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56화 (56/315)

# 56

056. 주저앉히든, 죽이든, 우리 손으로 해야지요 (1)

황성규와 함께 병원 건물을 나섰다.

“이렇게 얼굴을 드러내도 됩니까? 형이나 이사장에게 보고가 들어갈 수 있을 텐데요?”

“이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많이 힘드셨죠?”

“연락 못 드렸으니 꾸중을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천중명은 픽 웃고 말았다.

자판기 앞에 도착했을 때 당신의 고충을 이미 봤노라 말할 수 없어서 그랬다.

“저쪽에 커피전문점이 있습니다.”

황성규가 도로의 왼편을 가리켰다.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 눈치였다.

둘이서 커피전문점으로 움직여 커피를 산 다음이었다.

“조금 걸으셔도 됩니까?”

“그러시죠.”

황성규의 요청에 따라 천중명은 커피전문점을 나섰다.

“디지털 시대에는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습니다. 버튼 하나로 가족 관계, 성장 과정, 성향까지를 한눈에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출신 성분을 이겨내고 신분 상승을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사람을 피해 걷는 동안 황성규가 건넨 말이었다.

“누군가를 조사할 때 가장 먼저 그 사람의 소비 형태를 살핍니다. 신용카드, 체크카드 사용 내역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신불자의 경우에는 하루만 따라다녀 보면 판단이 서지요.”

3분쯤 걸었다.

“저쪽이 좋겠습니다.”

황성규는 상가와 건물 사이에 있는 작은 화단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곳에 오는 동안 그가 했던 말만큼이나 뜬금없이 만들어진 화단이었다.

“일이 많았습니다.”

어깨에서 가방을 내려놓은 황성규가 고백처럼 입을 열었다.

“우선 알아보라고 하셨던 강승애 이사장의 동생 강준수는 말씀하셨던 때에 미국으로 출국했습니다.”

천중명은 고개만 끄덕였다.

어둠을 통해 보았던 국세청장 조세원과 강준수의 모습대로라면 당연히 그랬어야 할 일이었다.

“먼저 연락 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이번 일로 그만두라고 하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황 선생님.”

황성규의 사죄를 천중명은 나직하게 부르는 것으로 잘랐다.

“그만두라고 할 생각 전혀 없습니다. 연락 없었던 것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말씀은 안 하셔도 됩니다.”

멍한 감정을 스치듯 보였던 황성규가 옅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윤만석 실장이 제 직계 선배입니다. 우리 바닥에도 룰이 있어서 선배를 뵈었습니다. 대표님. 윤 선배와 저는 CIA 출신입니다.”

황성규는 각오하고 온 듯 주저함이 없었다.

이걸 이 자리에서 처음 들었다면 놀라기도 했겠다만, 천중명은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황성규가 ‘CIA를 모르나? 어떻게 저렇게 덤덤하지?’ 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해한다.

“동아시아 담당의 실무진은 실제로 동양계가 맡습니다. 윤 선배가 우리 쪽 길을 열었고, 저는 두 기수 후배가 됩니다.”

“그쪽도 기수를 따집니까?”

“우리끼리 만들어 놓은 방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천중명의 질문에 답을 한 황성규가 가방에서 자료를 한 묶음 꺼냈다.

“윤 선배와 대립할 수밖에 없어서 우리 팀원들과 조율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결정했습니다만, 이 과정에서 대표님을 실망시켜 드렸습니다.”

황성규는 글씨가 빼곡하게 차 있는 A4 용지 크기의 두툼한 자료를 천중명 앞에 놓았다.

“대표님의 주변을 정리해 놓은 자료입니다. 지주회사 격인 주식회사 지경의 지분 내역과 이사진의 구성 및 성향 보고입니다.”

이사들의 성향을 제외하고는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주식회사 지경은 비상장 계열사의 경우 80퍼센트, 상장사의 경우는 대략 5에서 7퍼센트의 지분을 보유 중이었다.

주식회사 지경의 지분 13퍼센트가 천호득의 몫이었는데 그것이 그가 지닌 유일한 힘이라고 보면 대강 맞는다.

“이 자료도 한번 살펴보십시오. 증권가에서는 이걸 족보라고 부릅니다.”

황성규는 또다시 가방에서 자료를 꺼내 건네주었다.

“증권사별로 지경건설 주식을 매입한 고객들의 명단과 매입한 주식 수, 매입하는 데 든 금액을 뽑아놓은 자료입니다.”

어두워서 한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대략 이름과 숫자, 금액이 적혀 있었다.

“갑자기 이런 자료를 내놓는 이유는요?”

“큰 잘못을 했지만, 기회를 달라는 의미에서 가져온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내게 감추는 게 있나요?”

“예?”

황성규는 당황하는 눈치였다.

“오늘 좀 뜬금없어서요. 디지털 시대로 시작했다가 이런 자료를 건네고, 다시 기회를 달라고 하시니까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요.”

눈과 눈이 빤히 마주친 상태였다.

