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55화 (55/315)

# 55

055. 망나니 새끼 좋은 일만 하는 거 아냐? (3)

지경병원 입구로 승용차가 들어선 다음이었다.

“여보세요?”

- 황성규입니다, 대표님

근 일주일만의 전화인데도 황성규는 마치 오전에 통화했던 사람처럼 덤덤한 음성이었다.

- 어디 계십니까?

“지경병원에 방금 도착했어요.”

핸들을 꺾어 현관 앞으로 움직이자 비서실 직원이 승용차의 앞에서 손을 들고 나섰다.

- 병원으로 찾아뵙겠습니다. 20분쯤 걸립니다.

“도착하면 연락주세요.”

답을 한 천중명은 승용차에서 내려 열쇠를 건네주고는 현관을 향해 걸었다.

“20분 뒤에 이리 온단다.”

“그 양반 믿어도 괜찮을까? 여태 연락 없었던 것도 그렇고. 괜히 돈만 날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복도에 있는 비서실 직원을 본 곽대출의 말투가 바뀌었다.

“만나보면 알겠지. 혹시 그 양반이 변했더라도 너나 장만섭의 잘못이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마.”

지켜보는 직원들 때문에 더는 황성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려웠다.

전용 엘리베이터를 통해 올라간 천중명은 곧바로 천호득의 병실로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천호득은 아까와 변함없이 반쯤 세운 침대에 기대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진교와 눈인사를 나누는 동안, 천호득은 곽대출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놈은 왜 머리를 다쳤어?”

“도착하기 무섭게 승용차와 승합차로 달려온 사람들이 있어서 그걸 막다가 다쳤습니다.”

“너는?”

“저야 저 친구 믿고 바로 집으로 들어갔구요.”

“안을 지키던 아이들이 있었을 텐데?”

“그냥 비켜주던데요?”

천중명과 곽대출을 번갈아 보던 천호득이 ‘이게 어디서 약을 팔아?’ 하는 표정으로 눈을 갸름하게 떴다.

“배고파. 너 오기 전에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유 전무와 저기 덩치 큰 녀석도 함께 굶었고.”

천중명은 천호득을 빤히 보았다.

“왜? 배고프다는 게 뭐 잘못된 거냐?”

“어머니 안부는 안 물어보세요?”

“뭐…?”

“어머니도 그러시던데요. 아버지께 갈 거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시던데 제가 모르는 비밀이 있습니까?”

“배고프다니까 뭔 소리를 하고 있어?”

고집 센 노인네의 얼굴을 한 천호득이 순순히 답을 할 리는 없는 일이었다.

“뭐 드시고 싶으세요? 여기 음식은 그러니까 나가서 사오겠습니다.”

천중명은 우선 천호득과 유진교, 장만섭의 저녁을 해결해 주기로 했다.

“그럴 게 뭐 있어? 유 전무가 저기 덩치 큰 놈과 가서 저녁 먹고 오는 길에 사 오면 되지. 나는 설렁탕 사다 줘. 종로에서 파는 거 있지?”

“이 시간에 종로에 가면 늦습니다.”

몸을 일으킨 유진교가 천호득의 주문을 단숨에 꺾는 패기를 보여주었다.

“적당히 알아서 준비해 오겠습니다.”

“알아서 해.”

그렇게 유진교가 장만섭을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

“거기 머리 깨진 놈. 너는 가서 물부터 가져오고 커피도 만들어 와. 너희 마시는 그거 있지? 봉지로 타는 거. 그거.”

곽대출이 어떻게 하느냐는 듯이 천중명에게 시선을 주었다.

“심근경색이라면서요? 설탕이랑 크림가루가 있어서 안 좋을 거 아닙니까?”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알면서 그래? 약 기운 다 빠졌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져와.”

천중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곽대출이 옆에 있는 문을 통해 응접실로 움직였다.

거대한 침대, 처음 보는 장치들, 어지간한 1인실 다섯 개쯤 넣을 정도로 넓은 공간과 테이블, 의자, 커다란 TV 등이 있는 병실에 둘만 남았다.

천중명의 모친이 그토록 싫다던 어둠을 배경으로 그리웠다던 서울의 불빛들이 창을 통해 달려들고 있었다.

“엄마는 어때?”

“나빠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천중명이 답을 할 때 곽대출이 작은 쟁반에 물병과 컵을 가져다주었다.

“드세요.”

컵을 향해 내민 천호득의 손등에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다.

멍이 든 모양이었다.

바늘 주변으로 시커멓게 색이 죽은 그의 손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천호득은 그 떨리는 손으로 반 컵 정도의 물을 달게 마셨다.

곽대출이 커피를 끓이기 위해 다시 응접실로 향한 다음이었다.

