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057. 주저앉히든, 죽이든, 우리 손으로 해야지요 (2)
군데군데 이가 빠진 것처럼 불이 켜진 건물 앞이었다.
“나와.”
천중명은 위를 올려다 본 상태에서 명령조로 말을 전했다.
“건물 앞으로 내려오면 돼. 쓸데없이 깡패들은 왜 이렇게 많이 불렀어?”
- 무슨 깡패?
같잖은 변명에 웃음이 나왔다.
“주차장 입구에 승합차나 치우고 거짓말을 하든가. 타고 있는 놈들이 빤히 보이는데 뭔 헛소리를 해? 어떻게? 이 길로 그냥 가? 아니면 내려올 거야?”
- 누가 깡패를 불러? 올라와서 확인해!
공들여 준비했는데 들어가지도 않겠다면 서운하기는 하겠다.
그렇다고 옆구리와 등이 결리는 마당에 굳이 회칼 이벤트에 몸뚱이를 디밀 이유도 없었다.
“윤 실장이 이사장에게 붙었어. 뭘 좀 알고 큰소리를 쳐. 총수님 깨어나신 거 알지? 형이 생각할 때 총수님이 그냥 당하고 있을 것 같아?”
당장 천상기의 대꾸는 없었다.
“잘 생각해. 솔직히 나야 내 몫만 챙기면 되니까. 그런데 그게 주식회사 지경이면 곤란하지 않을까? 어떻게 할 거야? 건물 앞에서 전화하고 있으니까 짜증이 나려고 그러네.”
장만섭이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두들기고 싶은 눈초리로 승합차를 바라보는 앞이었다.
- 내려가면? 이 시간에 어디로 갈 건데?
“건물 앞에서 담배 피우면서 이야기하면 되지. 이사장부터 해결합시다. 그게 순서 아냐?”
- 알았다.
“내려올 때 커피 두 잔만 가져다주고.”
- 야, 이…!
천중명은 통화 종료버튼을 누르고 승용차에 팔을 짚은 자세로 섰다.
“내려올 거다. 준비하고 있어.”
“예.”
길게 대답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우렁우렁 울리는 음성으로 엉뚱한 소리를 내놓았다간 주변에서 모두 들을 일이라 그렇다.
승합차 한 번 보고, 하늘 한 번 보고.
그 고약한 골룸에게도 절대 반지를 불구덩이에 빠트리는 역할이 있었던 것처럼 천봉서와 천상기, 강승애도 분명 세상에 나온 이유가 있을 텐데 당장은 알 방법이 없었다.
몸뚱이는 왜 바뀌었을까?
천중명은 반쯤 어두운 건물 로비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과거의 천중명처럼 살아도 누가 뭐랄 사람 없었다.
오지은과 즐기다가 외국 가도 됐을 테고, 아니면 80억 원 쥐고서 곽대출과 함께 발리에 적당한 집 한 채 사서 즐길 수도 있었다.
왜 이러고 있을까? 왜?
엉뚱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로비에 휠체어를 탄 천상기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도 없다던 인간이 깡패들 다섯 명과 함께 우르르 나오는 뻔뻔함이라니.
마치 조금 전의 의문에 대한 답이 걸어오는 느낌이었다.
움켜쥔다고 다 쓰지도 못한다.
결국, 천봉서처럼 석관 하나 놓을 자리로 끝난다.
그러니 온갖 악행 저질러가며 발버둥을 칠 이유 따위는 없었다.
회전문을 피해 옆문으로 나온 천상기가 불편한 시선으로 천중명을 노려보았다.
“아, 얼른 와요!”
천중명의 손짓에 휠체어가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는 장만섭이 비켜난 자리에 멈췄다.
“뭐하자는 짓이야?”
“커피는?”
“옆에 편의점 있으니까 네가 데려온 놈을 보내서 가져오면 되잖아!”
“하여간 인생 피곤해. 베풀면서 살아 좀! 그깟 커피 한 잔을 아껴?”
타박을 냅다 던진 천중명은 인도 근처의 화단을 가리켰다.
“저리로 둘이 갑시다. 다른 애들이 말 들으면 곤란하잖아. 대로변이라 형이나 나나 서로 다른 짓 하기도 그렇고.”
천상기를 따라 내려온 다섯 놈이 적대감을 내보이며 천중명과 장만섭을 훑어댄 다음이었다.
“알았다.”
천상기가 답을 했다.
“여기 있어. 저기 멍청이들 다른 짓 못 하게 지켜보고.”
장만섭에게 지시를 건넨 천중명이 앞에서 걸었고, 깡패 하나가 휠체어를 밀었다.
“나머지는 여기 있고!”
그 직후에 우렁우렁한 장만섭의 음성이 들렸다.
“대표님이 조용히 말씀하신다잖아! 휠체어 미는 사람 빼고 거기 넷은 여기 있읍시다.”
“뭐야? 안 비켜?”
“아, 거 진짜.”
장만섭이 같잖다는 듯 웃었는데 화단에서 몸을 돌렸을 때 분위기는 살벌했다.
천중명은 휠체어를 밀고 온 깡패에게 시선을 주었다.