“디지털 데이터에 들어있는 정보와 전혀 다른 행동을 보일 때 정보분석관이 가장 당황하게 됩니다. 대표님께서 다 같이 잘사는 그룹을 만드시게 된다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또다시 뜬구름 잡는 듯한 황성규의 답이 있었다.

“윤 실장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강승애 이사장을 위해 일합니다.”

천중명은 가볍게 웃었다.

그럴 것 같았다.

만약 윤만석이 천상기를 위해 일했다면 박무일 같은 사람이 설치지 않았을 거란 짐작 때문이었다.

“과정이 이상했지만, 대표님 주변의 정황을 모두 파악했다고 자부합니다. 연락 못 드렸던 점은 죄송합니다. 기회를 주셨으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평범한 얼굴을 되찾은 황성규가 다짐을 건넸다.

“황 선생님은 국적이 어떻게 됩니까?”

“서류상으로는 미국인입니다.”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락 못 했던 것은 조금도 부담 갖지 마세요. 그럼 그렇게 알고 일어나지요. 가봐야 할 곳이 있거든요.”

커피 잔을 정리한 황성규가 천중명의 옆에서 병원을 향해 걸었다.

“그럼 저는 여기에서 돌아가겠습니다.”

병원의 입구에서 걸음을 멈춘 황성규가 건넨 말이었다.

“평창동에서 일하는 메이드와 직원들을 전부 조사해 주세요. 강승애나 천상기와 따로 연락하는 사람이 있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병원의 조명 아래에서 천중명이 요구했고, 한 걸음 떨어진 어둠 속에서 황성규가 답했다.

“오래 걸릴까요?”

“예상하시는 것보다 빠를 겁니다.”

어둠 속에서 든든한 답을 건네준 황성규가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돌아서 걷는 그의 뒷모습을 보던 천중명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현관의 유리문을 통과해서 비서실 직원이 지키는 복도를 걸은 뒤에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병실로 향하는 길에서 천중명은 픽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곽대출이 첫사랑에 실패한 사람의 몰골을 하고 복도의 긴 의자에 앉아 있어서였다.

“뭐해?”

고개를 들었다가 몸을 일으키는 곽대출이 심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밤이 깊어지면서 상처가 더 많이 울리는 모양이었다.

“장만섭이에게 낮에 있었던 일과 10시 약속에 대해 말해두었습니다.”

“갈 수 있겠대?”

“좋아죽습니다.”

서운하고 아쉬워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곽대출이 답을 건넸다.

“총수님은?”

“저녁은 반쯤 드셨고, 약은 그대로 두셨습니다.”

병실로 걸으며 천중명은 시간을 확인했다.

9시 15분쯤이어서 그리 급할 것도 없었다.

“황 선생이 사과했는데 오랜만에 그거 봤다.”

의아해하던 곽대출의 눈에 번쩍하고 호기심이 달렸다.

“봤… 습니까?”

“과거. 나중에 알려줄게. 그리고 이 서류 좀 가지고 있어.”

병실 앞이고 복도에 직원들이 있어서 영 말이 편치 않았다. 게다가 이런 이야기는 담배 하나 물고서 봉지 커피 홀짝이며 주고받아야 제맛이 나는 거였다.

곽대출에게 서류를 넘긴 천중명은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갈비탕의 냄새가 병원 냄새 뒤에서 사라지지 않으려 애쓰는 느낌이었다.

천호득은 힐끔 시선만 주었을 뿐, 누굴 만났는지조차 묻지 않았다.

“약 안 드셨다면서요?”

“머리 깨진 놈이 말했어?”

“곽 부장이라니까요.”

“곽 부장이라고 부르면 깨진 머리통이 바로 낫기라도 하냐?”

이상하게 천호득은 삐딱한 태도였다.

왜 이러냐는 의미로 던진 천중명의 시선을 유진교는 그저 덤덤하게 받기만 했다.

“형에게 다녀올 겁니다.”

천호득이 볼을 씰룩였다.

“왜 그러세요?”

“그놈이 널 그냥 기다릴 것 같으냐? 저기 머리 깨진 놈에, 미련하게 덩치만 큰놈만 믿고 가서 되겠냐고?”

“곽 부장은 여기 있을 겁니다.”

홱!

꾸중보다 날카롭게 천호득의 시선이 달려들었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해? 자칫하다가 큰일 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봐? 돈이면 다 해결되는 세상이야! 네가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냐고?”

분통이 터진 모양으로 천호득은 볼까지 벌게져서 고함을 질러댔다.

“아버지.”

천호득의 표정이 딸꾹질한 사람처럼 한순간에 바뀌었다.

“지난번에 왼쪽 무릎을 반쯤 부러트려서 휠체어를 타고 다녀요.”

“누가?”

“형이요.”

확인처럼 고개를 돌린 천호득에게 유진교가 짧게 고개를 끄덕여 답을 주었다.

“이번에는 오른쪽 무릎도 반쯤 부러트릴 생각입니다.”

“누가?”

“제가요.”

확인처럼 곽대출과 장만섭을 번갈아 본 노인네의 시선이 천중명을 향해 돌아온 순간이었다.

“장만섭.”

“예, 대표님.”

