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54화 (54/315)

# 54

054. 망나니 새끼 좋은 일만 하는 거 아냐? (2)

방지병원으로 향하는 길에서 천중명은 휴대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 여보세요?

“전무님. 용인에서 어머니 모시고 나왔습니다. 삼성동에 모셔드리고 병원으로 들를 예정이니까 아버지께 그렇게 전해주세요.”

방지병원에 들러야 한다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공연히 천호득이 염려하는 것이 싫어서였다.

- 그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휴대전화기를 기어 박스 뒤편에 넣은 천중명은 곽대출이 알려준 병원을 향해 차를 몰았다.

“곽 부장. 지경병원에 가도 치료는 돼. 진짜 그 병원에 가면 신고나 말 나오는 것 없이 치료되는 거지?”

“염려마십시오, 대표님. 원장이 좀 돌팔이같이 생기고 현찰 밝혀서 그런데 어떤 상처라도 환자가 원하면 신고 없이 치료해 줍니다.”

곽대출이 저렇게 말한 거라면 믿어도 될 일이었다.

천중명은 룸미러로 뒤에 앉은 모친을 살폈다.

얼마 만에 나온 세상일까?

변해 버린 바깥의 모습에 정신이 팔렸는지 모친은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자식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총수와 용인에 감금돼 있던 천중명의 모친, 강승애, 천상기까지, 지경그룹에는 누구 한 사람 행복해 보이는 이가 없었다.

“저기서 빠지면 됩니다.”

곽대출이 피가 말라붙은 손을 들어 오른쪽 길을 가리켰다.

거리와 건물에 불빛이 켜지는 시간이었다.

**

천호득은 통화내용을 전해 들었다.

“지경건설의 이사진 구성이 어떻게 되지?”

“사고 전에 큰 아드님의 측근들로 모두 교체한 상태입니다. 당장 어느 쪽에도 쏠리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회장실을 차지한 강승애 이사장이 아무래도 좀 더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시 심술 맞은 표정을 되찾은 천호득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임시주총을 연다고 해도 45일이 걸리지? 의결권 기준일까지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서 난리들일 텐데 그쪽 움직임은?”

“짐작하신 소문이 돌면서 실제 매입 움직임이 있습니다.”

“엉뚱하게 달려드는 개미들도 꽤 있겠군,”

“주가 역시 강세입니다.”

유진교는 알고 있는 내용만 전해주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사람 참….”

천호득이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웃음과 함께 탄식을 쏟아냈다.

“나이를 먹어 그런가? 어째서 막내를 보면 자꾸 의지하게 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그 녀석 말 들었지? 후회하지 않겠냐고 물었어. 허허. 기가 막히게 난 또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 답했고.”

“말씀드리지는 않았지만, 조금 전 통화에서도 총수님이나 왕회장님이라고 하지 않고, 아버지께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허허.”

넋을 잃은 사람처럼 천호득은 앞을 멍하니 보았다.

“아버지? 아버지라? 큰놈이 어릴 때 그렇게 부르곤 처음 듣는 말이네. 후우-. 그 녀석이 멍청하긴 했어도 이상하게 날 잘 따랐어. 내가 집에 들어가면 조르르 달려왔었고.”

천호득은 천봉서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아련한 얼굴이었다.

“크리스마스 땐가? 녀석에게 줄 선물을 잊고 들어갔지 뭔가. 자고 일어난 녀석이 거실을 헤매다가 실망한 얼굴로 돌아서는데….”

울컥 올라온 감정을 되새김질하듯 무언가를 곱씹은 천호득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 더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아야겠어.”

감정을 추스른 얼굴이었다.

“새로 얻은 자식 놈 같거든. 내게 하늘이 준 마지막 기회처럼. 아버지라고 매달릴 놈이 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녀석을 어떻게 또 모른 척 두겠나.”

유진교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크리스마스 선물 아니라 더한 것이라도 줘야지. 죽어서 가져갈 것도 아니고. 이러다가 괜히 후회를 더 남기면 이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말을 마친 천호득이 고개를 돌려 유진교를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 있겠나?”

“총수님이 정하신 일에 의견을 낸 적은 있지만, 뜻을 따르지 않은 적은 없었습니다.”

“허허.”

고개를 가져온 천호득이 묘한 웃음을 터트렸다.

**

치료를 마친 천중명은 기가 막힌 심정이었다.

“카드를 내는 건 반칙이지요.”

원장이란 양반이 검지와 중지에 엄지를 비벼가며 현찰을 요구하는 장면을 보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현찰이 없는데요.”

“저쪽에 현금인출기가 있습니다. 한 번 인출할 때마다 7백 원씩 병원에 떨어지니까 더 고맙지요.”

