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50화 (50/315)

# 50

050. 어떻게 밀어내느냐의 싸움이겠군 (1)

5일장으로 치러진 천봉서의 장례식을 마친 천중명은 그룹 비서실에서 준비한 차를 이용해 장지로 출발했다.

여주에 있는 선산이었다.

봉분의 규모며 주변을 정리한 모양새가 어지간한 조선의 왕릉 규모를 연상케 하는 수준이었다.

이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나.

어차피 숨이 끊어진 천봉서에게 필요한 공간이라야 달랑 석관을 놓을 자리가 전부인데 말이다.

절차는 길고 복잡했다.

그렇게 천봉서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천중명은 이어지는 종교 행사를 보며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신부, 승려, 목사의 순으로 나와서 천봉서의 영면과 천국행을 기원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명이라면 이해한다.

종교가 각자 다를 수 있으니까.

그러나 오늘은 천봉서 한 사람이었다.

자살한 사람은 천국에 못 간다는 기독교 의식은 뭐고, 그 중간에 낀 불교의식은 또 어떤 의미인지 천중명은 이해하기조차 어려웠다.

이런 식으로 가능한 종교를 쭉 동원해서 천국이든, 극락이든, 뭐 하나만 얻어걸리라는 모양인데 천봉서가 살았던 행적을 보면 죽어서 좋은 데 가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튼, 길었던 장례절차가 천국과 극락, 지옥의 뺑뺑이를 돌려주는 의식을 마지막으로 모두 끝났다.

사후 세계가 있다면 지금쯤 천봉서가 던진 다트 촉이 어디에 꽂혔는지에 따라 환희와 좌절이 교차하겠다만, 이쪽에서야 알 길이 없는 노릇이었다.

지난 닷새 동안 천중명은 계속 장례식장을 지켰고, 곽대출은 천호득의 병실을 지켰으며, 허선영은 여전히 모친과 함께 빌라에 있었다.

기삿거리가 된다고 생각했는지 이틀째부터 뜸했던 방송카메라가 여주까지 따라와 특별한 장면을 얻기 위해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서울로 출발할 시간이었다.

천중명은 먼저 휠체어에 앉아 있는 천상기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휠체어를 붙든 직원들과 주변을 둘러싼 임원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다가서는 천중명을 살폈다.

“박무일 전무가 누구야?”

천중명이 임직원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고,

“내가 박무일입니다.”

다부진 말투로 누가 봐도 임원 모습을 한 남자가 답을 했다. 박무일의 얼굴을 확인한 천중명은 다시 앉아 있는 천상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 양반 통해서 헛소리를 전했던데 정신 차려요. 내가 만만하지 않은 거 알 텐데 왜 까불어?”

천상기는 입을 다문 채 대꾸조차 없었다.

“오늘은 쉴 테니까 내일 만나서 의논하는 거로 해. 시간은 오늘 자정 전에 알려주고.”

그러나 지켜보는 임직원들을 의식해서인지 입을 다문 그의 표정만큼은 다부졌다.

“형.”

천상기의 눈 끝이 꿈틀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비서진에 둘러싸인 강승애가 이쪽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살피고 있었다.

“다른 사람 뒤에 숨어서 말 전하는 버릇 고칩시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만나서 해. 알았어?”

천중명의 태도와 천상기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한 임원들과 직원들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 만날 때도 둘만 만나는 거로 하고. 뭐, 형수가 함께 나오겠다면 그건 인정하겠는데 대신 정갈하게 만납시다. 봉분의 흙도 마르기 전에 더러운 짓거리하고 나오면 내가 화날 것 같으니까.”

할 말은 대강 다 전했다.

역시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방송카메라가 이쪽을 찍고 있어서 천중명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숫자에서 밀리는 느낌이었다.

천상기의 주변이나 강승애를 둘러싼 임직원이 제법 많았는데 천중명을 기다리는 건 달랑 유진교와 비서실에서 배정된 직원 한 명이 전부였다.

저 인간이 일당백이라는 말을 알기나 할까?

“출발하시겠습니까?”

“병원은요?”

“곽 부장이 잘 지키고 있습니다. 이틀 전에 부른 직원도 함께 있으니 특별히 염려하실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집에 가서 좀 씻고 병원으로 가지요.”

“병원에 가시기 전에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고개를 끄덕여준 천중명이 차에 올랐다.

윤만석과 황성규의 연락이 없는 것부터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때여서 그걸 위한 시간을 달라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운전은 비서실 직원이 했다.

**

천중명을 제외한 이들에게, 곽대출은 하여간 무섭고 두려운 인간이었다.

지정된 시간에 체온과 혈압을 재는 간호사도, 회진을 도는 의사도 곽대출의 독기에 질려서는 일을 마치고 도망치듯 병실을 나가곤 했다.

지금도 그렇다.

“이름이요?”

“조미숙이요.”

벌써 몇 번이나 보았던 얼굴인데도 곽대출은 링거 팩과 주사제를 들고 들어온 간호사의 이름을 물었고, 그걸 노트에 적었다.

“바이탈을 체크할….”

곽대출의 눈이 번득했다.

