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051. 어떻게 밀어내느냐의 싸움이겠군 (2)
퍼뜩 잠에서 깬 천중명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시계의 액정이 오후 2시 17분을 보여주고 있었다.
씻고 나가볼 생각으로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며 허선영의 고개가 살포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일어났어요?”
“응.”
좀 더 부드럽게 대답할 수 있었다.
대답하고 난 뒤에 깨달았지만 말이다.
“세수하고 나오세요. 식사 준비했어요.”
“고마워.”
문이 닫히자 꼬리가 잘린 아쉬움이 방 안을 요동쳤다.
정신 차리자, 천중명.
엉뚱한 곳에 신경 쓸 때가 아니잖아.
천중명은 드레스 룸으로 움직여 간단하게 세수를 마쳤다.
얼른 먹고 나설 참이었다.
“식사하세요.”
그런데 거실에 준비된 점심을 보면서 천중명은 가볍게 웃고 말았다.
“뭐가 이렇게 푸짐해요?”
“아주머니 솜씨가 대단하네요. 많이 배웠어요.”
송순주가 먼저 답했고,
“저는 밑반찬만 준비했습니다. 나머지는 사모님께서 직접 준비하셨구요.”
김순례의 보조 설명이 있었다.
“다들 드셨어요?”
“우린 나중에 먹으면 돼요. 얼른 드세요.”
“그러실 게 뭐 있어요? 같이 먹죠.”
사양하는 송순주를 달래서 밥그릇을 더 놓았고, 허선영을 붙들었으며, 마지막으로 당황하는 김순례를 강요하다시피 해서 함께 앉았다.
가족이라는 거, 함께 밥 먹는 식구라는 거.
상추에 얹는 수육과 쌈장, 풋고추, 그리고 된장찌개가 이토록 감사하고 행복한 음식이라는 거, 처음 알았을 정도로 좋았다.
천중명은 쌈을 작게 하나 만들어서 허선영 앞으로 내밀었다.
당황한 얼굴의 허선영을 두고 시선을 마주쳤던 송순주와 김순례가 얼른 고개를 떨궜다.
“나 때문에 하나도 못 먹었잖아. 앞으론 그러지 마. 어머님과 아주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체면 차리느라 안 드시면 제가 싸드릴 거니까 알아서 하세요.”
송순주와 김순례가 경쟁하듯 상추에 손을 내밀었다.
“얼른 받아. 민망하잖아.”
쭈뼛쭈뼛 손을 내민 허선영이 쌈을 받아서 손으로 가린 채 입에 넣었다.
어색함과 설렘이 조미료처럼 식탁에 뿌려질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행복을 시샘하는 것처럼 천중명의 휴대전화기가 몸을 떨었다.
“천중명입니다.”
- 대표님. 회장님께서 의식을 차리셨습니다.
유진교의 굵직한 음성이 바로 내용을 전해주었다.
“바로 갈게요.”
- 병원에서 뵙겠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총수님이 정신을 차리신 모양이야. 바로 가볼게.”
천중명과 함께 식사하던 세 명이 모두 몸을 일으켰다.
급하게 양치했고, 옷을 갈아입었으며, 서둘러서 거실로 나왔다.
아직 거실에 서 있던 송순주와 김순례가 자리를 피해 주어야 하는지를 의논하는 것처럼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갔다 올게.”
천중명은 곧바로 집을 나섰다.
신을 신으며, 몸을 일으켜 현관문을 여는 그 순간에 허선영만 보였다.
**
의식이 돌아온 천호득은 두통을 호소했고, 숨이 가쁘다는 증상을 알려주었다. 급하게 주사제를 넣어주고 상태를 살핀 의료진이 병실을 나선 다음이었다.
“저 인상 고약한 인간들은 뭐야?”
“막내 아드님이 부른 직원입니다. 이쪽이 곽대출 부장, 저쪽은 장만섭이라고 합니다.”
유진교가 시선을 돌렸을 때 곽대출은 깍듯하게, 장만섭은 황송하다는 태도로 상체를 숙였다.
“그런데 왜 의사들과 간호사들 이름을 적어?”
“혹시나 있을지 모를 일을 대비해서 막내 아드님이 지시한 일입니다.”
유진교의 답을 들은 천호득이 특유의 심술궂은 눈으로 곽대출과 장만섭을 훑어보았다.
“작은놈이 진짜배기네.”
그리고는 곽대출을 향해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꺼내놓았다.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나?”
“엿새째입니다.”
“세무조사는?”
“일이 많았습니다.”
입을 연 유진교는 천봉서의 자살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천호득에게 전했다.
독종이라는 곽대출조차 갓 깨어난 사람에게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의 보고는 거침이 없었다.
“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막내 아드님을 내려주고 병원으로 왔습니다.”
짧지 않은 유진교의 보고가 끝난 다음이었다.
“침대를 일으켜.”
천호득이 지시했고, 유진교가 얼른 스위치를 눌렀다.
