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052. 어떻게 밀어내느냐의 싸움이겠군 (3)
고개를 끄덕여 천호득이 답을 한 다음이었다.
“곽 부장. 커피 좀 있어?”
분위기를 바꿀 겸해서 천중명은 곽대출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가 할게.”
“대표님이 내게 하신 지시다.”
우렁우렁 울리는 말투로 움직이려던 장만섭을 곽대출이 막았다.
그리고는 응접실이 있는 옆방으로 움직였다.
“저런 놈은 어디에서 구했어?”
“들으셨을 거 아녜요?”
“그냥 다시 말해주면 뭐 어때서 토를 달아?”
정신을 다시 차린 천호득은 어쩐지 확 늙어서 대가 꺾여 버린 것처럼 보였다.
“특수부대 나왔다고 하던데 아는 사람 소개로 만났습니다.”
“용인에 가서 엄마를 데려와.”
곽대출에 관한 설명을 전했는데 엉뚱한 대꾸가 날아왔다.
“윤 실장이 저쪽에 붙었다면 위험해. 강승애 그년은 원래 관심이 없었고, 둘째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 만에 하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가면 좋지 않아.”
“용인 어딘데요?”
“주소 어쩌고 할 것 없이 용담 저수지 찍고 가서 그 길에 칠첩반상이라는 식당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가. 마당에 돌로 된 해태상이 두 개나 있어서 금방 찾을 거다.”
천호득의 말이 끝날 때 곽대출이 쟁반에 종이컵을 올려서 들어왔다.
“저 녀석을 데려가면 도움 되겠다.”
천호득은 곽대출에게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지키는 놈들이 있을지 몰라. 다른 말 할 것 없이 가서 데려와.”
“지금 바로 다녀올게요. 대신 곽 부장은 여기 있는 게 좋겠습니다. 저 친구 아니면 믿기 어렵거든요.”
“네가 올 때까지 입에 아무것도 안 넣고, 주사니 뭐니 손도 못 대게 할 테니까 저기 작은놈이랑 용인 먼저 다녀와. 저기 인상 더러운 덩치 큰 놈이 남아 있으면 됐다.”
천중명은 아직도 벽에 뻘줌하게 서 있는 장만섭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들었지? 곽 부장과 다녀올 동안 병실 지킬 수 있겠어?”
“맡겨주십시오.”
“의료진 아니라 세상없는 사람이 와도 유 전무님 허락 없이는 이 침대에 접근하지 못하게 해. 알았지?”
“예!”
괜히 너무 강조하는 바람에 엉뚱한 사고가 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장만섭은 사명감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
“이리 모셔올까요?”
“집으로 데려가. 네가 사는 빌라. 차라리 거기가 안전할 거다. 음식 특히 조심하고.”
“예.”
지시를 내리는 천호득을 보며 천중명은 이 지시에 무언가 숨겨져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걸 물어보며 시간을 끌 때도 아니었고, 물어본다고 순순히 답을 줄 것 같지도 않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천호득에게 인사한 천중명은 유진교와 눈인사를 나누고 봉지 커피의 달달한 향이 맴도는 병실을 나섰다.
병실을 나서기 전에 안을 향해 고개를 숙인 곽대출이 천중명의 뒤를 따랐다.
복도에는 비서실 직원들이 제법 있었다.
조용하게 걸었고,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으며, 병원의 현관에서 직원이 가져온 천중명의 승용차에 올랐다.
기분 좋은 엔진 소리와 함께 병원을 빠져나온 다음이었다.
“어후! 염병할!”
곽대출이 목을 조른 셔츠의 단추를 풀고는 넥타이를 좌우로 흔들었다.
“고생 많았지?”
“총수님이 깨어나기 전까지야 고생이랄 것도 없었지. 만섭이 새끼 부르고 나서는 화장실도 여유 있게 다녔고, 짬짬이 나가서 담배도 하나 피우고 왔었거든.”
신호에 걸린 덕분에 차를 세운 곽대출이 질린다는 얼굴로 천중명을 보았다.
“침대를 세워!”
그리고는 양쪽 입술을 아래로 늘어트리고는 천호득을 흉내 내듯 과장되게 깔린 음성을 쏟아냈다.
“그때부터 죽는 줄 알았다. 뭔 노인네 눈빛이 그리 독한지 아주 사람 잡더라니까! 그룹 총수 아무나 하는 거 아니구나 싶더라.”
닷새 만에 보는 곽대출이었다.
그동안 천호득을 염려하지 않고 장례식장에 있을 수 있었던 것도 이놈 덕분이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모르는 비밀을 터놓고 떠들 수 있는 것도 유일하게 이놈과 있을 때였다.
오후의 중간이라 용인으로 가는 길은 막히지 않았다.
“칠첩반상이라는 식당이 아예 나온다. 이리 가면 되겠다.”
천중명은 휴대전화기에 내비게이션을 띄워서 차의 앞쪽에 놓아주었다.
“거기 어딘지 알아.”
“뭐? 어떻게?”