“내 이름이 뭐야?”

“예?”

“내 이름이 뭐냐고?”

장난치는 건가 싶었는데 고집스럽고 심술 가득한 얼굴로 묻고 있어서 농담으로 대꾸할 상황은 아니었다.

“지경의 JK, 내 이름 천호득의 HD, 그리고 네 엄마 이름 이은명의 LEM, 기억했어?”

“예.”

천중명 모친의 이름이 이은명인 걸 이제야 알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달달한 커피 향이 병실로 달려들고 있었다.

“홍콩에 골든베스트 투자은행이 있다. 거기에서 JKHDLEM이란 계좌를 확인해.”

응접실을 힐끔 본 천호득이 노인네 특유의 아집이 담긴 입술을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법인 계좌다. 법인세가 없는 케이맨 제도의 법인으로 되어 있지. 거기에 1조 3천억이 들었다.”

말을 건넨 천호득이 힐끔 천중명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흥! 지옥을 열겠다는 놈이 고작 이런 거에 놀란 얼굴이야?”

“돈보다는 그걸 왜 제게 알려주시는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지옥문을 연다며? 맨입으로 그게 열려?”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을 거라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때 곽대출이 병실로 돌아와 쟁반을 내밀었다.

봉지 커피를 타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고급스럽고 예쁜 잔이었다.

“저는 응접실에 있겠습니다.”

눈치 빠른 곽대출이 곧장 응접실로 돌아갔다.

“진짜 드실 거예요?”

“가짜로 마시는 법이 있으면 알려주든가.”

이 노인네는 틀림없이 말을 예쁘게 했다가 따귀를 맞은 경험이 있을 거다.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는 천호득의 손이 물을 마실 때보다 좀 더 심하게 떨렸다.

위태위태한 모습으로 커피를 마신 천호득이 아슬아슬하게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너도 마셔.”

“예.”

천중명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쟁반에 내려놓았다.

“어떻게? 계획은 세웠어?”

“예.”

“뭔데?”

“형을 이용할 생각입니다.”

천호득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움직였다.

“방법은?”

“밤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만나는데 왜 내일 이야기를 해?”

“주무셔야죠.”

“쓸데없이 시간 끄는 것 질색이다. 괜찮으니까 만나고 나서 바로 병원으로 와.”

“봐서요.”

천호득의 입가가 꿈틀했다.

누군가가 지시에 따르지 않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불쑥 나오는 성격처럼 보였다.

불편한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그래. 네 계획대로 된다면 강승애 그년은 어떻게 돼?”

“근성이 있으니까 죽지는 않을 것 같은데 대신 그 집안이 좀 주저앉지 않을까 싶습니다.”

“크흠. 둘째는?”

“하는 거 봐서 결정할 생각인데 어쩌면 아들이 하나밖에 안 남을지 모릅니다.”

또다시 날카로운 눈이 천중명을 훑었다.

“정말 그 정도로 자신 있어?”

“두 사람 모두 눈을 감고 있어서 해볼 만할 것 같습니다.”

“눈을 감다니?”

“욕심 때문에 눈멀고, 귀먹은 꼴이어서요. 냉정할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다.”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신 천호득이 굳은 얼굴로 한숨을 뱉어냈다.

“본전 생각나지 않게 해 봐. 둘째까지 포함하면 나는 아들을 둘이나 잃는 건데 저쪽은 하나도 안 죽는다면 손해가 너무 크잖아.”

천중명은 나직하게 “예.”하며 답했다.

“윤 실장이 저쪽에 붙었다. 아까 말한 계좌를 그놈과 둘째는 알고 있으니까 참고해.”

“예.”

천중명이 답을 한 직후였다.

병실 문이 열리더니 마르고 작은 체형의 유진교와 거인 체격의 장만섭이 들어왔다.

“갈비탕이 가장 적당했습니다.”

호텔 이름이 찍힌 종이봉투를 내려놓은 장만섭이 응접실로 움직였다.

식사 준비를 어떻게 할까 싶을 때였다.

지이잉.

[대표님. 1층 로비에 있습니다.]

휴대전화기가 울리며 황성규의 문자가 들어왔다.

“드시고 계세요. 잠깐 1층에 다녀오겠습니다.”

짧게 고개를 숙인 천중명은 그 길로 병실을 나섰다.

응접실에서 복도로 난 문을 통해 곽대출이 고개를 내밀었는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얼른 다녀올게. 그냥 쉬고 있어.’

천중명은 손짓으로 그를 말렸다.

어차피 만나고 나서 어떤 내용인지 모두 전해줄 텐데 굳이 내려갔다가 올라올 필요가 뭐 있겠나 싶어서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천중명은 곧장 입구로 걸었다.

