상기는 야비한 미소를 그려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저야 뭐 망나니와 어제 협상한 것이 있어서 손해 볼 일은 없지만, 그래도 이사장님과의 약속을 지킬 생각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원하는 걸 말해요.
“지경건설을 손에 넣으시면 형님의 비자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법인 계좌이기 때문에 새로운 대표이사가 그걸 확인하면 가능합니다. 내가 원하는 건.”
새로운 날을 맞이한 창밖의 건물들을 바라본 천상기가 작정한 듯 입을 열었다.
“형님이 남기신 비자금의 절반입니다. 천 억 원쯤 됩니다. 물론 찾으면 주신다는 말씀 따위 안 하시리라 믿습니다.”
- 찾지도 않은 것을 달라구요? 지금 우리 쪽 자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빤히 알면서 그래요?
천상기는 여유가 느껴지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주식을 매입하느라 여유가 있으실 리 없지요. 그러니 그 주식을 제게 넘겨주십시오.”
- 지금 뭐라고 했어요?
“주식 담보로 제가 돈도 더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 무슨 뜻이에요?
강승애가 미끼를 물자 천상기는 오른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대로 주식으로 대결하게 되면 주가는 한없이 올라갑니다. 망나니가 총수님의 비자금을 동원해 공개매수를 한다면 지금보다 최소 세 배에서 많게는 여섯 배까지 상승할 겁니다.”
- 역시 무서운 분이네요. 지금까지 내가 매입한 주식을 담보로 잡고, 내게 돈을 빌려주겠다는 거죠? 내가 추가로 매입한 주식을 계속 담보로 잡으면서요. 나는 절대 먼저 팔 수도 없겠네요.
“저는 받기로 한 비자금만큼의 보증을 받는 거고, 이사장님은 확보한 자금만큼 주식을 더 매입하는 겁니다. 인수에 실패한다 치더라도 여섯 배 이상 수익이 남는 일이니 서로 나쁠 것도 없잖습니까.”
망설이는 게 분명한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 주담은 3개월 평균가로 돈을 빌려주잖아요? 당장 가격이 올라도 담보가치가 그 정도가 될 리가 없는 데다, 주담을 이용해 주식을 계속 매입하면 금감원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이사장님. 제가 저축은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쯤 적당하게 보완해 줄 전주들이 충분히 있습니다.”
- 좋아요. 오늘 고민해 보고 연락할게요.
“현명한 판단을 기다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상기는 종료버튼을 누른 후 휴대전화기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사는 거 참 힘드네. 이런데도 모르는 인간들은 거저 돈을 버는 줄 알고 짖어대니, 원.”
그는 책상에 놓인 이런저런 자료들을 훑어보았다.
“망나니 놈에게는 강승애가 맡긴 주식을 가지고 흥정하면 되겠고. 그런 뒤에 사채업자들에게 주식을 돌려서 강승애에게 돈을 빌려주면 그 독사 같은 여자는 또 사들일 테고, 그러면 그럴수록 주가는 계속 오를 테고?”
천상기가 몹시 만족한 얼굴로 웃었다.
“최고로 올라갔을 때, 망나니더러 사라고 던지면? 흐하하! 벌써 시가총액 5조가 넘어선 회사를 먹는 건데 2조는 넣어야 양심 있는 거지. 그렇지? 세상 물정 모르는 망나니 도련님?”
천상기는 모처럼 만족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