“혈압을 잴 거예요. 링거도 교체할 거구요. 주사제는 혈액 속에 응고된 덩어리를 녹이는 역할을 해요.”

“어지간하면 영어를 쓰지 맙시다.”

자칫 메모를 잘못할 수 있었고, 괜히 엉뚱하게 알아들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곽대출이 요구한 사항이었다.

“치료하세요.”

병실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 곽대출이 고갯짓을 하자 이번엔 장만섭이 간호사의 뒤에 바싹 붙었다.

장만섭은 인간이 좀 거대하게 생겨 먹었다.

이마에서 눈을 거쳐 볼까지, 다시 귀 바로 아래에서 목덜미까지 프랑켄슈타인처럼 길게 꿰맨 흉터가 있었고, 그것만이 아니라도 원래부터 좀 잔인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간호사들이 장만섭을 마주하는 데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상황이니 치료나 회진을 맡은 의료진이 어디 숨이나 한번 제대로 쉬겠나.

물론 비서실을 통해 의료진을 믿어달라는 요구도 있었다.

“뭐가 문제라는 거야?”

“어차피 차트에 다 기록되는 내용입니다. 그걸 굳이 매번 적는 것과 진료 행위를 바싹 붙어서 감시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비서실 직원이 점잖게 이야기하고 있어서 곽대출도 평소와 다르게 욕을 뺀 품위 있는 태도로 응대했다.

“천중명 대표님 지시사항이라 나는 누가 뭐래도 이걸 해야 돼. 그러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천중명 대표님께 허락받고 와. 알았어요?”

말은 점잖다.

그러나 금방에라도 눈을 파버릴 듯 빛나는 곽대출의 눈빛과 갈고리처럼 늘어트린 그의 양손이 묘하게 공포감을 조장했다.

“전무님.”

답답한 비서실 직원이 유진교를 불렀을 때였다.

“대표님이 지시하신 내용이다. 그걸 나더러 바꾸라고 하면 서로 곤란한 일이 생기지 않겠나?”

답을 한 유진교가 시선으로 곽대출을 가리켰다.

눈알이 뽑힐 각오가 있다면 모를까, 아니라면 그냥 따르라는 의미가 분명했다.

그 뒤로 진료는 늘 지금처럼 곽대출이 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오전에 장례식장에 들렀던 유진교는 오후에는 꼭 병실에 와서 시간을 보냈다.

“야! 저기 좀 치워.”

유진교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곽대출과 장만섭을 보았다.

덩치가 커다란 데다, 흉터마저 흉측하게 생긴 장만섭이 곽대출의 말에 꼼짝 못 하고 따른다.

힘은 또 어떤지.

장만섭은 어지간한 크기의 탁자 하나쯤 유진교가 의자 드는 것보다 쉽게 들었다. 그런 장만섭이 물티슈로 곽대출이 말한 곳을 얌전히 닦고 있었다.

“꼼꼼하게 좀 해!”

“여기 아까 직원이 닦은 자리야.”

“뭐?”

“알았어. 닦고 있잖아.”

심지어 곽대출의 눈치도 살핀다.

덩치가 훨씬 작은데도 말이다.

저런 곽대출이 또 천중명의 말이라면 꺼벅 죽는다.

천중명은 곽대출을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굴복시킨 걸까?

유진교는 고개를 흔들며 떠오르는 궁금함을 털어냈다.

당장은 천중명부터가 의문투성이여서 생각해 봐야 머리만 아픈 일이었다.

**

천중명을 내려준 유진교는 그 길로 병원으로 향했다.

빌라의 정문을 들어선 천중명은 걸음을 멈추고 6층을 올려다보았다.

빈집이 아니라는 사실이 주는 묘한 안도감 때문이었다.

문을 열었을 때 안에 사람이 있다.

썰렁한 소파와 외로움 타는 홈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천중명을 맞아줄 누군가가 있는 거였다.

비록 그들이 천중명을 반길지는 장담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삑삑삑삑삑삑삑삑. 띠루룩.

문을 열고 들어간 천중명의 눈에 세 명의 여자가 들어왔다.

거실을 닦느라 기다란 봉을 잡고 있던 허선영과 스프레이 청소용품과 손걸레를 든 그녀의 모친인 송순주, 거기에 메이드 복장의 김순례였다.

세 명 모두 당황한 모양이었다.

“오셨습니까?”

김순례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인사했고,

“왔어요? 연락이라도…. 힘들었죠?”

허선영이 아랫부분이 네모나게 생긴 걸레봉을 뒤로 감추며 어색한 눈으로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천중명은 먼저 송순주에게 인사했다.

“피곤하지요. 식사는요?”

“아직 안 했습니다.”

송순주의 질문에 답을 한 직후였다.

“안 된다고 하는 걸 엄마와 내가 우겨서 한 거예요.”

김순례를 위한 변명처럼 허선영이 말을 꺼냈다.

“고마워.”

“예?”

“아주머니 혼자 일하게 하지 않아서 고맙다고. 그렇게 함께 청소해 준 거.”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허선영은 눈만 깜박였다.

