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58화 (58/315)

# 58

058. 주저앉히든, 죽이든, 우리 손으로 해야지요 (3)

밤이 깊어지는 시간이었다.

“저는 이제 집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말을 건넨 천중명은 곽대출을 돌아보았다.

집으로 가자는 신호였다.

“나도 내일은 집으로 가겠다.”

그런 천중명의 뒤통수에 천호득의 고집스러운 음성이 매달렸다.

“병원에서 퇴원하라는 말이 없었잖습니까.”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알아.”

천호득이 입술을 내밀며 툭 뱉어낸 대꾸였다.

“아직 누가 손을 썼는지도 모르는데 가셨다가 또 이렇게 되면요?”

“네가 지켜주면 되잖아.”

이 양반이 왜 이렇게 투정을 부리지?

천중명은 쭉 째진 천호득의 눈을 보았다.

의도와 상관없이 축 늘어진 그의 볼과 팔자 주름을 타고 끝이 처진 입술, 턱과 목에 새겨진 주름들이 부록처럼 함께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켜켜이 쌓여버린 세월만큼은 되돌리지 못한다.

그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는 듯 보였다.

“대가리 터진 놈이야 너를 못 떠날 테니까 저기 덩치 큰 놈 붙여줘.”

“식사는요? 차 한 잔, 물 한 모금 드시는 것도 염려해야 하는데 당장 그건 어떻게 하시려고요.”

“네가 알아서 하라고.”

천중명이 잠자코 바라보자 천호득은 삐친 아이처럼 정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외롭고 쓸쓸한 얼굴이었다.

큰아들을 잃은 빈 곳을 감당하기 위해 끙끙대는 나이 든 아버지의 얼굴이기도 했다.

“오늘 밤에 어머니랑 의논해 볼게요. 의논해서 어머니가 평창동에 들어가신다면 그때 움직이세요.”

화들짝 천호득의 시선이 달려왔다.

“네가 뭔데 내가 집에 가겠다는 걸 결정해?”

“아버지가 또 당하시면 그땐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걸 바라세요?”

“그러니까 네가 지키라고 하지 않았냐.”

지금까지 이렇게 살았을 거다.

회사와 돈을 손에 쥐고서 고개 숙이라고 강요했을 거고, 지금까지 한 번도 뜻을 꺾어본 적 없었을 거다.

“후.”

천중명이 한숨을 뱉어낸 직후였다.

“기가 막혀서. 나이가 드니 이제 내 앞에서 눈을 부라리고 한숨을 내쉬는 자식 놈을 다 보는군. 방금 한숨 쉬는 것 봤나?”

푸념을 뱉어낸 천호득이 유진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웃고 있었다.

표정이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유진교의 눈은 분명 재미있는 것을 본다는 투로 웃는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가 돌보시겠다고 하면 그때 움직이세요. 김순례 씨라고 삼성동 빌라 도와주시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주방을 맡고, 아버지 곁에 저기 장만섭이 붙어있는 조건이라면 저도 평창동 가시는 거 반대 않겠습니다.”

고집스러운 천호득의 고개가 다시 돌아왔다.

침대에만 있어서 그런지 노인네의 고개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너도 내 말을 하나 들어.”

그리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조건이 불쑥 나왔다.

“주식회사 지경의 대표이사를 맡아.”

“예?”

참 오랜만에 천중명은 제대로 된 대꾸를 꺼내지 못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그냥 대표이사가 아니라 그룹 총수가 되라는 말씀이시잖습니까?”

그토록 죽고 죽여 가며 노리던 자리가 총수였다.

이렇게 쉽게 줘도 되는 건가 싶을 만큼 천호득은 그 피비린내 풍기는 자리를 아무렇지 않게 던지고 있었다.

이럴 때 조언을 얻을 사람이 있다면 유진교였다.

힐끔 본 그는 아까보다 더 분명하게 눈으로 웃고 있었다.

“네가 아니면? 심근경색이 온 내가 그룹 일을 봐? 아니면 죽은 놈을 시켜? 그도 아니면 내게 약을 먹인 놈을 불러서 네가 해라, 그렇게 말해?”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천중명은 아예 실없는 웃음만 나왔다.

“왜 이러세요, 진짜?”

“네가 하는 짓이 답답해서 그렇다. 너, 빤히 화장품에 들어간 자금 200억 돌릴 거고, 지경디자인, 냉동창고의 자금으로 주식 만질 생각인 게 속 터져서.”

천중명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천호득이 던진 말이 얼음물처럼 머리에 쏟아져 등줄기를 타고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해볼 만은 하지. 거기에 윤 실장 만나서 역정보를 흘리면 충분히 승산도 있고.”

노인네가 혹시 누군가에게서 아직 보고를 받고 있는 걸까?

힐끔 시선을 들었을 때, 유진교는 속을 읽기 어려울 정도로 덤덤한 얼굴이었다.

“강승애 그년과 둘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계산인 모양인데 그렇게 되면 이길 순 있어도 존경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니 내일 주식회사 지경의 대표이사로 올라가. 큰형이 저렇게 됐으니 명분도 좋아.”