영감이 하여간!

바라지도 않는다만, 계좌를 알려주고 비밀번호는 입도 뻥끗하지 않는 심술이라니.

아무렴 천중명이 그 돈 달라고 매달리기라도 할 줄 알았나.

복도를 지나자 드문드문 들어온 조명과 자판기 불빛이 전부인 로비 안쪽에서 황성규가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 걸어가는 동안이었다.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 나간 줄 알았다.

자판기까지 고장 난 건가 싶었다.

‘젠장!’

잊고 있었던 어둠이었다.

밤이 되면 찾아오는 어둠과 달리 지금 천중명을 감싼 어둠은 어딘가 끈적이는 느낌이었고, 잘 갈아놓은 먹처럼 진하디진한 색이었다.

우산 없이 빗속에 서서 안경 너머로 보는 것처럼 뿌연 화면이 펼쳐졌다.

저건 누구지?

천중명이 눈을 껌벅일 때 화면이 선명하게 바뀌었다.

“윤 선배님이 연락하셨습니다.”

압축렌즈의 줄무늬가 확연한 동그란 안경을 낀 남자가 꺼낸 말이었다.

“어떻게 하고 싶으냐?”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황성규였다.

천중명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평소의 그 덤덤하고 평범한 표정이었다.

화면이 점점 더 넓게 펴지며 두 사람의 주변을 보여주었다.

다섯 명의 남자가 테이블에 둘러앉아 황성규와 안경 낀 남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너희의 자유다. 그러니 내 판단에 굳이 끌려올 것 없다.”

황성규는 각오한 얼굴이었다.

“팀장님이 선택한 분의 과거에 대해서 윤 선배님께 들었습니다. 여자 문제, 그동안 해 왔던 직원 하대와 무시, 인간성,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지켜보던 다섯 명이 시선을 교환한 뒤에 황성규의 반응에 집중했다.

“그런데도 왜 그분을 택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팀장님을 믿고 따릅니다. 그렇지만 CIA 출신인 우리가 졸부 밑에서 돈을 바라고 움직이는 건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황성규의 표정을 힐끔 보았던 남자가 변명하듯 서둘러 말을 이었다.

“윤 선배님의 모습을 보셨잖습니까? 재벌이란 사람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뇌를 가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까지 이용당하고 버려지면 이렇게 모인 우리의 목적은 어떻게 됩니까?”

듣고 있던 다섯 명 중 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경 낀 남자의 말에 공감한다는 의미로 보였다.

팀원들이라고 하더니 곽대출이 천중명을 따르는 정도의 믿음을 심어주지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저래서 연락이 없었던 건가?

한편으로는 과거의 천중명이 워낙 개판으로 살았으니 팀원들이 저러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냥 다른 이유 없이 천중명은 황성규에게 미안했다.

“문상훈.”

“예.”

“컴퓨터를 전문으로 하는 네게 내가 준 경고는 사람을 데이터로 분석하지 말라는 거였다. 너희 모두 마찬가지다. 각자 전문으로 하는 파트에 사람을 가두고 평가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황성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묵직하고 매서운 표정이었다.

“내가 천중명 대표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하다. 이미 너희에게 말했던 대로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목표를 제시했고, 그에 걸맞은 눈을 하고 있어서다.”

황성규가 고개를 돌려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자들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하려는 일을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준이라고 생각했었나? 거창하게 죽음도 각오했다던 너희가 말 한마디에 흔들린다면 나도 너희와 일할 마음 없다. 오늘부터 너희는 내 팀원이 아니다.”

화들짝 놀란 듯 안경 낀 남자를 포함해 여섯 명의 고개가 불쑥 들렸다.

죽음을 각오하다니?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천중명은 황성규의 표정을 읽기 위해 시선을 집중했다.

“나가! 나가서 너희가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여!”

“팀장님?”

아! 염병할!

안경 낀 남자가 뭐라고 말을 꺼내는 그 중요한 순간에 화면이 흐릿하게 변하고 있었다.

뭘 좀 보여주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보여주던가!

이렇게 아쉬운 적이 있었나 싶었을 때 어둠이 천중명을 홱 밀쳐냈다.

천중명이 아쉬움을 꿀꺽 삼켰을 때였다.

간간이 들어온 천장의 조명과 자판기 불빛에 의지한 황성규가 그 평범하고 덤덤한 얼굴로 천중명을 향해 고개 숙이고 있었다.

“괜찮으면 나가서 이야기하지요.”

“대표님 편하신 대로 하면 됩니다.”

청바지에 셔츠, 그리고 따듯해 보이는 재킷을 입은 황성규가 배낭처럼 생긴 가방을 오른쪽 어깨에 걸친 채 걸어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