“아버지랑 낚시 다녔던 곳이거든.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의 유일한 취미가 그거여서. 소질은 진짜 없었는데, 뭐 그렇게 고기 잡는 걸 좋아하셨나 몰라.”
곽대출은 도로 위로 펼쳐진 하늘을 보며 픽 웃었다.
“세상 참 좁다. 그렇게 낚시 다니며 밥도 자주 먹었던 곳인데 그 맞은편에 천중명의 모친이 갇혀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 안 그러냐? 대표님?”
“그렇다.”
둘이서 모처럼 함께 있는 시간이었다.
병원에서의 일을 곽대출이 설명했고, 장례식과 빌라에서 있었던 일을 천중명이 전해주었다.
“씨발 것들이네, 진짜!”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곽대출의 반응이었다.
“아까 총수님도 마지막엔 사람이구나 싶더라. 다리에 매달리던 아들의 죽음이 가슴 아파서 낑낑대는 노인네. 신기한 건 그런 양반이 대표님 올 때까지 내색 하나 없이 앞만 노려보고 있었다는 거지.”
용인을 향해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곽대출은 감정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지옥문은 어떻게 열 참이야? 이왕 열 거면 확실하게 열어. 내가 아예 반쯤 죽여서 몰아넣을 테니까.”
“왜 그렇게 감정 이입이 돼서 그래?”
“내가 이상한 거야? 사람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게 있는 거 아니냐고?”
천중명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대표님은 그렇게 변하지 마라. 어떤 모습이어도 대표님 옆에 있겠지만, 그래도 내가 지키는 사람이 그런 모습이면 너무 서글플 것 같다.”
곽대출이 힐끔 시선을 주어서 천중명은 픽 웃었다.
지이잉.
그리고 그때 천중명의 휴대전화기가 짧게 울렸다.
[오늘 밤에 보자. 10시까지 내 사무실로 와.]
천상기가 보낸 메시지였다.
“오늘 밤에 보자네?”
“대표님이 내일 보자고 했다면서? 뭔가 꾸몄나?”
“그렇게 나오면 이번엔 반대쪽 무릎을 부러트려 주면 되지.”
천중명의 혼잣말 같은 대꾸에 곽대출이 흐뭇하게 웃었다.
승용차는 원주와 용인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향해 차선을 변경하고 있었다.
**
문자를 보내고 난 천상기가 고개를 들었다.
“몇 명이나 갔어?”
“승합차 한 대와 승용차 두 대가 갔습니다.”
“내가 차 대수 물어봤어? 몇 명이나 갔냐고?”
“열여섯 명입니다. 연장까지 챙겼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답을 들은 천상기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실수 없겠지? 자꾸 이러면 분양을 다른 조직에 맡기는 수가 있어.”
“염려하지 마십시오. 독종들로 꾸렸고, 연장도 챙겼습니다. 누구라도 거치적거리는 놈이 있으면 아예 묻어버리라고 했으니까 이번 일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가리가 커다란 조직의 행동대장이 눈알을 부라리며 내놓은 답이 천상기를 흐뭇하게 한 모양이었다.
그가 야비하게 웃는 모습이 그랬다.
“문자 보내놨으니까 그 성격에 분명 10시에 온다. 용인의 에미를 빼돌린 걸 알면 눈에 불을 켜고 나타날 테니까 지난번에 당한 수모를 제대로 갚아줘. 이 휠체어를 좀 보라고.”
“괜찮으시면 발목 힘줄을 끊어버리겠습니다.”
퍼뜩 시선을 들었던 천상기가 야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해. 알아서. 나는 뭐 그것까지는 뭐라 못하겠다.”
“혹시 신고하는 일이 있더라도 진술한 대로만 처리해 주시면 됩니다. 적당한 꼬마로 하나 들여보내서 다섯 바퀴면 끝납니다.”
“다섯 바퀴?”
“징역 5년을 산다는 뜻입니다.”
흥미를 잃은 듯 천상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 봐. 그리고 어디 가지 말고 사무실에 있어. 그놈이 소식 들으면 바로 들이닥칠지도 모르니까. 밖에 박 전무 들어오라고 하고.”
“예. 쉬십시오.”
행동대장이 나가고 나서 잠시 뒤에 박무일이 들어왔다.
“알아보라는 건 어떻게 됐어?”
“주식을 매입한 흔적이 꽤 있습니다. 주로 사립 재단들에서 나섰고, 그 외에 저축은행 두 곳, 중견 기업 여러 곳에서 나섰습니다.”
“미친 것들이! 저축은행과 사립재단은 주식 매입을 제한하는 규정이 있지 않나? 함부로 이렇게 달려들어도 되는 거야?”
“있는 대로 자금을 부어 넣는 모양새입니다. 이 정도라면 금감원과 국세청의 협조가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수준입니다.”
“후우.”
천상기가 한숨을 푹 내쉬며 책상을 검지로 콕콕 찍었다.
“욕심이, 욕심이, 하여간 끝도 없어요. 적당히 백화점 하나 가지고 물러나면 얼마나 좋아?”
“제가 만나보면 어떻겠습니까?”