넉살이 이렇게 좋은 의사는 처음이었다.

천중명은 두말하지 않고 현금인출기로 가서 원하는 치료비를 찾아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혹여 다치게 되면 엉뚱한 곳 헤매지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 담배는 참다가 도저히 안 되면 한두 대. 술은 진짜 안 되고요. 여자는 뭐 꿰맨 자리가 벌어지지 않는 선에서. 아시죠?”

“감사합니다.”

이 양반하고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는 함께 이상해질 것 같아서 천중명은 얼른 인사를 마치고 원장실을 나섰다.

먼저 치료를 마친 곽대출과 모친이 승용차 옆에 나와 있었다. 그 사이 곽대출이 정식으로 인사한 모양인지 두 사람이 조금은 편해 보였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니. 모처럼 서울을 보는 게 좋아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 몸은 어떻데? 괜찮데?”

“담배는 적당히, 술은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굳이 여자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의사가 그런 말을 해?”

“좀 이상하긴 하네요.”

어쩐지 편하게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가세요. 집에 모셔다드리고 아버지께 가봐야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것으로 답을 한 모친이 승용차의 뒷좌석으로 움직였다.

분명히 뭔가 있다.

이렇게 갇혀 있었다면 천호득을 만나러 간다는 말에 거부반응이든, 분노든 있어야 했는데 모친은 전혀 다른 내색이 없었다.

논현동에서 출발한 길이다.

운전은 여전히 천중명이 했다.

“집에 가면 허선영이라고 결혼을 약속한 여자와 어머님이 함께 있어요.”

흥미로운 시선으로 모친이 천중명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불편하시더라도 당분간은 함께 지내셨으면 해요. 매일 청소와 요리를 도와주시는 분도 오고요.”

“그 집도 사연이 많아?”

엉뚱한 질문이었다.

“아픈 곳이 있어요.”

천중명의 답을 들은 모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서울은 아름답구나.”

이런 말에는 뭐라 대꾸하기가 어렵다.

천중명은 곽대출과 시선을 힐끔 마주하고는 운전에 집중했다.

“이 불빛이 무척 그리웠어. 주변이 어둠으로 둘러싸이는 게 무섭고 떨려서 늘 서울의 이 불빛을 그리워했어.”

혼잣말을 끝으로 침묵이 이어졌다.

논현동에서 삼성동으로 가는 길이어서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자동으로 열리는 정문을 통과한 천중명은 1층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런 다음 셋이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허리와 허벅지의 옷이 갈라진 천중명, 뒤통수와 등, 팔, 어깻죽지에 각각 상처 크기의 거즈를 붙인 곽대출, 평상복에 니트 카디건을 걸친 모친이 어색하게 엘리베이터가 오기를 기다렸다.

6층으로 올라갔고, 문을 열었다.

문소리에 달려왔던 허선영과 송순주가 당황한 눈으로 모친을 맞았고, 놀란 얼굴로 천중명과 곽대출을 살폈다.

“인사하세요.”

긴장한 두 사람에게 천중명은 모친을 소개했다.

“어머니세요. 어머니, 이분이 제가 말씀드린 어머님이시고, 여기가 저와 결혼을 약속한 허선영 씨요.”

“안녕하세요?”

“먼저 와 계셨는데 제가 폐를 끼치게 됐어요.”

“폐라니요? 오히려 저희가 불청객인데요. 이렇게 인사드리게 돼서 송구합니다.”

여자 셋의 어색한 인사를 보며 천중명은 곽대출에게 안을 가리켰다.

“선영 씨. 미안한데 어머니가 사용하실 방을 안내해 줄래? 나랑 곽 부장은 병원에 가봐야 하거든. 혹시 곽 부장하고 저녁 먹을 수 있을까?”

“그럼요. 얼른 준비할게요.”

주방으로 움직이려던 허선영이 모친을 안내해야 한다는 생각에 멈칫했다.

“얼른 방부터 안내해 드려. 저녁은 내가 차릴게.”

송순주가 주방으로 나섰고,

“어머니. 이쪽이에요. 아직 저녁 안 드셨죠?”

“나는 신경 쓰지 말아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허선영이 모친을 안내했다.

환장할 일이었다.

어머니인데 아직 이름도 모르는 것은.

“씻고 나오자.”

“예, 대표님.”

천중명은 곽대출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 핏자국을 대강 씻었고, 옷을 갈아입었다.

거실로 나왔을 때는 방 구경을 끝낸 모양인지 모친도 소파에 있었다.

“병원에 가야 한다니까 얼른 먼저 들어요. 우리는 뒤에 먹을게요.”

곽대출까지 있어서 다 함께 먹자고 우기기는 어려웠다.