우우우우우우웅.
누워있던 천호득의 고개가 침대의 위쪽을 타고 서서히 들렸다.
부스스한 머리칼, 핼쑥한 볼은 환자의 모습이었는데 눈빛과 고집 가득한 입술만큼은 쓰러지기 전과 다를 바 없었다.
“윤 실장이 연락이 안 된다?”
“그렇습니다.”
“어느 쪽에 붙은 것 같아?”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습니다.”
“막내는?”
“이리 오는 길입니다.”
거기까지였다.
내내 질문을 던지던 천호득은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었다.
곽대출이 보기에는 천중명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
강승애는 윤만석과 함께 있었다.
다른 곳이 아닌 지경건설의 천봉서 집무실이었다.
“영감님이 일어났다고요?”
“그렇습니다. 15분 전에 일어나서 두통과 호흡곤란을 호소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된 거죠?”
“분명히 지시하신 대로 전달했습니다. 제 잘못이라기보다는 평창동의 메이드에게 실수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천봉서의 책상이었다.
책상 위로 두 손을 깍지 끼운 강승애가 앞에 앉은 윤만석을 노려보았다.
“총수님의 비자금 계좌는 분명한 거죠? 비밀번호는 정말 모르는 거고요?”
“이사장님께서도 비밀번호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지는 않으시잖습니까? 아무리 심복이었다고 하더라도 계좌번호 이상을 알 수는 없었습니다.”
냉정함을 덮어쓰고 있었지만, 강승애의 눈가에는 불안함이 묻어 있었다.
“둘째의 움직임은요?”
“역삼동을 근거지로 삼는 조직원들을 대거 불러들였습니다. 전에 막내 아드님과 마찰이 있었던 모양인데 어찌 된 일인지 둘째 아드님이 휠체어에 앉을 정도로 부상을 당했습니다.”
“내 앞에서는 아드님 소리 빼세요. 아니면 그냥 이름을 부르던지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상황이 못마땅한지 강승애는 표독한 눈을 돌려 창밖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잠시 흘렀다.
“영감님이야 비자금으로 협상하면 물러날 수 있는데 문제는 둘째네요. 저 정도로 악질인 줄은 몰랐어요.”
다시 시선을 가져온 강승애가 차가운 표정으로 윤만석을 보았다.
“영감님을 만나고 오세요.”
그리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요구를 꺼내놓았다.
“가서 나와 아이들을 노렸다는 점과 비자금을 내가 모두 알고 있다고 전하고, 우리 그이 회사 두 개와 백화점을 넘겨주는 데 협조하라고 전하세요.”
“이사장님. 저는 정보를 다루는 사람이지 협상을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일이 그렇게 됐잖아요. 윤 실장이 실수하는 바람에 영감님이 일찍 일어났고요. 그 많은 돈을 받았으면 적어도 책임지는 모습은 보여줘야죠. 어떻게 할 거예요?”
“제가 나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표독스러운 눈빛의 강승애와 각오한 표정의 윤만석이 말없이 상대를 바라보며 시간이 흘렀다.
“알았어요. 나가보세요.”
그 뒤에 강승애가 지시를 던졌고, 윤만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 뒤에 집무실을 나섰다.
“비겁한 새끼.”
누구인지 모를 상대를 향해 강승애는 저속한 욕을 쏟아냈다.
“약속한 것은 지키는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지. 그새 얼굴을 바꾸고 회사를 거저먹으려 들어? 어디 네 마음대로 될 것 같아?”
몸을 일으킨 강승애는 책상에 엉덩이를 걸친 자세로 널따랗게 펼쳐진 빌딩 숲을 바라보았다.
천호득이 예상보다 너무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은 아직 그룹 내의 입지가 부족했다.
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던 강승애가 휴대전화기를 들었다.
번호를 찾은 그녀가 통화버튼을 누른 다음이었다.
“저예요. 주식 매입은 어떻게 됐어요?”
- 내가 아는 쪽에서 계속 사들이고 있다. 아직 물량이 부족한데 주가가 오르니까 자꾸 달라붙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소문도 도는 것 같고.
강승애의 부친인 강종환은 지금의 상황이 마뜩잖은 음성이었다.
“세무조사를 진행하는 건 어때요? 총수님의 비밀계좌도 알아냈잖아요?”
- 계속 강조하고 있는데 당장 나서기는 어렵다는 답이다. 내가 생각해도 지금 국세청이나 검찰이 나서는 데는 문제가 있어요.
“아버지까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이게 어디 나 혼자 잘 되자고 하는 일이에요? 그래요?”
강승애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강종환은 나직하게 숨만 내쉴 뿐 답이 없었다.
“알았어요. 우선 주식 매입을 부탁할 곳이 더 있는지 알아보세요. 지금이 아니면 이런 기회 절대 없어요. 아셨죠?”
- 알았다.