박무일의 의견에 천상기가 관심 가득한 고개를 들었다.
“저쪽은 어차피 그룹 내에 세력이 없습니다. 지금이야 건설의 회장실을 깔고 앉았지만, 대표 임명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쯤 짐작하지 않겠습니까?”
“그 욕심 많은 여자가 백화점으로 떨어질까?”
“화장품이나 냉동창고를 끼워주면 어떻겠습니까?”
“흠.”
턱에 손을 걸친 천상기가 잠시 시간을 끌었다.
“총수님이 깨어난 게 변수야. 망나니 놈의 에미를 내가 데리고 있으려는 것도 그 때문이잖나.”
“비자금을 터트리십시오.”
입술을 뒤튼 천상기가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이를 드러내며 고민에 빠졌다.
“강승애 이사장도 어차피 그걸 무기로 총수님을 묶을 생각 아니겠습니까? 이쪽에서 먼저 터트리면 저쪽의 무기 하나를 뺏는 셈이 됩니다.”
“총수님은 구속되고?”
“그거야 검찰과 법정에서 판단할 일입니다.”
“이게 다른 것도 아니고 자살한 직후라 쉽게 터트릴 건이 안 돼요. 동정 여론도 있고.”
문 쪽을 슬쩍 보았던 박무일이 천상기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비자금이 있었는데도 도움을 주지 않았던 것으로 처리하십시오. 언론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의식을 잃고 병원에 입원한 걸 세상이 다 알아. 그걸 어떻게 그렇게 만드나?”
“심근경색을 일으킨 이유가 자금 지원을 요청받고 고인이 된 큰 아드님과 다투다가 그랬다고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참, 나!”
짜증난다는 것처럼 천상기가 상체를 불쑥 들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내지?”
뜻밖에도 천상기는 감탄했다는 얼굴이었다.
“언론이 우리 편이니까 바로 작업하면 되겠네! 흥미로운 기사 아냐?”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할 게 뭐 있어? 바로 시작해! 언론에 피도 눈물도 없는 총수님의 일이 나오고, 연달아 비자금 터지면 끝 아냐? 망나니는 제 에미 일로 달려왔다가 다치는 것으로 끝! 욕심 많은 아줌마는 주식 잘못 건드려서 망조 드는 거고!”
손날로 허공을 쭉쭉 가르며 천상기가 통쾌하게 상황을 짚어나갔다.
**
상지 IC를 나온 승용차는 그대로 국도를 20분쯤 달렸다.
왼편에 좌대와 낚시 시설이 있는 커다란 저수지를 지나서 200미터쯤 더 달린 다음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도로의 왼편으로 오래된 2층 건물이 보였다.
건물만큼이나 세월을 견딘 것처럼 보이는 ‘칠첩반상’이라는 간판을 지나자 오른쪽에 전원주택들이 보였다.
곽대출은 전원주택으로 들어서는 골목으로 핸들을 틀었다.
골목 안쪽 주택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안이 훤히 보이는 낮은 높이의 담장을 둘렀다.
“어디지?”
곽대출이 고개를 두 번 돌린 직후였다.
천중명과 곽대출이 동시에 마당에 해태상이 웅크려 있는 2층 주택을 발견했다.
잔디가 깔렸고, 중간에 사람이 지나다니도록 편평한 돌을 박아놓은 벽돌집이었다. 집을 살짝 지나친 곳에 곽대출이 길가에 차를 세웠고, 곧바로 둘이서 내렸다.
“담배 하나 피우고 들어가자.”
“그러시죠.”
곽대출이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서 둘이 하나씩 물고 불을 붙였다.
“후-.”
한 모금을 피운 천중명이 픽 웃으며 2층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창에 붙어 있던 시커먼 그림자가 얼른 뒤로 물러났다.
“뭐가 내려다보는 거지, 대표님?”
“지키는 애들이 있나 본데?”
“좀 많았으면 좋겠다는 가녀린 소망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미친 것 아닌가 하는 농담을 곽대출이 내뱉었을 때였다.
끼이익! 끼익! 끼이이익!
거칠게 방향을 튼 승용차 두 대와 승합차 한 대가 골목을 들어와 바로 눈앞에서 멈췄다.
“말이 씨가 된다니까.”
천중명이 꺼낸 말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세 대의 차에서 조직원이 분명한 남자들이 우르르 내렸다.
“대표님은 들어가셔요.”
“혼자 되겠어?”
“안 되면 한 새끼만 눈알 파 버리지요.”
담배를 바닥에 던진 곽대출이 발로 밟을 때 차에서 내린 놈들이 적대감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밖을 지켜보고 있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조직원들이 차에서 내린 직후에 현관문이 열리며 역시나 덩치가 만만치 않은 놈들이 마당으로 나서고 있었다.
“대표님, 혼자 되시겠어?”
곽대출이 눈짓으로 마당을 가리켰고,
“안 되면 모가지를 부러트려 주지 뭐.”
천중명이 피식 웃으며 답을 건넨 다음이었다.
스윽.
곽대출이 넥타이를 풀어 왼손에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