천중명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천호득이 입술을 늘이며 웃었다.

“정말 그룹 총수 자리를 욕심내지 않았던 게냐?”

“아버지가 계시니까요. 그리고 제 능력이 아직 부족한 데다 더 많은 경험을 쌓아야….”

“형제간의 싸움이 길어지면 임원들이 흔들려. 그럴 때 파벌 싸움까지 벌어지면 돌이키기 어렵다.”

이러려고 느닷없이 집에 가겠다며 고집을 부렸던 걸까?

천중명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천호득은 말을 이었다.

“네가 지경의 새로운 총수가 되면 날 노릴 이유가 없지. 비정규직 직원들의 정규화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그럴싸한 미끼도 던졌다.

“그렇게 되면 나도 네가 보내준 사람들 틈에서 여생을 좀 편안하게 보낼 것 같은데?”

나이와 그만큼의 경험은 확실히 무섭다.

그렇게 쌓인 연륜은 젊은 패기와 반짝이는 머리로 상대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었다.

“피곤해. 저기 머리 깨진 놈도 몸뚱이가 아픈 모양인데 얼른 데리고 들어가. 그리고 유 전무. 내일 기획실장과 비서실장 들어오라고 해. 변호사도 부르고.”

“예.”

“올 때 이 녀석에게 주식회사 지경의 지분을 넘겨줄 서류도 아예 작성해 오라고 하고, 세금도 내가 내주어야 할 테니까 그에 대한 양도세까지 별도로 계산해 오라고 전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멍하니 있는 천중명의 앞에서 천호득과 유진교는 지시와 답을 주고받았다.

“뭐해? 얼른 들어가라니까. 그래야 아침 일찍 평창동으로 사람 보낼 거 아냐?”

어쩐지 야바위꾼에게 당하고 일어설 때의 심정이었는데, 그게 지경그룹의 주인이 되라는 이상한 야바위꾼을 만난 상황이었다.

“내일 말씀하세요.”

“흥.”

대꾸 참.

시간을 벌어볼 계산으로 일어서는 천중명을 천호득은 코웃음으로 무시했다.

“내일 일찍 오겠습니다.”

“깔끔하게 차려입고 와.”

천중명은 얼른 고개를 숙인 뒤에 바로 병실을 나섰다.

당연하게 곽대출이 함께 움직이는 길이다.

병원의 로비를 지나 유리문을 나설 때까지 천중명과 곽대출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는 직원이 가져온 차를 타고 병원을 나섰다.

운전은 이번에도 천중명이 했다.

큰 도로에 합류한 다음이었다.

오래 참았던 숨을 내쉬듯 곽대출이 입을 열었다.

“어디 가서 차나 한잔 하실까, 대표님?”

“나도 그럴 생각이었다. 잠실 한강공원으로 가자.”

“오케이.”

병원에서 삼성동 빌라라고 해봐야 정말 얼마 걸리지도 않는다. 그 앞에 있는 도로를 타면 바로 잠실 한강공원이 나왔다.

“몸은 어떠냐?”

“좀 쑤시는 게 다야. 그나저나 어떻게 했길래 만섭이가 멀쩡하게 돌아온 거야? 정말 대화로 풀었어? 그 또라이들 하고?”

궁금해하는 곽대출을 향해 천중명은 먼저 천상기와의 일을 전해주었다.

“그렇게 경고만 하고 온 거다. 길바닥에서 붙었다가 엮이면 괜히 불편해지잖아.”

한강공원 입구에서 남자 한 명이 자정까지의 주차요금을 정산 받고 있었다.

자정까지의 요금이었다.

고작 15분 남았다만, 천 원짜리 지폐를 내고 200원을 거슬러 받았다.

이런 돈은 이상하게 진짜 아깝다.

그렇게 200원을 주머니에 넣은 천중명은 매점과 화장실이 있는 곳에 차를 세웠다.

“뭐 마실래?”

“내가 가겠습니다.”

“몸 성한 사람이 움직이자. 둘이 있을 때 그러니까 서운하기까지 하다.”

픽 웃은 곽대출이 “꿀차.” 하며 주문을 건넸다.

이제는 밤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계절이었다.

꿀차 하나에 커피 한 잔을 사 들고 돌아온 천중명은 당연하게 곽대출의 옆에 앉아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매점과 가로등의 불빛을 끌어안은 한강이 유리면처럼 잔잔하게 흐르는 앞의 벤치였다.

건너편의 잠들지 않은 건물들이 고개를 높다랗게 들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담배에 불을 붙인 천중명은 어둠 속에서 보았던 황성규와 팀원들에 관한 이야기를 곽대출에게 들려주었다.

“CIA? 그런 인간들이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재벌 꼬랑지에 붙어? 와! 윤만석 실장은 진짜 의외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곽대출은 놀란 정도를 감탄사와 몸짓을 이용해 제대로 표현해냈다.

“몸뚱이 바뀌고 하루하루 쉽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오늘이 그중 가장 황당한 날인 것 같다.”

“그룹 총수 되라는 말 때문에 그래? 나는 짐작했었는데?”