통화를 마친 강승애는 휴대전화기를 내려놓고 한쪽에 놓인 책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걸 밀면 안쪽에 침실과 간단한 샤워를 즐길 수 있는 욕실이 있었다.
천봉서가 간혹 한숨 잘 때 쓰거나 혹은 지금의 강승애처럼 답답할 때 기분을 풀기 위해 사용하는 용도였다.
몸을 돌린 강승애는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네. 이사장님.]
아직 회장이라 불리지 못한다는 사실에 울컥했던 강승애가 이를 지그시 깨물며 분을 삼켰다.
“김 비서 좀 들어오라고 해요.”
[네, 이사장님.]
인터폰에서 손을 뗀 강승애의 입술이 묘하게 비틀렸다.
“이사장! 이사장! 그놈의 이사장! 내가 회장이 되면 너희는 다 지방 구석에 처박을 거야! 다! 전부!”
그녀가 앙칼진 독기를 품어낼 때였다.
똑똑똑.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지경갤러리에서 데려온 비서가 들어왔다.
“내가 신경을 많이 써서 어깨가 결려. 좀 주물러줘.”
“네, 이사장님.”
“이리 오지 말고. 저기. 책장을 옆으로 밀어봐.”
남자 직원이 무거운 얼굴로 움직여 양팔로 책장을 밀었다.
드르륵.
안으로 통하는 문이 열릴 때 강승애가 걸어왔다.
선택의 순간이었다.
때려치우느냐, 아니면 따라 들어가느냐.
“싫어? 어깨가 결려서 그런다는데 그걸 못 주무르겠다는 거야? 그래서 그런 얼굴인 거야?”
“아닙니다, 이사장님.”
억지로 웃는 비서 앞을 강승애는 당당하게 걸었다.
그리고 그녀가 시선을 돌렸을 때, 비서가 안으로 들어갔다.
**
병실에 들어선 천중명의 귀에 ‘살려줘!’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분위기는 죽여줬다.
독한 눈으로 침대에 기대앉은 천호득, 그 옆에 앉아 있는 유진교, 그리고 침대의 발 쪽 방향에 서 있는 곽대출과 장만섭이 만들어낸 분위기였다.
“일어나셨어요?”
침대로 움직이는 천중명을 향해 곽대출이 살짝 고개를 숙였고, 그걸 본 장만섭이 함께 상체를 숙였다.
장만섭, 저 인간은 천중명을 처음 본다.
“좀 어떠세요?”
“장지까지 갔었다고?”
“예.”
“잘 갔어?”
천중명이 침대 옆에 앉았는데도 천호득은 앞을 노려본 채 시선조차 주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누가 들으면 천봉서가 해외여행이라도 간 줄 알았을 정도로 덤덤하고 무뚝뚝했으며,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면서 천호득은 감정을 감추려 애쓰고 있었다.
냉혈한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처럼, 독하게 눈을 부릅뜨고 있었지만, 그의 눈 안에서 일렁이는 감정을 천중명은 분명하게 보았다.
“잘 갔냐고?”
“마지막까지 자리 지켰습니다. 잘 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대신 허술하게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앞에 있는 곽대출을 노려보듯 고정되었던 천호득의 고개가 천천히 천중명에게 돌아왔다.
“너는 내 아들 맞아?”
섬뜩하리만치 냉정한 눈빛으로 가슴 서늘한 질문을 천호득이 꺼내놓았다.
눈과 눈이 똑바로 마주친 상태였다.
“대답 못 하겠어?”
유진교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곽대출이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천호득과 천중명을 번갈아 보았으며, 장만섭은 이게 뭔 소리인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괜찮다면 아버지 아들 하고 싶습니다.”
계산해서 나온 답은 아니었다.
그저 평소 천호득을 보며 느끼던 감정이었다.
“안 괜찮은 건 뭔데?”
“재벌 후계자를 강요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지금까지 하셨던 모습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셔야 하고요.”
“건방진 녀석.”
처음 저녁 먹는 자리에서 보았던 따듯한 시선, 탄천에서 보여주었던 자상한 눈빛이 자식의 죽음에 일렁이는 천호득의 눈 속에 모두 담겨 있었다.
“부탁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네가 말했던 지옥문을 열어다오. 멍청하지만, 바보 같았지만, 그래도 큰놈이라고….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내가 이상하게 가슴이 아파….”
천호득이 입술을 삐죽이는 모습을 상상한 사람이 있을까?
“그놈이…. 내가 회사에 나갈 때면 유일하게 다리에 매달렸었다. 그때 제대로 품어주지 못했던 게…. 지금 아파. 아플 줄 몰랐는데, 그러니….”
눈물을 쏟지 않으려 힘을 주었는지 천호득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서 떨리고 있었다.
“지옥문을 얼른 열어. 필요하다면 나도 들어갈 테니 그 안에 저 인간들을 모두 처넣어.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천호득이 붉어진 눈에 독기를 담은 채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입술을 꿈틀거린 천호득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