“미안한데 씻고 한 시간만 잘게. 밥은 그 뒤에 먹어도 되겠지?”

“그래요. 피곤할 텐데 얼른 쉬어요.”

허선영을 대신해 그녀만큼이나 눈이 큰 송순주가 천중명을 다독여주었다.

드레스 룸으로 들어간 천중명은 안쪽의 샤워실에서 몸을 씻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 연락이 없는 윤만석과 황성규, 의식을 못 찾는 천호득까지,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지금은 몸을 씻고 한숨 자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이었다.

간단한 면 티셔츠와 편안한 운동복 바지를 입고 나왔을 때였다.

허선영이 쟁반에 컵을 들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왔다.

“뭐야?”

“홍삼하고 영지버섯 달인 거요. 엄마가 준비했어요. 혹시 안 내키더라도….”

천중명은 컵을 들어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쭉 마셨다.

“좋네. 어머님께 고맙다고 꼭 말씀드려.”

“정말요?”

“응.”

빈집이 아니어서 더 좋다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집에 함께 있어서 큰 위로가 된다는 말도 건네고 싶었다. 그런데 커다란 허선영의 눈을 보는 순간, 가슴 한쪽이 쿵 하고 울려서 입을 열지 못했다.

허선영도 같은 생각이었으면 싶었다.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지는 않더라도, 저 큰 눈에 담긴 감정이 함께 있어서 위로가 된다는 의미였으면 하고 바랐다.

잠시 눈을 바라본 채로 서 있었다.

두근대는 감정을 누른 채였다.

“잘게.”

“네.”

아쉬웠다. 이대로 방으로 그냥 가는 것이.

“일어나긴 할 텐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 시간 넘으면 깨워줄래?”

“그럴게요.”

부탁을 받은 허선영이 밝은 얼굴로 답을 주어서 좋았다.

천중명은 허선영을 스쳐서 방으로 들어갔다.

뭔가가 서운했다.

허선영이 몸을 돌려 천중명을 바라보는 것만은 분명히 알았다.

**

삼성동의 사무실로 돌아온 천상기는 엘리베이터 앞의 복도부터 곳곳에 조직원들을 배치했다.

그리고는 회의실에 핵심 임원들을 모았다.

소위 말하는 천상기의 심복 세 명이었다.

“당장 세무조사는 어렵습니다. 천봉서 회장이 고인이 된 상태에서 세무조사가 이뤄지면 강승애 이사장의 집안이 언론에 확실하게 노출돼서 저쪽도 부담이 꽤 클 겁니다.”

박무일이 희끗희끗한 머리칼 아래로 보이는 냉정한 표정으로 의견을 내놓았다.

천상기가 일등 심복으로 꼽는 박무일은 사리분별이 분명했고 강단도 있는 인물이었다.

“추징 세액이 2천억 수준이라면 그룹 내에서 충분히 상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은 것은 지분 싸움입니다.”

박무일의 말을 듣고 난 천상기가 못마땅한 얼굴로 입술을 뒤틀었다.

“내게 돌아올 부담이나 언론 분위기는?”

“건설과 전자는 단순한 계열사가 아니라 그룹의 중추를 담당하는 회사입니다. 세무조사를 한다고 쳐도 과실은 모두 고인이 된 천봉서 회장의 몫이고, 비자금은 누워 계신 총수님의 책임으로 돌아갑니다.”

“흐음.”

어느 정도 만족한 얼굴의 천상기가 박무일 옆에 있던 임원을 보았다.

“주식 현황은?”

“우리가 보유한 주식 7퍼센트에 기관보유분의 협조를 받으면 대략 13퍼센트의 지분을 확보한 셈입니다.”

“저쪽은?”

“대주주 신고물량과 특수 관계인을 합쳐서 모두 8.9퍼센트입니다.”

“지분 싸움은 그 정도면 됐고. 그렇다면 강승애 이사장이 만들어낼 변수가 뭐가 있느냐와 저 개망나니를 어떻게 밀어내느냐의 문제가 남는군.”

답을 내놓으라는 것처럼 천상기가 앞에 앉은 세 명을 둘러본 다음이었다.

“회장님. 그전에 천중명이 왜 그리 당당한지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래야 확실한 대응책이 서기 때문입니다.”

박무일은 분명하게 천중명이라는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도 천상기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별거 있나? 강승애 이사장과 협조한 내막을 아는 게 전부지. 형사적으로 문제 될 것도 없고, 언론이 우리 편일 테니까 지금은 걱정할 필요 없는 거지. 안 그래?”

“흠.”

박무일이 힐끔 옆에 있는 임원 둘을 살폈다.

“괜찮으니까 말을 해.”

“이번에 허세직 의원이 마약과 관련돼서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쪽을 이용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작은 물고기를 발견한 가물치 모양으로 천상기의 시선이 번득였다.

“그 딸이 부정한 태생이라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참고인이든, 공범 혐의든 검찰에 불러들이시면 어떻겠습니까?”

“마약쟁이 집안의 부정한 딸이라?”

박무일이 다시 양옆에 있는 두 명의 임원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도 무언가를 알아들은 양, 천상기는 야비하게 웃었다.

1