반찬에 눈이 휘둥그레진 곽대출과 둘이서 세 공기씩을 가뿐하게 비우고서야 몸을 일으켰다.

현관을 나설 때였다.

상처는 어떤지, 많이 아픈 것은 아닌지,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한 것이 아쉬운 허선영의 눈을 보았다.

‘조심해요.’

그녀의 눈에 담긴 감정이 이상하게 기분 좋았고, 묘하게 다가오는 뿌듯한 감정의 뒤에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녀오겠습니다. 제가 올 때까지 문 절대 열어주지 마세요.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전화하시고요.”

남은 것은 세 사람이 알아서 친해지는 과정이었다.

아픈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니 서로 보듬어줄지, 아니면 날카롭게 대립할지는 알 수 없었다.

현관을 나선 천중명은 곽대출과 함께 바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담배 하나 피우고 가자.”

천중명의 말에 곽대출이 반가운 얼굴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모처럼 집밥 먹었더니 속이 다 든든하네. 그렇지? 사랑에 푹 빠진 대표님?”

천중명은 픽 웃으며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뽀뽀는 하셨고?”

“상황을 봐라. 어디 그런 거 하게 생겼나?”

곽대출이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지옥문은 어떻게 여실 생각이야?”

그리고는 진지한 질문을 꺼내 들었다.

“솔직히 좀 어수선한데, 지경건설이 상장사니까 주식을 이용해 볼까 생각 중이야.”

“주식? 그런 걸 이용할 방법이 있어?”

연기를 뱉어내던 곽대출이 몸을 움찔했다.

아닌 게 아니라 마취가 풀리는지 천중명도 옆구리와 허벅지, 그리고 등허리가 욱신거리고 있었다.

“내가 1년을 되돌아온 거잖아.”

“그랬지.”

“그때 주식 거래에 대해서 좀 들은 게 있거든. 상장사 돌아가는 꼴에 대해 공부한 것도 있고.”

“대학에서 그런 것도 가르치는구나.”

곽대출은 잘못 이해한 모양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건 그냥 기본이었고, 1년 동안 천중명 따라다니며 배운 게 진짜였지.”

“담배 하나 더 피워도 되겠냐, 대표님?”

“그러자.”

둘이서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은은한 조명이 들어온 주차장의 바깥이어서 도로를 지나가는 자동차의 불빛이 정문으로 연달아 뛰어들고 있었다.

“계획은 대강 섰으니까 나머지는 유 전무와 의논하면 될 것 같다.”

곽대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놈은 또 인상을 버럭 찌푸렸다.

아무래도 회칼에 맞은 상처가 많이 울리는 모양이었다.

“출발하자.”

“내가 운전합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조수석에 타.”

천중명은 곽대출을 일부러 조수석 쪽으로 거칠게 밀었다.

“아, 이 씨!”

그리고 반응을 확인했다.

둘이서 차에 올라 정문을 빠져나온 다음이었다.

“이따가 10시 약속에 나 빼놓고 가려나 본데 엉뚱한 생각 마십쇼. 이런 상처에 밀릴 곽대출이 아니올시다.”

“장만섭이랑 갈 테니까 총수님을 지켜.”

“이거 봐! 이러니까 아까 밀었던 거지! 대표님. 자꾸 그러시면 욕을 드시게 됩니다.”

곽대출은 전혀 양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너 혼자 스물 가까이 상대해 준 덕분에 편안하게 마당에 들어섰었다. 대신 네가 이렇게 다친 거고. 그러니까 이번은 쉬어. 만약 네가 여기에서 더 다치면 내가 어떻게 변할지 몰라서 그런다.”

곽대출이 힐끔 천중명을 보았다.

“아버지랑 유 전무 보는 앞에서 가네, 못 가네, 하는 것도 싫고. 한 가지만 생각해봐. 너 제대로 칼질당하는 거 보면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으냐?”

앞에 있는 빌딩 사이로 지경병원의 간판이 보였다.

“셋이서 가는 건 곤란하겠지?”

“누군가는 병원을 지켜야지.”

“씨발.”

앞을 노려본 상태에서 곽대출이 욕을 툭 뱉어냈다.

고맙다. 이런 놈이 옆에 있어 주는 것이.

또 사람이 그렇다.

고마운 건 고맙다고 표시해줘야 하는 거지, 자꾸 삼켜버릇하면 상대방은 알 방법이 없는 거다.

천중명이 낯간지러운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휴대전화기가 도저히 그런 말을 들을 수 없다는 듯 울었다.

“이제 연락이 오네?”

“누군데 그래? 대표님?”

“황성규.”

천중명은 얼른 통화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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