“됐으니까 가 있어.”
천상기의 지시에 따라왔던 놈이 돌아섰고, 장만섭이 있는 승용차 앞에 일대 오로 눈알을 부라리는 평화가 펼쳐졌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총수님 깨어나신 건 알지? 왜 안 찾아와?”
천상기가 질투와 분노가 섞인 눈매로 천중명을 노려보았다.
“막말로 난 출생이 다르잖아. 그런데 하나 남은 진짜배기가 안 찾아오면 의심밖에 더 들겠어?”
“내가 가면? 그 양반 성격에 퍽도 조용히 끝나겠다.”
“약을 형이 썼어?”
퍼뜩 표정이 바뀐 천상기가 나직한 헛기침으로 답을 대신했다.
속을 이렇게 못 감추는 놈들이 무슨 사업을 한다고.
천중명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빨리 끝냅시다. 건설을 먹으면 당연히 전자가 따라오잖아. 그걸 되찾아 오는데 협조해. 그럼 형이 가지고 있는 저축은행과 시행사는 그대로 넘겨줄게.”
담배에 불을 붙이는 동안, 천상기는 무언가를 계산하는 것처럼 야비한 눈빛이었다.
“잘 생각해. 나는 윤만석 실장 통해서 이사장과 손잡을 수도 있어. 주식회사 지경에 있는 건설 주식의 의결권을 넘긴다면 그쪽은 나와 손잡을 것 같은데? 내가 이사장에게 내걸 조건은 하나야.”
입술을 꿈틀거린 천상기가 마른침을 삼켰다.
“형이 세무조사 받는 거. 좋게 끝날 것 같지는 않은데 뭐, 형이라면 건물에서 뛰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총수님의 뜻은?”
잠시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들고 질문을 던졌다.
“비자금을 말씀하시던데? 골든베스트 투자은행, 케이맨 제도의 법인명.”
천호득의 비자금 계좌가 있는 곳을 일부러 던졌고,
“이, 씨…!”
그와 동시에 천상기가 욕을 뱉어냈다.
본인은 어렵게 알아낸 비자금 계좌의 정보를 천중명에게는 직접 알려주었다는 데서 오는 질투의 감정처럼 보였다.
“내게 전권을 주었다는 의미라는 건 알겠지?”
천상기의 입장에서 보면 그룹을 손에 넣기 위해 애썼는데 엉뚱하게 천중명이 홀랑 먹게 생긴 꼴이었다.
그의 얼굴에 분노와 회한, 아쉬움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총수님은 그렇다고 치고 너를 어떻게 믿어?”
“자꾸 그런다. 지경건설만 해도 시가총액이 4조가 넘어요. 형이 가지고 있는 회사에 욕심 없다니까. 그거 주고 건설에 전자까지를 내가 먹는 건데 그걸 마다할 바보가 있어?”
천상기가 휠체어의 손잡이를 매만지고 있었다.
고민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담배를 떨어트려 발로 밟은 천중명이 시선을 들었다.
“윤 실장이 이사장에게 붙었다는 것만 명심해. 이사장 같은 독한 여자가 왜 그를 데려갔을지 모르겠어?”
“하고 싶은 말을 해.”
“큰형이 만든 비자금이 있었어. 그걸 누가 찾을까?”
아차 하는 표정 뒤에 천상기의 눈알이 또 빠르게 움직였다.
“그거로 큰형을 구속하려 해놓고 벌써 잊었어? 지경건설 법인 계좌니까 대표이사가 되면 바로 찾겠지. 이사장이 그것까지 차지하면 그쪽은 그냥 천국이 쫙 펼쳐지는 거고.”
천중명은 천상기를 본 채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형은 이쪽저쪽에서 실 끊어진 연이 되면서 끝나.”
“세상이 네 맘대로 될 것 같냐?”
천상기가 눈꼬리와 입술을 묘하게 비틀며 웃었다.
짐작했었다.
천상기가 대책 하나 없이 멍청하게 당할 인간이 아니란 것쯤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시간을 끌던 천상기가 퍼뜩 시선을 들었다.
“전자를 내놔. 주식회사 지경이 가진 저축은행 지분과 시행사 지분도 주고. 건설을 찾아가서 네가 대표이사가 되면 형이 감춘 비자금도 네가 먹을 거 아냐?”
천중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야기해 놓을 테니까 총수님 직접 뵙고 답을 들어.”
“흠.”
아버지를 만나라는 말을 이렇게 부담스러워할 줄은 몰랐다.
덕지덕지 욕심은 피어나는데 당당하게 요구하기보다는 약을 써서라도 쉽게 얻겠다는 인간의 진짜 모습을 보는 느낌이었다.
“총수님께 네가 말씀드려.”
“내 말을 믿을 수 있겠어?”
“뭐, 언제까지 살아계실 것도 아니고. 내가 아니어도 손쓸 사람도 있고.”
심통이 올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기껏 죽 쑤어놨더니 천중명이 홀랑 먹게 생긴 꼴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천중명 앞에서 천호득을 노릴 거란 투로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지난번에 한 말 있지.”
“뭐?”