뜻밖의 말을 던져놓은 곽대출이 느긋한 얼굴로 꿀차를 마셨다.

“어후, 따끈한 게 진짜 좋다.”

“뭐야? 뭘 보고 그렇게 짐작한 건데?”

“왜 이러시나, 대표님? 큰아들은 사망, 둘째 아들은 약을 타는데 협조한 게 거의 확실하고, 아니더라도 형수랑 붙어먹은 놈 아냐, 그럼 남는 게 누가 있어?”

듣고 보니 그랬다.

더럽게 단순한 논리였는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정확한 판단이기도 했다.

“그러네, 씨발.”

“아니, 그룹의 총수가 되라는 건데 왜 욕을 하십니까?”

“야, 이 씨! 일이 얼마나 많겠냐? 기획실에 비서실에, 유진교 전무 같은 임원들에,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남은 커피를 단숨에 마신 천중명은 다시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지경화장품도 아직 체계를 못 잡았어. 거기에 냉동창고는 사표 받아놓은 상태에서 돌아보지도 못했고. 이 상태에서 내가 그룹 총수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냐?”

“쫘-아악. 황금이 깔린 길을 걷는 거?”

곽대출의 능청이 웃겨서 천중명은 실없이 웃었다.

“내가 그룹의 후계자가 되겠다고 했었던 건, 이런 식으로 느닷없이 얻는 게 아니라 화장품과 디자인, 냉동창고를 통해서 급하게라도 배운 다음이었다.”

“말은 그게 맞네.”

“그래! 그러니 내가 황당하지 않겠냐?”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이것이 모두 다 대표님의 운명인걸.”

말을 뱉고 난 곽대출이 얼른 천중명의 눈치를 살폈다.

운명이란 말이 주는 무게감이 다른 이들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었다.

“받아들여, 대표님.”

“방법이 없을까? 그 구렁이 노인네를 설득해서 좀 더 시간을 얻을 방법?”

“총수님이 의식이 돌아온 뒤에 했던 말들을 생각해 봐. 가장 먼저 큰형 잘 보내줬냐였고, 다음이 용인의 어머니 모셔 와라. 다음으로 거 뭐시냐, 비자금 계좌를 알려준데다, 마지막으로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느냐는 꾸중이었잖아?”

곽대출이 병원에서 천호득이 했던 말들을 쭉 되새겼다.

“깨어난 직후에 총수님은 답을 정해놓았던 거지.”

어쩐지 이놈이 무척 똑똑해진 느낌이었다.

“대표님이 천상기를 만나러 장만섭이랑 병실 나선 뒤에 총수님이 유 전무를 보고 이렇게….”

곽대출이 천호득을 흉내 낸 듯 표정까지 바꾸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이렇게 유 전무에게 묻더라고.”

“유 전무가 뭐라고 했어?”

“이미 결심이 서신 것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제게 저녁을 사 오라고 하신 줄 알았습니다.”

이번엔 유진교를 흉내 낸 모양인데 요번 건 좀 아니었다.

“연륜은 진짜 무섭다.”

“나는 대표님이 무섭다.”

“뭐가?”

“어쩌면 그룹 총수자리를 준다는데 그렇게 덤덤해?”

픽 웃은 천중명은 잔잔하게 흐르는 한강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어섭시다. 곽 부장. 내일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모시겠습니다, 총수님.”

“야! 왜 너까지 그래?”

“좋구만!”

결국, 둘이서 킬킬대며 일어섰다.

차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천중명과 곽대출은 모두 윤만석을 생각하고 있었다.

왜 그토록 오랜 시간 천호득을 모신 양반이 강승애 밑으로 갔을까?

한강공원을 빠져나와 채 10분이 걸리지 않아서 빌라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올라간 천중명이 번호 키를 누르고 현관문을 연 다음이었다.

뜻밖에도 허선영이 문 앞에 있었다.

“안 잤어요?”

“책 읽고 있었어요.”

면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인 허선영이 곽대출과 고갯짓으로 인사를 나눴다.

“시장하진 않아요?”

“아니. 괜찮아.”

아직은 한두 마디 하고 나서야 말이 놓였다.

“대표님. 그럼 전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분위기를 짐작한 곽대출이 탈출한다는 표정으로 방으로 움직여서 거실에 둘만 남았다.

“두 분은 먼저 주무신다고 들어가셨어요.”

그냥 들어가기 아쉬워서 천중명은 홈바를 돌아 냉장고로 향했다. 전에는 물병이 전부였던 냉장고에 사각형의 통들이 가지런하게 담겨 있었다.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현관을 나섰을 때부터 이렇게 단둘이 볼 수 있는 시간을 바랐다.

물병을 꺼내 든 천중명은 허선영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마주하는 시간을 그녀도 기다렸다고 믿고 싶었다.

“다친 곳은 괜찮아요?”

“나는 별거 없는데 곽 부장이 좀 힘들 거야.”

“홍삼하고 영지버섯 끓여놓은 거 있는데 지금 마실 수 있어요?”

“지금은 됐어. 저기, 괜찮으면 우리 잠깐 걷고 올까?”

천중명의 말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허선영의 눈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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