천중명이 불렀고, 장만섭이 거인 특유의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답을 꺼내놓았다.

“도깨비 출신이지?”

“그렇습니다.”

“내가 형하고 이야기하는 동안 깡패들을 정리해 놓을 수 있겠어?”

“맡겨주십시오.”

순박한 건지, 잔인의 끝인지 모를 미소와 함께 장만섭이 다부진 답을 내놓았다.

“도깨비는 또 뭐야?”

“저희가 나온 특작부대에서 부대원을 부르는 은어입니다.”

천호득의 시선을 받은 장만섭은 자부심 넘치는 음성이었다.

또다시 그의 시선이 천중명을 찾았다.

“지옥문을 여는 데 돈만 가지고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형만 관련됐다면 아예 팔다리를 다 부러트려서 주저앉혀 버리겠지만, 이사장을 그렇게 할 수는 없잖습니까?”

어금니를 씹어대는지 천호득의 볼이 씰룩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제가 갈 일 없습니다. 형이잖습니까? 주저앉히든, 죽이든, 우리 손으로 해야지요.”

“말은…!”

천중명은 픽 웃은 뒤에 몸을 일으켰다.

“곽 부장. 아버지 부탁해.”

“다녀오십시오.”

곽대출과 시선을 주고받은 천중명이 돌아섰고, 장만섭이 기쁜 얼굴로 옆에 붙었다.

병실을 나서기 직전이었다.

“조심해.”

고약한 말투로 천호득이 당부를 전했고,

“예. 다녀오겠습니다.”

천중명은 병실을 나섰다.

침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던 장만섭과 둘이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로비로 내려온 다음이었다.

“곽 부장에게서 말 들었지?”

“그 자리에 못 갔던 것이 억울했습니다.”

복도를 걸으며 장만섭이 아쉬움을 토해냈다.

이 인간하고 속삭이는 말 따위 하기는 틀려먹었다.

제 딴에는 조심한다고 하는데 동굴 안쪽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기본적으로 울리기 때문이었다.

“대낮에도 회칼을 휘두르던 놈들이라는 것만 명심해. 사무실 꼴 봐서 도저히 안 되겠으면 돌아올 생각이니까 내가 지시하는 대로 무조건 따르고.”

“예, 대표님.”

흥분했는지 장만섭의 눈꼬리가 위로 올라가 있었다.

둘이서 병원 건물을 나와 직원들이 준비해 준 차에 올랐다.

조수석에 탄 장만섭은 웅크린 것처럼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의자를 뒤로 빼.”

“괜찮습니다.”

“옆에 거울이 안 보여서 내가 불편해.”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장만섭이 손을 조수석 옆으로 내렸다.

지이이잉.

의자가 뒤로 가는 도중이었다.

“어?”

그가 의자를 움직이는 버튼을 얼굴 앞으로 가져왔다.

힘을 세게 줘서 부러진 모양이었다.

“괜찮아. 스위치를 손가락으로 밀어도 움직일 테니까 더 뒤로 빼.”

“예.”

민망한 얼굴로 장만섭이 의자를 마저 빼냈다.

병원을 빠져나온 승용차가 도로에 들어설 때였다.

“대표님은 운동하셨었습니까?”

부러진 스위치를 기어 박스 뒤편에 얌전히 넣은 장만섭이 궁금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운동?

곽대출이 유일하게 졌다고 했던 괴물이 천중명이란 사실을 알 리가 없으니 궁금하기도 하겠다.

“그냥 날 때부터 몸이 빨랐어.”

“예.”

앞 유리로 달려든 가로등의 불빛이 지붕을 타고 뒤 유리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도대체 왜 어둠이 나타나는 거지?

천중명은 아까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CIA 출신이 목숨 걸고 달려드는 목표는 또 뭐고?

핸들에 오른손을 걸친 자세로 운전하던 천중명은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냈다.

지금은 천상기와의 만남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병원에서 천상기의 사무실까지 얼마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도로를 5분쯤 달리고 나자 앞에 그의 건물이 바로 앞에 있었다.

‘하여간 미련한 새끼들.’

천중명은 지하 주차장 입구에 세워진 승합차를 보며 웃었다.

아무렴 미련하게 달랑 둘이서 깡패들이 바글바글하게 기다릴 지하 주차장에 들어가겠나.

천중명은 인도를 가로지른 길을 따라 건물의 정문 앞에 차를 세웠다.

“내리자.”

“예.”

조심스럽게 조수석 문의 레버를 당긴 장만섭이 차에서 내린 뒤에 옷매무새를 만졌다.

곧 있을 사건을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천중명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천상기의 무릎을 부러트릴 때 깡패들을 두들겼던 데다, 낮에 당한 것까지 있으니 준비 죽여줄 거다.

늘 이렇다.

이놈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일 거라 기대한다.

무시해서 그렇다.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이 습관이 천상기의 가장 큰 약점이자 문제였다. 어떤 요구에도 거부하는 사람을 상대해 본 경험이 없어서 그런 것처럼 보였다.

픽 웃은 천중명은 휴대전화기를 들고서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신호음이 들리지도 않았는데 천상기가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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