“기억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는 말. 상황이 바뀌면 약속했던 것과 대답했던 걸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
무슨 말인가 했던 천상기가 화들짝 놀란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나는 그저….”
“그저 뭐? 지켜보다가 안 되겠으면 또 약을 쓰겠다고?”
깡패를 부르기 위해 천상기가 홱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깡패를 부르는 순간 남은 무릎도 부러진다.”
천중명이 나직하게 던진 경고에 천상기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내가 만들어줄 수 있는 마지막.”
천상기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협조하는 것으로 아버지께 용서를 빌어. 그리고 아버지의 처벌이 무엇이든 달게 받아. 최소한 큰형의 죽음에 대한 죗값은 치러야지.”
“미친놈.”
“갑니다. 가기 전에 하나 더 경고하는데 다음번에도 저런 식으로 깡패를 동원하면 오른쪽 무릎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만 알아둬.”
뭔가 퍼붓고는 싶은데 천중명이 무서워서 못하는 눈치였다.
“협조하기로 결심하면 전화로 알려주고. 가지고 있는 계좌와 지분 알려줘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고.”
말을 마친 천중명은 승용차로 걸음을 옮겼다.
승합차에서 내린 세 놈까지 합세해서 여덟 놈이 장만섭을 둘러싸고 있었다.
“비켜.”
천중명의 이야기는 들었을 일이다.
사무실에서 만년필로 목덜미를 찌른 거며, 용인에서 어깻죽지째 팔을 뽑아 부러트린 것도 알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독기를 펄펄 풍겨내면서도 깡패들은 주춤대며 물러났다.
“뭐해? 휠체어 끌어주지 않고?”
천중명이 운전석의 손잡이를 잡을 때, 날카롭게 생긴 놈의 눈 끝이 꿈틀대고 있었다.
대로변이고, 건물과 가로등의 불빛이 훤히 비치는 곳이라 회칼을 뽑아야 하는지, 참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눈치였다.
“야!”
천상기의 고함이 버럭 들리면서 대치가 끝났다.
우르르 깡패들이 천상기에게 움직였는데, 마지막까지 날카로운 놈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눈치였다.
눈과 눈이 똑바로 마주친 상태에서 천중명은 픽 웃었다.
“사람들이 본다. 얼른 저쪽 챙겨서 올라가라.”
철컥.
그런 뒤에 운전석 문을 열고 몸을 실었다.
부르릉.
시동을 걸자 재킷을 가볍게 털어댄 장만섭이 조수석으로 들어왔다.
“그냥 가십니까?”
“대로변에서 이 시간에 붙으면 그게 조용히 수습될 것 같아?”
천중명은 차를 움직였다.
도로에 합류한 뒤에 들여다본 룸미러로 천상기 일행이 건물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깡패들을 동원했다면 무릎을 부러트리려고 했었다.
힘으로 나온다면 힘으로, 야비하게 나온다면 그보다 더 야비하게 상대해주겠다고 여겼다.
그런데 말이다.
병실을 나설 때 조심하라던 천호득의 목소리가 천중명을 달랬다.
아들 둘을 잃는데 저쪽은 아무도 안 다치면 억울하다던 그의 서글픈 눈과 표정이, 고집스러운 태도로 천중명을 걱정하는 그의 모습이 천상기의 무릎을 온전히 돌려보내게 만들었다.
밤이 깊어서 병원은 정말 한가했다.
현관에서 직원들에게 차를 맡긴 천중명은 곧바로 유리문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뭔가 보여주지 못해 아쉬운 것처럼 장만섭이 눈치를 살폈는데 천중명의 표정이 가라앉아 있어서인지 입을 열지는 않았다.
천호득의 병실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쯤이었다.
“다녀왔습니다.”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천호득이 빠르게 천중명의 위아래를 살핀 뒤에 곧바로 장만섭에게 시선을 주었다.
“잘 끝났어요.”
“뭐가?”
침대 옆에서 일어선 유진교와 곽대출 역시 궁금한 얼굴이었다.
“아무렴 깡패들 바글바글한데 진짜 들어갈 줄 아셨어요?”
“큰소리만 잔뜩 치더니!”
천호득과 유진교가 안심하는 반면에 곽대출은 진짜 아무 일 없었냐는 의아한 시선을 장만섭에게 던지고 있었다.
“그럴 거면 전화로 하지. 뭐 하러 거길 가서 얼굴을 봐?”
“마지막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침대에 기댄 천호득이 오른쪽에 앉은 천중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건설을 찾아오는 걸 돕고,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라고 했거든요.”
“그놈이 그럴 것 같아?”
“그랬으면 싶습니다. 안 그러면 아들이 하나밖에 안 남을 것 같으니까요.”
천호득은 뭔 소리인가 하는 얼굴이었다.
“내일부터 움직일 생각입니다.”
“네가 가진 게 뭐가 있다고? 저기 대가리 깨진 놈하고, 덩치만 커다란 놈 둘 데리고 뭘 할 수 있는데?”
“지켜보세요. 그럼 아실 거예요. 대신 돌이키지는 못할 겁니다.”
고개를 갸웃하는 천호득 옆에서 유진교는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가라앉은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